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영혼
그녀를 기다린 것은 또하나의 음모뿐이었다.
...패러데우스 임시 기지.
푸슉.
칼을 니토의 시체에서 뽑아내고, AK-15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는 남아있는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격전이 지나간 뒤, 엉망이 된 방은 조용해졌다.
AK-15는 비수를 쥐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가 돌입해와서 적을 모조리 청소할 때까지 고위 니토를 하나도 마주치지 못했다.
......
AK-15는 비수를 칼집에 꽂고, 총을 들고서 더 깊은 곳으로 계속 움직였다.
고요한 기지 내부는 어디서 매복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부터 패러데우스 기지였다기보다는 기존 건물을 임시 개조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퍼엉!
AK-15는 문을 박차고 열어 빠르게 방 안으로 돌입한 뒤 좌우를 경계했다.
......
여기가 마지막 방인 듯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는 적 대신 피투성이 인간 시체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AK-15는 총구를 내리고 쪼그려 앉아 한바탕 수색을 펼쳤다.
......
사망한 지 한 시간도 넘지 않았다.
패러데우스가 자기 기지 안에서 학살을 벌인 건가?
무슨 이유로?
AK-15가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하던 사이에 문 밖에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AK-15는 신속하게 시야가 탁 트인 위치로 이동해 바깥 상황을 살피려 했다.
용의자들은 들어라! 너희는 이미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칫.
AK-15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버려진 기지, 잔뜩 나뒹굴고 있는 니토와 인간 시체들, 거기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전술인형...
......
창밖에 경광등이 번쩍였다. 경찰은 보디캠을 켜고 헤드셋을 잡은 채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AK-15는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현장에 도착했다. 그래, 회색 건물...
문 여는 사람은 없다... 인형도 안 보이고... 정말 인형이 인간을 습격한 사건이라 확신하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경관님, 현장에 생명체 반응 감지되지 않습니다! 아니, 신원 미상의 인형 신호를 하나 포착했습니다!
모든 출구를 봉쇄해!
경찰과 경찰 인형들은 각자 총을 뽑아 빠르게 건물을 포위했다.
......!
건물 밖에서 경찰 인형이 진압 방패를 들고 다가왔다.
쿠웅! 이어서 도어 브리칭 소리가 들렸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신분이 노출되어선 안 된다, AK-12는 그렇게 당부했다.
늑대의 눈으로 AK-15는 빠르게 포위망의 빈틈을 찾아냈고, 어둠에 모습을 감춰 탈출할 수 있었다.
...최신 뉴스를 보도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발생한 EN440-13M 미래호 열차 사고의 주요 원인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독일의 관련 운영회사에 제3자 검증을 요구하며, 하루빨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답변을 내놓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병원을 찾은 위문단으로부터 유가족 인터뷰를 전해드립니다.——
휴가로 베를린에 가던 중이었어요. 원래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는데...
그 회사 영업사원이 공항 문앞에서 애들 아빠 길을 막고 전단지를 쑤셔넣었어요.
남편에 애들까지 다 행방불명되고... 지금 제 속이 어떨지 상상이 되세요?
시체라도 찾겠다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요!
처음에 분명 표값에 보험료도 포함돼 있다고 했거든요. 근데 지금 계속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떠넘기고 있어요.
독일에서 사람이 실종됐는데, 사건 발생 위치가 독일이 아니라는 얘기만 계속 하는 거예요!
저 보고 증거를 대라는데,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댑니까? 정부에서 뭐 도와주기라도 한대요?
......
뉴스 보도 화면이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초췌한 두 얼굴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오늘까지 대책 낼 수 있겠어?
이미 입장 발표 골든 아워인 48시간이 지나버렸는데요.
말도 마, 나도 뉴스에 뜨고 나서야 알았다고.
시간 다 지나고 나서야 자료가 오는데 뭐 방법이 있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놨어?
...입 닫고 있는 건 불가능하겠죠, 국제적 사건이니까.
사과는 당연히 하는 건데, 책임 소재가 문젭니다.
이건 우리 회사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위에서 아직 아무 지시도 안 내렸잖아.
어찌됐든 우리가 책임을 피할 순 없어.
하지만 장사를 접을 순 없으니 노선 자체는 계속 운영해야 해. 이번 사건을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우리 내년 경쟁 입찰에 영향을 줄 거라고.
사고 피해자에겐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책임에는 완곡하게 선을 긋는 게 어떨까요? 습격한 보르 브 쟈코네는 소련 놈들이잖아요.
앞으로 우리는 승객 신원을 더 엄격하게 검사할 것이며, 신소련 당국이 더 정확한 국민 인증 시스템을 공유하여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길 요청한다...
...배상 초안은 대충 이렇게, 어떻습니까?
스윽, 종이 한 장이 매니저 앞으로 디밀어졌다.
10월 20일 새벽에 발생한 EN440-13M 미래호 폭발 사고에 관하여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회사는 사후 조치와 배상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구조 및 대피 과정에서 자의로 현장을 벗어나신 승객님께서도 후유증 발생 시 저희에게 연락드리면 상응한 의료비를 부담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야, 이건 안 돼. 무슨 만성 질환에 걸려놓고 오염지대 공기를 마신 탓이라 우길 수도 있잖아. 리스크가 너무 커.
그럼 배상 얘기는 꺼내지 말고, 그냥 우리 권한 상 우리나라 영토 밖의 노선까지 책임질 순 없다고 할까요?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치른 안전 검사 결과는 이상 없었다고 강조하고.
안 되지! 우리가 무능하다 인정하는 꼴이잖아!
다른 국제 노선에 영향이 갈 거라고.
그럼 전부 불가항력이었다고 하면...?
