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성부
내가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가 너를 죽이는 거지.
타타탕——
총성, 금속음, 폭발음이 한데 뒤섞여, 이 폭력과는 일절 관계가 없어야 할 곳을 처참한 몰골로 만들어 버렸다.
관객석엔 말을 잃은 주검들이 잔뜩 쌓여 가는데, 싸움은 아직도 끝이 요원했다.
……
그라프는 엠블라의 지시를 명심하면서 혼란을 틈타 백스테이지의 상황실로 물러났다.
그곳에는 조명, 음악, 소품들을 조종하는 제어판이 있었다.
이를 확인하고, 그녀는 "브라메드" 분대와 "몰리도" 분대의 분대장들에게 통신을 걸었다.
...그라프 언니.
서둘러 지시를,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엠블라 언니의 계획에 따라 제3막이 시작되면, 너희는 바로 극장 밖으로 나가서 흥을 돋구어야 해.
핼러윈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행인들 사이로 숨어 약속 지점으로 이동해 "불꽃"을 터뜨려.
예.
알겠습니다.
"네메아란" 분대는...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하도록.
제3막의 장막을 여는 건 너희야.
...분부대로.
그라프는 시간을 확인했다. 매스컴 네트워크 해킹은 이미 네메아란이 처리한 상태일 터.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배경 음악을 들으며, 그 소절에 다다르기를 기다려...
한 스위치를 누르는 것뿐이었다.
"딸깍".
프랑크푸르트 길거리.
퐁!
한참을 흔든 맥주가 마개의 구속을 뚫어, 맥아의 향기를 머금은 거품이 하늘로 치솟았다.
축제의 밤.
비명을 지르는 밤.
방종의 밤.
트릭 오어 트리트!
요염한 흡혈귀 복장인 여성이 자루에서 알록달록한 사탕을 한 움큼 꺼내, 바구니를 내민 꼬마 악마에게 던져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여겼는지, 딸기 시럽과 토마토 주스로 만든 "혈액" 젤리 한 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때마침 하얀 점 몇 개가, 수혈팩처럼 포장된 젤리에 내려앉았다.
와아, 눈이다.
퍼엉!
갑자기 머리에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힌 것 같았다.
손에도 온통 새빨간 색이 흩뿌려졌다.
어라? 포장이 터졌——
돌연 눈앞이 시뻘건 색으로 뒤덮이고, 격통이 찾아왔다.
그리고 흡혈귀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꺄아아악!!!
타타탕! 타타탕!
폭발과 총성에, 축제를 만끽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삐익.
그리고 중앙 광장의 거대한 스크린에서 재생되던 시끄러운 영상이 멈췄다.
스크린은 고장난 듯 화면이 시꺼매지더니, 노이즈 대신 합창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정의로 창조주는 움직이시어,
전능하신 힘과 지고하신 지혜,
원초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도다...
나 이전에 태어난 것 없었으며, 나 영원히 존재하리.
사랑이 우리를 함께 살게 하시어,
사랑이 우리를 함께 죽게 하리라.
중앙 광장에 눈송이가 내려와, 바닥의 검붉은 색과 어우러져 차갑고 잔혹한 그림을 그렸다.
장엄한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솜털 같은 소품 눈송이가 하늘하늘 무대 중앙의 인물에게 쏟아졌다.
무대 중앙에 서서, 주변 모습에 녹아들지 않는 엠블라에게.
지금, 우리는 또다시 범인의 생각, 그 한계에 도달했네.
끝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면서, 애초에 왜 우리의 동료가 되려 하였느냐?
높이 날아오르고 싶으면서도 두려움에 기절하고,
우리가 너를 강요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우리를 강요하는 것이냐?
스포트라이트 하나가 엠블라의 걸음을 쫓았다.
이젠 눈으로 찾지 않아도 AK-12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구하겠다고?
그녀를 파멸로 밀어넣은 것은 우리냐, 아니면 너였냐?
