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공놀이
갑자기 피어난 약간의 경건함에 사로잡혀 촛불에 불을 붙였다.
프랑크푸르트, 슈타지 본부 회의실.
J는 창가에 서서 저 멀리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봤다. 가슴 속 초조함이 그의 말투에 묻어나왔다.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그들이 우릴 막고 그 인형을 못 데려가게 해서...
상황은 이해했다. Q를 보내서 처리하지.
...네.
통신을 끊고 J는 자신이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 회의감에 빠졌다.
이럴 줄 알았어. 애초에 프랑크푸르트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난 요원이다. 에베르스발데의 고등학교를 과 3등으로 졸업해서, 실전 테스트와 심리 평가를 30번이나 친 끝에 겨우 여기 들어온 요원.
그런데 지금은 사무실에 앉아서 정치질이나 하고 있다니...
이런 사무 업무가 싫어서 이 직장을 고른 건데.
차라리 섀도리스 일이 더 재밌어 보일 지경이야...
집에 가면 통장 잔고나 확인해야겠다...
지금 펀드 수익률이 몇 퍼센트더라...
아니면 K한테 돈 좀 빌려서 튈까...
똑똑.
누군가 회의실 문을 노크하고 바로 문을 열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누구일지는 뻔했으니.
이제야 왔슴까.
어디 한번 들어보자,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어?
...이번엔 진짜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때론 아무것도 안 한 게 잘못이 되기도 하지.
...지금 시비 거는 겁니까?
무슨 사고인지나 말해.
미리 알려주는데, 이번에 보스 정말 빡친 모양이야.
......
브리짓이 자료를 화이트존 자료실에 보관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수속을 다 밟고, 규정 시간에 화이트존 입구에 도착했어요. 물론 일반 직원용 문으로.
여기까진 문제 없네.
그런데 경비단 사람이 마인드맵 코어를 가진 인형은 못 들어간다면서 브리짓을 가로막았어요.
그래서?
그래서 브리짓은 그들하고 말다툼을 벌였어요.
근데 그러던 중에 경비단이 걔 눈앞에서 의료 인형을 하나 들여보낸 거예요, 검문도 인증 수속도 안 거치고 말이죠.
...기록 있어?
네, 브리짓의 마인드맵을 확인하면 됩니다.
그리고 저도 상황을 듣고 달려갔는데, 도착했을 때 경보가 울렸습니다.
...네가 울렸어?
아뇨!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저랑 브리짓은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어요.
잠깐만.
경보가 울린 곳이 설마...
...우리 슈타지 기밀 자료실이요.
......
Q는 넥타이를 살짝 풀어 급상승한 혈압을 약간 내렸다.
뭘 털렸는데?
...서맨사 쇼의 프로필을 조회당했어요.
다른 이상은 아직까지 못 찾았습니다.
......
Q는 탁자를 짚고 천천히 앉았다. 그녀는 움켜쥔 주먹을 서서히 풀면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J가 먼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까지 그렇게 앉아있을 셈은 아니죠?
......
뭣하면 제가 짐싸고 나가는 거죠 뭐.
......
...설마 프로필 하나 털렸다고 감방에 처넣을 건 아니잖아요?
......
...뭐라고 말 좀 해줄래요?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긴장된다고요.
Q는 어쩔 줄을 모르는 J를 보고 무심코 어느 기억을 떠올려 입꼬리가 올라갔다.
걱정 마, 이 회의실은 다른 방에 이어져 있지도 않고,
뭐 어디 부서장들 열몇 명이 옆방에서 회의하고 있거나 하지도 않으니까.
아이 씨¥#%@¥#... @... 그 일은 다신 꺼내지 말자고 했잖아요!
네, 그땐 제가 좀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도 그만큼 저도 망신당했잖아요?!
그때 청산한 걸로 모자라서 지금 또 꺼내서 따지게요?
그렇게 고까우면 그냥 로미한테 저 제명시키라 하든가요! 고향 내려가서 슈바인스학세 장사나 하지 뭐!
