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금빛
"좁은 길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한쪽은 안개가 자욱한 슬픈 과거, 한쪽은 햇빛이 영원히 화창한 정원."
......
하늘은 투명할 정도로 맑고 푸르렀다.
뭉게뭉게 하얀 구름이 바람에 천천히 실려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햇살은 마치 황금빛 비단처럼 소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푸른 잔디밭 중앙, 꽃들이 만발한 곳에서 가는 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펼쳐져 흔들렸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깬 듯이 소녀는 길게 하품을 하고 금빛 눈동자를 깜빡였다.
......
...응?
바로 코앞에서 똑같은 금빛 눈동자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하늘에 그녀가 비쳐보이는 것일까?
쿵.
손을 뻗는 순간 앞에 놓인 거울에 닿았다.
쿵! ...쿵쿵!
M4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몸이 마치 틈새에 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앞, 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단단한 유리가 그녀를 에워싸 가두고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든 관처럼.
...내보내줘요! 여기서 꺼내줘요!
M4는 더 세게 유리를 두드려보았지만, 유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윽... 제발!
여기서... 내보내줘요!!!
아니, 바보야? 왜 스스로 그런 데 쑤셔박힌 거야?
쨍그랑!
유리가 깨지면서 M4는 갑자기 상자에서 풀려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따스한 작은 품이 자신을 받쳐안는 것이 느껴졌다.
헉... 헉...
아무리 파티에서 빠져나가고 싶어도 그렇게 사서 고생할 건 없잖아...
구사일생한 소녀는 잔디밭에 앉아 숨을 골랐다. 사나운 얼굴의 남자아이의 말투는 약간 누그러졌다.
그녀 밑에 잔디는 융단처럼 푹신하고, 꽃들이 활짝 폈다.
투명한 관은 잔디밭 중앙에 마치 보석처럼 박혀있었다.
그리고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허리 높이의 관목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 뒤에는 익숙한 양옥이 있었다.
여기는 어디죠?
우리 집 정원이잖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자꾸 그러면 마티니 헨리 부른다?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마티니 헨리는...?
......
앳된 남자아이의 얼굴에 음험한 분노가 서렸다.
죄송해요, 제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서. 이곳의 위치와 당신의 신원을 알려주세요.
...빌.
원래 날 빌이라고 불렀었잖아.
좋아요, 빌. 방금 이곳이 당신네 정원이라고 했나요? 자세한 좌표나——
우리 집이야.
네?
여긴 우리 집이라고! 따라와!
묘하게 화가 난 남자아이가 M4를 정원 반대편으로 끌고갔다.
M4는 생기가 가득한 정원을 둘러보면서 가슴 속에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절대 잊어선 안 될 일을 잊은 것 같은.
마티니 헨리!
커다란 파라솔 밑에 무기를 지닌 소녀가 티 세트를 상에 놓고 있다가, 둘이 오는 것을 보고 바로 일을 멈추고 인사했다.
도련님, 아가씨, 반갑습니다.
누구세요...? 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죠?
아가씨...? 왜 그러세요?
저는 당신의 메이드 마티니 헨리입니다. 당신의 경호와 일상 생활 보좌를 맡고 있죠.
제 메이드요...?
메이드라 자처하는 소녀가 약간 걱정하면서 M4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어주었다.
아가씨,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다들 아가씨를 찾아다녔다고요.
저를요?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
부인께선 햇볕을 좀 쐬시니 몸이 편찮으시다고 방에 돌아가 쉬고 계셔요.
용무가 있으시면 제게 분부해주세요.
루시가 갑자기 기억을 잃었어. 나까지 잊어버렸나봐.
......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가씨?
메이드가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M4의 얼굴과 몸에 난 자잘한 생채기를 살며시 닦아주었다.
또 도련님하고 다퉜나요?
아 제발 좀! 무슨 일만 나면 왜 다 내 잘못인데!?
너네 폐급들이 한참 동안 못 찾아낸 걸 내가 찾아냈잖아! 그 망할 유리 상자에 갇혀 있는 걸!
상자에 갇혀 있었다고요?
또 어디 함부로 못 가게 잘 지켜보고 있어! 나는 어머니 불러올 테니까.
시종일관 인상을 구기고 있던 남자아이는 쌩하고 사라졌다.
아가씨, 제게 말씀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
M4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치맛자락을 내려다봤다. 왠지 어깨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아니야...
루니샤 아가씨?
아니야... 아니에요...
저는 루니샤가 아니라 M4A1이에요.
M4A1이요?
메이드가 긴장한 표정을 풀더니, 미소지으며 M4의 두 손을 잡았다.
M4A1에 대한 것도 잊어버리신 줄 알았는데...
무슨 뜻이죠?
아가씨께서 어릴 적에 어느 기계인형에 관한 이야기집을 읽고선, 자신이 그 책 주인공인 "M4A1"이라고 막 외치면서 다니셨잖아요.
아가씨 혹시 자신이 "AR팀" 대장이고, 작전 책임자는 "그리폰 기지"의 지휘관이라고 기억하시나요?
네.
거기 마지막 대흑막이 "윌리엄"이란 사람 아니었나요? 막 하얀 옷을 입은 괴물들을 잔뜩 만들어서 그리폰과 싸우고.
왜 그렇게 잘 아시죠...
아하하하, 전부 아가씨가 어릴 적에 하시던 상상이에요. 그리고 도련님이 그 "윌리엄" 역할을 맡아서 연기에 어울려주셨죠.
도련님이 겉으론 성질이 더러워 보이셔도, 사실은 아가씨를 엄청 의지하는 동생이시라고요.
...빌이 제 동생이라고요?
자자, 조급해하지 마세요. 아마 더위를 먹으셔서 현실과 상상을 혼동한 걸지도 몰라요.
걱정 마시고 파라솔 밑에 잠시 앉아 계세요.
그럴 리 없어요. 저는 M4A1, AR팀의 대장이라고요!
메이드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미소 지었다.
좋아요, M4A1 어린이. 그럼 당신의 팀원분들을 불러오실래요?
이 땡볕에 어디 콕 박혀 숨어있으면 다들 힘들겠죠? 같이 앉아서 차 한잔하자고 해요.
......
M4는 통신 인터페이스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손을 들어올린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살결 아래로 혈관이 비쳐 보이는 것을 눈치챘다.
선명하고 가느다란, 푸르스름한 정맥이.
아가씨, 먼저 앉을까요?
아뇨.
찬란한 햇살 밑의 푹신푹신한 잔디밭이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M4는 머리를 쥐어짜며 그 익숙한 얼굴들을 떠올리려 했다.
지휘관, AR팀, 그리폰 기지의 인형들...
그토록 실감나고 선명한 기억이 어떻게 환상일 수 있을까?
저는 뚜렷하게 기억해요. 당신이 찾는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저는 제 동료를 찾으러 가겠어요.
루니샤 아가씨...
M4는 몸을 돌려 정원 밖으로 달렸다.
하지만 정원은 사방이 관목 울타리로 꽉 막혀 있고, 오직 양옥으로 향하는 방향에만 빈틈이 열려있었다.
마치 일부러 그녀를 유도하는 것처럼.
자꾸 그러시면 부인과 도련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저는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적어도 도련님께 한마디 정도는 남기셔야 하지 않을까요?
