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전하
EP.15.3 · 영전하

그림자가 둘인 자

제 이름은 엠블라 페트로프스카야예요.

-70-A-4

1 / 209
전체 대사 보기 (185줄)

프랑크푸르트시 프랑크푸르트구, 오페라 극장.

역사 유적지 숭배자들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폐허 위에 다시 세워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은 일종의 신성모독이었다.

외부의 바로크 스타일 페가수스상도 여신상도 전부 그대로지만, 인테리어의 설계가 무너지기 전과 완전히 딴판이 되어 "더럽혀져" 버렸으니까.

그나마 원래와 비슷한 곳은 로비 홀이 유일하고, 중앙 극장은 전면 확장 설계되어 수용 가능한 관객수를 대폭 늘렸을 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자 최신 미디어 설비도 도입했다.

이 때문에 화려했던 로열 계단은 보존될 수 없었고, 관객들은 중앙 극장의 돔 천장 아래에 복원된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에서나 3차 대전 이전의 극장의 빛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공연 시간이 아니기에 샹들리에 아래의 어두컴컴한 관객석 앞자리에는 감독과 스태프 몇 명이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우스트 역

내 마음에는 두 영혼이 살고 있어,

그 둘은 서로 갈라지고 싶어한다.

한 영혼은 격한 사랑의 욕구에 잠겨,

달라붙는 기관들로 세상에 매달리는데,

다른 영혼은 흙먼지에서 억지로 벗어나,

드높은 조상들의 영역으로 올라가려 하지.

메피스토 역

작은 바보 세계인 인간이 흔히 자신을 세계라 여긴다면,

나는 처음엔 전체였다가 지금은 부분이 된 것의 일부라오.

빛을 낳은 어둠의 한 부분이라는 거죠.

오만한 빛은 오래된 등급인 공간을 놓고 낳아 준 어머니 밤과 경쟁을 벌이지만, 성공하진 못하오.

빛이 아무리 많은 것을 추구한다 한들, 물체에 달라붙어 있으니 말이오.

파우스트 역

이제야 자네의 고귀한 임무를 알겠네...

오페라 감독

스톱!

메피스토, 파우스트 쪽으로 두 걸음만 더 가까이. 응, OK 그렇게!

오페라 감독

표정 신경씁시다, 메피스토 등장하는 씬이니까.

오페라 감독

파우스트, 처음 자리로 돌아가서 한 번만 더!

간만의 리부트 버전이니까 디테일을 최대한 살려야지!

그때, 감독의 허리춤에서 통신기가 급히 울렸다.

오페라 감독

무슨 일이야?

코디네이터

<color=#00CCFF>감독님 큰일났어요! 지금 우리 공연복이랑 소품 가져오는 차인데, 고속도로에 갇혔어요!</color>

오페라 감독

뭐어? 어떻게 된 거야?

코디네이터

<color=#00CCFF>몰라요, 17시부터 도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에 경찰이 쫙 깔렸어요!</color>

<color=#00CCFF>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그냥 차마다 금지 물품 없는지 뒤져보고 있대요...</color>

코디네이터

<color=#00CCFF>지금 우리 앞으로 차가 적어도 1천 대는 줄 서 있어요!</color>

오페라 감독

아니 뭘 찾으려고... 우리 물건 중에 걸리는 건 없지?

코디네이터

<color=#00CCFF>그게... 있어요.</color>

오페라 감독

엉?

코디네이터

<color=#00CCFF>토치랑 방풍 초 전부 소방법에 걸리는 물건이에요...</color>

오페라 감독

......쓰읍.

아이 씨, 왜 하필 이런 날에...

돈 좀 먹이는 걸로 어떻게 안 돼?

코디네이터

<color=#00CCFF>여기서 바로요? 단속반 너무 많아서 안 돼요.</color>

오페라 감독

머리 좀 굴려봐, 만만해 보이는 경찰한테 잘 싸바싸바해서 어떻게 좀 봐줄 수 없는지 물어보라고. 내 쪽에서도 따로 알아볼 테니까.

코디네이터

<color=#00CCFF>네, 어떻게 해볼게요.</color>

오페라 감독

어이 부감독! 잠깐 와서 현장 지켜봐!

감독은 손짓으로 리허설을 계속 진행시키고, 헐레벌떡 극장 밖으로 나갔다.

무대의 다소 어두운 구석에서, 연기자들은 공연복을 입은 채로 수다를 떨었다.