야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난 그냥 멘토로서 우리 귀여운 학생에게 강의 한 번 더 해주려고 이러는 거니까.
...저도 이제 정직원이거든요, 멘토 필요 없어요.
아이, 공짜로 가르쳐준다는데 받아 그냥.
직장에선 악재를 기회로 바꾸는 법을 알아야 해.
네? 우리 자료가 털렸는데... 그게 어떻게 기회가 돼요?
먼저 경비단 사람들. 규정을 지킨 우리 슈타지한테 갑질을 한 것도 모자라 함부로 검문 안 한 인형을 들여보냈지. 그리고 그 인형은 무려 우리 슈타지 기밀 자료실에 들어갔고.
...네.
화이트존 네트워크에 어떠한 방문 기록도 없어서, 단거리 무선 통신이라 추측돼요.
그리고, 상대가 단거리 무선 통신으로 인형을 해킹했다는 건, 우리가 맡은 네트워크 차단 시스템을 뚫지 못했다는 뜻이지. 그런데 경비단은 바로 눈앞에서 수작을 부린 적을 붙잡지도 못해서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쳤어.
...후속 수색에는 저희도 참여했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피해 목록을 작성해서 호프만 씨한테 제출할 거야. 브리짓은 2급 손상을 입었고, 수색에 참여한 요원 두 명이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호소했고, 우리는 기밀 자료를 수십 건 유출당했다고 말이야. 그중엔 최신 무기 개발 자료도 있다는 말도 덧붙이고.
......
네가 매스컴에다가 입바람 좀 넣어, 대충 슈타지는 빈틈없이 조치를 했지만 경비단의 직무 소홀로 일어난 사태라고.
정부 요원들의 개인 정보와 행적 기록이 무더기로 새어나가서 극단주의 세력이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고.
...알았어요.
슈타지 기밀 자료실의 보안은 강화했어?
네, 경비단 쪽에서 보안 장치를 증설했고, 순찰 인원을 더 배치한다고 했습니다.
걔들 보안은 빈틈투성이라 신뢰가 안 가는걸~?
압력 넣어서 우리쪽 인원이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네.
...댁한테서 뭘 배울 때마다 무지막지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말이죠.
그만큼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교육인 거지.
봐봐, 한 시간만에 슈타지의 부서장들 수십 명한테 네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
Q는 J가 성질 부리며 문을 나가는 걸 지켜본 다음, 보고할 모든 서류에 문제가 없는지를 재차 확인한 다음 뿌듯하게 기지개를 켰다.
창문을 여니, 바깥은 이미 동이 터서 아직 피곤한 햇살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동그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휴, 또 새로운 하루네.
프랑크푸르트시 프랑크푸르트구, 프랑크푸르트 대교회.
붉은 벽돌이 높은 아치형 천장을 떠받치고, 천장에는 부드러운 빛의 샹들리에가 하나만 밝혀져 있었다. 신부가 작은 목소리로 신도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AK-12는 모습을 감춘 채 맨 뒷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든 잠재적 위협을 우회, 미행자 없음.
확인, 목표 구역 양호.
수신, 모두 밖에 있지 말고 임시 세이프하우스에 돌아가.
혼자서 괜찮은가? 지금 너의 모습은 너무 눈에 띈다.
걱정 마, 일반인은 날 눈치채지 못해.
AK-12는 통신을 끊고 일어서서 떠나려 했다.
그녀가 일어선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풍파에 시달린 나그네 같았다.
...신부님, 저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신부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은 고해실로 들어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AK-12는 그 뒤를 따라 고해실 밖에 머물렀다.
시간이 급하지 않은 탓인지, 나그네의 표정에 호기심이 생긴 것인지.
저번의 고해성사는 언제였습니까?
......
이번이 제 생애 처음입니다.
나의 아이여, 무슨 일이 당신을 괴롭혔습니까?
메피스토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생명의 나무만이 항상 푸르다, 라고...