저리 가요!
M4는 따라오는 메이드를 밀쳐낸 뒤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길모퉁이를 몇 번 꺾은 뒤, M4는 경계 태세를 잡고 시야가 약간 트인 개활지에 들어섰다.
오솔길이 그녀 발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 대칭을 이루는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M16 언니,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
분명 스타피쉬에 함께 들어갔는데, 왜 언니의 목소리가 안 들리죠?
통신 채널은 아직도 먹통이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야겠어요.
눈 앞의 두 갈림길을 바라보니, 한쪽은 시야가 깨끗하고 평탄한 길이었다. 다른 한쪽은 안개가 자욱하고 저 멀리 희미하게 울퉁불퉁한 지형이 보였다.
M4가 망설이는 사이, 흐릿한 모습들이 안개 속에 나타났다.
모두 준비됐어?
응! 어서 출발하자, M4를 구하러 가야지!
그 바보가 함부로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저 여기 있어요!
그림자가 안개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목소리도 멀어졌다.
M4가 쫓아가려는 그때 반대쪽 갈림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 또 어디 갔어!?
또 바보처럼 돌아다니다 다치지 말라고!
......
왜 대답 안 해?! 누나마저 날 피하는 거야!?
전에 그랬잖아...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빌, 돌아가세요...
이 거짓말쟁이, 사기꾼, 도망치는 것밖에 모르는 겁쟁이...
......
다들 날 무서워하고 날 피하지만... 그래도 누나만은...
그런데 이제는 누나마저 도망치는 거야? 왜...? 나 뭔가 잘못했어...?
누나...
억지로 표정을 잔뜩 구긴 남자아이는 힘없이 뙤약볕 아래 분숫가에 앉았다. 주변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다들 "아가씨"만을 소리 높여 찾을 뿐, 단 한 사람도 멈춰서서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M4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그림자에 대고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저는 당신의 누나가 아니라, 그리폰 인형 M4A1이에요.
M4는 고개를 돌리고 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달렸다...
M16 언니! AR15! SOP2!
모두 어딨나요?!
M4의 목소리가 하얀 안개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다들 겨우 다시 모였는데...
지휘관님께서 AR-15가 무장해제 당할 일은 없다고,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 아니면 커피숍이나 탄광에서 그녀를 찾아야 할 테니.
어쩌면 우리가 돌아가는 대로 그녀가 팀에 복귀할지도 몰라요.
응...
내 목소리... 그런데 AR15가 어디로 갔다는 거지?
M4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길을 더듬으며 걸어갔다. 흐릿한 그림자가 그녀 곁에 나타났다.
AR-15...
어째서 계속 피하기만 하는 걸까......
왜냐하면... 너희들은 자꾸 일만 만드니까지.
털썩, 흐릿한 그림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누구?!
M16이 이런 매복 기술에 대해 여러 번 일러뒀는데도 여전하구나.
내가 곁에 없으면 너희들은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니?
AR15...?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안개가 뭉쳐 위압감을 내뿜는 실루엣으로 변했다.
눈물 나게 감동적인 재회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
미로의 푸른 벽이 갑자기 무너져 M4를 깔아뭉개려고 했다...
...으윽!
갑자기 지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정원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사람마저 내팽개칠 것 같은 어마무시한 힘이, M4를 시커먼 구렁텅이에 던져넣었다.
추락, 끝없는 추락...
M4가 양팔을 힘껏 뻗어보지만 어떤 물건이나 벽도 손에 닿지 않았다.
동굴의 입구, 푸른 하늘의 빛이 갈수록 멀어지며, 마치 지나가는 별똥별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웅——
뾰족한 아픔이 뒤통수를 찔렀다.
실제 물건에 찔린 것이 아닌, 머릿속의 무언가가 욱신거렸다——
으아아앗——!!
쿠웅!
바닥에 부딪히는 것 같은 강렬한 충격이 모든 따끔함을 깨뜨렸다.
모든 촉각과 지각이 한순간에 소녀의 소체와 함께 산산조각나 영원히 조용한 공백으로 변했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이야, 진지하게 대답해.
M4A1... 넌 도대체 누구지?
...??
도대체... 뭘 묻는 건가요...?
대답해. M4.
난 지금 모든 사람들을 살릴 기회를 주는 거야...
너, 지휘관, 그리고 그리폰의 모두들...
그러니, 빨리 대답해, M4A1.
...넌, 도대체 누구야?
저는 M4A1! 그리폰 AR팀의 M4A1이에요!
소리지르면서 악몽에서 깨어난 M4는 가장 먼저 자신의 총을 집었다.
......
AR15?
자욱한 안개 속에서 M4는 AR15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보였다.
곁에 서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소의 쌀쌀맞은 표정이었다.
당신인가요, AR15?
알고 있니, M4A1. 이 눈으로 처음 세상을 봤을 때 난 호기심에 들떠 있었지...
난 IOP가 적당히 제조한 양산형 인형이 아니야. 16LAB에서 직접 개발한 엘리트지.
나의 소망은 수많은 영광스런 명령을 완수하고, 여러 강한 인형들과 친구가 되는 거였어.
그때의 나는 열심히 노력하면 빛나는 스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지.
AR15...
하지만 곧 명령이 내려왔어. 네 지휘를 반드시 따라야 했고, 영원히 AR팀에 묶여버리게 됐지.
멍청하고 시끄러운 SOPII, 털털하고 건성건성한 M16, 그리고 우유부단한 너...
그때부터 내 모든 가능성이 말살됐지.
난 너희들이 정말 싫었어. 하지만 명령 앞에선 무력했지.
이건 전부 과거의 기억이에요.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난 네가 싫어, M4A1.
......
네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이 가짜! AR15는 그런 말 안 해요!
타타타탕!
총구가 불을 뿜어 안개를 걷어냈다.
하지만 금세 다른 안개 덩어리가 모여들어, 새로운 절망으로 변해 꿈틀거렸다.
역시, 아무래도 난 널 싫어해야 할 것 같아...
AR15!
M4는 불길에 삼켜지는 AR15에게 달려갔지만, 그녀는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안개 뒤의 공허로 굴러떨어졌다...
추락...
끝없는 추락.
끝나지 않는 꿈, 점점 목을 조르는 두 손...
M4!
......
정신 차려, M4!
M16 언니...?
콜록...콜록...
이봐,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너 또 한 번 삼도천을 건널 뻔했잖아.
M16 언니!
M4, 계속 지휘할 수 있겠어?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저는 괜찮아요, 이 정도 상처쯤...
그것보다 M16 언니, 저를 어떻게 찾아냈죠? 왜 모습이——
지금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야. 무기 들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예비플랜 C로 가도록 하자. 다들, 저번에 약속한 대로 하는 거다.
우리가 갈라져서 적을 유인할 테니 그 틈에 가도록 해.
......
꾸물거리지 마 M4! 이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야!
그래, 지금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건 M4밖에 없어!
좋아! 다들 흩어져서 적들을 유인한다!
기다려요! 절 두고 가지 말아요...
M16과 두 흐릿한 그림자가 함께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에 치밀어올랐지만 M4는 이를 악물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M16 언니!
안개가 요염한 자태로 몸을 흔들고, M4는 팀원들을 걱정하며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조심해!