돈 좀 깨지고 말 걸 굳이 굳이 그렇게 모가지가 날아가고 싶니?
아 그럼 어떻게 써요!?
가만 있어봐... 내가 고민해 볼게.
우리 하청 준 것 중에 소련 회사한테 준 거 있어?
있습니다. 열차칸 유리랑 핸들요.
옳거니, 그럼 방호 유리 문제라고 하자. 사고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 유리에 품질 문제를 발견했다고 해.
앞으로 이런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 품질검사 기준을 다시 정할 거고 깊이 사과드린다고, 그리고 대충 어중간한 보상 기준을 제시해.
알겠습니다.
홍보부 부장은 시커먼 눈두덩이를 비비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요지는, 미래호는 절대 안전하고, 양측 정부도 최선을 다했다.
문제가 발생한 건 다 소련 회사 때문이고, 우리 책임은 품질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못한 점뿐이다. 이해했어?
넵. 그럼 한번 검토를...
쿠웅!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옷을 입은 남성들이 몰려들었다.
동작 그만! 움직이지 마! 손 들어!
...당신들 누구야!?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신분증을 꺼냈다.
경찰입니다.
회사 직원들 전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자료 및 인형 기억도 전부 복사해 가겠습니다.
이게 다 뭐야?!
너네 지금 우리 사장님이 누군 줄 알고 이래!? 통일사회당에서 끗발 좀 날리는...
두 분, 수사에 협조 바랍니다. 머리 위에 손 하시고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가십시오.
들이닥친 검은 옷들은 빠르게 사무실을 완전히 통제했다.
따라 들어온 인형들은 빠르게 자료를 포장하고 스캔하여, 열차 노선 승객 자료와 감시 녹화 영상까지 전부 가져갔다.
......
검은 옷 중 한 명이, 방금 두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던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엔 열차 관련 자료가 두껍게 쌓여있었다.
그는 승객 명단을 집었다.
좌석 번호 F02-A02, 남성, 32세, 일등석, 일부 잔해 발견.
......
좌석 번호 F15-E56, 남성, 21세, 이등석, 생존 확인.
좌석 번호 F17-E57, 여성, 19세, 이등석, 일부 잔해 발견.
......
인스턴트 커피의 향기가 신경을 자극했다. 기억 속의 K는 아직 착해빠진 면상을 달고 있었다.
...K 선배.
응?
골칫거리가 하나 있는데... 앗, 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친구가 요즘 빡센 고민이 하나 있다고 해서...
그래? 한 번 말해봐.
그 친구가 최근 꿈에도 그리던 직장에 취업했는데...
그런데 걔 멘토, 아니, 걔 상사가...
그 친구 상사가 뭐?
...그 상사가 엄청 잘해준대...
같이 식당 가서 급식도 받아주고, 회의실 위치도 가르쳐주고, 자기 영수증도 걔한테 주고...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너무 잘해주는 게 문제야...
너무 잘해준다니?
걔 상사는 직장에선 잔혹하고 차가운 여자라고 소문이 났거든.
근데 이제 막 졸업한 걔한텐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이상하잖아?
심지어 달마다 한 번씩 밥도 사줘.
응, 그래서?
그 친구가 약간 걱정하는 게... 직장 내 연애할 생각은 없지만, 그 상사랑 서먹해지는 것도 싫어서...
아하... 이해했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어, K 선배?
Q가 너 좋아하는 거 같다 이거지?
아이잇!!!
K 선배! 소리 좀 줄여! Q 씨도 체면이란 게 있잖아, 그냥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다고...
확실히 이 소문이 퍼지면 그 사람 명성에 금이 가겠지.
Q 씨는 엄청 좋은 사람이니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Q한테 상처 주지 않으면서 완곡하게 거절하고 싶다?
응...
그건 간단하지. 우린 요원이야, 언제나 목숨 걸린 임무를 맡으니까 무슨 일이든 속전속결해야 해.
그러니까, 직접 마주보고 말하는 거야.
너무 돌직구 아닐까...
전혀. Q는 굳센 여자야, 널 분명 이해해줄 거고 앞으로도 너한테 잘해줄 거야.
하지만 우선은 네 생각을 솔직하게 밝혀야 해.
네가 그 호감을 어떻게 눈치챘는지부터 말이야.
음... 일리가 있네...
15분 뒤에 Q가 회의하러 여기 올 거야.
그 사람 성격상 정시보다 일찍 오겠지. 회의 기다리는 동안 확실하게 이야기해.
...응!
고마워, K 선배.
천만에.
그럼 들어갈게...
안 돼... 들어가면 안 돼...
스테에에에이!!!!
흐억!!!
J는 악몽에서 깨어나 눈을 부릅떴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프랑크푸르트, 슈타지 본부.
J 요원, 남들 일하는 앞에서 자는 것만 해도 엄청 실례인데...
어떻게 잠꼬대까지 합니까?
J는 사무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아마리스, 스털링과 브리짓, 그리고 한 구석에서 심드렁하게 커피를 마시는 Q를 바라봤다.
방금 악몽의 근원을 잘 알고 있는 J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에 놓인 자료 페이지를 건성건성 넘겼다.
「미래호 식당차 경영권 위탁 방안」... 대륙간 열차에서 도시락 파는 게 이렇게 짭짤한 장사였어?
근데 이게 패러데우스랑 무슨 상관이지?
...미안, 그건 내가 보려던 거야. 너는 밑에 있는 그거.
손 안의 서류가 바꿔치기 당했다.
이건 그 운영사의 책임자, 승무원, 바텐더 등 직원들의 서명이 들어간 진술서다.
J는 빠르게 훑어보았다.
