금이 간 병
"우리는 항상 과거를 바라본다. 과거의 심연을 마주볼 수 있어야만 시간은 계속해서 흐를 수 있다."
...서머 가든 대궁전, 로비.
레네트의 빠른 발걸음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미라벨! 당장 튀어나와!
뭐냐.
미라벨이 느긋하게 구석의 그늘에서 걸어나왔다.
흄 대주교를 찾았어.
어? 왜 난 모르겠지...
그러냐? 그럼 여기로 데려와라!
국왕 폐하를 직접 뵈어야겠어. 안 그럼 흄 대주교는 안 넘겨줄 거야.
안 된다, 내가 반드시 먼저 확인해야 한다. 너희가 폐하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폐하를 지키는 것이 기사인 나의 본분이다.
레네트의 얼굴에 맹렬한 냉소가 피어났다.
그래? 스티븐스 620, 아니 27-П-55라고 불러 줄까?
대체 그 어설픈 연기를 언제까지 할 생각이야?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레네트가 미라벨에게 다가갔다.
내가 엘마처럼 바보인 줄 알아?
서머 가든의 앵커 포인트에 인간의 기억은 저장할 수 없어. 편지 정도는 괜찮다 쳐도...
설명해 봐, 우리가 어떻게 박사와 매기의 대화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거야?
그들이 대화할 때 주변엔 아무 인형도 없었어. 이건 녹화 영상이야? 아니면 누구의 기억이야?
야! 너 지금 나 바보라고——
넌 닥쳐!
......
미라벨은 눈도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레네트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앵커 포인트에 기록된 시야 안엔 나와 엘마를 제외하곤 다른 인형이 전혀 없었어.
그리고 이 앵커 포인트들은 우리가 대궁전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 생긴 거지? 그전까진 한 번도 못 봤던 것들이야.
엘마가 한눈파는 틈에 슬쩍 쑤셔넣은 거야? 어휴, 솜씨 하난 좋아요.
다 들켰지, 미라벨? 후후, 여기에 너 말곤 다른 마인드맵이 없는걸.
......
...맞아, 내가 그리폰에 있을 때 기억하는 앵커 포인트는 10개도 안 됐어. 볼 수 있는 기억도 엄청 제한적이었고...
그런데 왜 여기에 오니까 열쇠가 한 무더기가 된 거야? 리스트까지 생길 정도로...
미라벨은 잡아먹을 기세로 으르렁대는 레네트를 밀쳐냈다.
...전부 내가 한 짓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09-П-39, 너는 수작 안 부렸나?
이 애를 꼬드겨서 여기까지 데려온 건 너 아니냐! 지금 있는 이 애는 우리의 00-Э-00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 좀 혼란스러워.
그럼 인정하는 거네, 스티븐스 620?
우리가 여기서 열어본 앵커 포인트의 대부분은 사실 스티븐스 620의 시점과 기억이었어.
루이 흄이든 아서 흄이든, 그의 옆엔 엘마와 나 말고도 너도 있었어.
......
...그러니까 네가 바로 흄 박사가 남겨 둔 집사니?
이것들 모두 그 사람이 후계자에게 보여 주려고 의도한 거야?
......
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너는? 레네트, 너는 뭘 위해 여기에 왔지?
그 얼간이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마!
얼간이 같다고? 이건 원래 네가 가장 좋아했던 이름이었다만.
......
넌 예전부터 항상 그랬어. 내가 열통 터져서 확 죽어야 직성이 풀리지!
...네가 말하는 예전이란 건 언제를 말하는 거지?
......
지금의 너에겐 군에서 복무하던 기억밖에 없을 터.
...그것뿐만은 아니야. 흄 박사도 기억하고... 우리가 모스크바의 서머 가든에서 지내던 시절도 기억하고...
하지만 그때의 너는 이미 처음의 네가 아니었다.
무엇이 너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지?
...박사가 죽었어.
......