M16의 모습이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M4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타타탕! 총알이 빗발치는 소리가 울렸다.
엎드려, 놈들이 왔어.
누가 왔다고요?
철혈. 너를 노리고 온 거야.
철혈이요...?
M4, 모두를 지휘해줘, 빨리 반격을!
M16 언니, 철혈은 이미...
아직도 이해 못했어? M4!
빨리 작전을 짜지 않으면 전부 여기서 죽을 거라고!
......
M4, 네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말했었지, 우리는 같이 여기서 나갈 거라고. 맞아?
......
네, 우리 함께 여기서 벗어나요.
이 모든 것이 기억의 파편으로 짜맞춰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M4는 M16 곁에 서서 총을 들어, 어둠을 뚫고 닥쳐올 무언가에 맞서기를 선택했다.
뚜벅, 뚜벅, 뚜벅——
공허하고 가벼운 발소리.
타타탕!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둘은 동시에 사격을 가했다.
명중했나요...?
약간 빗나갔나?
안타깝게도...
...멀리 빗나갔군.
작은 형체가 안개 끝에서 나타났다.
엘리사...
조심해, M4.
네.
엘리사는 총구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M4를 향해 걸어왔다.
뭘 할 셈이야!?
......
내가 하려는 건...
AR15가 해주지 못했던 것...
또한 너도 대답할 수 없는 것...
엘리사는 M16을 그대로 뚫고 지나가, M4를 단단히 껴안았다...
날카로운 이명.
거품이 깊은 바다 속에서 보글보글 치솟으며, 흐느끼는 소녀들이 피로 얼룩진 뒷골목을 지나갔다.
무수한 장면들이 조각난 파편이 되어 M4의 눈앞에서 흘러갔다...
......
대체 뭘 할 셈인가요, 엘리사?
...답을 찾고 있지.
"넌... 도대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말이야.
저는 그리폰에 고용된 인형, AR팀의 멤버.
그 외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대답해.
말했잖아요. 전 모른다고...
네가 제조된 목적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대답해, 빨리 대답하란 말이다.
모른다고요! 저는 M4A1이에요! 그저 인형일 뿐이라고요!
마치 온 세상이 M4에게 답을 내길 바라는 것 같았다. M4 자신조차 모르는 답을.
"나는 누구인가", 그게 꼭 대답해야 하는 질문일까?
내 곁으로 와, 너의 기억을 분석하겠어.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
엘리사가 손을 들자 원래부터 비좁던 공간이 더욱 좁아졌다.
엘리사를 피해 구석에 몰린 M4는 마지막 발악으로 총을 들었다——
M4! 녀석에게 닿으면 안 돼!
M16...
왜... 당신이...?
왜 나냐니? 항상 나였잖아?
갑자기 M4 앞에 나타나 엘리사를 가로막은 M16이 고개를 돌려 미소지었다.
처음부터 언제나 나였잖아.
너는... 누구...?
내 이름은 페르시카리아. 널 만든 사람이야.
왜... 날 만들었어?
넌 AR팀의 리더가 되어서, 내가 만든 가장 우수한 인형들을 이끌게 될 거야.
인형...
난... 인형이야?
지금부터는 그렇지.
널 복원하고 나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여운걸...
네가 나를 위해... 리코가 나에게 주지 못했던 답을 줄 수 있기를...
...리코?
...무슨 답?
그건 말이야... 지금은 말해주기 아직 너무 이른 것 같네. 일단 먼저 새로운 동료부터 만나지 않을래?
네가 M4A1 맞지?
내 이름은 M16A1. 너랑 같은 전술인형이야.
만나서 반가워. 아마 앞으로 네 지휘를 받게 될 것 같은데.
너... 눈이?
하하하, 놀라게 해버렸나?
이 안대는 말이지... 사실 뭐 그렇게 무서운 것도 아냐. 그냥 기념일 뿐이니까. 멋지지 않아?
으...
아 참, 작전 쪽으로는 내가 더 경험이 풍부할 테니 잘 모르는 건 나한테 물어보도록 해.
술 좋아하면 나중에 나랑 한잔하자고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까지나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너를 지키는 것이 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명령이니까.
M16의 손을 잡고서, M4는 엘리사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다시 끝이 없는 미로로 돌아왔다.
M16 언니...
겁먹지 마, 침착하게 관찰해서 여기서 벗어날 길을 찾는 거야.
네.
M4의 불안감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그녀는 단단한 지면을 딛고서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M16의 걸음소리 덕에 그녀는 더이상 그 악착같은 추궁이 두렵지 않았다.
잠깐만요.
뭔데?
우리... 맨 처음 왔던 갈림길로 돌아왔어요...
M4는 갈림길 중간에 섰다. 한쪽 길은 햇빛이 화창한 정원, 한쪽 길은 안개가 자욱한 황무지.
왜 여기로 돌아온 거지...
나는 여기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어.
M16 언니?
잘 살아.
M16의 등 뒤에 도사리던 안개가 비명을 지르는 괴물이 되어 그녀의 몸에 달라붙었다.
저를 또 혼자 두고 가는 건가요...
M4A1...
날 기다려줘, 내가 뭘로 변했든지...
M16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M4는 또 혼자 갈림길 앞에 서게 됐다.
루니샤 아가씨...
......
저는 루니샤가 아니에요...
왜 계속 다른 사람의 괴로운 기억을 보시는 건가요?
저건 남의 기억이 아니에요, 저의 기억이라고요!
아가씨의 것은, 지금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는걸요.
마티니 헨리가 분숫가에 앉아 있는 빌을 가리켰다. 벌써 해가 저물어, 그 작은 몸집은 혼탁한 야경 속에서 연약하고 왜소해 보였다.
그는 변함없이 누나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계속 당신의 것이 아닌 환상에만 집착하시죠.
환상이 아니에요! 이건 저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또 저 괴로운 환상 속으로 돌아가 그들이 죽는 것을 또 한 번 관람하실 셈인가요?
......
이미 셀 수 없이 보셨잖아요... 그들이 죽는 장면을.
마티니 헨리가 안개로 통하는 길을 가리켰다. 안개가 한데 뭉쳐 만들어진 인형 하나가 그 끝에 나타나 있었다.
M4A1 씨! 어디 있어요? 제 말 들리세요? 대답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어서 깨어나요!
RO의 목소리...
대답하실 건가요? 어떻게 될지 알고 계시면서...
아... 안 돼!
아가씨가 계속 환상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면 저것들을 계속 보게 될 거예요...
아가씨의 것이 아닌 기억들을.
출발하자, M4!
어서 가자고! 우리가 함께 있는 한 완수하지 못할 임무는 없어!
SOP2...
멈춰! 당장 멈춰!
아무도 아가씨가 멈추는 걸 말리지 않아요. 오히려 아가씨가 스스로 멈추지 않는 거예요...
......
머리 깊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마치 위잉 하며 돌아가는 드릴처럼 구멍을 파는 것 같았다...
기억 깊은 곳의 어떤 물건들이 그 구멍으로 새어나가 버렸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꺼져! 다 꺼지라고!
너네 때문에 루시가 안 돌아오는 거잖아! 내가 다 죽여버리겠어!
루니샤 아가씨...