바텐더와 승무원의 공통된 진술로, 열차에선 비정기적으로 암시장 거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자세한 거래 내용은 그들도 모른다, 그저 암시장 호스트가 통이 아주 크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숨기고 다닐 수 있었구나.
하지만 사고가 난 이 열차에선 암시장 거래가 중단됐습니다. 보르 브 쟈코네의 습격으로요.
이거 좀 의심스럽네요...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요.
신소련 민속에 대해 조금만 알면 전혀 다른 결론을 낼 거다.
신소련의 보르 브 쟈코네에게 강도질은 숨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야.
암시장 거래 정보는 이것뿐이야?
초동 조사 보고에선, 암시장 거래 정보가 모두 한 인형의 마인드맵에 저장되어 있다고 해. 그런데 당시 인형을 회수한 건 그리폰의 지휘관이었지.
그쪽에서 관련 인형 정보 제공했어?
...있다. 허나 보내 준 것 모두 일반 인형의 애매모호한 정보뿐이다.
예를 들어 이거. 매기 폰지, 직업은 바텐더.
캐서린 폰지, 직업은 부동산 중개인.
엘마 흄, 직업은 프리랜서 작가.
......
이딴 건 아예 주지를 말든가!
스털링은 그중 한 파일을 복사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전송했다.
뭐야 이게? 거래 장부랑 수익 분배 명세서?
아니, 승무원도 여기서 사르디스 골드를 30온스 받아갔네.
이건 암시장 거래 목록이다.
...「파우스트」 한 권에 20만 사르디스 골드는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나?
...너 예술품이 돈세탁계의 제왕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거는요?
「인류 지성 연구(제17판)」, 이건 왜 이렇게 비싸죠?
이것도 돈세탁인가 보지 뭐.
J는 리스트를 대충 훑고서는 툭 내던졌다. 아마리스가 그걸 다시 주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책...
줄곧 한 마디도 안 하던 Q가 갑자기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이 리스트는 남겨둬, 나머지는 제12부 정보분석 평가 센터에 맡겨.
J와 아마리스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
알았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두 인형이 문을 닫고 떠나고, Q는 J와 아마리스 맞은편에 앉았다.
아마리스, 방금 말하려던 거 계속해봐.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NGAD" 프로젝트에서 "서광"을 탄생시킨 참고 자료에 바로 이 책이 있었어.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몰라.
그때는 「인류 지성 연구(제16판)」이었던 걸로 기억해.
좋아, 아마리스, 너의 오늘 임무는 이걸로 끝이다.
응.
아마리스도 회의실에서 나갔다.
이제 왜 우리가 신소련을 도와 이 임무를 맡았는지, 그리고 왜 저 인형을 슈타지에 들였는지 알겠지?
..."서광"과 사형수, 쇼와 흄, 지휘관 쪽의 기술...
전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그런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요?
...멘토로서 몇 가지 더 전수해 주지.
Q는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자료를 전부 한 구석으로 치웠다.
1892년, 독일의 기술자였던 디젤은 밀가루 공장 분진폭발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실린더에 빨아들인 공기를 고도 압축해서 연료의 발화점보다 높은 온도를 만든 다음, 압축 공기로 연료를 실린더에 불어넣어 점화했지.
1897년 그는 압축점화식 내연 기관 개발에 성공했고, 이는 내연기관의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됐어.
...네네, 내연기관, 기차 엔진부터 이야기하게요?
압축점화식 내연기관은 전세계 중공업 업계의 주목을 받았고, 훗날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디젤 엔진이라 불리게 됐지.
......
1898년 디젤 엔진은 처음으로 고정식 발전기에 사용되었고, 1903년엔 화물선에, 1904년엔 군함에, 1913년엔 자동차에 탑재되었어...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은 내연기관 전쟁이라고도 불리지.
……
방금 과학 기술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지.
바로 이런 관계야.
1897년에 디젤이 내연기관을 개량할 때는 설마 자신의 발명이 얌전한 열차 엔진뿐만 아니라 전쟁에 사용될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겠지.
3차 대전이 끝난 지 이제야 10년 조금 넘었어. 4차 세계 대전은 무슨 전쟁일 것 같아?
......
인형 이야기군요.
나도 가끔은 윗사람들한테 아예 과학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건의하고 싶어져.
......
농담이야.
전혀 안 웃겨요.
그 이야기는 뭐하러 하는데요?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수다 떨 정도로 친했다고.
지휘관한테서 좀 떨어지라고 하는 말이야.
우리는 각자 입장이 있어.
멘토로서 멘티에게 마지막으로 충고하는 거야.
......
왜 그렇게 친절하게 충고해주는데요?
지금은 민감한 시기니까, 너의 개인 문제가 슈타지 전체 문제로 격상되는 건 원하지 않아.
내무부가 바로 그렇게 권세를 잃었어.
...로미는 그 틈에 한 자리 꿰찼고요?
경멸 어린 얼굴인 J를 보면서 Q는 그저 미소 지었다.
너는 아직 직장이 있고, 내무부의 마흔 살 먹은 보직해임자는 집에서 실업급여나 타먹게 된 이유가 바로 그거야.
......
...긴급 속보 전해드립니다.
모스크바 북부 호브리노에 위치한 호블린 병원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여 현지 소방대가 긴급 출동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화재는 병원 지하 영안실에서 시작되었으며, 안치된 시신이 다수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병원 측과 경찰이 현장을 점검하던 중, 몇 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서맨사 쇼 박사의 시신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경찰이 해당 사건을 조사 중에 있습니다.
DDR2 채널 취재 결과, 모스크바 북부 호블린 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영안실의 시신이 다수 훼손되었습니다.