"국왕"은 약간 시린 손을 비비며 옆의 "메피스토"에게 눈짓했다.

국왕 역

우리 여주인공, 급하게 데려왔다며?

메피스토 역

루스틴 씨는 원래부터 이 극단 배우였어. 평소엔 연습 때마다 무빙 확인을 도와줬으니까, 헬레네 2호라 쳐도 돼.

국왕 역

그래? 그런데 원래 배역은 브라메드 씨였다며?

메피스토 역

어떻게 직업 정신이 정말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홍보지에 그 사람은 안 써서 천만다행이야.

베를린에 간 뒤로 소식이 완전히 끊어져서는... 높으신 분들 연회에 자주 나간다던데, 이번에 봉 하나 제대로 잡은 걸지도.

국왕 역

하긴, 어지간히 섹시해야지.

파우스트 역

야 이, 신사답지 않은 말은 좀 삼가지? 다른 분들한테 실례잖아.

메피스토 역

너도 그 사람한테 들이댄 적 있다며?

파우스트 역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차였지.

아리따운 아가씨는 나처럼 보잘것 없는 배우는 눈에도 안 들어온단――

헬레네 역

무슨 얘기 하세요?

메피스토 역

흐억!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음? 루스틴 씨, 저 문 앞의 꽃들은 뭐예요?

헬레네 역

초록색 코트를 입은 모르는 아가씨가 가져온 건데요, 꼭 "메피스토" 씨한테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갖고 올까요?

메피스토 역

허허... 아뇨, 그냥 냅둬요. 제 팬인가 보죠 뭐.

파우스트 역

그래서, 오늘 리허설은 계속 하는 건가요?

헬레네 역

지금 감독님이랑 코디네이터님이 공연복이랑 소품 문제로 논의 중이에요, 운송하는 차가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겼다나 봐요.

파우스트 역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기다려요?

헬레네 역

제 생각엔 금방 해결될 것 같아요, 지금 감독님이 여기저기 연락하고 있으니까.

메피스토 역

해결 못하면 공연 완전 망하는데...

헬레네 역

......

올해 핼러윈도 제대로 지낼 수나 있을까요...

공연 부감독

<size=50>이봐요들! 수다 그만하고 준비해요! 리허설 다시 갑니다!</size>

배우들

<size=50>네!</size>

극장 바깥의 카페.

초겨울에 들어선 프랑크푸르트의 마인강가.

노을이 퍼뜨리는 황금빛 광휘가, 모든 어둠과 회색을 한 겹의 포근함으로 덮어씌웠다.

손 안의 이 커피 한 잔마저도, 창밖의 노을에 물들어 조금 낭만적인 색을 띠었다.

초록색 코트를 입은 여성은 오페라 전단지를 만지작거리며 한가하게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남성이 여성의 맞은편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작업 거는 남자

이번에 「파우스트」 공연을 보러 여기 오는 사람이 참 많죠?

괜한 참견일수도 있겠지만, 사전 지식 없이 그냥 본다면 푯값을 못할 거예요.

???

그런가요?

전 그냥 이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서요.

남자의 시선이 여성의 손에 들린 전단지로 향했다.

거기에 볼드체로 쓰인 글씨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악마가 당신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면, 영혼을 팔겠습니까?"

작업 거는 남자

아가씨처럼 아리따운 분은 헬레네를 더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불후의 신령이 내게 애매모호한 명예와 운명을 정하였네."

???

운명이 어떻게 애매모호할 수 있나요? 신령이 반드시 불후일까요?

작업 거는 남자

추구와 욕망, 진실과 거짓.

「파우스트」의 주제는 심오하고 또 매력적이죠.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조용히 담화를 나눌 곳으로... 어떨까요?

???

「파우스트」를 위해서요?

작업 거는 남자

아름다운 헬레네를 위해서도요.

???

유감스럽게도, 이토록 오래 사랑받아 온 오페라에서 제가 맡을 만한 배역은 절대 헬레네가 아닐 거예요.

작업 거는 남자

그럼 그레트헨이겠습니까?

충분히 좋긴 하지만, 당신의 매력에 비하면 아깝기 그지없을 텐데요.

???

프랑크푸르트의 남자들은 모두 당신처럼 달변가인가요?

작업 거는 남자

마인강이 언제나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길 바랄 뿐이죠.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이름이라...

엠블라

엠블라. 엠블라 페트로프스카야.

파울

엠블라...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저는 파울입니다.