누나가 안 돌아오면 여기 있는 것들 전부 무슨 의미가 있는데!
......
아니야... 나는 M4A1...
아가씨...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아니야... 아니야...
머릿속의 울림이 갈수록 시끄러워져, 의식을 유지하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M4는 더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찰싹! 따귀 소리가 들렸다.
너 또 말썽 부렸니? 누나 속 터져서 뛰쳐나가라고?
...죄송합니다, 어머니.
부인! 편찮으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왜 나오셨어요...
야위고 연약한 부인이 얼얼해진 손바닥을 거두고, M4를 바라보며 입술을 떨었다.
루시...
어머니, 천천히 걸으세요.
남자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부인은 M4에게서 몇 걸음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멈춰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정도 걸음만으로 온몸의 힘을 소진한 것처럼.
내 사랑스러운 딸아, 식사 시간이란다. 어서 돌아오렴...
......
...엄마...?
그래, 아가야. 엄마 여기 있단다.
저... 어떻게 된 거죠?
이리로 오지 않겠니, 루시?
......
M4는 주저하면서도 창백한 여인의 품으로 걸어갔다.
땡...
경쾌한 종소리가 공중에 울려퍼져 M4 머릿속의 모든 잡음을 쫓아냈다.
M4는 홀가분해진 듯이 숨을 골랐다. 다시 뒤돌아봤을 때, 안개가 자욱한 갈림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가씨,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
어서 누나에게 사과하렴.
미안해 누나. 화나게 만들어서.
아니야... 빌이 잘못한 거 없어. 내가...
부드러운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 더이상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가자꾸나, 우리 집으로.
따듯한 가족에 둘러싸여, "루니샤"는 저 멀리 집으로 이끌려갔다.
바람이 잔디밭을 지나 문이 열린 양옥 안으로 불었다. "루니샤"는 문 앞에 서서 얼굴에 부는 바람을 느꼈다.
빌, 여기서 루시를 지켜주거라. 또 누나 화나게 하지 말고.
네, 어머니.
마티니 헨리, 내가 아껴둔 그 와인 좀 꺼내게 같이 가자꾸나.
네, 부인.
두 사람을 자리에 남겨두고 부인은 마티니 헨리의 부축을 받으며 주류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들어가, 왜 여기서 멍하니 서 있어?
조금... 낯설어서...
뭔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또 환상에 빠진 거야?
자기가 M4A1이라는 인형 같고 막 그래?
너도 M4A1의 이야기를 아는구나...
당연히 알지, 나한테 몇 번을 얘기했는데. 기억 안 나?
나한테 거기 나오는 악역 연기를 시켰잖아.
왜 네가 악역을 연기했는데? 다른 등장 인물도 많은데...
아무튼 나한테 쭉 시켜왔는걸. 뭐 다 익숙해졌어.
계속 툴툴거리던 소년이 갑자기 잠시 침묵했다.
다들 날 싫어해. 내가 이 집 자식이 아니었으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
어머니마저도 그래. 나한테도 웃어주는 건 누나가 같이 있을 때뿐이야.
빌...
상관없어, 누나는 다르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니까.
누나가 내게 잘해주는 건 그저 내가 나이기 때문이야. 내 신분이나 혈연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난 그걸로 됐어. 어리석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이해 따윈 필요 없어. 루시가 날 이해해 주면 충분해.
"루니샤"는 말없이 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짧은 머리가 약간 까칠까칠했다.
내 머리 만지지 말고 들어가. 어머니 돌아오신다.
넓은 응접실에서 세 사람은 식탁 앞에 앉았다.
마티니 헨리가 와인을 꺼내 뚜껑을 열어 잔에 따랐다. 그리고 그 중 한 잔을 "루니샤"에게 건넸다.
이 천국에서 온 선물을 마시세요.
【세계】는 이미 아가씨의 선택으로 변했습니다.
...무슨 뜻이죠?
기도하자꾸나.
부인이 경건하게 눈을 감고, 빌도 얌전히 눈을 감았다.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두 태양은 각자 서로 다른 두 길을 밝히니,
속세로의 길과, 자애로운 아버지로의 길.
누가 "루니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기도가 끝나기 전에 와인을 마시세요.
알았어요.
신전은 마굴로 변하고, 천칭은 죄악으로 물들어 피를 채우는 제단이 되었도다.
복수의 여신은 보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갈라,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며 날카롭게 외치노라.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 올바른 길을 잃으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끌려 내려간다.
마력이 담긴 듯한 기도를 들으며, "루니샤"는 아무 생각 없이 술잔을 들었다. 취기를 부르는 향기가 솔솔 피어났다...
진홍색의 액체는 마치 비단 끈처럼, 부드럽고 매혹적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고 지나갔다.
예전에 어디에서 누구하고...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었나?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시끌벅적한 연회장, 친근한 동료들... 그 모두가 뜬구름처럼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떠들썩한 한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소녀 몇 명이 술잔을 들고서 빨간 제복을 입은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으음...
날카로운 울림이 그녀의 인내력을 시험했다.
그녀는 계속 회상할 생각을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 술잔 속 액체를 비웠다.
모든 아픔과 혼란이 붉은 알콜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함께하리라.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저주도 축복도 받지 아니하매.
기도는 여기서 끝나고, 한나 부인이 "루니샤"의 손을 쥐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으니, 제가 대신 맡아두고 있었던 물건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뭐죠?
마티니 헨리가 품 안에서 타로 카드 한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메이저 아르카나 21, 세계.
아가씨의 단 하나뿐인 신분증이랍니다.
제가... 세계... 라고요?
사랑하는 루시, 너에게는 이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있단다. 동시에 그것은 네가 이 세상을 원만하게 만들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제게 그렇게 엄청난 힘이...
아직 기억이 안 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은 끝없는 재난에 빠져,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이고 있단다.
오직 이곳만이 마지막으로 남은 정토라 할 수 있지.
......
"루니샤"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창밖의 고요한 야경을 바라봤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 그냥——
빌.
죄송합니다, 어머니.
우리는 타인의 고난을 못 본 체해선 안 된단다.
네, 엄마...
하지만 아직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마티니 헨리가 "루니샤"의 술잔에 술을 다시 따랐다.
괜찮아요, 아가씨, 천천히 이해가 가실 거예요.
마티니 헨리, 일단 루시를 데리고 구경 좀 시켜주렴.
네, 부인.
아가씨, 이 카드를 잘 보관하시고 저를 따라오세요.
알겠어요.
"루니샤"는 일어서서 자신의 카드를 움켜쥐고 마티니 헨리를 따라갔다.
누나!
왜 그러니, 빌?
너무 무리하면 안 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루시, 이제 출발할 시간이란다. 조심해서 가렴.
네.
다정한 가족과 작별하고 꽃들이 무성한 정원을 떠나, "루니샤"는 충성스러운 메이드를 따라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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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투명할 정도로 맑고 푸르렀다.
뭉게뭉게 하얀 구름이 바람에 천천히 실려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햇살은 마치 황금빛 비단처럼 소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푸른 잔디밭 중앙, 꽃들이 만발한 곳에서 가는 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펼쳐져 흔들렸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깬 듯이 소녀는 길게 하품을 하고 금빛 눈동자를 깜빡였다.
......
...응?