또한 모스크바 경찰은 몇 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서맨사 쇼 박사의 시신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서맨사 쇼 박사는 유명한 신소련 인형 과학자로서, 100개에 달하는 특허를 보유할 정도로 인형 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모스크바 경찰은 현재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저희 채널에서도 후속 보도를 전해드리겠습니다.
......
조용한 고급 호텔 방 안에서, 텔레비전 속 뉴스만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툭.
텔레비전이 꺼지고, 리모컨이 페르시카의 손에서 떨어졌다.
말도 안 돼, 그 여자가 죽었다고?
카자크인과 슬라브인의 피를 이어받은 그 여자가? 골리앗으로 볼링도 칠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소리도 없이 모스크바 교외 병원에서 죽을 수가 있어!?
진정하십시오, 여기 커피 한 잔 하시고...
페르시카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받아 단숨에 비웠다.
가짜야, 가짜가 분명해. 진짜 쇼는 아직 어디에 갇혀있을 거야. 경찰이 저거 때문에 쇼를 찾는 걸 그만두면 어떡하지!?
헬리안, 빨리 수사팀에 메일 보내야 해!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가게 둘 순 없어!
페르시카는 컴퓨터를 켜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헬리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일단 앉으세요. 머리를 비우시고요...
사실인 것 같네, 페르시카. 경찰이 시신과 쇼의 DNA를 대조해봤네.
틀림없이 그녀일세.
......
크루거 님...
나도 전부 거짓말이라고 위로해주고 싶네.
하지만 죽음은 이미 확정된 일이야. 산 사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등에 짊어지고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네.
페르시카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돌아가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헬리안은 커피를 새로 한 잔 타서 그녀 곁에 놓았다.
...페르시카 씨, 괜찮으십니까?
...쇼랑 했던 통신 기록을 정리하는 중이야.
스르륵...
촘촘한 아카이브 기록이 페르시카의 눈앞에 펼쳐진 후, 시간과 주제에 따라 분류되었다.
페르시카는 스크롤을 가장 위로 올려서 천천히 살펴봤다——
젊은 시절 함께 주콥스키 공군 아카데미에 합격했을 때의 혈기왕성함, 1세대 자율인형 기술에서 새로운 진전을 이뤄냈을 때의 희열, 담당 연구과제의 진척이 막혔을 때 느꼈던 고뇌...
오래된 앨범을 펼친 것마냥, 한참 동안 묵혀뒀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
그녀의 시선은 M4A1을 개발 도중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쇼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의 페이지에 머물렀다.
그때 쇼는 뇌 슬라이드를 모델로 마인드맵을 개발하는 것에 굉장히 거세게 반대했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도움을 구했을 때 그녀는 선뜻 나서주었다...
페르시카의 손이 갑자기 멈칫했다.
잠깐.
뭐죠?
페르시카는 M4A1을 개발할 때 사용한 뇌 슬라이드 기록을 열고, 동시에 자신이 확보한 철혈과 니토 관련 데이터를 열었다...
...프레임워크가... 부분적으로... 동일해...
똑같아...
뭔가 발견하신 겁니까?
M4A1을 개발하기 전부터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어...
내가 AR팀을 개발한 것 자체가 음모였을지도 몰라...
페르시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이게 전부 거대한 음모라면...
그럼... 쇼는 정말로 죽었을지도 몰라.
...애도를 표합니다.
...나도 가끔 그 무시무시한 슬라브 여자가 어떻게 죽을지 상상해본 적은 있어.
페르시카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 반 컵 들이켰다.
주콥스키 공군 아카데미를 다닐 때, 나는 그래도 여자애 취급을 받았지만...
쇼는 아니었어.
둘이 사이가 좋았나요?
아니, 전혀.
걔는 날 변태 취급했어.
......
그전까진 반에서 2등이 누군지 관심 가져본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걔는 꽤나 인상 깊었지.
어째서죠?
걔는 학술적인 성취에 전혀 집착하지 않았어.
지식과 미지를 탐구하는 자라기보다는 수공예가에 더 가까웠어.
......
걔가 인형을 보는 시선은, 도끼를 보는 거랑 별 다를 바 없었을 거야.
하지만 걔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비행기였어.
페르시카는 화면에 표시된, 쇼가 비행기 앞에 선 사진을 가리켰다.
그녀는 그때만 해도 씩씩하게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난 걔가 죽는다면 군대로 돌아가서 비행기 사고로 갈 줄 알았어.
그게 걔 스타일에 더 어울리니까.
대충 혼자서 비행기를 몰고 적진 후방을 기습해서, 적기를 한 5대쯤 격추하고서 포로로 안 붙잡히려고 절벽에 부딪친다든가...
......
그런데 설마 이런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다니.
페르시카 씨, 전 이런 예감이 드는군요.
쇼 씨의 죽음은 도화선이 될 거라고.
지금 흔들리는 화약통을 터뜨릴 도화선 말이에요.
뭐어? 그 슬라브 여자는 그런 뱅뱅 돌리는 짓은 절대 안 해.
...이 세상엔 명분에 목마른 사람이 잔뜩이랍니다.
...그건 걔를 오히려 욕보이는 짓이야.
걔만큼 솔직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고.
왕재수긴 하지만 밉지는 않은 타입.
안젤리아처럼 말입니까?
응, 안젤리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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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데우스 임시 기지.
푸슉.
칼을 니토의 시체에서 뽑아내고, AK-15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는 남아있는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격전이 지나간 뒤, 엉망이 된 방은 조용해졌다.
AK-15는 비수를 쥐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가 돌입해와서 적을 모조리 청소할 때까지 고위 니토를 하나도 마주치지 못했다.
......