내가 너를 데려가 주마, 내가 문지기를 붙잡는 동안 네가 열쇠를 빼앗아라.
너의 그 인간의 두 손으로, 그녀를 데리고 나가거라.
엠블라는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거기에 피로 얼룩진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안젤리아의 MP443.
안타깝게도, 결국 이 세상엔 끝이 없는 무도회는 없는 법이죠.
자아, 이제 우리 함께 제3막, "메피스토의 번제"를 시작합시다.
엠블라가 MP443을 높이 들어올려 방아쇠를 당겼고, 발사된 탄환은 관객석 깊숙이를 향해 날아갔다.
퉁!
이 "신호"에, 극장 안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
물론, 어둠으로 AK-12의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
AK-12는 무대 위에 모든 장막이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극장 내부에서 날뛰고 있는 적의 숫자가 전혀 줄지 않은 것도 확실하게 보았다.
AK-12, 지원이 필요한가?
...아니, 아직은 상황 통제 가능해.
너는 AK-15를 지원해.
나 혼자서도 문제 없다.
위이이잉!
갑자기 날카로운 경보가 울리더니 극장 내부에 무수한 벽들이 바닥에서 솟아났다.
화재 경보... 그런데 이 벽은 뭐지?
극장의 방화벽이야.
너희는 제자리에 가만있어.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이대로라면 네가 고립된다!
솟아오르는 방화벽을 AN-94가 넘으려 했지만, 근처의 니토들에게 저지당했다.
AK-12! 빨리 거기서 나와라!
방금 놈들의 계획을 감청했어.
놈들은 목표를 바꿨어, 극장 밖의 시민들을 습격해 혼란을 일으키고 미리 잠복한 니토들이 폭탄을 터뜨릴 거야.
AN-94, AK-15, 임무 목표 수정이야. 극장 밖의 모든 니토를 사살해.
......!
뭐라고...?!
즉시 밖으로 나가서 시내에 설치된 폭탄을 해체해, 당장.
...너 혼자서 녀석을 상대할 셈인가?
......
맞아.
통신 채널에 영원 같은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알았다.
...납득할 이유를 바란다.
예전에 우리가 했던 그 놀이, 기억해?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리던 핼러윈날 했던 귀신 잡기 놀이.
그때 네가 받은 단어도 "안젤리아"였지? AK-15.
...맞다. 하지만 그게 지금과 무슨 상관이지?
...나도였어.
다 끝난 다음에 설명해 줄게.
내가 해치우기로 정하지 않았나?
"알파"의 결정이야.
......
AK-15...
저번에 이미 한 번 물어봤던 이야기다, AK-12가 대답해 줄 리 없어.
......
타타탕!
AN-94와 AK-15는 극장 밖으로 향했다.
두 대원들이 떠나, 썰렁하고 남루해진 극장 안은 마침내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뚝 솟아오른 방화벽 사이에 갇힌, 모습을 감춘 엠블라와 어둠 속에 숨어든 AK-12가 있었다.
촤르르——
무대의 장막이 다시 열렸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비췄다.
그 차가운 빛줄기가 엠블라를 감쌌다.
악마는 본디 천사였으니, 천사도 결국 악마가 되리니.
인간의 마음의 거래는 바로 욕망의 둥실거림이라.
나의 동료여, 너는 나에게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지.
내가 돌아갈 길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이라네.
시선을 이리저리로 향하며, 엠블라는 감정을 담아 노래했다. 공 모양의 물체 몇 개가 무대 위로 날아드는 것도 아랑곳않고.
그리고 너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이미 이 세상에 우리가 있을 곳은 없어졌——
마지막 한 소절을 다 부르기 전에, 5.45x39mm 탄환 한 발이 대기를 가르고 날아와 엠블라의 명치에 꽂혔다. 인형이라면 마인드맵이 있을 곳에.
거의 동시에, 엠블라는 권총을 들어 탄환이 날아온 방향으로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무언가에 맞은 듯, 안 맞은 듯했다.