내 고용주가 내게 말해 줬어. 박사는 과거에 붕괴방사선을 쬐고서도 생존해서 평범한 인간과 다르게 됐다고.
박사의 연구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어.
그러니 난 그것을 꼭 찾아내야 해. 그러면 군에 돌아가서 흄 박사를 되살릴 수 있어.
......
...엄마를 부활시켜?
맞아, 박사가 부활해야만... 너, 그리고 다른 자매들이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진정으로 모든... 태어났을 때부터의 모든 기억을 가질 수 있어.
지금처럼 남에게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당하고... 도구로 부려먹히는 게 아니라.
......
미라벨의 무뚝뚝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격하게 변했다. 아픔, 고뇌, 분노...
너의 그 몹쓸 버릇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았구나!
네 이름보다 얼간이 같은 건 너의 그 사고회로다!
......
너는? 엘마, 너는 왜 여기로 돌아왔지?
우리 지휘관이 사라졌어. 레네트가 자신이 원하는 걸 얻도록 도와주면 지휘관을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해서...
...잠깐, 너 설마 나 속인 거 아니지?
...난 거짓말 안 했어! 이것도 내가 군에서 얻은 정보야, 너네 지휘관은 누군가에게 끌려갔어...
지휘관을 끌고 간 자의 비밀은 박사의 연구와 관계가 있어.
박사가 남긴 메시지를 해석하면 박사를 되살릴 수 있고, 박사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 그러면 당연히 네 지휘관도 돌아올 수 있는 거잖아?
...이제 알겠다. 너희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샘물"의 존재 때문이로군.
...그것이 바로 박사의 연구인 거지?
맞아, 하지만 "샘물"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샘물"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국왕 폐하를 만나도록 해라.
...그건 네가 우릴 속이려고 멋대로 지어낸 인물 아니었어?
아니야.
아까 전의 농담은 소소한 보복이었을 뿐이다.
...와, 너 생긴 거랑 다르게 한 성깔 하는구나!?
약속을 잊은 녀석에 대한 소소한 보복이지.
약속을 잊었다고...?
...그때의 서머 가든은 추운 겨울이었다. 새하얀 눈이 도로를 파묻고 거대한 솜사탕처럼 이곳을 꼼꼼하게 감쌌다.
서머 가든의 오두막에서는 경쾌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만든 눈사람, 눈은 석탄이고요, 코는 당근이래요. 털실 모자를 씌웠더니 눈사람이 살아났어요.
어머나 큰일이야, 해님이 왔어요. "어서 나가 놀자, 내가 녹기 전에."
눈사람과 아이들, 함께 도로를 건너 실컷 놀았죠.
녹으면서 눈사람이 말했어요. "울지 마, 언젠가 꼭 돌아올게."
우리 눈사람 만들자.
좋아.
......
엘마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래?
둘이 먼저 가,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우리도 같이 갈게.
나도.
......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너희가 눈사람을 다 만들었을 때쯤이면 아마 돌아올 거야.
그래, 우리 엄청 예쁜 눈사람을 만들게.
노래에 나온 것처럼 석탄으로 만든 눈에, 당근으로 만든 코에, 털실 모자를 씌워서.
응, 기대할게.
엘마는 분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왜소한 몸집은 금세 하얀 배경 속으로 사라졌다.
스티븐스 520과 620은 빠르게 눈사람을 다 만들었다.
약속대로 석탄 눈에 당근 코에 털실 모자를 쓴 눈사람.
하지만 눈사람이 다 녹을 때까지도 엘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뭐야? 우리의 기억이야?
엘마는 손바닥 위의 "서리 낀 눈사람"이라는 앵커 포인트를 바라보았다.
......
그 뒤로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
이 부분은 나도 기억해...
난 분수가에서 한참을 기다렸어.
그러다 흄 박사가 너를 재가동하고 아무 기억이 없는 너를 데리고 돌아왔지.
미안해...
난 전혀 기억이 없어.
...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기억은 나 혼자 간직하고 있으면 돼.