악마의 꼬드김 때문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사람이 흐르는 강물에 쓰러져서 잠기고 떠내려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만 봤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녀가 죽는 걸 지켜보면서, 구해주고 싶었지만, 참 잘 됐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와 무슨 관계입니까?
제 여동생이요. 하나뿐인 여동생입니다.
핼러윈 날에 태어났죠. 저희 어머니는 그날 그 애를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몇 년 동안 저는 그 애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면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럼 여동생에게 당신의 생각을 전부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까?
음... 누구나 저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동생이 강물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전에 그애는 제게 모든 걸 끝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결정권을 당신께 맡긴 거군요.
네... 하지만 전 포기하길 택했습니다...
악마의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
주께서 그대를 용서하시고, 그대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리니...
......
AK-12는 고해실에서 뒤돌아 떠났다. 그리고 교회 문을 나서기 전에, 구석의 촛대 앞에 멈춰섰다.
그녀는 갑자기 피어난 약간의 경건함에 사로잡혀 촛불에 불을 붙였다.
프랑크푸르트 대철교.
AK-12는 철교 난간에 기대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야경을 가만히 서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는 바로 세이프하우스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이 역겨운 소체로 프랑크푸르트 길거리를 걷다가는 자칫 시민들이 패닉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마인강에 함박눈이 내리는 경치는 누구든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감상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후우...
AK-12가 가볍게 입김을 불어 눈송이의 방향을 어지럽혔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느긋하게 눈을 감상한 건 아주 오래 전, 핼러윈 날이었던 것 같다...
훈련을 마친 AN-94는 평소처럼 자발적으로 청소 당번을 맡았다.
그럴 때면 그녀는 로비 바닥의 먼지를 한 톨 한 톨 꼼꼼하게 쓸어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AN-94.
......
귀찮은 웃는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AN-94는 최대한 무시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끈질긴 귀신처럼 떼어낼 수가 없었다.
...좋은 아침.
오늘은 즐거운 날인데 왜 아직도 일하고 있나요?
......
핼러윈, 귀신의 명절.
인간이 귀신 분장을 해서, 진짜 귀신이 더 자유롭게 현세를 거닐게 해준다고 하죠.
AN-94는 RPK-16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의 다른 두 대원을 바라봤다. 바로 저 두 명의 존재 때문에 이 방은 아무리 청소해도 깨끗해질 날이 없었다.
RPK-16는 슬금슬금 AK-12와 AK-15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AK-15의 등뒤에 멈췄다.
여러분은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모른다.
...그렇게 따분해?
네, 그러니까 제가 따분하지 않게끔 같이 "귀신잡기" 놀이 하지 않을래요?
싫어.
쇼가 여러분께 새로운 파츠를 준비했는데... 리스트는 여기 있답니다~
봐요.
AK-12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떤 놀이지?
규칙은~ 우리 네 명 중 한 사람이 귀신이에요. 귀신은 자신만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 "귀신"을 찾아내야 해요.
어떻게 찾는데?
다들 통신으로 단어를 하나 받았을 거예요. 자기 차례가 되면 그 단어를 정확하게 묘사해야 해요.
여러분은 귀신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어요.
만약 귀신이라면 끝까지 정체를 숨겨야 하고,
인간이라면 동료와 함께 귀신을 찾아내야 해요.
일행은 각자 통신을 확인했다. 확실히 단어가 하나 와 있었다.
이 단어는 어디서 난 거야? 네가 골랐어?
저도 단어가 뭔지는 몰라요, 그냥 AK-15의 마인드맵에서 랜덤으로 두 개 뽑았어요.
우리 중에서 마인드맵 용량이 가장 작잖아요.
......
그럼, 귀신잡기 놀이 시~작.
AN-94, 당신부터 하세요.
나?
음...
인간이다.
AK-15는요?
여자.
그렇게 짧으면 안 돼요.
......
엄청 센 여자.
당신 차례에요, 선배.
이 사람이 죽으면 내가 복수할 거야.
흐음...
뭔지 알 것 같아요.
RPK16이 속을 알 수 없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 차례네요...
저는 이 사람이 죽으면 제가 대신 살아갈 거예요.