보름 뒤 밤 19시 반에 시작하는 「파우스트」 예매표가 있습니다만, 함께 관람하러 가길 권해도 될까요?

엠블라

왜 보름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행복이란 단단히 쥐고 있지 않으면 앗 하는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데.

파울

그건 프랑크푸르트의 외곽 타우누스에서 독일 최대의 핼러윈 파티가 열리기 때문이랍니다. 그날은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옥수수밭 미로 행사에도 참여하죠.

와인을 좋아하신다면 저와 함께 "도살장" 행사도 체험해 보시겠어요? 현지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는 와인이 자루에 담겨져 나오거든요.

조각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라면 호박 조각도 어울릴 것 같군요.

엠블라

Am Tag vor Allerheiligen, als der Teufel wieder einmal auf der Suche nach neuen Seelen war, begann auch diese Geschichte.

이야기는 만성절 전날 밤, 악마가 새로운 영혼을 찾아다닐 때 시작되었지.

파울

In der Kneipe traf er auf Jack Oldfield den irischen Hufschmied und Trunkenbold, um ihn seiner Seele zu entreißen.

악마는 어느 작은 술집에서 대장장이이자 주정뱅이인 아일랜드인 잭 올드필드를 만나, 그의 영혼을 거두어 가려 했네.

엠블라

Dieser bot dem Teufel seine Seele im Austausch für einen letzten Drink.

잭 올드필드는 악마가 대신 술값을 내어 준다면 영혼을 주기로 했지.

파울

Um diesen zu bezahlen fehlte dem Teufel allerdings das Geld.

하지만 악마는 잭을 대신해 술값을 내 줄 돈이 없었다네.

엠블라

Da der Teufel kein Geld dabei hatte, verwandelte er sich selbst in eine Münze.

자신에게 돈이 없으니, 악마는 스스로 동전으로 변했다네.

파울

Doch statt damit zu bezahlen, legte Jack die Münze zusammen mit einem Silberkreuz in seinen Geldbeutel.

그런데 잭은 그 동전으로 술값을 내지 않고, 은십자와 함께 돈주머니에 넣어버렸지.

Der Teufel war gefangen und konnte sich nicht mehr zurückverwandeln.

붙잡힌 악마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지.

엠블라

In einem Handel schlug er dem Teufel vor ihn freizulassen, wenn er Jack zehn Jahre nicht mehr belästigt.

잭은 악마에게 거래를 제안했네, 10년 동안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풀어 주겠다고.

파울

Der Handel wurde vollbracht.

그렇게 거래는 성사되었네.

엠블라

잭 오 랜턴의 이야기는 참 재밌다니까요.

당신과의 대화도 정말 즐거웠어요. 하지만 이만 가봐야겠네요.

파울

그렇군요... 엠블라 씨, 그럼 아주 잠시만 더 있어 주시겠습니까?

파올이란 이름의 남자는 종종걸음으로 카운터로 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떼 한 잔을 주문해 와 엠블라에게 건넸다.

파울

제가 사는 겁니다. 태양이 지고 난 뒤의 프랑크푸르트의 겨울밤에, 한 줌의 온기가 되기를.

엠블라

감사합니다, 친절하신 분. 안녕히 계세요.

엠블라는 싱긋 웃고서 카페를 나섰다.

파울은 그 마지막 눈길의 여운에 푹 빠져, 한참을 멍하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엠블라는 프랑크푸르트의 길거리에 들어섰다. 인간만의 발소리가 신기하고 흥분됐다.

살짝 불어온 바람에 쌀쌀함이 느껴졌다.

온도 감지 모듈이 아닌, 피부가 떨리는 느낌.

그녀는 이제 추위와 더위를 모르는 인형이 아니었다.

엠블라는 숙소로 돌아가기를 서두르지 않고, 한가로이 길거리를 산책했다.

이런 적은 이전에도 무수히 많았지만, 지금 이토록 자유롭고도 자유롭지 않은 적은 없었다.

눈치 없는 통신이 고요함을 부숴 버렸다.

몰리도

<color=#00CCFF>판도라 씨, 임무는 완수했나요?</color>

엠블라

<color=#00CCFF>살짝 귀띔 드리자면, 지금의 저는 "엠블라 페트로프스카야"라 불러 주시는 편이 더 좋아요.</color>

몰리도

<color=#00CCFF>...그래요, 엠블라 씨.</color>

<color=#00CCFF>인간임을 즐기는 중에 흥을 깨진 않을게요.</color>

엠블라

당신은 악마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다 하면, 영혼을 팔겠어요?

