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가장 좋은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들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뛰어넘었다."
......
M4! 나와!
저는 루니샤예요, 당신이 찾는 M4A1은 여기 없어요.
...
너,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죄악이 없는, 어둠이 없는, 폭력과 살육이 없는,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
저의 정원처럼, 모두가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자라는 식물들처럼, 저마다 생기 넘치는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도록.
지금 네가 하는 짓은 그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이용당할 뿐이야!
누가 너한테 그러면 소망을 이룰 수 있다 알려줬는지 모르겠지만, 그놈은 널 속이고 있어!
......
왜 네가 여기로 오게 됐는지 떠올려 봐, 네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들어온 건지 떠올려 보라고.
만약 너라면... 네가 나와 융합한다면...
정말 괜찮겠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미래는 끝없는 가능성으로 가득해요.
어둠 속에 감춰진 과거가 그녀를 찔렀다.
...그럼, 당신이 여기에 온 목적은 뭔가요? 왜 계속 저에게 집착하고, 놓아주지 않죠?
네가 바로 내가 여기 온 이유 그 자체니까.
......
네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기억해?
네가 M4A1 맞지?
내 이름은 M16A1. 너랑 같은 전술 인형이야.
만나서 반가워. 아마 앞으로 네 지휘를 받게 될 것 같은데.
AR팀은 네가 떠난 뒤론 RO가 돌아와 대장으로서의 책임을 짊어졌지.
하지만 너도 알겠지만, 우리 모두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
아쉽지만 이제 작별의 시간이야, M4A1.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청산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네.
슬퍼해도 좋고, 화내도 좋아. 나를 기억해 줘도 좋고, 잊어버려도 좋아...
이 기억이 네 힘이 될 수 있기를, 네가 더 굳세질 수 있기를...
난 이미 AR-15와 M16을 잃었어!
너마저 잃게 될 바에야, 차라리 너랑 함께 싸우다 죽을 거야!
이건 우리가 공장에서 출고될 때부터 받은 명령이고, 난 이걸 끝까지 지키겠어!
AR-15는 제가 당신을 구하길 바라고 있어요. M16도, SOP2도, 그리고 지휘관님도 제가 당신을 구하길 바라고 있다고요!
M4 씨...
저에게 저 스스로의 의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제게 맡긴 희망이 있어요.
당신이 절 믿지 못하겠다면 절 믿고 있는 당신의 동료들을 믿어 주세요.
자요. 제 손을 잡고, 같이 돌아가요...
어둠에 형상이 생겼다.
무겁고 걸쭉한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의 중심이 그녀의 가슴을 천천히, 그러면서도 격하게 짓눌렀다.
비현실적으로 부드러운 두 손이 그녀의 뺨을 받쳤다.
루니샤 아가씨. 지금 엄청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신데, 어떤 목소리가 시끄럽게 굴고 있나요?
지금 목소리, 누구야?
...전 괜찮아요.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네. 그저, 제가 곁에 있으니 두려워 마시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분부만 하시면 제가 어떤 장애물이라도 전부 청소해 드리겠습니다.
......
마티니 헨리는 고개를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또 속삭였다.
부인과 도련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계세요.
M4! 놈의 말을 믿으면 안 돼!
부인께서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요리와 간식을 준비하셨고, 도련님도 아가씨와 함께 TV를 보길 기다리고 계세요.
내 말 들어, M4!!
아가씨, 자신을 그만 괴롭히세요. 이런 타인의 괴로운 기억에 빠져서 아가씨께 무슨 의미가 있나요?
현실 세계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할까요?
마티니 헨리는 "루니샤"의 귀를 막아 M16A1의 외침을 차단했다.
그만... 그만..!
그런 괴로운 남의 이야기, 그냥 지나가라고 해요. 그들의 이야기는 이미 정해졌잖아요?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랍니다.
마티니 헨리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요, 아가씨.
...네.
M4!!!
