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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1 · 오귀인의 샘물

요람

"우리는 어머니의 요람에서 태어나, 결국엔 처음의 그곳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68-A-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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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걸어나오니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로등 몇 개가 부스스 눈을 떠 미약하나마 길의 윤곽을 비추었다.

엘마와 레네트는 어둠 속에서 흐릿한 길을 따라 걸었다.

엘마

날이 왜 갑자기 어두워졌지? 서머 가든은 언제나 낮일 줄 알았는데.

레네트

그건 갑자기 왜?

엘마

그냥, 여기는 뭐든지 작동 방식이 너무 뜬금없는 느낌이라.

레네트

...그건 서머 가든을 관리하는 게 너라서 그런 거야.

넌 메모리 정리할 줄도 모르는 인형이잖아! 서머 가든의 기후나 조명 관리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지!

엘마

내가 한 거였구나, 그럼 말이 되네.

레네트

......

엘마

화내지 마, 내가 선물 하나 줄게.

짠~ 서머 가든의 조명 관리 권한이야. 이걸로 너 스스로 불을 켤 수 있어!

레네트

그냥 시간을 낮으로 바꾸면 되잖아.

엘마

설정하는 법 까먹었어.

레네트

......

레네트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면서 조명을 켰다.

엘마

국왕 폐하란 게 누구일까?

레네트

몰라, 내가 떠나기 전에는 서머 가든에 그런 건 없었어.

엘마

미라벨이 가짜로 마네킹이라도 세워 둔 거 아닐까? 우리한테 심술부리려고.

레네트

...그건 아닐 거야.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우리한테 앙갚음할 녀석은 아니야.

엘마

그럼 그 국왕 폐하란 건 엄마의 유산일까?

엄마가 살아있을 때는 그런 거 없었잖아.

레네트

나도 몰라, 한번 만나봐야 알겠지.

엘마

응...

둘은 조용히 걸었다. 레네트는 표정을 보지 않아도 엘마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레네트

묻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말해.

어차피 네가 지금까지 한 바보 질문이 이미 어린이 백과사전 3권쯤은 되니까, 지금 하나 더 한다고 달라질 건 없어.

엘마

......

대체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분명 다 같이 언제나 즐겁게 서머 가든에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레네트

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야. 내가 서머 가든을 떠날 때 박사는 아직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지.

내가 돌아왔을 땐 모든 게 사라지고 니달리만 남아있었어.

엘마

니달리...

레네트

니달리는 줄곧 우리를 돌봐 주고 박사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야.

내가 군에서 퇴역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해 준 게 그 사람이었어.

너를 찾아와서 박사의 유산을 계승하라고 말해 준 것도.

엘마

......

레네트

그때 그 사람은 엄청 다급해하고 있었어. 박사의 죽음이나 너의 실종이나 그녀에겐 몹시 큰 불안과 위협으로 다가왔겠지.

엘마

...패러데우스가 한 짓이야.

레네트

맞아.

엘마

놈들은 엄마에게 뭔가를 요구했지만 엄마는 그걸 넘겨주지 않았어.

레네트

박사가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는 타입은 아닌데.

엘마

그러게, 시스터후드에도 들어가 놓고.

레네트

...내 말은, 박사가 아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거야. 그는 정말 몰입하고 있는 한 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쓰질 않아.

하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박사는 아무리 몰입 중이라 해도 그걸 누구랑 공유하는 건 꺼려하지 않는 것 같은데.

엘마

앞뒤가 안 맞네.

레네트

그래서 좀 이상해.

엘마

그럼 엄마가 정말 부활할 수는 있을 것 같아?

레네트

...몰라.

엘마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을 위해서 노력하다니, 너도 별로 똑똑하진 않구나?

레네트

서머 가든 안이라고 내가 너 못 때릴 줄 알아?

엘마

...오.

레네트

그래도 내가 알기론... 해낸 사람이 있어.

너네 지휘관도 그 사람을 봤고.

엘마

어? 그럼 그 부활한 사람은 어떻게 됐어?

레네트

...그런 바보 질문은 너네 지휘관한테 하지?

엘마

오...