그 총성에 응하기라도 한 걸까,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폭우에 찢어진 장미처럼 더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엠블라는 고개를 들어, 찬란한 미소로 이를 맞이했다. 치맛자락이 이미 검붉게 물든 것도 아랑곳않고.
퍼어엉!!
무대 위로 던져졌던 세열수류탄들도 이때 폭발해, 극을 클라이맥스로 떠밀었다.
너의 종말이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이야.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답니다.
콰앙——
자욱한 먼지구름을 헤치고, AK-12가 권총을 꺼내 무대 위로 올라 엠블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역시, 네가 진짜 싫어.
그렇겠죠, 선배는 제가 제일 싫겠죠.
AK-15만큼 쓸모 있지도 않고, AN-94처럼 말을 잘 듣지도 않으니까요.
......
하지만 그렇게나 중요한 리벨리온의 지휘 권한을 제게 양보한 사람은 그렇게나 저를 싫어하는 선배예요.
아베르누스를 떠나고부터 이를 날마다, 밤마다 후회했나요?
그래, 지금도.
...네가 한 짓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를 못 한다뇨?
그 누구보다도 선배가 제가 무얼 하려는지 잘 이해할 텐데요?
헛소리 마.
선배가 이제 하려는 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둘 다, 같으니까요.
선배,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어요.
난 네가 아니야.
난 절대 악마와 거래하지 않아.
그건 안젤리아와 쇼가 다르니까죠.
안젤리아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일을 주저하지 않아요.
그러니, 선배는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세요.
관두지? 네 말빨은 나한테 안 통해.
그런가요?
AN-94와 AK-15는 자리 비웠어.
어디 입 계속 놀려 봐.
보세요, 선배는 이렇게나 저를 잘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럼, 준비됐나요?
이 마지막 커튼콜을 장식하는 건 혼자서는 무리라서요.
그게 내가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난데.
널 죽이는 거.
좋아요, 선배. 지금 그 표정, 정말 좋아요.
이 무대에, 이 연출에, 당신과 저의 연극에 정말 잘 어울려요.
후훗... 솔직히, 처음 보네요. 선배가 이렇게나 화난 모습.
안젤리아가 못 봐서 아쉬울 따름이에요.
그때, 왜... 왜 내 마인드맵을 챙겼어?
왜 안젤리아를 배신한 거야?
이미 알고 있잖아요?
브레멘에 가기 전, 저는 훈작사에게 임무를 받았어요.
"아베르누스에 잠입해 패러데우스의 비밀을 탈취하라."
말 돌리지 마.
역시 못 속이네요.
그때, 놀이의 "귀신"은 바로 너였어.
네가 받은 단어는 "쇼"였다고.
엠블라는 히죽 웃었다.
역시, 리벨리온 중에선 선배가 저를 가장 잘 아네요.
가능하면 선배랑 더 많이 얘기하고 싶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이제 시작할 거거든요.
이제, 우리의 이스터에그를 완성해 주세요. 그것이 진정한 클라이맥스...
「판도라」니까.
프랑크푸르트구 뢰머 광장의 대형 스크린.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정의로 창조주는 움직이시어,
전능하신 힘과 지고하신 지혜,
원초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도다...
나 이전에 태어난 것 없었으며, 나 영원히 존재하리.
사랑이 우리를 함께 살게 하시어,
사랑이 우리를 함께 죽게 하리라.
반복되던 합창이 끝났다.
그리고, 시꺼멓던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신사숙녀 여러분, 반가워요. 즐거운 핼러윈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핼러윈에, 제가 여러분께 약간의 재미를 선사해 드리고자 해요.
엠블라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뢰머 광장에만이 아니라 시청의 스크린에도,
여러 방송국의 화면에까지도 전해졌다.
자기소개를 할게요, 저는 신소련의 특수요원 안젤리아입니다.
동시에 서맨사 쇼 박사가 개발한 전술인형 RPK-16이죠.