AK-15는 비수를 칼집에 꽂고, 총을 들고서 더 깊은 곳으로 계속 움직였다.
고요한 기지 내부는 어디서 매복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부터 패러데우스 기지였다기보다는 기존 건물을 임시 개조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퍼엉!
AK-15는 문을 박차고 열어 빠르게 방 안으로 돌입한 뒤 좌우를 경계했다.
......
여기가 마지막 방인 듯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는 적 대신 피투성이 인간 시체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AK-15는 총구를 내리고 쪼그려 앉아 한바탕 수색을 펼쳤다.
......
사망한 지 한 시간도 넘지 않았다.
패러데우스가 자기 기지 안에서 학살을 벌인 건가?
무슨 이유로?
AK-15가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하던 사이에 문 밖에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AK-15는 신속하게 시야가 탁 트인 위치로 이동해 바깥 상황을 살피려 했다.
용의자들은 들어라! 너희는 이미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칫.
AK-15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버려진 기지, 잔뜩 나뒹굴고 있는 니토와 인간 시체들, 거기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전술인형...
......
창밖에 경광등이 번쩍였다. 경찰은 보디캠을 켜고 헤드셋을 잡은 채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AK-15는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현장에 도착했다. 그래, 회색 건물...
문 여는 사람은 없다... 인형도 안 보이고... 정말 인형이 인간을 습격한 사건이라 확신하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경관님, 현장에 생명체 반응 감지되지 않습니다! 아니, 신원 미상의 인형 신호를 하나 포착했습니다!
모든 출구를 봉쇄해!
경찰과 경찰 인형들은 각자 총을 뽑아 빠르게 건물을 포위했다.
......!
건물 밖에서 경찰 인형이 진압 방패를 들고 다가왔다.
쿠웅! 이어서 도어 브리칭 소리가 들렸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신분이 노출되어선 안 된다, AK-12는 그렇게 당부했다.
늑대의 눈으로 AK-15는 빠르게 포위망의 빈틈을 찾아냈고, 어둠에 모습을 감춰 탈출할 수 있었다.
<color=#00CCFF>...최신 뉴스를 보도해 드리겠습니다.</color>
<color=#00CCFF>얼마 전 발생한 EN440-13M 미래호 열차 사고의 주요 원인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독일의 관련 운영회사에 제3자 검증을 요구하며, 하루빨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답변을 내놓을 것을 촉구했습니다.</color>
<color=#00CCFF>병원을 찾은 위문단으로부터 유가족 인터뷰를 전해드립니다.——</color>
<color=#00CCFF>휴가로 베를린에 가던 중이었어요. 원래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는데...</color>
<color=#00CCFF>그 회사 영업사원이 공항 문앞에서 애들 아빠 길을 막고 전단지를 쑤셔넣었어요.</color>
<color=#00CCFF>남편에 애들까지 다 행방불명되고... 지금 제 속이 어떨지 상상이 되세요?</color>
<color=#00CCFF>시체라도 찾겠다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요!</color>
<color=#00CCFF>처음에 분명 표값에 보험료도 포함돼 있다고 했거든요. 근데 지금 계속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떠넘기고 있어요.</color>
<color=#00CCFF>독일에서 사람이 실종됐는데, 사건 발생 위치가 독일이 아니라는 얘기만 계속 하는 거예요!</color>
<color=#00CCFF>저 보고 증거를 대라는데,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댑니까? 정부에서 뭐 도와주기라도 한대요?</color>
......
뉴스 보도 화면이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초췌한 두 얼굴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오늘까지 대책 낼 수 있겠어?
이미 입장 발표 골든 아워인 48시간이 지나버렸는데요.
말도 마, 나도 뉴스에 뜨고 나서야 알았다고.
시간 다 지나고 나서야 자료가 오는데 뭐 방법이 있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놨어?
...입 닫고 있는 건 불가능하겠죠, 국제적 사건이니까.
사과는 당연히 하는 건데, 책임 소재가 문젭니다.
이건 우리 회사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위에서 아직 아무 지시도 안 내렸잖아.
어찌됐든 우리가 책임을 피할 순 없어.
하지만 장사를 접을 순 없으니 노선 자체는 계속 운영해야 해. 이번 사건을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우리 내년 경쟁 입찰에 영향을 줄 거라고.
사고 피해자에겐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책임에는 완곡하게 선을 긋는 게 어떨까요? 습격한 보르 브 쟈코네는 소련 놈들이잖아요.
앞으로 우리는 승객 신원을 더 엄격하게 검사할 것이며, 신소련 당국이 더 정확한 국민 인증 시스템을 공유하여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길 요청한다...
...배상 초안은 대충 이렇게, 어떻습니까?
스윽, 종이 한 장이 매니저 앞으로 디밀어졌다.
10월 20일 새벽에 발생한 EN440-13M 미래호 폭발 사고에 관하여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회사는 사후 조치와 배상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구조 및 대피 과정에서 자의로 현장을 벗어나신 승객님께서도 후유증 발생 시 저희에게 연락드리면 상응한 의료비를 부담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야, 이건 안 돼. 무슨 만성 질환에 걸려놓고 오염지대 공기를 마신 탓이라 우길 수도 있잖아. 리스크가 너무 커.
그럼 배상 얘기는 꺼내지 말고, 그냥 우리 권한 상 우리나라 영토 밖의 노선까지 책임질 순 없다고 할까요?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치른 안전 검사 결과는 이상 없었다고 강조하고.
안 되지! 우리가 무능하다 인정하는 꼴이잖아!
다른 국제 노선에 영향이 갈 거라고.
그럼 전부 불가항력이었다고 하면...?
돈 좀 깨지고 말 걸 굳이 굳이 그렇게 모가지가 날아가고 싶니?