그녀의 뒤로, M16A1의 외침은 끝없는 어둠에 파묻혀 버렸다.
......
등의 욱신거림에 AR-15는 간신히 몽롱함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휘감긴 덩굴, 기이한 화초, 허공에 떠 있는 시계와 평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괴기하게 비틀린 채 맴돌아, 가까스로 정원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RO...! SOP2...!
소리 낮춰 외쳐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고통을 참으며, AR-15는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세 토막 난 타로 카드의 조각 중 하나.
조각의 중앙에는 목이 긴 술잔과, 그 잔에 담겨진 햇빛 같은 연황색의 술이 그려져 있었다.
제발 쓸모 있어라...
AR-15는 카드 조각을 양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합장했다.
그러자 유리잔처럼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마인드맵을 어느 특수한 채널로 인도했다.
...RO? SOP2?
너희 지금 어디야? 응답해!
몇 번 더 외쳐봤다.
하지만 이 채널에서도 응답은 없었다.
내 목소리 안 들려?!
기다렸다.
심호흡을 하면서 1분 1초가 흘렀다.
눈앞의 수풀 사이로 나뭇가지가 비틀리며 회전해, 혼돈스러운 공허를 자아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쿠웅!
SOP2와 AR-15가 폭발의 충격으로 임시 지휘실의 문짝에 부딪혀 바닥을 굴렀다.
틈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자욱한 먼지가 공중에 흩날렸다 내려앉는 것을 비췄다.
밖은 더 이상 못 버텨! 이제 퇴각해야 해!
지휘관은 상태 어때? 내가 업을 테니까 빨리 가자!
......
RO635는 고개를 들지 않고, 무릎에 눕힌 지휘관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제복이 피로 시꺼멓게 물든 지휘관은, 더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표정이 아니라 편안하게 꿈나라에 빠진 것 같았다.
...지휘관님은, 떠나셨어.
......
무슨 소리야... 지휘관이 떠날 리 없잖아?
지휘관은 우릴 절대 두고 가지 않는다 했는데...!
SOP2가 지휘관을 붙들고 흔들었다.
지휘관! 지휘관!
빨리 일어나! 얼른 퇴각해야 한단 말야!
...SOP2, 그만 놔줘.
아무 반응도 없자, SOP2는 지휘관을 등에 들쳐 업었다.
가자! 내가 지휘관 업을 테니까 둘이서 길을 열어 줘!
지휘관은 잠들었을 뿐일 거야! 며칠을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잠들어버린 거라고!
안전한 곳에 도착할 쯤이면 깨어날 거야!
......
SOP2... 지휘관님을, 내려놔...
싫어어어!! 마지막까지 함께한다고 약속했단 말야아아!!
...지휘관님은 이미 마지막까지 우리와 버텨주셨어.
......
지휘관의 손이 SOP2의 어깨에서 힘없이 흘러내렸다. 소리 없는 진실에, SOP2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여태까지 힘든 싸움 다 견뎌냈으면서 이번 한 번을 못 버텨?! 난 못 믿어! 안 믿어!!
......
RO635에겐 이제 따질 기운도 없었다. 그저 목놓아 우는 SOP2의 머리를 품으로 감싸 줄 뿐이었다.
AR-15는 최대한 부드럽게 지휘관을 SOP2의 등에서 떼어내, 바닥에 눕혔다.
우리... 이제 어떡해...? M4도 죽고, 지휘관도 죽었어...
그리폰은 다 압수당해서 우리밖에 안 남았는데...
M4가 죽기 전에, 우리한테 지휘관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는데...
나도... 모르겠어.
......
아직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는 있을 거야.
RO635가 파우치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펼쳐 보였다.
그게 뭐야...?
G&K 내부 암호화 코드, 그것도 3형... 최고 기밀이야.
지휘관이 남긴 거야?
아니... 누가 보낸 건진 몰라.
뭐랄까... 난데없이 지휘관님의 몸에서... 생겨났어.