엠블라가 다시 손 안의 전단지를 보았다. 강가의 바람에, 종이는 펄럭펄럭 나부꼈다.

몰리도

<color=#00CCFF>글쎄요, 유감스럽게도 저에겐 영혼이 없어서.</color>

엠블라

어휴, 패러데우스에서 당신과는 말이 잘 통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몰리도

<color=#00CCFF>그 질문에 대답하기보단 그 질문을 던지는 쪽이 되고 싶네요.</color>

<color=#00CCFF>역할을 고른다면 저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좋거든요.</color>

엠블라

...그건 참 아쉽네요.

몰리도

<color=#00CCFF>장소를 고르셨나 봐요?</color>

엠블라

여기보다 나은 곳은 없으니까요.

여기보다 좋은 자리는 없어요.

몰리도

<color=#00CCFF>1880년에 세워진 그 오페라 극장 말인가요?</color>

<color=#00CCFF>세 번 폐허가 되고, 세 번 다시 세워진 곳...</color>

<color=#00CCFF>확실히, 좋은 곳이네요.</color>

엠블라

프랑크푸르트 자체가 전쟁의 폐허 위에 다시 세워진 도시죠.

아름다워요, 가슴 아플 정도로.

몰리도

<color=#00CCFF>어머, 인간의 감수성까지 계승한 건가요?</color>

<color=#00CCFF>그건 인간의 글러먹은 구석 중 하난데.</color>

엠블라

답답한 네메아란이나 일부러 당신 성질 건드리는 브라메드보단 저와 얘기하는 편이 더 재밌지 않나요?

몰리도

<color=#00CCFF>전혀요, 당신을 감시하는 것도 엄연히 일인걸요.</color>

엠블라

하지만 당신은 근처에 없잖아요.

몰리도

<color=#00CCFF>어라? 제가 근처에 없다는 건 어떻게 아나요?</color>

엠블라

저도 당신만큼 예리하답니다, 몰리도 씨.

몰리도

<color=#00CCFF>후훗... 제 착각이려나요?</color>

<color=#00CCFF>지금의 당신은, 예전만큼 온순하지가 않네요.</color>

엠블라

안젤리아와 섞인 까닭이겠죠.

신소련의 피가 순수하지 못한 성분을 더한 거예요.

통신 너머의 비꼬는 듯한 실소에, 엠블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엠블라

다른 좋은 소식 있나요?

몰리도

<color=#00CCFF>축하해요, 예상대로 리벨리온이 시내로 들어왔어요.</color>

<color=#00CCFF>오늘, 집중 단속이 시작되기 전에 말이죠.</color>

<color=#00CCFF>조금만 늦었으면 당신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을 텐데, 다행이네요.</color>

엠블라

아뇨, 몰리도 씨.

리벨리온을 절대 얕보면 안 돼요. 그레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세요.

당신은 AK-12가 얼마나 행동력 있는 인형인지 몰라요.

마음만 먹으면, 맨몸으로 마인강을 헤엄쳐서라도 당신 앞에 나타날 인형이에요.

몰리도

<color=#00CCFF>그럼 미리 한 번 더 축하할게요.</color>

<color=#00CCFF>소원을 반드시 이루길 바라요, 엠블라 씨.</color>

엠블라

그럼요, 저는 악마와 거래한 여자니까요. 목표를 달성하기 전엔 절대 쉽게 쓰러지지 않아요.

프랑크푸르트시 비스바텐구, 슈타지 본부.

칙칙하고, 네모반듯한 모서리에, 꼭대기엔 슈타지의 기치가 걸린 건물.

본부는 저 깃발과 정문의 팻말이 없었다면 21세기 초 흔히 볼 수 있었던 사무소 건물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J

형씨, 혹시나 시계가 망가졌나 해서 말해 주겠는데——

J

<size=50>지금 오후 19시야! 나 여기서 벌써 4시간째 기다리는 중이라고!</size>

보안 요원

죄송합니다, 관련자 서명 인증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사무 구역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저희 동료가 아직 다른 업무를 처리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J

형씨 인간 맞아? 왜 그 말만 반복해?

보안 요원

죄송합니다, 관련자 서명 인증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사무 구역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저희 동료가 아직 다른 업무를 처리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J

...그럼 형씨, 그 일 언제 끝나는지 말해 줄 수는 있어?

기다리는 동안 딴 데 좀 갔다 오게. 시간 맞춰서 돌아올 테니까.