......
AK-12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시스템에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아아, 모두랑 같이 즐거운 핼러윈을 보내고 싶었는데...
어휴, 할 수 없죠. 임무 출동하죠.
즉시 움직여.
리벨리온은 전투 준비를 하고 핼러윈의 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 놀이는 조용히 잊혀졌다.
......
AK-12는 흩날리는 눈송이에서 시선을 떼고 멀리 길가에 깜빡이는 등불을 바라봤다.
삐삐삐. 급한 통신음이 그녀의 사색을 끊었다.
AK-12, 여기는 AR-18. 쇼의 자료를 받았다.
그래, 아직 시 바깥이야?
그래. 허가 쪽에 약간 문제가 생겨서 지금 방법을 찾고 있다.
...바로 내일이 핼러윈이야, 계획은 예정대로 실행할 거야.
마인드맵 백업 말고도 우리가 도울 일이 있는가?
아니, 이건 리벨리온의 내부 사정이야.
스티븐스 520이 전달해준 물건은 잘 받았어.
순조롭게 풀리길 빈다.
...고마워.
AR-18,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는 흄을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누구와 논하지 않아.
왜?
...한 사람을 깊게 논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 해.
하지만 난 그 사람을 전혀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쇼는 누구보다 흄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어.
쇼는 끝까지 순수 기계 기술을 고집했고, 흄은 다른 길을 선택했지.
설계자의 입장이 인형의 입장이 되진 않아.
그 둘의 입장은 정반대였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너와 나는 한편이다.
아이러니하네.
인간은 이런 걸 운명이라 하겠지.
AK-12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꽃이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창조주의 인도를 잃고 지휘관과 연락도 끊긴 상태인데, 어때? 망설여져?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앞이 낭떠러지라면?
...죽음으로 의무를 다할 뿐.
...프랑크푸르트구, 괴테의 생가.
핼러윈의 이른 아침, 명절 분위기가 이미 퍼지기 시작했다.
평소 수수하던 가게들도 이목을 끄는 호박 머리와 박쥐 장식으로 가득했고, 길거리의 녹지에도 촘촘한 거미줄이 걸렸다.
한 카페에서, 테이블 몇 개를 채운 손님들이 최신 이슈를 두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이쿠? 유명 과학자 서맨사 쇼 사망 확인, 국가반역죄로 KGB에 처형당한 걸로 의심된다는데?
에이, 구라지 저건. 저 쇼란 사람, KGB의 에이스 요원이라고. 혼자서 슈타지를 몇 십 명 해치우고 전투기를 탈취해서 모스크바로 탈출했다고도 들었어!
와 대박, 맨손으로?
당연하지, 슬라브녀잖아!
웅성거리는 사람들 뒤로, 책가방을 메고 폴짝폴짝 길을 걷던 어린 여자아이가 손목시계를 봤다.
전시회 입장 시간까지 이제 7분밖에 안 남았다.
이러다 지각하겠어!
아이는 다급하게 땅을 박차고 괴테의 생가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바닥의 눈이 다 녹지 않아서, 미끄러운 빙판길에 여자아이는 얼마 못 가서 세게 넘어졌다.
꽈당!
으앙! 아파...
괜찮아요?
따듯한 손 한 쌍이 여자아이를 부축해줬다.
고개를 드니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고마워요, 언니.
엠블라라고 불러주세요.
엠블라 언니...
엄청 바쁜 모양인데, 어딜 그리 서둘러서 가요?
괴테의 생가 전시회를 보러 가요!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눈을 싫어하진 말고요.
어... 네...
엠블라는 웃으며 여자아이에게 손짓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오른 손바닥을 목덜미에 갖다대 맥박을 느꼈다.
들어보세요, 눈 내리는 소리가 심장 박동 같아요.
전체 대사 보기 (196줄)
프랑크푸르트, 슈타지 본부 회의실.
J는 창가에 서서 저 멀리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봤다. 가슴 속 초조함이 그의 말투에 묻어나왔다.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그들이 우릴 막고 그 인형을 못 데려가게 해서...