바로 코앞에서 똑같은 금빛 눈동자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하늘에 그녀가 비쳐보이는 것일까?
쿵.
손을 뻗는 순간 앞에 놓인 거울에 닿았다.
쿵! ...쿵쿵!
M4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몸이 마치 틈새에 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앞, 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단단한 유리가 그녀를 에워싸 가두고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든 관처럼.
...내보내줘요! 여기서 꺼내줘요!
M4는 더 세게 유리를 두드려보았지만, 유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윽... 제발!
여기서... 내보내줘요!!!
아니, 바보야? 왜 스스로 그런 데 쑤셔박힌 거야?
쨍그랑!
유리가 깨지면서 M4는 갑자기 상자에서 풀려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따스한 작은 품이 자신을 받쳐안는 것이 느껴졌다.
헉... 헉...
아무리 파티에서 빠져나가고 싶어도 그렇게 사서 고생할 건 없잖아...
구사일생한 소녀는 잔디밭에 앉아 숨을 골랐다. 사나운 얼굴의 남자아이의 말투는 약간 누그러졌다.
그녀 밑에 잔디는 융단처럼 푹신하고, 꽃들이 활짝 폈다.
투명한 관은 잔디밭 중앙에 마치 보석처럼 박혀있었다.
그리고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허리 높이의 관목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 뒤에는 익숙한 양옥이 있었다.
여기는 어디죠?
우리 집 정원이잖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자꾸 그러면 마티니 헨리 부른다?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마티니 헨리는...?
......
앳된 남자아이의 얼굴에 음험한 분노가 서렸다.
죄송해요, 제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서. 이곳의 위치와 당신의 신원을 알려주세요.
...빌.
원래 날 빌이라고 불렀었잖아.
좋아요, 빌. 방금 이곳이 당신네 정원이라고 했나요? 자세한 좌표나——
우리 집이야.
네?
여긴 우리 집이라고! 따라와!
묘하게 화가 난 남자아이가 M4를 정원 반대편으로 끌고갔다.
M4는 생기가 가득한 정원을 둘러보면서 가슴 속에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절대 잊어선 안 될 일을 잊은 것 같은.
마티니 헨리!
커다란 파라솔 밑에 무기를 지닌 소녀가 티 세트를 상에 놓고 있다가, 둘이 오는 것을 보고 바로 일을 멈추고 인사했다.
도련님, 아가씨, 반갑습니다.
누구세요...? 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죠?
아가씨...? 왜 그러세요?
저는 당신의 메이드 마티니 헨리입니다. 당신의 경호와 일상 생활 보좌를 맡고 있죠.
제 메이드요...?
메이드라 자처하는 소녀가 약간 걱정하면서 M4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어주었다.
아가씨,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다들 아가씨를 찾아다녔다고요.
저를요?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
부인께선 햇볕을 좀 쐬시니 몸이 편찮으시다고 방에 돌아가 쉬고 계셔요.
용무가 있으시면 제게 분부해주세요.
루시가 갑자기 기억을 잃었어. 나까지 잊어버렸나봐.
......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가씨?
메이드가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M4의 얼굴과 몸에 난 자잘한 생채기를 살며시 닦아주었다.
또 도련님하고 다퉜나요?
<size=50>아 제발 좀! 무슨 일만 나면 왜 다 내 잘못인데!?</size>
너네 폐급들이 한참 동안 못 찾아낸 걸 내가 찾아냈잖아! 그 망할 유리 상자에 갇혀 있는 걸!
상자에 갇혀 있었다고요?
또 어디 함부로 못 가게 잘 지켜보고 있어! 나는 어머니 불러올 테니까.
시종일관 인상을 구기고 있던 남자아이는 쌩하고 사라졌다.
아가씨, 제게 말씀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
M4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치맛자락을 내려다봤다. 왠지 어깨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아니야...
루니샤 아가씨?
아니야... 아니에요...
저는 루니샤가 아니라 M4A1이에요.
M4A1이요?
메이드가 긴장한 표정을 풀더니, 미소지으며 M4의 두 손을 잡았다.
M4A1에 대한 것도 잊어버리신 줄 알았는데...
무슨 뜻이죠?
아가씨께서 어릴 적에 어느 기계인형에 관한 이야기집을 읽고선, 자신이 그 책 주인공인 "M4A1"이라고 막 외치면서 다니셨잖아요.
아가씨 혹시 자신이 "AR팀" 대장이고, 작전 책임자는 "그리폰 기지"의 지휘관이라고 기억하시나요?
네.
거기 마지막 대흑막이 "윌리엄"이란 사람 아니었나요? 막 하얀 옷을 입은 괴물들을 잔뜩 만들어서 그리폰과 싸우고.
왜 그렇게 잘 아시죠...
아하하하, 전부 아가씨가 어릴 적에 하시던 상상이에요. 그리고 도련님이 그 "윌리엄" 역할을 맡아서 연기에 어울려주셨죠.
도련님이 겉으론 성질이 더러워 보이셔도, 사실은 아가씨를 엄청 의지하는 동생이시라고요.
...빌이 제 동생이라고요?
자자, 조급해하지 마세요. 아마 더위를 먹으셔서 현실과 상상을 혼동한 걸지도 몰라요.
걱정 마시고 파라솔 밑에 잠시 앉아 계세요.
그럴 리 없어요. 저는 M4A1, AR팀의 대장이라고요!
메이드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미소 지었다.
좋아요, M4A1 어린이. 그럼 당신의 팀원분들을 불러오실래요?
이 땡볕에 어디 콕 박혀 숨어있으면 다들 힘들겠죠? 같이 앉아서 차 한잔하자고 해요.
......
M4는 통신 인터페이스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손을 들어올린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살결 아래로 혈관이 비쳐 보이는 것을 눈치챘다.
선명하고 가느다란, 푸르스름한 정맥이.
아가씨, 먼저 앉을까요?
아뇨.
찬란한 햇살 밑의 푹신푹신한 잔디밭이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M4는 머리를 쥐어짜며 그 익숙한 얼굴들을 떠올리려 했다.
지휘관, AR팀, 그리폰 기지의 인형들...
그토록 실감나고 선명한 기억이 어떻게 환상일 수 있을까?
저는 뚜렷하게 기억해요. 당신이 찾는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저는 제 동료를 찾으러 가겠어요.
루니샤 아가씨...
M4는 몸을 돌려 정원 밖으로 달렸다.
하지만 정원은 사방이 관목 울타리로 꽉 막혀 있고, 오직 양옥으로 향하는 방향에만 빈틈이 열려있었다.
마치 일부러 그녀를 유도하는 것처럼.
자꾸 그러시면 부인과 도련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저는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적어도 도련님께 한마디 정도는 남기셔야 하지 않을까요?
저리 가요!
M4는 따라오는 메이드를 밀쳐낸 뒤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길모퉁이를 몇 번 꺾은 뒤, M4는 경계 태세를 잡고 시야가 약간 트인 개활지에 들어섰다.
오솔길이 그녀 발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 대칭을 이루는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M16 언니,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
분명 스타피쉬에 함께 들어갔는데, 왜 언니의 목소리가 안 들리죠?
통신 채널은 아직도 먹통이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야겠어요.