그게 무슨...?
지휘관님의 출혈이 여전히 심각한데 지혈용 붕대가 바닥나서 대신 쓰려고 내 옷을 찢었는데...
옷조각을 소독하려고 잠깐 눈을 돌렸다 다시 보니 지휘관님의 손에 이 편지가 놓여 있었어.
겨우 몇 초 사이에 누가 너에게 들키지도 않고 이 방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맞아, 말도 안 되지. 우리가 이 지휘실에 보안 조치를 얼마나 깔아 뒀는데.
지휘관은 누군지 알까...?
응. 아마도, 그 사람의 얼굴까지 직접 보셨다고 생각해.
엄청 반기는 듯한 미소를 지으셨으니까...
...그렇다는 건, 적어도 아군이란 뜻이네.
그리고 편지를 내게 맡기시고, 지휘관님은...
......
셋은 해독한 편지 내용을 수 차례 읽어보고, 동시에 시선이 서명으로 휘갈겨진 이름 "레이나드 개즈"에 멈춰 눈을 깜빡였다.
발신인 "레이나드 개즈"는, 한 우주에 다른 세계선이 존재한다 주장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른 세계선에도 그리폰, 지휘관, 그리고 우리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누군가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세계선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만약 우리가 여태까지 옳은 판단을 해 왔다면, M16도 M4도, 지휘관도 살았을 거란 말인가...
그게 정말 가능해?!
우리의 세계는 이미 결말이 정해졌어. 하지만, 다른 세계라면...
이 "레이나드 개즈"란 사람의 말이 사실일 경우에 말이지.
..."레이나드 개즈"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스타피쉬를 통해서 "타로 천국"이란 공간으로 들어가야 해.
그리고 거기서 펼쳐지는 잔혹한 배틀로얄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우승자가 되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나서, "그녀"가 우리를 이끌고 과거와 미래를 바꾸어 바라는 결말로 인도해 줄 것이다...
난... 해볼래. M16이랑 M4랑 지휘관을 다시 보고 싶어.
정말 할 거야? 이 사람의 정체도 모르고, 스타피쉬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도 아는 것 하나 없는데?
어쩌면 스타피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의문투성이긴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콰아앙! 저 멀리 폭발은 끊어지질 않았다, 적은 이 구역 전체를 평지로 만들 심산이었다.
여기서 가만히 죽기를 기다리거나, 이거에 걸어보는 거야.
......
지휘관이라면... 분명 했을 거야.
...그랬겠지.
셋의 시선이 편안히 잠든 지휘관의 얼굴에 모였다.
지휘관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휘해 주고 계셔. 그러니까...
우리도, 절대 포기해선 안 돼!
...15... AR-15!
빨리 일어나!!
가녀린 몸뚱이가 격하게 흔들렸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눈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을 만큼 뻔했다.
...그렇게 세게 흔들어서, 날 박살낼 셈이야?
당장에라도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팔로 무거운 몸을 지탱해, AR-15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꿈이 아님을 인지했다.
수수께끼의 인물과 카드 조각이, 다시 AR팀을 그녀의 곁으로 보내 준 것이었다.
천만다행이야.
어디 불편한 곳은 있어, AR-15?
너희 기다리는 동안 잠깐 눈 좀 붙였을 뿐이야.
AR-15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숲속은 여전히 조용했다.
안심해, 엘리사의 신호는 근처에 없어.
녀석을 찾아내야 해.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녀석이 M16을 봤다고 했어!
응.
정말로 희망이 있었네, 그치?
...그렇게 말하기엔 아직 너무 일러.
아이 참, AR-15는 왜 그렇게 옹고집이야?
이쯤 되면 레이나드 개즈를 믿을 만하잖아!
편지의 내용이 거의 다 그대로 실현됐다고! 분명히 은둔 신선인가 뭔가일 거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안 믿어.
...가자.
전체 대사 보기 (128줄)
......
M4! 나와!