<color=#00CCFF>상황은 이해했다. Q를 보내서 처리하지.</color>
...네.
통신을 끊고 J는 자신이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 회의감에 빠졌다.
이럴 줄 알았어. 애초에 프랑크푸르트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난 요원이다. 에베르스발데의 고등학교를 과 3등으로 졸업해서, 실전 테스트와 심리 평가를 30번이나 친 끝에 겨우 여기 들어온 요원.
그런데 지금은 사무실에 앉아서 정치질이나 하고 있다니...
이런 사무 업무가 싫어서 이 직장을 고른 건데.
차라리 섀도리스 일이 더 재밌어 보일 지경이야...
집에 가면 통장 잔고나 확인해야겠다...
지금 펀드 수익률이 몇 퍼센트더라...
아니면 K한테 돈 좀 빌려서 튈까...
똑똑.
누군가 회의실 문을 노크하고 바로 문을 열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누구일지는 뻔했으니.
이제야 왔슴까.
어디 한번 들어보자,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어?
...이번엔 진짜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때론 아무것도 안 한 게 잘못이 되기도 하지.
...지금 시비 거는 겁니까?
무슨 사고인지나 말해.
미리 알려주는데, 이번에 보스 정말 빡친 모양이야.
......
브리짓이 자료를 화이트존 자료실에 보관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수속을 다 밟고, 규정 시간에 화이트존 입구에 도착했어요. 물론 일반 직원용 문으로.
여기까진 문제 없네.
그런데 경비단 사람이 마인드맵 코어를 가진 인형은 못 들어간다면서 브리짓을 가로막았어요.
그래서?
그래서 브리짓은 그들하고 말다툼을 벌였어요.
근데 그러던 중에 경비단이 걔 눈앞에서 의료 인형을 하나 들여보낸 거예요, 검문도 인증 수속도 안 거치고 말이죠.
...기록 있어?
네, 브리짓의 마인드맵을 확인하면 됩니다.
그리고 저도 상황을 듣고 달려갔는데, 도착했을 때 경보가 울렸습니다.
...네가 울렸어?
아뇨!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저랑 브리짓은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어요.
잠깐만.
경보가 울린 곳이 설마...
...우리 슈타지 기밀 자료실이요.
......
Q는 넥타이를 살짝 풀어 급상승한 혈압을 약간 내렸다.
뭘 털렸는데?
...서맨사 쇼의 프로필을 조회당했어요.
다른 이상은 아직까지 못 찾았습니다.
......
Q는 탁자를 짚고 천천히 앉았다. 그녀는 움켜쥔 주먹을 서서히 풀면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J가 먼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까지 그렇게 앉아있을 셈은 아니죠?
......
뭣하면 제가 짐싸고 나가는 거죠 뭐.
......
...설마 프로필 하나 털렸다고 감방에 처넣을 건 아니잖아요?
......
...뭐라고 말 좀 해줄래요?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긴장된다고요.
Q는 어쩔 줄을 모르는 J를 보고 무심코 어느 기억을 떠올려 입꼬리가 올라갔다.
걱정 마, 이 회의실은 다른 방에 이어져 있지도 않고,
뭐 어디 부서장들 열몇 명이 옆방에서 회의하고 있거나 하지도 않으니까.
아이 씨¥#%@¥#... @... 그 일은 다신 꺼내지 말자고 했잖아요!
네, 그땐 제가 좀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도 그만큼 저도 망신당했잖아요?!
그때 청산한 걸로 모자라서 지금 또 꺼내서 따지게요?
그렇게 고까우면 그냥 로미한테 저 제명시키라 하든가요! 고향 내려가서 슈바인스학세 장사나 하지 뭐!
야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난 그냥 멘토로서 우리 귀여운 학생에게 강의 한 번 더 해주려고 이러는 거니까.
...저도 이제 정직원이거든요, 멘토 필요 없어요.
아이, 공짜로 가르쳐준다는데 받아 그냥.
직장에선 악재를 기회로 바꾸는 법을 알아야 해.