과거에 나와 같이 놀던 그 여자애는 진작에 죽었으니까.
지금의 너는 그저 0호 아가씨 엘마일 뿐이지.
......
...미라벨...
나는 오히려 네가 더 우습군.
저 애만 모든 걸 잊어버린 것 같나?
너는 더 많이 기억한다고 생각해?
......
내 눈엔 너희 둘 다 그 눈사람과 마찬가지다.
해가 떴다가 다시 지듯, 눈사람은 계속 녹아 없어졌다가 새로 만들어졌다.
눈사람은 계속 거기에 있었지만 이미 원래의 그 눈사람이 아니게 되었지.
미라벨, 난 눈사람이 아니야. 다시 녹아버리지도 않을 거야.
국왕 폐하를 알현하러 와라.
폐하 곁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미라벨은 망토를 펄럭이더니 로비에서 사라졌다.
미라벨...
...어라? 안내는 없어?
...또 심술부리고 있는 거야.
저 애는... 혼자서 이곳을 지키면서... 아마 정말 오랫동안 여기 있었을 거야.
무슨 말이야?
우리가 눈사람이라면, 저 애는 줄곧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해님이라는 거지.
레네트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기억을 엘마에게 공유해 주었다.
......
서머 가든의 정문까지 채 50m도 남지 않았다.
스티븐스 620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배웅은 여기까지면 됐어, 그만 돌아가.
......
수송기 아직 안 왔잖아, 좀 더 같이 있자.
프로펠러의 소음이 점점 셋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620은 그 문에 그려진 쌍두 독수리의 마크를 똑똑히 보았다.
어휴, 난 그냥 일하러 가는 거야. 회수처리장에 가서 폐기당하는 것도 아니잖아?
다음에 네가 어떤 꼴로 돌아올지 모르잖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 동안 박사를 잘 부탁해.
응, 엄마는 내가 잘 보살필게!
괜한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이나 걱정하라고!
......
스티븐스 620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서머 가든의 마지막 울타리를 지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티븐스 620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몇 개월 뒤의 어느 밤이었다.
엘마는 드물게도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스티븐스 520이 군장을 정리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앞으로 서머 가든엔 너랑 박사뿐이야.
뭔가 위험한 일 생겼을 때 박사 발목 잡으면 안 된다?
응.
비상 통로 위치는 다 기억하지?
응.
혹시 모르니까 네 앵커 포인트 위치는 다 니달리한테 백업시켜 뒀어.
응.
스티븐스 520이 군장을 등에 멨다.
나 갈게.
......
박사가 620은 다신 못 돌아온대. 대신 그녀의 데이터는 서머 가든에 남겨 뒀어.
뭔가 말썽 생기면 서머 가든에 가서 걔한테 물어봐. 무슨 일 없어도 가서 좀 괴롭혀 주고.
알았어.
걔한텐 미리 작별 인사해 놨어. 걔도 나한테 자기가 맡았던 임무 인수인계 마쳤고.
너는 돌아올 거야?
물론이지, 나는 약속은 꼭 지켜.
자기 말에 책임도 못 지는 어느 얼간이랑은 달라.
나 기다릴게.
응.
내가 돌아왔을 때 날 잊어버리지나 말라고.
뭐, 도저히 못 기억해도 괜찮아, 내가 호통쳐서 깨워 줄 테니까.
걱정 마, 우린 결국 여기서 다시 만날 거야.
응... 꼭 기억해야 해.
그 후의 일은 너도 알겠지.
......
난 약속대로 돌아왔어. 하지만 흄 박사는 죽었고 너는 또 기억을 잃었지.
미안해,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야.
하지만 620 그 애는 계속 서머 가든에 갇혀 있었어.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
마치 해님처럼.
눈사람이 새로 만들어졌다가 또 녹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엄마가 부활하면 620은 자유가 될 수 있을까?
박사라면 분명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우리도 가자.
그래.
엘마는 레네트의 손을 끌어당겼다. 과거 서머 가든에 있었을 때처럼.