저는 루니샤예요, 당신이 찾는 M4A1은 여기 없어요.
...
너,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죄악이 없는, 어둠이 없는, 폭력과 살육이 없는,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
저의 정원처럼, 모두가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자라는 식물들처럼, 저마다 생기 넘치는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도록.
지금 네가 하는 짓은 그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이용당할 뿐이야!
누가 너한테 그러면 소망을 이룰 수 있다 알려줬는지 모르겠지만, 그놈은 널 속이고 있어!
......
왜 네가 여기로 오게 됐는지 떠올려 봐, 네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들어온 건지 떠올려 보라고.
만약 너라면... 네가 나와 융합한다면...
정말 괜찮겠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미래는 끝없는 가능성으로 가득해요.
어둠 속에 감춰진 과거가 그녀를 찔렀다.
...그럼, 당신이 여기에 온 목적은 뭔가요? 왜 계속 저에게 집착하고, 놓아주지 않죠?
네가 바로 내가 여기 온 이유 그 자체니까.
......
네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기억해?
네가 M4A1 맞지?
내 이름은 M16A1. 너랑 같은 전술 인형이야.
만나서 반가워. 아마 앞으로 네 지휘를 받게 될 것 같은데.
AR팀은 네가 떠난 뒤론 RO가 돌아와 대장으로서의 책임을 짊어졌지.
하지만 너도 알겠지만, 우리 모두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
아쉽지만 이제 작별의 시간이야, M4A1.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청산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네.
슬퍼해도 좋고, 화내도 좋아. 나를 기억해 줘도 좋고, 잊어버려도 좋아...
이 기억이 네 힘이 될 수 있기를, 네가 더 굳세질 수 있기를...
난 이미 AR-15와 M16을 잃었어!
너마저 잃게 될 바에야, 차라리 너랑 함께 싸우다 죽을 거야!
이건 우리가 공장에서 출고될 때부터 받은 명령이고, 난 이걸 끝까지 지키겠어!
AR-15는 제가 당신을 구하길 바라고 있어요. M16도, SOP2도, 그리고 지휘관님도 제가 당신을 구하길 바라고 있다고요!
M4 씨...
저에게 저 스스로의 의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제게 맡긴 희망이 있어요.
당신이 절 믿지 못하겠다면 절 믿고 있는 당신의 동료들을 믿어 주세요.
자요. 제 손을 잡고, 같이 돌아가요...
어둠에 형상이 생겼다.
무겁고 걸쭉한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의 중심이 그녀의 가슴을 천천히, 그러면서도 격하게 짓눌렀다.
비현실적으로 부드러운 두 손이 그녀의 뺨을 받쳤다.
루니샤 아가씨. 지금 엄청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신데, 어떤 목소리가 시끄럽게 굴고 있나요?
지금 목소리, 누구야?
...전 괜찮아요.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네. 그저, 제가 곁에 있으니 두려워 마시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분부만 하시면 제가 어떤 장애물이라도 전부 청소해 드리겠습니다.
......
마티니 헨리는 고개를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또 속삭였다.
부인과 도련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계세요.
M4! 놈의 말을 믿으면 안 돼!
부인께서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요리와 간식을 준비하셨고, 도련님도 아가씨와 함께 TV를 보길 기다리고 계세요.
<size=50>내 말 들어, M4!!</size>
아가씨, 자신을 그만 괴롭히세요. 이런 타인의 괴로운 기억에 빠져서 아가씨께 무슨 의미가 있나요?
현실 세계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할까요?
마티니 헨리는 "루니샤"의 귀를 막아 M16A1의 외침을 차단했다.
그만... 그만..!
그런 괴로운 남의 이야기, 그냥 지나가라고 해요. 그들의 이야기는 이미 정해졌잖아요?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랍니다.
마티니 헨리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요, 아가씨.
...네.
<size=50>M4!!!</size>
그녀의 뒤로, M16A1의 외침은 끝없는 어둠에 파묻혀 버렸다.