눈 앞의 두 갈림길을 바라보니, 한쪽은 시야가 깨끗하고 평탄한 길이었다. 다른 한쪽은 안개가 자욱하고 저 멀리 희미하게 울퉁불퉁한 지형이 보였다.
M4가 망설이는 사이, 흐릿한 모습들이 안개 속에 나타났다.
<color=#FFCC33>모두 준비됐어?</color>
<color=#FF33CC>응! 어서 출발하자, M4를 구하러 가야지!</color>
<color=#FFCCCC>그 바보가 함부로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좋겠는데.</color>
여러분? 저 여기 있어요!
그림자가 안개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목소리도 멀어졌다.
M4가 쫓아가려는 그때 반대쪽 갈림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 또 어디 갔어!?
또 바보처럼 돌아다니다 다치지 말라고!
......
왜 대답 안 해?! 누나마저 날 피하는 거야!?
전에 그랬잖아...
<size=50>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size>
빌, 돌아가세요...
이 거짓말쟁이, 사기꾼, 도망치는 것밖에 모르는 겁쟁이...
......
다들 날 무서워하고 날 피하지만... 그래도 누나만은...
그런데 이제는 누나마저 도망치는 거야? 왜...? 나 뭔가 잘못했어...?
누나...
억지로 표정을 잔뜩 구긴 남자아이는 힘없이 뙤약볕 아래 분숫가에 앉았다. 주변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다들 "아가씨"만을 소리 높여 찾을 뿐, 단 한 사람도 멈춰서서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M4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그림자에 대고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저는 당신의 누나가 아니라, 그리폰 인형 M4A1이에요.
M4는 고개를 돌리고 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달렸다...
M16 언니! AR15! SOP2!
모두 어딨나요?!
M4의 목소리가 하얀 안개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color=#FF33CC>다들 겨우 다시 모였는데...</color>
<color=#7FFF00>지휘관님께서 AR-15가 무장해제 당할 일은 없다고,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color>
<color=#FFCC33>그나마 다행이네, 아니면 커피숍이나 탄광에서 그녀를 찾아야 할 테니. </color>
<color=#7FFF00>어쩌면 우리가 돌아가는 대로 그녀가 팀에 복귀할지도 몰라요. </color>
<color=#FF33CC>응...</color>
내 목소리... 그런데 AR15가 어디로 갔다는 거지?
M4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길을 더듬으며 걸어갔다. 흐릿한 그림자가 그녀 곁에 나타났다.
<color=#FF33CC>AR-15...</color>
<color=#FF33CC>어째서 계속 피하기만 하는 걸까......</color>
<color=#FFCCCC>왜냐하면... 너희들은 자꾸 일만 만드니까지. </color>
털썩, 흐릿한 그림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누구?!
<color=#FFCCCC>M16이 이런 매복 기술에 대해 여러 번 일러뒀는데도 여전하구나.</color>
<color=#FFCCCC>내가 곁에 없으면 너희들은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니? </color>
AR15...?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안개가 뭉쳐 위압감을 내뿜는 실루엣으로 변했다.
<color=#FFCCCC>눈물 나게 감동적인 재회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color>
미로의 푸른 벽이 갑자기 무너져 M4를 깔아뭉개려고 했다...
...으윽!
갑자기 지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정원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사람마저 내팽개칠 것 같은 어마무시한 힘이, M4를 시커먼 구렁텅이에 던져넣었다.
추락, 끝없는 추락...
M4가 양팔을 힘껏 뻗어보지만 어떤 물건이나 벽도 손에 닿지 않았다.
동굴의 입구, 푸른 하늘의 빛이 갈수록 멀어지며, 마치 지나가는 별똥별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웅——
뾰족한 아픔이 뒤통수를 찔렀다.
실제 물건에 찔린 것이 아닌, 머릿속의 무언가가 욱신거렸다——
<size=50>으아아앗——!!</size>
쿠웅!
바닥에 부딪히는 것 같은 강렬한 충격이 모든 따끔함을 깨뜨렸다.
모든 촉각과 지각이 한순간에 소녀의 소체와 함께 산산조각나 영원히 조용한 공백으로 변했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이야, 진지하게 대답해.
M4A1... 넌 도대체 누구지?
...??
도대체... 뭘 묻는 건가요...?
대답해. M4.
난 지금 모든 사람들을 살릴 기회를 주는 거야...
너, 지휘관, 그리고 그리폰의 모두들...
그러니, 빨리 대답해, M4A1.
...넌, 도대체 누구야?
<size=50>저는 M4A1! 그리폰 AR팀의 M4A1이에요!</size>
소리지르면서 악몽에서 깨어난 M4는 가장 먼저 자신의 총을 집었다.
......
AR15?
자욱한 안개 속에서 M4는 AR15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보였다.
곁에 서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소의 쌀쌀맞은 표정이었다.
당신인가요, AR15?
알고 있니, M4A1. 이 눈으로 처음 세상을 봤을 때 난 호기심에 들떠 있었지...
난 IOP가 적당히 제조한 양산형 인형이 아니야. 16LAB에서 직접 개발한 엘리트지.
나의 소망은 수많은 영광스런 명령을 완수하고, 여러 강한 인형들과 친구가 되는 거였어.
그때의 나는 열심히 노력하면 빛나는 스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지.
AR15...
하지만 곧 명령이 내려왔어. 네 지휘를 반드시 따라야 했고, 영원히 AR팀에 묶여버리게 됐지.
멍청하고 시끄러운 SOPII, 털털하고 건성건성한 M16, 그리고 우유부단한 너...
그때부터 내 모든 가능성이 말살됐지.
난 너희들이 정말 싫었어. 하지만 명령 앞에선 무력했지.
이건 전부 과거의 기억이에요.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난 네가 싫어, M4A1.
......
네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이 가짜! AR15는 그런 말 안 해요!
타타타탕!
총구가 불을 뿜어 안개를 걷어냈다.
하지만 금세 다른 안개 덩어리가 모여들어, 새로운 절망으로 변해 꿈틀거렸다.
역시, 아무래도 난 널 싫어해야 할 것 같아...
<size=50>AR15!</size>
M4는 불길에 삼켜지는 AR15에게 달려갔지만, 그녀는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안개 뒤의 공허로 굴러떨어졌다...
추락...
끝없는 추락.
끝나지 않는 꿈, 점점 목을 조르는 두 손...
<color=#FFCC33>M4!</color>
......
<color=#FFCC33>정신 차려, M4!</color>
M16 언니...?
콜록...콜록...
이봐,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너 또 한 번 삼도천을 건널 뻔했잖아.
M16 언니!
M4, 계속 지휘할 수 있겠어?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저는 괜찮아요, 이 정도 상처쯤...
그것보다 M16 언니, 저를 어떻게 찾아냈죠? 왜 모습이——
지금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야. 무기 들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예비플랜 C로 가도록 하자. 다들, 저번에 약속한 대로 하는 거다.
우리가 갈라져서 적을 유인할 테니 그 틈에 가도록 해.
......
<color=#FFCCCC>꾸물거리지 마 M4! 이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야! </color>
<color=#FF33CC>그래, 지금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건 M4밖에 없어! </color>
좋아! 다들 흩어져서 적들을 유인한다!
기다려요! 절 두고 가지 말아요...