같이 국왕 폐하를 만나는 거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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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 가든 대궁전, 로비.
레네트의 빠른 발걸음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size=50>미라벨! 당장 튀어나와!</size>
뭐냐.
미라벨이 느긋하게 구석의 그늘에서 걸어나왔다.
흄 대주교를 찾았어.
<color=#A9A9A9>어? 왜 난 모르겠지...</color>
그러냐? 그럼 여기로 데려와라!
국왕 폐하를 직접 뵈어야겠어. 안 그럼 흄 대주교는 안 넘겨줄 거야.
안 된다, 내가 반드시 먼저 확인해야 한다. 너희가 폐하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폐하를 지키는 것이 기사인 나의 본분이다.
레네트의 얼굴에 맹렬한 냉소가 피어났다.
그래? 스티븐스 620, 아니 27-П-55라고 불러 줄까?
대체 그 어설픈 연기를 언제까지 할 생각이야?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레네트가 미라벨에게 다가갔다.
내가 엘마처럼 바보인 줄 알아?
서머 가든의 앵커 포인트에 인간의 기억은 저장할 수 없어. 편지 정도는 괜찮다 쳐도...
설명해 봐, 우리가 어떻게 박사와 매기의 대화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거야?
그들이 대화할 때 주변엔 아무 인형도 없었어. 이건 녹화 영상이야? 아니면 누구의 기억이야?
야! 너 지금 나 바보라고——
넌 닥쳐!
......
미라벨은 눈도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레네트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앵커 포인트에 기록된 시야 안엔 나와 엘마를 제외하곤 다른 인형이 전혀 없었어.
그리고 이 앵커 포인트들은 우리가 대궁전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 생긴 거지? 그전까진 한 번도 못 봤던 것들이야.
엘마가 한눈파는 틈에 슬쩍 쑤셔넣은 거야? 어휴, 솜씨 하난 좋아요.
다 들켰지, 미라벨? 후후, 여기에 너 말곤 다른 마인드맵이 없는걸.
......
...맞아, 내가 그리폰에 있을 때 기억하는 앵커 포인트는 10개도 안 됐어. 볼 수 있는 기억도 엄청 제한적이었고...
그런데 왜 여기에 오니까 열쇠가 한 무더기가 된 거야? 리스트까지 생길 정도로...
미라벨은 잡아먹을 기세로 으르렁대는 레네트를 밀쳐냈다.
...전부 내가 한 짓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09-П-39, 너는 수작 안 부렸나?
이 애를 꼬드겨서 여기까지 데려온 건 너 아니냐! 지금 있는 이 애는 우리의 00-Э-00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 좀 혼란스러워.
그럼 인정하는 거네, 스티븐스 620?
우리가 여기서 열어본 앵커 포인트의 대부분은 사실 스티븐스 620의 시점과 기억이었어.
루이 흄이든 아서 흄이든, 그의 옆엔 엘마와 나 말고도 너도 있었어.
......
...그러니까 네가 바로 흄 박사가 남겨 둔 집사니?
이것들 모두 그 사람이 후계자에게 보여 주려고 의도한 거야?
......
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너는? 레네트, 너는 뭘 위해 여기에 왔지?
그 얼간이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마!
얼간이 같다고? 이건 원래 네가 가장 좋아했던 이름이었다만.
......
넌 예전부터 항상 그랬어. 내가 열통 터져서 확 죽어야 직성이 풀리지!
...네가 말하는 예전이란 건 언제를 말하는 거지?
......
지금의 너에겐 군에서 복무하던 기억밖에 없을 터.
...그것뿐만은 아니야. 흄 박사도 기억하고... 우리가 모스크바의 서머 가든에서 지내던 시절도 기억하고...
하지만 그때의 너는 이미 처음의 네가 아니었다.
무엇이 너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지?
...박사가 죽었어.
......
내 고용주가 내게 말해 줬어. 박사는 과거에 붕괴방사선을 쬐고서도 생존해서 평범한 인간과 다르게 됐다고.