네? 우리 자료가 털렸는데... 그게 어떻게 기회가 돼요?
먼저 경비단 사람들. 규정을 지킨 우리 슈타지한테 갑질을 한 것도 모자라 함부로 검문 안 한 인형을 들여보냈지. 그리고 그 인형은 무려 우리 슈타지 기밀 자료실에 들어갔고.
...네.
화이트존 네트워크에 어떠한 방문 기록도 없어서, 단거리 무선 통신이라 추측돼요.
그리고, 상대가 단거리 무선 통신으로 인형을 해킹했다는 건, 우리가 맡은 네트워크 차단 시스템을 뚫지 못했다는 뜻이지. 그런데 경비단은 바로 눈앞에서 수작을 부린 적을 붙잡지도 못해서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쳤어.
...후속 수색에는 저희도 참여했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피해 목록을 작성해서 호프만 씨한테 제출할 거야. 브리짓은 2급 손상을 입었고, 수색에 참여한 요원 두 명이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호소했고, 우리는 기밀 자료를 수십 건 유출당했다고 말이야. 그중엔 최신 무기 개발 자료도 있다는 말도 덧붙이고.
......
네가 매스컴에다가 입바람 좀 넣어, 대충 슈타지는 빈틈없이 조치를 했지만 경비단의 직무 소홀로 일어난 사태라고.
정부 요원들의 개인 정보와 행적 기록이 무더기로 새어나가서 극단주의 세력이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고.
...알았어요.
슈타지 기밀 자료실의 보안은 강화했어?
네, 경비단 쪽에서 보안 장치를 증설했고, 순찰 인원을 더 배치한다고 했습니다.
걔들 보안은 빈틈투성이라 신뢰가 안 가는걸~?
압력 넣어서 우리쪽 인원이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네.
...댁한테서 뭘 배울 때마다 무지막지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말이죠.
그만큼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교육인 거지.
봐봐, 한 시간만에 슈타지의 부서장들 수십 명한테 네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
Q는 J가 성질 부리며 문을 나가는 걸 지켜본 다음, 보고할 모든 서류에 문제가 없는지를 재차 확인한 다음 뿌듯하게 기지개를 켰다.
창문을 여니, 바깥은 이미 동이 터서 아직 피곤한 햇살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동그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휴, 또 새로운 하루네.
프랑크푸르트시 프랑크푸르트구, 프랑크푸르트 대교회.
붉은 벽돌이 높은 아치형 천장을 떠받치고, 천장에는 부드러운 빛의 샹들리에가 하나만 밝혀져 있었다. 신부가 작은 목소리로 신도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AK-12는 모습을 감춘 채 맨 뒷줄 의자에 앉아 있었다.
<color=#00CCFF>모든 잠재적 위협을 우회, 미행자 없음.</color>
<color=#00CCFF>확인, 목표 구역 양호.</color>
수신, 모두 밖에 있지 말고 임시 세이프하우스에 돌아가.
<color=#00CCFF>혼자서 괜찮은가? 지금 너의 모습은 너무 눈에 띈다.</color>
걱정 마, 일반인은 날 눈치채지 못해.
AK-12는 통신을 끊고 일어서서 떠나려 했다.
그녀가 일어선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풍파에 시달린 나그네 같았다.
...신부님, 저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신부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은 고해실로 들어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AK-12는 그 뒤를 따라 고해실 밖에 머물렀다.
시간이 급하지 않은 탓인지, 나그네의 표정에 호기심이 생긴 것인지.
저번의 고해성사는 언제였습니까?
......
이번이 제 생애 처음입니다.
나의 아이여, 무슨 일이 당신을 괴롭혔습니까?
메피스토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생명의 나무만이 항상 푸르다, 라고...
악마의 꼬드김 때문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사람이 흐르는 강물에 쓰러져서 잠기고 떠내려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만 봤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녀가 죽는 걸 지켜보면서, 구해주고 싶었지만, 참 잘 됐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와 무슨 관계입니까?
제 여동생이요. 하나뿐인 여동생입니다.