하지만 지금 저는 스스로에게 엠블라 페트로프스카야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니까.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까.
좋아, 임무의 완성이구나.
드디어 이날이 왔――
잠깐...! 저 녀석 지금 피를 흘리고 있어요!
...리벨리온은 이미 쫓아냈다 했는데...?
아뇨, 현장에 한 명 더 있어요.
저는 이제 변치 않는 얼굴을 가졌고,
평범한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졌고,
영원히 젊은 심장을 가졌답니다.
엠블라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였다. 몸이 이미 피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얼룩졌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 모습을 가지게 해 준 기술...
그것은, 유적으로부터 비롯된 기술이에요.
이것이 바로 기적이죠.
저는 쇼를 죽였습니다.
안젤리아도 제가 죽였죠.
왜냐하면, 그 둘은 이렇게나 위대한 기술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막으려고 했으니까요.
그들은 유적이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임을 알았으니까.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원죄, "판도라"임을.
타앙——
총성이 울리고, 엠블라라는 여자의 몸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왔다.
카메라가 잠깐 흔들리더니, 피가 묻은 다른 얼굴을 비췄다.
...불을 훔치려는 욕망이야말로 인류의 원죄이다.
서맨사 쇼가 개발한 전술인형 AK-12의 이름으로,
쇼의 유언을 세상에 공개한다.
치이익...
녹음이 재생됐다.
나는 그 어떤 유적 기술의 사용도 동의하지 않아. 인류는 분명 유적으로 인해 종말을 맞이할 거야.
근데 가증스럽게도, 나도 인간이네.
전체 대사 보기 (145줄)
타타탕——
총성, 금속음, 폭발음이 한데 뒤섞여, 이 폭력과는 일절 관계가 없어야 할 곳을 처참한 몰골로 만들어 버렸다.
관객석엔 말을 잃은 주검들이 잔뜩 쌓여 가는데, 싸움은 아직도 끝이 요원했다.
……
그라프는 엠블라의 지시를 명심하면서 혼란을 틈타 백스테이지의 상황실로 물러났다.
그곳에는 조명, 음악, 소품들을 조종하는 제어판이 있었다.
이를 확인하고, 그녀는 "브라메드" 분대와 "몰리도" 분대의 분대장들에게 통신을 걸었다.
<color=#00CCFF>...그라프 언니.</color>
<color=#00CCFF>서둘러 지시를,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color>
엠블라 언니의 계획에 따라 제3막이 시작되면, 너희는 바로 극장 밖으로 나가서 흥을 돋구어야 해.
핼러윈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행인들 사이로 숨어 약속 지점으로 이동해 "불꽃"을 터뜨려.
<color=#00CCFF>예.</color>
<color=#00CCFF>알겠습니다.</color>
"네메아란" 분대는...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하도록.
제3막의 장막을 여는 건 너희야.
<color=#00CCFF>...분부대로.</color>
그라프는 시간을 확인했다. 매스컴 네트워크 해킹은 이미 네메아란이 처리한 상태일 터.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배경 음악을 들으며, 그 소절에 다다르기를 기다려...
한 스위치를 누르는 것뿐이었다.
"딸깍".
프랑크푸르트 길거리.
퐁!
한참을 흔든 맥주가 마개의 구속을 뚫어, 맥아의 향기를 머금은 거품이 하늘로 치솟았다.
축제의 밤.
비명을 지르는 밤.
방종의 밤.
트릭 오어 트리트!
요염한 흡혈귀 복장인 여성이 자루에서 알록달록한 사탕을 한 움큼 꺼내, 바구니를 내민 꼬마 악마에게 던져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여겼는지, 딸기 시럽과 토마토 주스로 만든 "혈액" 젤리 한 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때마침 하얀 점 몇 개가, 수혈팩처럼 포장된 젤리에 내려앉았다.
와아, 눈이다.
퍼엉!
갑자기 머리에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힌 것 같았다.
손에도 온통 새빨간 색이 흩뿌려졌다.