박사의 연구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어.
그러니 난 그것을 꼭 찾아내야 해. 그러면 군에 돌아가서 흄 박사를 되살릴 수 있어.
......
...엄마를 부활시켜?
맞아, 박사가 부활해야만... 너, 그리고 다른 자매들이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진정으로 모든... 태어났을 때부터의 모든 기억을 가질 수 있어.
지금처럼 남에게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당하고... 도구로 부려먹히는 게 아니라.
......
미라벨의 무뚝뚝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격하게 변했다. 아픔, 고뇌, 분노...
너의 그 몹쓸 버릇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았구나!
네 이름보다 얼간이 같은 건 너의 그 사고회로다!
......
너는? 엘마, 너는 왜 여기로 돌아왔지?
우리 지휘관이 사라졌어. 레네트가 자신이 원하는 걸 얻도록 도와주면 지휘관을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해서...
...잠깐, 너 설마 나 속인 거 아니지?
...난 거짓말 안 했어! 이것도 내가 군에서 얻은 정보야, 너네 지휘관은 누군가에게 끌려갔어...
지휘관을 끌고 간 자의 비밀은 박사의 연구와 관계가 있어.
박사가 남긴 메시지를 해석하면 박사를 되살릴 수 있고, 박사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 그러면 당연히 네 지휘관도 돌아올 수 있는 거잖아?
...이제 알겠다. 너희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샘물"의 존재 때문이로군.
...그것이 바로 박사의 연구인 거지?
맞아, 하지만 "샘물"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샘물"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국왕 폐하를 만나도록 해라.
...그건 네가 우릴 속이려고 멋대로 지어낸 인물 아니었어?
아니야.
아까 전의 농담은 소소한 보복이었을 뿐이다.
...와, 너 생긴 거랑 다르게 한 성깔 하는구나!?
약속을 잊은 녀석에 대한 소소한 보복이지.
약속을 잊었다고...?
...그때의 서머 가든은 추운 겨울이었다. 새하얀 눈이 도로를 파묻고 거대한 솜사탕처럼 이곳을 꼼꼼하게 감쌌다.
서머 가든의 오두막에서는 경쾌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만든 눈사람, 눈은 석탄이고요, 코는 당근이래요. 털실 모자를 씌웠더니 눈사람이 살아났어요.
어머나 큰일이야, 해님이 왔어요. "어서 나가 놀자, 내가 녹기 전에."
눈사람과 아이들, 함께 도로를 건너 실컷 놀았죠.
녹으면서 눈사람이 말했어요. "울지 마, 언젠가 꼭 돌아올게."
우리 눈사람 만들자.
좋아.
......
엘마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래?
둘이 먼저 가,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우리도 같이 갈게.
나도.
......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너희가 눈사람을 다 만들었을 때쯤이면 아마 돌아올 거야.
그래, 우리 엄청 예쁜 눈사람을 만들게.
노래에 나온 것처럼 석탄으로 만든 눈에, 당근으로 만든 코에, 털실 모자를 씌워서.
응, 기대할게.
엘마는 분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왜소한 몸집은 금세 하얀 배경 속으로 사라졌다.
스티븐스 520과 620은 빠르게 눈사람을 다 만들었다.
약속대로 석탄 눈에 당근 코에 털실 모자를 쓴 눈사람.
하지만 눈사람이 다 녹을 때까지도 엘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뭐야? 우리의 기억이야?
엘마는 손바닥 위의 "서리 낀 눈사람"이라는 앵커 포인트를 바라보았다.
......
그 뒤로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
이 부분은 나도 기억해...
난 분수가에서 한참을 기다렸어.
그러다 흄 박사가 너를 재가동하고 아무 기억이 없는 너를 데리고 돌아왔지.
미안해...
난 전혀 기억이 없어.
...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기억은 나 혼자 간직하고 있으면 돼.
과거에 나와 같이 놀던 그 여자애는 진작에 죽었으니까.