보안 요원

귀하는 이미 약속 시간에 늦으셨으니, 다음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여기서 담당자가 귀하를 호출하길 기다리는 편이 최선입니다.

J

————

J는 문 밖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지금 본부 건물 밖에는 그와 문을 지키는 보안 요원 둘뿐이었다.

건물 안은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서, J는 내친 김에 눈을 감고 건물 내부의 동향을 살피려 했다.

그런데 그때, 보안 요원 뒤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정장 차림의 남성이 걸어나왔다.

그 다소 낯익은 얼굴을 본 순간 J는 부리나케 어디론가 숨으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파인 호프만

아니 이게 누구야, J 요원님 아니십니까?

본부의 모두가 이름을 알고 그 업적이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전해진 전설의 요원!

그런 전설적인 분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여기까지 행차하셨는지요?

J

저기요... 제가 여기 관두고 딴 일자리 알아보고 싶다 하면 어떻게 됩니까?

파인 호프만

국가반역죄로 나라에서 평생 묵으실 단칸방을 제공해 드리겠지요.

J

아 쫌 못 본 척해 줄 순 없어요?!

파인 호프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자뻑 요원"이란 별명이 국가안전국 전체에 널리 퍼졌거든요.

행정군수부부터 26부, 정보 센터, 의료 센터에까지 말이죠.

각 부서의 신입 교육 과정으로도 항상 그 일화를 전승해서 잊혀지지 않도록 할 정도랍니다.

그 존안을 다시 본 이상, 시선을 떼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부탁이네요.

J

아아악 그때는 정말 실례했습니다 제가 다시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그런 케케 묵은 일은 제발 좀 다시 꺼내지 말아 주시겠어요?!

파인 호프만

아무렴, 그때뿐이었나요?

최근에 누가 저를 이렇게 뒷담화한다던데, 뭐랬더라...

아아, "꽃병 옆의 꽃병"?

J

...슈바벤 그 XX 입을 믿은 내가 바보지.

둘의 대화가 한창 달아올랐을 때, 보안 요원 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J가 기다리던 그 여자였다.

Q

어라, 호프만 씨도 계셨네? 웬일로 오늘은 칼퇴래요?

파인 호프만

오늘은 그렇게 됐습니다, 정시 퇴근이어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오늘도 야근이었으면 이렇게 당신의 제자분도 못 마주쳤겠잖습니까.

J

아익 그냥 신입 시절 멘토였을 뿐이지 저 여자한테 배운 거 하나도 없거든요!?

Q

J 요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준 거 벌써 잊었어?

J

...이따구로 놀려먹으려고 프랑크푸르트까지 부른 겁니까?

자신이 장장 4시간 넘게 기다린 사람이건만, J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Q

에이 그럴 리가, 널 여기로 보낸 건 K의 뜻이야.

걔가 전에 맡았던 일을 너한테 인계했거든?

얼른 따라와.

호프만 씨, 먼저 갈게요.

파인 호프만

수고하십시오, 퇴근길에 전설의 요원도 보다니 오늘 밤은 정말 즐거운 밤이 되겠어요.

Q를 따라 정문으로 들어가려던 J는 결국 못 참고 고개를 돌려 호프만에게 눈을 부라렸다.

천천히 하강하는 엘레베이터는 심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메아리도 점점 중후해져 갔다.

치이이——

문 위의 8개의 밸브가 실처럼 가느다란 안개를 뿜어 모두를 감쌌다.

엘레베이터 안에 단둘만 남게 되자, 이중삼중의 보안 검사를 통과하며 온몸 구석구석 헤집힌 J가 마침내 푸념을 터뜨렸다.

J

소독약에 뼛속까지 절여지겠네, 지금 이 자리서 죽으면 100년 넘게 안 썩어서 박물관에 전시되겠어!

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대체 뭐하는 곳이길래 이렇게 빡세게 보안 검사를 해요?

Q

긴장 풀어, 정화 분무는 무해하니까.

혹시 피부 갈라질까 걱정되면 다음 관문에 스킨 로션 비치돼 있으니까 발라.

J는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봤다.

J

벌써 65초나 지났는데, 얼마나 더 내려가요?

Q

거의 다 왔어.

이윽고 엘레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서서히 열려 그 너머를 드러냈다.

조명이 흐릿한, 약 3m 높이의 넓은 편은 아닌 복도였다.