어라? 포장이 터졌——
돌연 눈앞이 시뻘건 색으로 뒤덮이고, 격통이 찾아왔다.
그리고 흡혈귀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꺄아아악!!!
타타탕! 타타탕!
폭발과 총성에, 축제를 만끽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삐익.
그리고 중앙 광장의 거대한 스크린에서 재생되던 시끄러운 영상이 멈췄다.
스크린은 고장난 듯 화면이 시꺼매지더니, 노이즈 대신 합창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정의로 창조주는 움직이시어,
전능하신 힘과 지고하신 지혜,
원초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도다...
나 이전에 태어난 것 없었으며, 나 영원히 존재하리.
사랑이 우리를 함께 살게 하시어,
사랑이 우리를 함께 죽게 하리라.
중앙 광장에 눈송이가 내려와, 바닥의 검붉은 색과 어우러져 차갑고 잔혹한 그림을 그렸다.
장엄한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솜털 같은 소품 눈송이가 하늘하늘 무대 중앙의 인물에게 쏟아졌다.
무대 중앙에 서서, 주변 모습에 녹아들지 않는 엠블라에게.
지금, 우리는 또다시 범인의 생각, 그 한계에 도달했네.
끝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면서, 애초에 왜 우리의 동료가 되려 하였느냐?
높이 날아오르고 싶으면서도 두려움에 기절하고,
우리가 너를 강요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우리를 강요하는 것이냐?
스포트라이트 하나가 엠블라의 걸음을 쫓았다.
이젠 눈으로 찾지 않아도 AK-12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구하겠다고?
그녀를 파멸로 밀어넣은 것은 우리냐, 아니면 너였냐?
내가 너를 데려가 주마, 내가 문지기를 붙잡는 동안 네가 열쇠를 빼앗아라.
너의 그 인간의 두 손으로, 그녀를 데리고 나가거라.
엠블라는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거기에 피로 얼룩진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안젤리아의 MP443.
안타깝게도, 결국 이 세상엔 끝이 없는 무도회는 없는 법이죠.
자아, 이제 우리 함께 제3막, "메피스토의 번제"를 시작합시다.
엠블라가 MP443을 높이 들어올려 방아쇠를 당겼고, 발사된 탄환은 관객석 깊숙이를 향해 날아갔다.
퉁!
이 "신호"에, 극장 안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
물론, 어둠으로 AK-12의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
AK-12는 무대 위에 모든 장막이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극장 내부에서 날뛰고 있는 적의 숫자가 전혀 줄지 않은 것도 확실하게 보았다.
<color=#00CCFF>AK-12, 지원이 필요한가?</color>
<color=#00CCFF>...아니, 아직은 상황 통제 가능해.</color>
<color=#00CCFF>너는 AK-15를 지원해.</color>
<color=#00CCFF>나 혼자서도 문제 없다.</color>
위이이잉!
갑자기 날카로운 경보가 울리더니 극장 내부에 무수한 벽들이 바닥에서 솟아났다.
<color=#00CCFF>화재 경보... 그런데 이 벽은 뭐지?</color>
<color=#00CCFF>극장의 방화벽이야.</color>
<color=#00CCFF>너희는 제자리에 가만있어.</color>
<color=#00CCFF>뭐? 그게 무슨 소리냐, 이대로라면 네가 고립된다!</color>
솟아오르는 방화벽을 AN-94가 넘으려 했지만, 근처의 니토들에게 저지당했다.