......
등의 욱신거림에 AR-15는 간신히 몽롱함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휘감긴 덩굴, 기이한 화초, 허공에 떠 있는 시계와 평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괴기하게 비틀린 채 맴돌아, 가까스로 정원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RO...! SOP2...!
소리 낮춰 외쳐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고통을 참으며, AR-15는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세 토막 난 타로 카드의 조각 중 하나.
조각의 중앙에는 목이 긴 술잔과, 그 잔에 담겨진 햇빛 같은 연황색의 술이 그려져 있었다.
제발 쓸모 있어라...
AR-15는 카드 조각을 양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합장했다.
그러자 유리잔처럼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마인드맵을 어느 특수한 채널로 인도했다.
<color=#00CCFF>...RO? SOP2?</color>
<color=#00CCFF>너희 지금 어디야? 응답해!</color>
몇 번 더 외쳐봤다.
하지만 이 채널에서도 응답은 없었다.
<color=#00CCFF>내 목소리 안 들려?!</color>
기다렸다.
심호흡을 하면서 1분 1초가 흘렀다.
눈앞의 수풀 사이로 나뭇가지가 비틀리며 회전해, 혼돈스러운 공허를 자아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쿠웅!
SOP2와 AR-15가 폭발의 충격으로 임시 지휘실의 문짝에 부딪혀 바닥을 굴렀다.
틈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자욱한 먼지가 공중에 흩날렸다 내려앉는 것을 비췄다.
밖은 더 이상 못 버텨! 이제 퇴각해야 해!
지휘관은 상태 어때? 내가 업을 테니까 빨리 가자!
......
RO635는 고개를 들지 않고, 무릎에 눕힌 지휘관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제복이 피로 시꺼멓게 물든 지휘관은, 더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표정이 아니라 편안하게 꿈나라에 빠진 것 같았다.
...지휘관님은, 떠나셨어.
......
무슨 소리야... 지휘관이 떠날 리 없잖아?
지휘관은 우릴 절대 두고 가지 않는다 했는데...!
SOP2가 지휘관을 붙들고 흔들었다.
지휘관! 지휘관!
빨리 일어나! 얼른 퇴각해야 한단 말야!
...SOP2, 그만 놔줘.
아무 반응도 없자, SOP2는 지휘관을 등에 들쳐 업었다.
가자! 내가 지휘관 업을 테니까 둘이서 길을 열어 줘!
지휘관은 잠들었을 뿐일 거야! 며칠을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잠들어버린 거라고!
안전한 곳에 도착할 쯤이면 깨어날 거야!
......
SOP2... 지휘관님을, 내려놔...
싫어어어!! 마지막까지 함께한다고 약속했단 말야아아!!
...지휘관님은 이미 마지막까지 우리와 버텨주셨어.
......
지휘관의 손이 SOP2의 어깨에서 힘없이 흘러내렸다. 소리 없는 진실에, SOP2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size=50>거짓말!! 거짓말이야!!!</size>
여태까지 힘든 싸움 다 견뎌냈으면서 이번 한 번을 못 버텨?! 난 못 믿어! 안 믿어!!
......
RO635에겐 이제 따질 기운도 없었다. 그저 목놓아 우는 SOP2의 머리를 품으로 감싸 줄 뿐이었다.
AR-15는 최대한 부드럽게 지휘관을 SOP2의 등에서 떼어내, 바닥에 눕혔다.
우리... 이제 어떡해...? M4도 죽고, 지휘관도 죽었어...
그리폰은 다 압수당해서 우리밖에 안 남았는데...
M4가 죽기 전에, 우리한테 지휘관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는데...
나도... 모르겠어.
......
아직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는 있을 거야.
RO635가 파우치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펼쳐 보였다.
그게 뭐야...?
G&K 내부 암호화 코드, 그것도 3형... 최고 기밀이야.
지휘관이 남긴 거야?
아니... 누가 보낸 건진 몰라.