아 그럼 어떻게 써요!?
가만 있어봐... 내가 고민해 볼게.
우리 하청 준 것 중에 소련 회사한테 준 거 있어?
있습니다. 열차칸 유리랑 핸들요.
옳거니, 그럼 방호 유리 문제라고 하자. 사고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 유리에 품질 문제를 발견했다고 해.
앞으로 이런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 품질검사 기준을 다시 정할 거고 깊이 사과드린다고, 그리고 대충 어중간한 보상 기준을 제시해.
알겠습니다.
홍보부 부장은 시커먼 눈두덩이를 비비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요지는, 미래호는 절대 안전하고, 양측 정부도 최선을 다했다.
문제가 발생한 건 다 소련 회사 때문이고, 우리 책임은 품질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못한 점뿐이다. 이해했어?
넵. 그럼 한번 검토를...
쿠웅!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옷을 입은 남성들이 몰려들었다.
동작 그만! 움직이지 마! 손 들어!
...당신들 누구야!?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신분증을 꺼냈다.
경찰입니다.
회사 직원들 전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자료 및 인형 기억도 전부 복사해 가겠습니다.
이게 다 뭐야?!
너네 지금 우리 사장님이 누군 줄 알고 이래!? 통일사회당에서 끗발 좀 날리는...
두 분, 수사에 협조 바랍니다. 머리 위에 손 하시고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가십시오.
들이닥친 검은 옷들은 빠르게 사무실을 완전히 통제했다.
따라 들어온 인형들은 빠르게 자료를 포장하고 스캔하여, 열차 노선 승객 자료와 감시 녹화 영상까지 전부 가져갔다.
......
검은 옷 중 한 명이, 방금 두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던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엔 열차 관련 자료가 두껍게 쌓여있었다.
그는 승객 명단을 집었다.
좌석 번호 F02-A02, 남성, 32세, 일등석, 일부 잔해 발견.
......
좌석 번호 F15-E56, 남성, 21세, 이등석, 생존 확인.
좌석 번호 F17-E57, 여성, 19세, 이등석, 일부 잔해 발견.
......
인스턴트 커피의 향기가 신경을 자극했다. 기억 속의 K는 아직 착해빠진 면상을 달고 있었다.
...K 선배.
응?
골칫거리가 하나 있는데... 앗, 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친구가 요즘 빡센 고민이 하나 있다고 해서...
그래? 한 번 말해봐.
그 친구가 최근 꿈에도 그리던 직장에 취업했는데...
그런데 걔 멘토, 아니, 걔 상사가...
그 친구 상사가 뭐?
...그 상사가 엄청 잘해준대...
같이 식당 가서 급식도 받아주고, 회의실 위치도 가르쳐주고, 자기 영수증도 걔한테 주고...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너무 잘해주는 게 문제야...
너무 잘해준다니?
걔 상사는 직장에선 잔혹하고 차가운 여자라고 소문이 났거든.
근데 이제 막 졸업한 걔한텐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이상하잖아?
심지어 달마다 한 번씩 밥도 사줘.
응, 그래서?
그 친구가 약간 걱정하는 게... 직장 내 연애할 생각은 없지만, 그 상사랑 서먹해지는 것도 싫어서...
아하... 이해했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어, K 선배?
Q가 너 좋아하는 거 같다 이거지?
아이잇!!!
<size=25>K 선배! 소리 좀 줄여! Q 씨도 체면이란 게 있잖아, 그냥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다고...</size>
확실히 이 소문이 퍼지면 그 사람 명성에 금이 가겠지.
Q 씨는 엄청 좋은 사람이니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Q한테 상처 주지 않으면서 완곡하게 거절하고 싶다?
응...
그건 간단하지. 우린 요원이야, 언제나 목숨 걸린 임무를 맡으니까 무슨 일이든 속전속결해야 해.
그러니까, 직접 마주보고 말하는 거야.
너무 돌직구 아닐까...
전혀. Q는 굳센 여자야, 널 분명 이해해줄 거고 앞으로도 너한테 잘해줄 거야.
하지만 우선은 네 생각을 솔직하게 밝혀야 해.
네가 그 호감을 어떻게 눈치챘는지부터 말이야.
음... 일리가 있네...
15분 뒤에 Q가 회의하러 여기 올 거야.
그 사람 성격상 정시보다 일찍 오겠지. 회의 기다리는 동안 확실하게 이야기해.
...응!
고마워, K 선배.
천만에.
그럼 들어갈게...
<color=#FF0000>안 돼... 들어가면 안 돼...</color>
<size=50><color=#FF0000>스테에에에이!!!!</color></size>
<size=50>흐억!!!</size>
J는 악몽에서 깨어나 눈을 부릅떴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프랑크푸르트, 슈타지 본부.
J 요원, 남들 일하는 앞에서 자는 것만 해도 엄청 실례인데...
어떻게 잠꼬대까지 합니까?
J는 사무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아마리스, 스털링과 브리짓, 그리고 한 구석에서 심드렁하게 커피를 마시는 Q를 바라봤다.
방금 악몽의 근원을 잘 알고 있는 J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에 놓인 자료 페이지를 건성건성 넘겼다.
「미래호 식당차 경영권 위탁 방안」... 대륙간 열차에서 도시락 파는 게 이렇게 짭짤한 장사였어?
근데 이게 패러데우스랑 무슨 상관이지?
...미안, 그건 내가 보려던 거야. 너는 밑에 있는 그거.
손 안의 서류가 바꿔치기 당했다.
이건 그 운영사의 책임자, 승무원, 바텐더 등 직원들의 서명이 들어간 진술서다.
J는 빠르게 훑어보았다.