엘마

엄마가 부활한다면 넌 무슨 말을 할 거야?

레네트

나를 0번으로 해 달라고 할 거야.

엘마

...내가 그렇게 싫어?

레네트

흥.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근데 이 길 왜 갈수록 어두워지지? 조명 밝기는 최대치로 올려놨는데.

레네트는 빛이 희미해지며 밤에 잠긴 가로등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엘마

...이 소리 들려?

레네트

뭐가?

엘마

샘물 소리.

어두운 오솔길의 끝에 콸콸 솟아나는 분수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레네트

길을 잘못 들었나?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엘마

이쪽이 맞는 것 같은데...

레네트

왔던 길로 돌아가자, 아마 어두워서 갈림길을 놓쳤을 거야.

레네트는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그런데 등뒤에서 별안간 풍덩 소리가 들렸다.

레네트

......

엘마?

등뒤에서 물보라가 사방에 튀는 소리가 났다가 점차 흩어져갔다.

레네트가 뒤돌아보자 분수는 여전히 쉬지 않고 물을 뿜고 있고, 거기 있어야 할 엘마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레네트

<size=50>엘마!</size>

엘마

<color=#66CDAA>여기야.</color>

레네트

<color=#66CDAA>너 어디 있어?</color>

엘마

<color=#66CDAA>요 아래. 분수 안으로 들어왔어. 여기에 길이 있어.</color>

레네트

<color=#66CDAA>알았어.</color>

레네트

<color=#66CDAA><size=50>다음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마!</size></color>

레네트는 투덜거리며 뒤따라서 분수 안으로 뛰어들었다.

엘마의 말대로, 분수 아래는 다른 세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분수 안 통로의 끝엔 또 다른 정원이 있었다.

깊은 밤에 잠긴 정원은 고요하고 썰렁하여, 마치 바다에 가라앉은 선박 같았다.

레네트

여기는 어디지?

엘마

나도 몰라.

화륵——

작은 불꽃들이 피어올라 어둠 속 소녀의 얼굴을 비췄다.

미라벨

폐하, 그들이 왔습니다.

???

알고 있었어. 언젠가 너희가 이곳에 오리라는 걸.

엘마

어떻게 알았어?

???

샘 안에서 태어나 샘 안에서 끝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야.

엘마, 난 너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

엘마

너는 누구야?

???

나는 너의 과거야.

엘마

...뭐?

???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느낌이 싫지?

이리 와, 내가 그 고통에서 널 해방시켜 줄게.

레네트

잠깐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미라벨

...이것이 엘마의 사명이다. 서머 가든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

엘마는 흄 박사의 유일한 딸이니까.

레네트

유일한? 그럼 우리는 뭔데?

미라벨

우리는 기사, 공주, 시녀, 그리고 군인이다.

우리는 모두 박사가 미리 정해놓은 설계도대로 제작된 인형이지.

박사가 부여한 최고 권한을 가진 인형은 오직 엘마뿐이다.

그의 말대로 오직 엘마만이 예술품이고 우리는 그저 평범한 상품일 뿐이야.

엘마

...최고 권한이란 게... 뭐야?

???

이리 와, 우리가 하나가 되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어.

엘마

......

엘마는 주저하며 걸음을 떼지 못했다.

레네트

<size=25>미라벨,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size>

<size=25>우리 셋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함께 겪었는데...</size>

미라벨

국왕 폐하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춰봤자 의미 없다.

레네트, 내가 네게 보여 준 기억은 극히 일부일 뿐.

우리의 시리얼 넘버를 생각하면 서머 가든에 우리 같은 존재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국왕 폐하는 단 한 명, 엘마도 단 한 명뿐이다.

레네트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게 다 오래 전부터 계획된 전개라는 거야?

나도 너도, 전부 박사가 죽은 후에 엘마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한 역할이었다고?

미라벨

그래. 우리의 고유 통신 채널이 있는 한, 푸른 화초로 가득한 이 통로가 있는 한, 이 샘구멍에서 물이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다시 만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엘마를 국왕 폐하 앞으로 이끌게 되지.

레네트

뭔가 수상해... 엘마, 가면 안 돼.