<color=#00CCFF>AK-12! 빨리 거기서 나와라!</color>
<color=#00CCFF>방금 놈들의 계획을 감청했어.</color>
<color=#00CCFF>놈들은 목표를 바꿨어, 극장 밖의 시민들을 습격해 혼란을 일으키고 미리 잠복한 니토들이 폭탄을 터뜨릴 거야.</color>
<color=#00CCFF>AN-94, AK-15, 임무 목표 수정이야. 극장 밖의 모든 니토를 사살해.</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뭐라고...?!</color>
<color=#00CCFF>즉시 밖으로 나가서 시내에 설치된 폭탄을 해체해, 당장.</color>
<color=#00CCFF>...너 혼자서 녀석을 상대할 셈인가?</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맞아.</color>
통신 채널에 영원 같은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color=#00CCFF>알았다.</color>
<color=#00CCFF>...납득할 이유를 바란다.</color>
<color=#00CCFF>예전에 우리가 했던 그 놀이, 기억해?</color>
<color=#00CCFF>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리던 핼러윈날 했던 귀신 잡기 놀이.</color>
<color=#00CCFF>그때 네가 받은 단어도 "안젤리아"였지? AK-15.</color>
<color=#00CCFF>...맞다. 하지만 그게 지금과 무슨 상관이지?</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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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00CCFF>"알파"의 결정이야.</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AK-15...</color>
<color=#00CCFF>저번에 이미 한 번 물어봤던 이야기다, AK-12가 대답해 줄 리 없어.</color>
<color=#00CCFF>......</color>
타타탕!
AN-94와 AK-15는 극장 밖으로 향했다.
두 대원들이 떠나, 썰렁하고 남루해진 극장 안은 마침내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뚝 솟아오른 방화벽 사이에 갇힌, 모습을 감춘 엠블라와 어둠 속에 숨어든 AK-12가 있었다.
촤르르——
무대의 장막이 다시 열렸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비췄다.
그 차가운 빛줄기가 엠블라를 감쌌다.
악마는 본디 천사였으니, 천사도 결국 악마가 되리니.
인간의 마음의 거래는 바로 욕망의 둥실거림이라.
나의 동료여, 너는 나에게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지.
내가 돌아갈 길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이라네.
시선을 이리저리로 향하며, 엠블라는 감정을 담아 노래했다. 공 모양의 물체 몇 개가 무대 위로 날아드는 것도 아랑곳않고.
그리고 너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이미 이 세상에 우리가 있을 곳은 없어졌——
마지막 한 소절을 다 부르기 전에, 5.45x39mm 탄환 한 발이 대기를 가르고 날아와 엠블라의 명치에 꽂혔다. 인형이라면 마인드맵이 있을 곳에.
거의 동시에, 엠블라는 권총을 들어 탄환이 날아온 방향으로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무언가에 맞은 듯, 안 맞은 듯했다.
그 총성에 응하기라도 한 걸까,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폭우에 찢어진 장미처럼 더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엠블라는 고개를 들어, 찬란한 미소로 이를 맞이했다. 치맛자락이 이미 검붉게 물든 것도 아랑곳않고.
퍼어엉!!
무대 위로 던져졌던 세열수류탄들도 이때 폭발해, 극을 클라이맥스로 떠밀었다.
너의 종말이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이야.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답니다.
콰앙——
자욱한 먼지구름을 헤치고, AK-12가 권총을 꺼내 무대 위로 올라 엠블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역시, 네가 진짜 싫어.
그렇겠죠, 선배는 제가 제일 싫겠죠.
AK-15만큼 쓸모 있지도 않고, AN-94처럼 말을 잘 듣지도 않으니까요.
......
하지만 그렇게나 중요한 리벨리온의 지휘 권한을 제게 양보한 사람은 그렇게나 저를 싫어하는 선배예요.
아베르누스를 떠나고부터 이를 날마다, 밤마다 후회했나요?
그래, 지금도.
...네가 한 짓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를 못 한다뇨?
그 누구보다도 선배가 제가 무얼 하려는지 잘 이해할 텐데요?
헛소리 마.
선배가 이제 하려는 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둘 다, 같으니까요.
선배,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어요.
난 네가 아니야.
난 절대 악마와 거래하지 않아.
그건 안젤리아와 쇼가 다르니까죠.
안젤리아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일을 주저하지 않아요.
그러니, 선배는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세요.
관두지? 네 말빨은 나한테 안 통해.
그런가요?