바텐더와 승무원의 공통된 진술로, 열차에선 비정기적으로 암시장 거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자세한 거래 내용은 그들도 모른다, 그저 암시장 호스트가 통이 아주 크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숨기고 다닐 수 있었구나.
하지만 사고가 난 이 열차에선 암시장 거래가 중단됐습니다. 보르 브 쟈코네의 습격으로요.
이거 좀 의심스럽네요...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요.
신소련 민속에 대해 조금만 알면 전혀 다른 결론을 낼 거다.
신소련의 보르 브 쟈코네에게 강도질은 숨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야.
암시장 거래 정보는 이것뿐이야?
초동 조사 보고에선, 암시장 거래 정보가 모두 한 인형의 마인드맵에 저장되어 있다고 해. 그런데 당시 인형을 회수한 건 그리폰의 지휘관이었지.
그쪽에서 관련 인형 정보 제공했어?
...있다. 허나 보내 준 것 모두 일반 인형의 애매모호한 정보뿐이다.
예를 들어 이거. 매기 폰지, 직업은 바텐더.
캐서린 폰지, 직업은 부동산 중개인.
엘마 흄, 직업은 프리랜서 작가.
......
이딴 건 아예 주지를 말든가!
스털링은 그중 한 파일을 복사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전송했다.
뭐야 이게? 거래 장부랑 수익 분배 명세서?
아니, 승무원도 여기서 사르디스 골드를 30온스 받아갔네.
이건 암시장 거래 목록이다.
...「파우스트」 한 권에 20만 사르디스 골드는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나?
...너 예술품이 돈세탁계의 제왕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거는요?
「인류 지성 연구(제17판)」, 이건 왜 이렇게 비싸죠?
이것도 돈세탁인가 보지 뭐.
J는 리스트를 대충 훑고서는 툭 내던졌다. 아마리스가 그걸 다시 주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책...
줄곧 한 마디도 안 하던 Q가 갑자기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이 리스트는 남겨둬, 나머지는 제12부 정보분석 평가 센터에 맡겨.
J와 아마리스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
알았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두 인형이 문을 닫고 떠나고, Q는 J와 아마리스 맞은편에 앉았다.
아마리스, 방금 말하려던 거 계속해봐.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NGAD" 프로젝트에서 "서광"을 탄생시킨 참고 자료에 바로 이 책이 있었어.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몰라.
그때는 「인류 지성 연구(제16판)」이었던 걸로 기억해.
좋아, 아마리스, 너의 오늘 임무는 이걸로 끝이다.
응.
아마리스도 회의실에서 나갔다.
이제 왜 우리가 신소련을 도와 이 임무를 맡았는지, 그리고 왜 저 인형을 슈타지에 들였는지 알겠지?
..."서광"과 사형수, 쇼와 흄, 지휘관 쪽의 기술...
전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그런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요?
...멘토로서 몇 가지 더 전수해 주지.
Q는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자료를 전부 한 구석으로 치웠다.
1892년, 독일의 기술자였던 디젤은 밀가루 공장 분진폭발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실린더에 빨아들인 공기를 고도 압축해서 연료의 발화점보다 높은 온도를 만든 다음, 압축 공기로 연료를 실린더에 불어넣어 점화했지.
1897년 그는 압축점화식 내연 기관 개발에 성공했고, 이는 내연기관의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됐어.
...네네, 내연기관, 기차 엔진부터 이야기하게요?
압축점화식 내연기관은 전세계 중공업 업계의 주목을 받았고, 훗날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디젤 엔진이라 불리게 됐지.
......
1898년 디젤 엔진은 처음으로 고정식 발전기에 사용되었고, 1903년엔 화물선에, 1904년엔 군함에, 1913년엔 자동차에 탑재되었어...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은 내연기관 전쟁이라고도 불리지.
……
방금 과학 기술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지.
바로 이런 관계야.
1897년에 디젤이 내연기관을 개량할 때는 설마 자신의 발명이 얌전한 열차 엔진뿐만 아니라 전쟁에 사용될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겠지.
3차 대전이 끝난 지 이제야 10년 조금 넘었어. 4차 세계 대전은 무슨 전쟁일 것 같아?
......
인형 이야기군요.
나도 가끔은 윗사람들한테 아예 과학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건의하고 싶어져.
......
농담이야.
전혀 안 웃겨요.
그 이야기는 뭐하러 하는데요?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수다 떨 정도로 친했다고.
지휘관한테서 좀 떨어지라고 하는 말이야.
우리는 각자 입장이 있어.
멘토로서 멘티에게 마지막으로 충고하는 거야.
......
왜 그렇게 친절하게 충고해주는데요?
지금은 민감한 시기니까, 너의 개인 문제가 슈타지 전체 문제로 격상되는 건 원하지 않아.
내무부가 바로 그렇게 권세를 잃었어.
...로미는 그 틈에 한 자리 꿰찼고요?
경멸 어린 얼굴인 J를 보면서 Q는 그저 미소 지었다.
너는 아직 직장이 있고, 내무부의 마흔 살 먹은 보직해임자는 집에서 실업급여나 타먹게 된 이유가 바로 그거야.
......