뭐랄까... 난데없이 지휘관님의 몸에서... 생겨났어.
그게 무슨...?
지휘관님의 출혈이 여전히 심각한데 지혈용 붕대가 바닥나서 대신 쓰려고 내 옷을 찢었는데...
옷조각을 소독하려고 잠깐 눈을 돌렸다 다시 보니 지휘관님의 손에 이 편지가 놓여 있었어.
겨우 몇 초 사이에 누가 너에게 들키지도 않고 이 방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맞아, 말도 안 되지. 우리가 이 지휘실에 보안 조치를 얼마나 깔아 뒀는데.
지휘관은 누군지 알까...?
응. 아마도, 그 사람의 얼굴까지 직접 보셨다고 생각해.
엄청 반기는 듯한 미소를 지으셨으니까...
...그렇다는 건, 적어도 아군이란 뜻이네.
그리고 편지를 내게 맡기시고, 지휘관님은...
......
셋은 해독한 편지 내용을 수 차례 읽어보고, 동시에 시선이 서명으로 휘갈겨진 이름 "레이나드 개즈"에 멈춰 눈을 깜빡였다.
발신인 "레이나드 개즈"는, 한 우주에 다른 세계선이 존재한다 주장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른 세계선에도 그리폰, 지휘관, 그리고 우리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누군가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세계선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만약 우리가 여태까지 옳은 판단을 해 왔다면, M16도 M4도, 지휘관도 살았을 거란 말인가...
그게 정말 가능해?!
우리의 세계는 이미 결말이 정해졌어. 하지만, 다른 세계라면...
이 "레이나드 개즈"란 사람의 말이 사실일 경우에 말이지.
..."레이나드 개즈"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스타피쉬를 통해서 "타로 천국"이란 공간으로 들어가야 해.
그리고 거기서 펼쳐지는 잔혹한 배틀로얄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우승자가 되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나서, "그녀"가 우리를 이끌고 과거와 미래를 바꾸어 바라는 결말로 인도해 줄 것이다...
난... 해볼래. M16이랑 M4랑 지휘관을 다시 보고 싶어.
정말 할 거야? 이 사람의 정체도 모르고, 스타피쉬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도 아는 것 하나 없는데?
어쩌면 스타피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의문투성이긴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콰아앙! 저 멀리 폭발은 끊어지질 않았다, 적은 이 구역 전체를 평지로 만들 심산이었다.
여기서 가만히 죽기를 기다리거나, 이거에 걸어보는 거야.
......
지휘관이라면... 분명 했을 거야.
...그랬겠지.
셋의 시선이 편안히 잠든 지휘관의 얼굴에 모였다.
지휘관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휘해 주고 계셔. 그러니까...
우리도, 절대 포기해선 안 돼!
...15... AR-15!
빨리 일어나!!
가녀린 몸뚱이가 격하게 흔들렸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눈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을 만큼 뻔했다.
...그렇게 세게 흔들어서, 날 박살낼 셈이야?
당장에라도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팔로 무거운 몸을 지탱해, AR-15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꿈이 아님을 인지했다.
수수께끼의 인물과 카드 조각이, 다시 AR팀을 그녀의 곁으로 보내 준 것이었다.
천만다행이야.
어디 불편한 곳은 있어, AR-15?
너희 기다리는 동안 잠깐 눈 좀 붙였을 뿐이야.
AR-15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숲속은 여전히 조용했다.
안심해, 엘리사의 신호는 근처에 없어.
녀석을 찾아내야 해.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녀석이 M16을 봤다고 했어!
응.
정말로 희망이 있었네, 그치?
...그렇게 말하기엔 아직 너무 일러.
아이 참, AR-15는 왜 그렇게 옹고집이야?
이쯤 되면 레이나드 개즈를 믿을 만하잖아!
편지의 내용이 거의 다 그대로 실현됐다고! 분명히 은둔 신선인가 뭔가일 거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안 믿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