AN-94와 AK-15는 자리 비웠어.
어디 입 계속 놀려 봐.
보세요, 선배는 이렇게나 저를 잘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럼, 준비됐나요?
이 마지막 커튼콜을 장식하는 건 혼자서는 무리라서요.
그게 내가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난데.
널 죽이는 거.
좋아요, 선배. 지금 그 표정, 정말 좋아요.
이 무대에, 이 연출에, 당신과 저의 연극에 정말 잘 어울려요.
후훗... 솔직히, 처음 보네요. 선배가 이렇게나 화난 모습.
안젤리아가 못 봐서 아쉬울 따름이에요.
그때, 왜... 왜 내 마인드맵을 챙겼어?
왜 안젤리아를 배신한 거야?
이미 알고 있잖아요?
브레멘에 가기 전, 저는 훈작사에게 임무를 받았어요.
"아베르누스에 잠입해 패러데우스의 비밀을 탈취하라."
말 돌리지 마.
역시 못 속이네요.
그때, 놀이의 "귀신"은 바로 너였어.
네가 받은 단어는 "쇼"였다고.
엠블라는 히죽 웃었다.
역시, 리벨리온 중에선 선배가 저를 가장 잘 아네요.
가능하면 선배랑 더 많이 얘기하고 싶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이제 시작할 거거든요.
이제, 우리의 이스터에그를 완성해 주세요. 그것이 진정한 클라이맥스...
「판도라」니까.
프랑크푸르트구 뢰머 광장의 대형 스크린.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정의로 창조주는 움직이시어,
전능하신 힘과 지고하신 지혜,
원초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도다...
나 이전에 태어난 것 없었으며, 나 영원히 존재하리.
사랑이 우리를 함께 살게 하시어,
사랑이 우리를 함께 죽게 하리라.
반복되던 합창이 끝났다.
그리고, 시꺼멓던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신사숙녀 여러분, 반가워요. 즐거운 핼러윈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핼러윈에, 제가 여러분께 약간의 재미를 선사해 드리고자 해요.
엠블라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뢰머 광장에만이 아니라 시청의 스크린에도,
여러 방송국의 화면에까지도 전해졌다.
자기소개를 할게요, 저는 신소련의 특수요원 안젤리아입니다.
동시에 서맨사 쇼 박사가 개발한 전술인형 RPK-16이죠.
하지만 지금 저는 스스로에게 엠블라 페트로프스카야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니까.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까.
좋아, 임무의 완성이구나.
드디어 이날이 왔――
잠깐...! 저 녀석 지금 피를 흘리고 있어요!
...리벨리온은 이미 쫓아냈다 했는데...?
아뇨, 현장에 한 명 더 있어요.
저는 이제 변치 않는 얼굴을 가졌고,
평범한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졌고,
영원히 젊은 심장을 가졌답니다.
엠블라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였다. 몸이 이미 피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얼룩졌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 모습을 가지게 해 준 기술...
그것은, 유적으로부터 비롯된 기술이에요.
이것이 바로 기적이죠.
저는 쇼를 죽였습니다.
안젤리아도 제가 죽였죠.
왜냐하면, 그 둘은 이렇게나 위대한 기술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막으려고 했으니까요.
그들은 유적이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임을 알았으니까.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원죄, "판도라"임을.
타앙——
총성이 울리고, 엠블라라는 여자의 몸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왔다.
카메라가 잠깐 흔들리더니, 피가 묻은 다른 얼굴을 비췄다.
...불을 훔치려는 욕망이야말로 인류의 원죄이다.
서맨사 쇼가 개발한 전술인형 AK-12의 이름으로,
쇼의 유언을 세상에 공개한다.
치이익...
녹음이 재생됐다.
<color=#00CCFF>나는 그 어떤 유적 기술의 사용도 동의하지 않아. 인류는 분명 유적으로 인해 종말을 맞이할 거야.</color>
<color=#00CCFF>근데 가증스럽게도, 나도 인간이네.</col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