위로는 매끄러운 아치형 천장에, 측면에는 각기 다른 굵기의 파이프 네 가닥이 붙어있고, 아래로는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네 줄의 손잡이로 갈라진 양방향 자동보도가 있었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Q가 출발점의 콘솔에 홍채와 권한 카드를 들이대자, 콘솔 위의 초록색 램프가 켜졌다.

Q

여긴 올 때마다 공장의 통조림이 된 거 같다니까.

뭐해? 얼른 와.

J가 올라서자 자동보도가 작동해,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벽에는 10m마다 붕괴 방사능 탐지기가 부착되어 있었고, 전부 수치가 0을 가리켰다.

J

여기... 지나치게 깨끗한데요.

Q

미사일 한 발 터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방사능 오염을 지우려면 10년 단위로 작업해야 하니까.

정부에서 GDP의 1.9%를 오염 정화에 할당해도 그린존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고작인 건 알지?

모든 붕괴 오염을 차단하려면, 차라리 지하에 도시를 새로 건설하는 수밖에 없어.

그러던 와중 벨트가 멈추더니 전방에 금속 관문이 또 나타났다.

Q는 다가가서, 이번엔 홍채와 손금, 성문, 권한 카드까지 4중의 신분 인증을 거쳤다.

Q

너도 등록해.

J가 다가서자, 좌측의 공 모양 스캐너가 한 바퀴 구르더니 스크린에 그의 기본 정보가 출력됐다.

J는 오른손을 내밀어 인증 구역을 눌렀다.

그러자 삐 소리가 나고 스크린에 팝업창이 띄워져 통과되었음을 알렸다.

J

삼엄하네...

Q

"귀찮네"겠지.

근데 어쩔 수 없어, 까다로운 매뉴얼은 수많은 이들의 피로 쓰여진 거라고.

삐삐...

문이 열렸다.

천장에서 부드럽고 밝은 광선이 쏟아져 내리는, 매우 넓은 전당.

이 공간을 떠받치는 굵고 높다란 기둥들은 외벽이 하나의 거대한 전광판이어서, 마치 프랑크푸르트라는 심장의 동맥을 흐르는 혈액처럼 끊임없이 데이터가 화면에 흘렀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원은 고작 몇 명. J는 그들 모두 목에 정부 요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 걸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들은 기둥 밑의 콘솔에서 어떤 작업을 하며 수시로 곁의 동료와 소리 낮춰 대화했고, 주변 벽에 난 여러 개의 차단문이 때때로 열리며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홀 끄트머리의 거대한 투명 유리벽 너머는 흐르는 물로 반짝였다.

이렇게나 거대한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은 마치 거목 밑의 풀 두 포기마냥 보잘것 없어 보였다.

J

여긴...?

Q

인류 문명의 불씨의 피난소, "화이트존"에 온 걸 환영해.

이제부터 네가 맡을 일은 바로 우리가 여기에 보관한 기밀을 지키는 거야.

프랑크푸르트시 프랑크푸르트구의 대철교.

이 철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써 200년 가까이 존재해, 이 도시에 흉터를 새긴 전쟁을 전부 지켜봤다.

엠블라는 철교의 난간에 기대어, 조용히 마인강의 물결을 감상했다.

엠블라

......

손에서 흘러내린 전단지는 찰랑이는 강물로 떨어져 물결을 타고 멀리 떠내려갔다.

엠블라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을 내면의 자기 안에서 누리겠네.

내 정신으로 가장 높은 것과 가장 깊은 것을 붙잡고, 온 인류의 쾌감도 아픔도 내 가슴에 쌓아올리고,

그렇게 나의 "자기"가, 인류의 "자기"로 확장되어야지.

그리고 종국에는, 그들처럼 나도 부서지리라...

슈욱!

바람소리에 뒤섞여, 무언가가 대기를 뚫고 날아왔다.

그것은 한 발의 탄환. 바람을 가르고, 밤을 가르고, 강물의 소리를 갈라, 그녀에게 날아왔다.

엠블라는 몸을 기울여 아슬아슬하게 이를 피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철교 남쪽 방향을 바라봤다.

철교 위로 천천히 움직이는 차량의 행렬 너머 녹지에서, 시뻘건 눈동자가 번득였다.

엠블라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AK-15,

왜 바로 머리를 노리지 않았나요?

밤의 장막을 뚫고, 태산처럼 거대한 형체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엠블라는 몸을 돌려, 서로에게 더없이 익숙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엠블라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당신이라 정말 기뻐요~

타앙!!

총구의 화염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