M16과 두 흐릿한 그림자가 함께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에 치밀어올랐지만 M4는 이를 악물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M16 언니!
안개가 요염한 자태로 몸을 흔들고, M4는 팀원들을 걱정하며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조심해!
M16의 모습이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M4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타타탕! 총알이 빗발치는 소리가 울렸다.
엎드려, 놈들이 왔어.
누가 왔다고요?
철혈. 너를 노리고 온 거야.
철혈이요...?
M4, 모두를 지휘해줘, 빨리 반격을!
M16 언니, 철혈은 이미...
아직도 이해 못했어? M4!
빨리 작전을 짜지 않으면 전부 여기서 죽을 거라고!
......
M4, 네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말했었지, 우리는 같이 여기서 나갈 거라고. 맞아?
......
네, 우리 함께 여기서 벗어나요.
이 모든 것이 기억의 파편으로 짜맞춰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M4는 M16 곁에 서서 총을 들어, 어둠을 뚫고 닥쳐올 무언가에 맞서기를 선택했다.
뚜벅, 뚜벅, 뚜벅——
공허하고 가벼운 발소리.
타타탕!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둘은 동시에 사격을 가했다.
명중했나요...?
약간 빗나갔나?
안타깝게도...
...멀리 빗나갔군.
작은 형체가 안개 끝에서 나타났다.
엘리사...
조심해, M4.
네.
엘리사는 총구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M4를 향해 걸어왔다.
뭘 할 셈이야!?
......
내가 하려는 건...
AR15가 해주지 못했던 것...
또한 너도 대답할 수 없는 것...
엘리사는 M16을 그대로 뚫고 지나가, M4를 단단히 껴안았다...
날카로운 이명.
거품이 깊은 바다 속에서 보글보글 치솟으며, 흐느끼는 소녀들이 피로 얼룩진 뒷골목을 지나갔다.
무수한 장면들이 조각난 파편이 되어 M4의 눈앞에서 흘러갔다...
......
대체 뭘 할 셈인가요, 엘리사?
...답을 찾고 있지.
"넌... 도대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말이야.
저는 그리폰에 고용된 인형, AR팀의 멤버.
그 외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대답해.
말했잖아요. 전 모른다고...
네가 제조된 목적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대답해, 빨리 대답하란 말이다.
<size=50>모른다고요! 저는 M4A1이에요! 그저 인형일 뿐이라고요!</size>
마치 온 세상이 M4에게 답을 내길 바라는 것 같았다. M4 자신조차 모르는 답을.
"나는 누구인가", 그게 꼭 대답해야 하는 질문일까?
내 곁으로 와, 너의 기억을 분석하겠어.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
엘리사가 손을 들자 원래부터 비좁던 공간이 더욱 좁아졌다.
엘리사를 피해 구석에 몰린 M4는 마지막 발악으로 총을 들었다——
M4! 녀석에게 닿으면 안 돼!
M16...
왜... 당신이...?
왜 나냐니? 항상 나였잖아?
갑자기 M4 앞에 나타나 엘리사를 가로막은 M16이 고개를 돌려 미소지었다.
처음부터 언제나 나였잖아.
너는... 누구...?
내 이름은 페르시카리아. 널 만든 사람이야.
왜... 날 만들었어?
넌 AR팀의 리더가 되어서, 내가 만든 가장 우수한 인형들을 이끌게 될 거야.
인형...
난... 인형이야?
지금부터는 그렇지.
널 복원하고 나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여운걸...
네가 나를 위해... 리코가 나에게 주지 못했던 답을 줄 수 있기를...
...리코?
...무슨 답?
그건 말이야... 지금은 말해주기 아직 너무 이른 것 같네. 일단 먼저 새로운 동료부터 만나지 않을래?
네가 M4A1 맞지?
내 이름은 M16A1. 너랑 같은 전술인형이야.
만나서 반가워. 아마 앞으로 네 지휘를 받게 될 것 같은데.
너... 눈이?
하하하, 놀라게 해버렸나?
이 안대는 말이지... 사실 뭐 그렇게 무서운 것도 아냐. 그냥 기념일 뿐이니까. 멋지지 않아?
으...
아 참, 작전 쪽으로는 내가 더 경험이 풍부할 테니 잘 모르는 건 나한테 물어보도록 해.
술 좋아하면 나중에 나랑 한잔하자고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까지나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너를 지키는 것이 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명령이니까.
M16의 손을 잡고서, M4는 엘리사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다시 끝이 없는 미로로 돌아왔다.
M16 언니...
겁먹지 마, 침착하게 관찰해서 여기서 벗어날 길을 찾는 거야.
네.
M4의 불안감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그녀는 단단한 지면을 딛고서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M16의 걸음소리 덕에 그녀는 더이상 그 악착같은 추궁이 두렵지 않았다.
잠깐만요.
뭔데?
우리... 맨 처음 왔던 갈림길로 돌아왔어요...
M4는 갈림길 중간에 섰다. 한쪽 길은 햇빛이 화창한 정원, 한쪽 길은 안개가 자욱한 황무지.
왜 여기로 돌아온 거지...
나는 여기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어.
M16 언니?
잘 살아.
M16의 등 뒤에 도사리던 안개가 비명을 지르는 괴물이 되어 그녀의 몸에 달라붙었다.
저를 또 혼자 두고 가는 건가요...
M4A1...
날 기다려줘, 내가 뭘로 변했든지...
M16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M4는 또 혼자 갈림길 앞에 서게 됐다.
루니샤 아가씨...
......
저는 루니샤가 아니에요...
왜 계속 다른 사람의 괴로운 기억을 보시는 건가요?
저건 남의 기억이 아니에요, 저의 기억이라고요!
아가씨의 것은, 지금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는걸요.
마티니 헨리가 분숫가에 앉아 있는 빌을 가리켰다. 벌써 해가 저물어, 그 작은 몸집은 혼탁한 야경 속에서 연약하고 왜소해 보였다.
그는 변함없이 누나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계속 당신의 것이 아닌 환상에만 집착하시죠.
환상이 아니에요! 이건 저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또 저 괴로운 환상 속으로 돌아가 그들이 죽는 것을 또 한 번 관람하실 셈인가요?
......
이미 셀 수 없이 보셨잖아요... 그들이 죽는 장면을.
마티니 헨리가 안개로 통하는 길을 가리켰다. 안개가 한데 뭉쳐 만들어진 인형 하나가 그 끝에 나타나 있었다.
<color=#FFFF33>M4A1 씨! 어디 있어요? 제 말 들리세요? 대답해주세요!</color>
<color=#FFFF33>부탁이에요, 어서 깨어나요!</color>
RO의 목소리...
대답하실 건가요? 어떻게 될지 알고 계시면서...
<size=50>아... 안 돼!</size>
아가씨가 계속 환상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면 저것들을 계속 보게 될 거예요...
아가씨의 것이 아닌 기억들을.
<color=#FF33CC>출발하자, M4!</color>
<color=#FF33CC>어서 가자고! 우리가 함께 있는 한 완수하지 못할 임무는 없어!</color>
SOP2...
<size=50>멈춰! 당장 멈춰!</size>
아무도 아가씨가 멈추는 걸 말리지 않아요. 오히려 아가씨가 스스로 멈추지 않는 거예요...
......