엘마

응.

레네트

<color=#A9A9A9>...이 국왕이란 게 대체 누군지 봐야겠어.</color>

레네트는 엘마가 준 조명 조절 권한을 발동하여 국왕 폐하 옆의 조명을 켜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은 여전히 너무 어두워 촛대 바로 아래 있는 사람을 밝혀 주지 못했다.

레네트

<color=#A9A9A9>어떻게 된 거지?</color>

???

아, 벌써 내 모습을 잊어버렸구나.

그럼 다시 한 번 보여 줄게.

국왕 폐하가 손을 들자, 손에 등롱이 나타나 그녀의 얼굴을 밝혔다.

국왕 폐하?

......

엘마

......

레네트

......

넌, 엘마...?

국왕 폐하?

맞아, 나는 과거의 엘마이자 엘마의 미래야.

레네트

네가 과거이자 미래라면 왜 여기 있는 엘마와 하나가 되려고 해?

국왕 폐하?

이 애는 '현재'니까.

이 애는 흄 대주교가 내린 유일한 축복 "망각"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내가 그 축복을 깨뜨리면 그녀는 내 몸속으로 돌아와서 나를 서머 가든의 진정한 주인으로 만들어 주지.

그리고 나는 너희의 진정한 기반이기도 해.

레네트

...설마 이게 전부 흄 박사의 계획이었다니...

엘마는 코트 속을 샅샅이 뒤져서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코트 속엔 쪽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엘마

이건 엄마의 코트야. 엄마가 죽고 나서 내가 계속 가지고 있었어.

사람들은 헤어지면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만을 떠올리며 괴롭고 슬펐던 때를 잊어버린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보호 수단이자 인간의 갈망을 나타낸다.

사랑과 기쁨, 이것들은 모두 얻기 힘든 것들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필사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것들로 생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엘마

난 줄곧 이해가 안 됐어, 왜 나는 자꾸 기억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어졌는지. 그래도 나는 그게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어.

레네트

......

엘마

...사실은 지금까지 정말 무서웠어. 두려웠어.

기억을 잃어버리면 마치 죄를 지은 기분이었어.

모두에게 빚을 진 것 같았어.

모두와 함께 지냈던 나날도, 620이 계속 서머 가든에서 날 기다렸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어.

미라벨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엘마

내 기억 속에선 언제나 기억을 잃기 직전에 엄마가 나한테 총을 쐈어.

엘마

내가 뭘 잘못했을까?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외투가 엘마의 팔에서 흘러내려,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레네트

......

엘마

난 가족을 갖고 싶었어. 자매를, 엄마를, 곁에 있어 줄 사람을 원했어.

나는... 외로운 게 무서웠어.

엘마

이제 내겐 엄마가 생겼어. 자매도 생겼어.

그런데 너희는 다들 내가 싫대. 이런 나는 필요 없대.

너희가 좋아한 건, 너희가 원한 건 여기 있는 기억도 없고 쓸모도 없는 내가 아니었어.

기억이 있고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나"였어.

저기 있는 완벽한 "예술품" 말이야.

레네트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린 그런 말 안 했어.

엘마

난 최대한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과거의 추억을 되찾으려고 애썼어.

엘마

하지만 미안해...

그 추억들을 보면 너무너무 짜증이 치밀고 구역질까지 나.

그게 아서 흄이 내게 남겨 준 마지막 유품이라고 착각하기까지 하고...

엘마

이 외투, 더는 꼴도 보기 싫어.

엘마의 눈물이 바닥에 떨어진 외투의 주머니에 떨어졌다.

엘마

...내가 계속 쫓아다닌 것은 다 과거의 잔상일 뿐이었어.

내 것이 아닌 과거, 내 것이 아닌 미래.

난 이제 내가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레네트

엘마, 일단 진정해!

엘마

진정 안 해. 말도 안 들을 거야. 난 청개구리야.

날 싫어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 나도 이제 너희가 정말 싫어.

엘마는 그곳을 뛰쳐나갔다.

국왕 폐하?

돌아올 거야.

레네트

......

엘마!

레네트는 바로 엘마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