핼러윈 날에 태어났죠. 저희 어머니는 그날 그 애를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몇 년 동안 저는 그 애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면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럼 여동생에게 당신의 생각을 전부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까?
음... 누구나 저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동생이 강물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전에 그애는 제게 모든 걸 끝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결정권을 당신께 맡긴 거군요.
네... 하지만 전 포기하길 택했습니다...
악마의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
주께서 그대를 용서하시고, 그대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리니...
......
AK-12는 고해실에서 뒤돌아 떠났다. 그리고 교회 문을 나서기 전에, 구석의 촛대 앞에 멈춰섰다.
그녀는 갑자기 피어난 약간의 경건함에 사로잡혀 촛불에 불을 붙였다.
프랑크푸르트 대철교.
AK-12는 철교 난간에 기대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야경을 가만히 서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는 바로 세이프하우스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이 역겨운 소체로 프랑크푸르트 길거리를 걷다가는 자칫 시민들이 패닉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마인강에 함박눈이 내리는 경치는 누구든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감상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후우...
AK-12가 가볍게 입김을 불어 눈송이의 방향을 어지럽혔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느긋하게 눈을 감상한 건 아주 오래 전, 핼러윈 날이었던 것 같다...
훈련을 마친 AN-94는 평소처럼 자발적으로 청소 당번을 맡았다.
그럴 때면 그녀는 로비 바닥의 먼지를 한 톨 한 톨 꼼꼼하게 쓸어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AN-94.
......
귀찮은 웃는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AN-94는 최대한 무시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끈질긴 귀신처럼 떼어낼 수가 없었다.
...좋은 아침.
오늘은 즐거운 날인데 왜 아직도 일하고 있나요?
......
핼러윈, 귀신의 명절.
인간이 귀신 분장을 해서, 진짜 귀신이 더 자유롭게 현세를 거닐게 해준다고 하죠.
AN-94는 RPK-16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의 다른 두 대원을 바라봤다. 바로 저 두 명의 존재 때문에 이 방은 아무리 청소해도 깨끗해질 날이 없었다.
RPK-16는 슬금슬금 AK-12와 AK-15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AK-15의 등뒤에 멈췄다.
여러분은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모른다.
...그렇게 따분해?
네, 그러니까 제가 따분하지 않게끔 같이 "귀신잡기" 놀이 하지 않을래요?
싫어.
쇼가 여러분께 새로운 파츠를 준비했는데... 리스트는 여기 있답니다~
봐요.
AK-12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떤 놀이지?
규칙은~ 우리 네 명 중 한 사람이 귀신이에요. 귀신은 자신만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 "귀신"을 찾아내야 해요.
어떻게 찾는데?
다들 통신으로 단어를 하나 받았을 거예요. 자기 차례가 되면 그 단어를 정확하게 묘사해야 해요.
여러분은 귀신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어요.
만약 귀신이라면 끝까지 정체를 숨겨야 하고,
인간이라면 동료와 함께 귀신을 찾아내야 해요.
일행은 각자 통신을 확인했다. 확실히 단어가 하나 와 있었다.
이 단어는 어디서 난 거야? 네가 골랐어?
저도 단어가 뭔지는 몰라요, 그냥 AK-15의 마인드맵에서 랜덤으로 두 개 뽑았어요.
우리 중에서 마인드맵 용량이 가장 작잖아요.
......
그럼, 귀신잡기 놀이 시~작.
AN-94, 당신부터 하세요.
나?
음...
인간이다.
AK-15는요?
여자.
그렇게 짧으면 안 돼요.
......
엄청 센 여자.
당신 차례에요, 선배.
이 사람이 죽으면 내가 복수할 거야.
흐음...
뭔지 알 것 같아요.
RPK16이 속을 알 수 없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 차례네요...
저는 이 사람이 죽으면 제가 대신 살아갈 거예요.
......
AK-12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시스템에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아아, 모두랑 같이 즐거운 핼러윈을 보내고 싶었는데...
어휴, 할 수 없죠. 임무 출동하죠.