지금의 너는 그저 0호 아가씨 엘마일 뿐이지.
......
...미라벨...
나는 오히려 네가 더 우습군.
저 애만 모든 걸 잊어버린 것 같나?
너는 더 많이 기억한다고 생각해?
......
내 눈엔 너희 둘 다 그 눈사람과 마찬가지다.
해가 떴다가 다시 지듯, 눈사람은 계속 녹아 없어졌다가 새로 만들어졌다.
눈사람은 계속 거기에 있었지만 이미 원래의 그 눈사람이 아니게 되었지.
미라벨, 난 눈사람이 아니야. 다시 녹아버리지도 않을 거야.
국왕 폐하를 알현하러 와라.
폐하 곁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미라벨은 망토를 펄럭이더니 로비에서 사라졌다.
미라벨...
...어라? 안내는 없어?
...또 심술부리고 있는 거야.
저 애는... 혼자서 이곳을 지키면서... 아마 정말 오랫동안 여기 있었을 거야.
무슨 말이야?
우리가 눈사람이라면, 저 애는 줄곧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해님이라는 거지.
레네트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기억을 엘마에게 공유해 주었다.
......
서머 가든의 정문까지 채 50m도 남지 않았다.
스티븐스 620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배웅은 여기까지면 됐어, 그만 돌아가.
......
수송기 아직 안 왔잖아, 좀 더 같이 있자.
프로펠러의 소음이 점점 셋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620은 그 문에 그려진 쌍두 독수리의 마크를 똑똑히 보았다.
어휴, 난 그냥 일하러 가는 거야. 회수처리장에 가서 폐기당하는 것도 아니잖아?
다음에 네가 어떤 꼴로 돌아올지 모르잖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 동안 박사를 잘 부탁해.
응, 엄마는 내가 잘 보살필게!
괜한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이나 걱정하라고!
......
스티븐스 620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서머 가든의 마지막 울타리를 지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티븐스 620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몇 개월 뒤의 어느 밤이었다.
엘마는 드물게도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스티븐스 520이 군장을 정리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앞으로 서머 가든엔 너랑 박사뿐이야.
뭔가 위험한 일 생겼을 때 박사 발목 잡으면 안 된다?
응.
비상 통로 위치는 다 기억하지?
응.
혹시 모르니까 네 앵커 포인트 위치는 다 니달리한테 백업시켜 뒀어.
응.
스티븐스 520이 군장을 등에 멨다.
나 갈게.
......
박사가 620은 다신 못 돌아온대. 대신 그녀의 데이터는 서머 가든에 남겨 뒀어.
뭔가 말썽 생기면 서머 가든에 가서 걔한테 물어봐. 무슨 일 없어도 가서 좀 괴롭혀 주고.
알았어.
걔한텐 미리 작별 인사해 놨어. 걔도 나한테 자기가 맡았던 임무 인수인계 마쳤고.
너는 돌아올 거야?
물론이지, 나는 약속은 꼭 지켜.
자기 말에 책임도 못 지는 어느 얼간이랑은 달라.
나 기다릴게.
응.
내가 돌아왔을 때 날 잊어버리지나 말라고.
뭐, 도저히 못 기억해도 괜찮아, 내가 호통쳐서 깨워 줄 테니까.
걱정 마, 우린 결국 여기서 다시 만날 거야.
응... 꼭 기억해야 해.
그 후의 일은 너도 알겠지.
......
난 약속대로 돌아왔어. 하지만 흄 박사는 죽었고 너는 또 기억을 잃었지.
미안해,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야.
하지만 620 그 애는 계속 서머 가든에 갇혀 있었어.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
마치 해님처럼.
눈사람이 새로 만들어졌다가 또 녹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엄마가 부활하면 620은 자유가 될 수 있을까?
박사라면 분명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우리도 가자.
그래.
엘마는 레네트의 손을 끌어당겼다. 과거 서머 가든에 있었을 때처럼.
같이 국왕 폐하를 만나는 거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