<color=#00CCFF>...긴급 속보 전해드립니다.</color>
<color=#00CCFF>모스크바 북부 호브리노에 위치한 호블린 병원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여 현지 소방대가 긴급 출동하였습니다.</color>
<color=#00CCFF>조사 결과 화재는 병원 지하 영안실에서 시작되었으며, 안치된 시신이 다수 훼손되었다고 합니다.</color>
<color=#00CCFF>또한 병원 측과 경찰이 현장을 점검하던 중, 몇 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서맨사 쇼 박사의 시신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color>
<color=#00CCFF>현재 경찰이 해당 사건을 조사 중에 있습니다.</color>
<color=#00CCFF>DDR2 채널 취재 결과, 모스크바 북부 호블린 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영안실의 시신이 다수 훼손되었습니다.</color>
<color=#00CCFF>또한 모스크바 경찰은 몇 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서맨사 쇼 박사의 시신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color>
<color=#00CCFF>서맨사 쇼 박사는 유명한 신소련 인형 과학자로서, 100개에 달하는 특허를 보유할 정도로 인형 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color>
<color=#00CCFF>모스크바 경찰은 현재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저희 채널에서도 후속 보도를 전해드리겠습니다.</color>
......
조용한 고급 호텔 방 안에서, 텔레비전 속 뉴스만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툭.
텔레비전이 꺼지고, 리모컨이 페르시카의 손에서 떨어졌다.
말도 안 돼, 그 여자가 죽었다고?
카자크인과 슬라브인의 피를 이어받은 그 여자가? 골리앗으로 볼링도 칠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소리도 없이 모스크바 교외 병원에서 죽을 수가 있어!?
진정하십시오, 여기 커피 한 잔 하시고...
페르시카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받아 단숨에 비웠다.
가짜야, 가짜가 분명해. 진짜 쇼는 아직 어디에 갇혀있을 거야. 경찰이 저거 때문에 쇼를 찾는 걸 그만두면 어떡하지!?
헬리안, 빨리 수사팀에 메일 보내야 해!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가게 둘 순 없어!
페르시카는 컴퓨터를 켜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헬리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일단 앉으세요. 머리를 비우시고요...
사실인 것 같네, 페르시카. 경찰이 시신과 쇼의 DNA를 대조해봤네.
틀림없이 그녀일세.
......
크루거 님...
나도 전부 거짓말이라고 위로해주고 싶네.
하지만 죽음은 이미 확정된 일이야. 산 사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등에 짊어지고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네.
페르시카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돌아가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헬리안은 커피를 새로 한 잔 타서 그녀 곁에 놓았다.
...페르시카 씨, 괜찮으십니까?
...쇼랑 했던 통신 기록을 정리하는 중이야.
스르륵...
촘촘한 아카이브 기록이 페르시카의 눈앞에 펼쳐진 후, 시간과 주제에 따라 분류되었다.
페르시카는 스크롤을 가장 위로 올려서 천천히 살펴봤다——
젊은 시절 함께 주콥스키 공군 아카데미에 합격했을 때의 혈기왕성함, 1세대 자율인형 기술에서 새로운 진전을 이뤄냈을 때의 희열, 담당 연구과제의 진척이 막혔을 때 느꼈던 고뇌...
오래된 앨범을 펼친 것마냥, 한참 동안 묵혀뒀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
그녀의 시선은 M4A1을 개발 도중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쇼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의 페이지에 머물렀다.
그때 쇼는 뇌 슬라이드를 모델로 마인드맵을 개발하는 것에 굉장히 거세게 반대했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도움을 구했을 때 그녀는 선뜻 나서주었다...
페르시카의 손이 갑자기 멈칫했다.
잠깐.
뭐죠?
페르시카는 M4A1을 개발할 때 사용한 뇌 슬라이드 기록을 열고, 동시에 자신이 확보한 철혈과 니토 관련 데이터를 열었다...
...프레임워크가... 부분적으로... 동일해...
똑같아...
뭔가 발견하신 겁니까?
M4A1을 개발하기 전부터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어...
내가 AR팀을 개발한 것 자체가 음모였을지도 몰라...
페르시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이게 전부 거대한 음모라면...
그럼... 쇼는 정말로 죽었을지도 몰라.
...애도를 표합니다.
...나도 가끔 그 무시무시한 슬라브 여자가 어떻게 죽을지 상상해본 적은 있어.
페르시카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 반 컵 들이켰다.
주콥스키 공군 아카데미를 다닐 때, 나는 그래도 여자애 취급을 받았지만...
쇼는 아니었어.
둘이 사이가 좋았나요?
아니, 전혀.
걔는 날 변태 취급했어.
......
그전까진 반에서 2등이 누군지 관심 가져본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걔는 꽤나 인상 깊었지.
어째서죠?
걔는 학술적인 성취에 전혀 집착하지 않았어.
지식과 미지를 탐구하는 자라기보다는 수공예가에 더 가까웠어.
......
걔가 인형을 보는 시선은, 도끼를 보는 거랑 별 다를 바 없었을 거야.
하지만 걔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비행기였어.
페르시카는 화면에 표시된, 쇼가 비행기 앞에 선 사진을 가리켰다.
그녀는 그때만 해도 씩씩하게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난 걔가 죽는다면 군대로 돌아가서 비행기 사고로 갈 줄 알았어.
그게 걔 스타일에 더 어울리니까.
대충 혼자서 비행기를 몰고 적진 후방을 기습해서, 적기를 한 5대쯤 격추하고서 포로로 안 붙잡히려고 절벽에 부딪친다든가...
......
그런데 설마 이런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다니.
페르시카 씨, 전 이런 예감이 드는군요.
쇼 씨의 죽음은 도화선이 될 거라고.
지금 흔들리는 화약통을 터뜨릴 도화선 말이에요.
뭐어? 그 슬라브 여자는 그런 뱅뱅 돌리는 짓은 절대 안 해.
...이 세상엔 명분에 목마른 사람이 잔뜩이랍니다.
...그건 걔를 오히려 욕보이는 짓이야.
걔만큼 솔직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고.
왕재수긴 하지만 밉지는 않은 타입.
안젤리아처럼 말입니까?
응, 안젤리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