즉시 움직여.
리벨리온은 전투 준비를 하고 핼러윈의 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 놀이는 조용히 잊혀졌다.
......
AK-12는 흩날리는 눈송이에서 시선을 떼고 멀리 길가에 깜빡이는 등불을 바라봤다.
삐삐삐. 급한 통신음이 그녀의 사색을 끊었다.
<color=#00CCFF>AK-12, 여기는 AR-18. 쇼의 자료를 받았다.</color>
그래, 아직 시 바깥이야?
<color=#00CCFF>그래. 허가 쪽에 약간 문제가 생겨서 지금 방법을 찾고 있다.</color>
...바로 내일이 핼러윈이야, 계획은 예정대로 실행할 거야.
<color=#00CCFF>마인드맵 백업 말고도 우리가 도울 일이 있는가?</color>
아니, 이건 리벨리온의 내부 사정이야.
스티븐스 520이 전달해준 물건은 잘 받았어.
<color=#00CCFF>순조롭게 풀리길 빈다.</color>
...고마워.
AR-18,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는 흄을 어떻게 생각해?
<color=#00CCFF>...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누구와 논하지 않아.</color>
왜?
<color=#00CCFF>...한 사람을 깊게 논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 해.</color>
<color=#00CCFF>하지만 난 그 사람을 전혀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color>
쇼는 누구보다 흄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어.
쇼는 끝까지 순수 기계 기술을 고집했고, 흄은 다른 길을 선택했지.
<color=#00CCFF>설계자의 입장이 인형의 입장이 되진 않아.</color>
<color=#00CCFF>그 둘의 입장은 정반대였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너와 나는 한편이다.</color>
아이러니하네.
<color=#00CCFF>인간은 이런 걸 운명이라 하겠지.</color>
AK-12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꽃이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창조주의 인도를 잃고 지휘관과 연락도 끊긴 상태인데, 어때? 망설여져?
<color=#00CCFF>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color>
...앞이 낭떠러지라면?
<color=#00CCFF>...죽음으로 의무를 다할 뿐.</color>
...프랑크푸르트구, 괴테의 생가.
핼러윈의 이른 아침, 명절 분위기가 이미 퍼지기 시작했다.
평소 수수하던 가게들도 이목을 끄는 호박 머리와 박쥐 장식으로 가득했고, 길거리의 녹지에도 촘촘한 거미줄이 걸렸다.
한 카페에서, 테이블 몇 개를 채운 손님들이 최신 이슈를 두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이쿠? 유명 과학자 서맨사 쇼 사망 확인, 국가반역죄로 KGB에 처형당한 걸로 의심된다는데?
에이, 구라지 저건. 저 쇼란 사람, KGB의 에이스 요원이라고. 혼자서 슈타지를 몇 십 명 해치우고 전투기를 탈취해서 모스크바로 탈출했다고도 들었어!
와 대박, 맨손으로?
당연하지, 슬라브녀잖아!
웅성거리는 사람들 뒤로, 책가방을 메고 폴짝폴짝 길을 걷던 어린 여자아이가 손목시계를 봤다.
전시회 입장 시간까지 이제 7분밖에 안 남았다.
이러다 지각하겠어!
아이는 다급하게 땅을 박차고 괴테의 생가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바닥의 눈이 다 녹지 않아서, 미끄러운 빙판길에 여자아이는 얼마 못 가서 세게 넘어졌다.
꽈당!
으앙! 아파...
괜찮아요?
따듯한 손 한 쌍이 여자아이를 부축해줬다.
고개를 드니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고마워요, 언니.
엠블라라고 불러주세요.
엠블라 언니...
엄청 바쁜 모양인데, 어딜 그리 서둘러서 가요?
괴테의 생가 전시회를 보러 가요!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눈을 싫어하진 말고요.
어... 네...
엠블라는 웃으며 여자아이에게 손짓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오른 손바닥을 목덜미에 갖다대 맥박을 느꼈다.
들어보세요, 눈 내리는 소리가 심장 박동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