머리 깊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마치 위잉 하며 돌아가는 드릴처럼 구멍을 파는 것 같았다...
기억 깊은 곳의 어떤 물건들이 그 구멍으로 새어나가 버렸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꺼져! 다 꺼지라고!
너네 때문에 루시가 안 돌아오는 거잖아! 내가 다 죽여버리겠어!
루니샤 아가씨...
누나가 안 돌아오면 여기 있는 것들 전부 무슨 의미가 있는데!
......
아니야... 나는 M4A1...
아가씨...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아니야... 아니야...
머릿속의 울림이 갈수록 시끄러워져, 의식을 유지하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M4는 더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찰싹! 따귀 소리가 들렸다.
너 또 말썽 부렸니? 누나 속 터져서 뛰쳐나가라고?
...죄송합니다, 어머니.
부인! 편찮으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왜 나오셨어요...
야위고 연약한 부인이 얼얼해진 손바닥을 거두고, M4를 바라보며 입술을 떨었다.
루시...
어머니, 천천히 걸으세요.
남자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부인은 M4에게서 몇 걸음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멈춰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정도 걸음만으로 온몸의 힘을 소진한 것처럼.
내 사랑스러운 딸아, 식사 시간이란다. 어서 돌아오렴...
......
...엄마...?
그래, 아가야. 엄마 여기 있단다.
저... 어떻게 된 거죠?
이리로 오지 않겠니, 루시?
......
M4는 주저하면서도 창백한 여인의 품으로 걸어갔다.
땡...
경쾌한 종소리가 공중에 울려퍼져 M4 머릿속의 모든 잡음을 쫓아냈다.
M4는 홀가분해진 듯이 숨을 골랐다. 다시 뒤돌아봤을 때, 안개가 자욱한 갈림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가씨,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
어서 누나에게 사과하렴.
미안해 누나. 화나게 만들어서.
아니야... 빌이 잘못한 거 없어. 내가...
부드러운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 더이상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가자꾸나, 우리 집으로.
따듯한 가족에 둘러싸여, "루니샤"는 저 멀리 집으로 이끌려갔다.
바람이 잔디밭을 지나 문이 열린 양옥 안으로 불었다. "루니샤"는 문 앞에 서서 얼굴에 부는 바람을 느꼈다.
빌, 여기서 루시를 지켜주거라. 또 누나 화나게 하지 말고.
네, 어머니.
마티니 헨리, 내가 아껴둔 그 와인 좀 꺼내게 같이 가자꾸나.
네, 부인.
두 사람을 자리에 남겨두고 부인은 마티니 헨리의 부축을 받으며 주류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들어가, 왜 여기서 멍하니 서 있어?
조금... 낯설어서...
뭔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또 환상에 빠진 거야?
자기가 M4A1이라는 인형 같고 막 그래?
너도 M4A1의 이야기를 아는구나...
당연히 알지, 나한테 몇 번을 얘기했는데. 기억 안 나?
나한테 거기 나오는 악역 연기를 시켰잖아.
왜 네가 악역을 연기했는데? 다른 등장 인물도 많은데...
아무튼 나한테 쭉 시켜왔는걸. 뭐 다 익숙해졌어.
계속 툴툴거리던 소년이 갑자기 잠시 침묵했다.
다들 날 싫어해. 내가 이 집 자식이 아니었으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
어머니마저도 그래. 나한테도 웃어주는 건 누나가 같이 있을 때뿐이야.
빌...
상관없어, 누나는 다르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니까.
누나가 내게 잘해주는 건 그저 내가 나이기 때문이야. 내 신분이나 혈연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난 그걸로 됐어. 어리석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이해 따윈 필요 없어. 루시가 날 이해해 주면 충분해.
"루니샤"는 말없이 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짧은 머리가 약간 까칠까칠했다.
내 머리 만지지 말고 들어가. 어머니 돌아오신다.
넓은 응접실에서 세 사람은 식탁 앞에 앉았다.
마티니 헨리가 와인을 꺼내 뚜껑을 열어 잔에 따랐다. 그리고 그 중 한 잔을 "루니샤"에게 건넸다.
이 천국에서 온 선물을 마시세요.
【세계】는 이미 아가씨의 선택으로 변했습니다.
...무슨 뜻이죠?
기도하자꾸나.
부인이 경건하게 눈을 감고, 빌도 얌전히 눈을 감았다.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두 태양은 각자 서로 다른 두 길을 밝히니,
속세로의 길과, 자애로운 아버지로의 길.
누가 "루니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기도가 끝나기 전에 와인을 마시세요.
알았어요.
신전은 마굴로 변하고, 천칭은 죄악으로 물들어 피를 채우는 제단이 되었도다.
복수의 여신은 보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갈라,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며 날카롭게 외치노라.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 올바른 길을 잃으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끌려 내려간다.
마력이 담긴 듯한 기도를 들으며, "루니샤"는 아무 생각 없이 술잔을 들었다. 취기를 부르는 향기가 솔솔 피어났다...
진홍색의 액체는 마치 비단 끈처럼, 부드럽고 매혹적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고 지나갔다.
<color=#A9A9A9>예전에 어디에서 누구하고...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었나?</color>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시끌벅적한 연회장, 친근한 동료들... 그 모두가 뜬구름처럼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떠들썩한 한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소녀 몇 명이 술잔을 들고서 빨간 제복을 입은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으음...
날카로운 울림이 그녀의 인내력을 시험했다.
그녀는 계속 회상할 생각을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 술잔 속 액체를 비웠다.
모든 아픔과 혼란이 붉은 알콜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함께하리라.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저주도 축복도 받지 아니하매.
기도는 여기서 끝나고, 한나 부인이 "루니샤"의 손을 쥐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으니, 제가 대신 맡아두고 있었던 물건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뭐죠?
마티니 헨리가 품 안에서 타로 카드 한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메이저 아르카나 21, 세계.
아가씨의 단 하나뿐인 신분증이랍니다.
제가... 세계... 라고요?
사랑하는 루시, 너에게는 이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있단다. 동시에 그것은 네가 이 세상을 원만하게 만들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제게 그렇게 엄청난 힘이...
아직 기억이 안 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은 끝없는 재난에 빠져,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이고 있단다.
오직 이곳만이 마지막으로 남은 정토라 할 수 있지.
......
"루니샤"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창밖의 고요한 야경을 바라봤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 그냥——
빌.
죄송합니다, 어머니.
우리는 타인의 고난을 못 본 체해선 안 된단다.
네, 엄마...
하지만 아직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마티니 헨리가 "루니샤"의 술잔에 술을 다시 따랐다.
괜찮아요, 아가씨, 천천히 이해가 가실 거예요.
마티니 헨리, 일단 루시를 데리고 구경 좀 시켜주렴.
네, 부인.
아가씨, 이 카드를 잘 보관하시고 저를 따라오세요.
알겠어요.
"루니샤"는 일어서서 자신의 카드를 움켜쥐고 마티니 헨리를 따라갔다.
누나!
왜 그러니, 빌?
너무 무리하면 안 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루시, 이제 출발할 시간이란다. 조심해서 가렴.
네.
다정한 가족과 작별하고 꽃들이 무성한 정원을 떠나, "루니샤"는 충성스러운 메이드를 따라서 여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