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강물
시위 행진하는 인파를 넘어서, 넬레는 사촌 언니를 방문해 어린 시절처럼 담소를 나누지만 배후에는 암류가 흘렸다.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 더러운 지하철역 안.
늘상 피로에 절어 무엇에도 관심 없던 승강장의 승객들은 지금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지하철역의 스크린 아래 모여 보는 생방송 뉴스 때문이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2시 정오 뉴스입니다. 아침 수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의 후속 보도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금일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 프랑크푸르트시 A661번 고속도로 공항 구역 7km 밖, 671번 고속도로 노이젠부르크구 입구 방면, 그리고 로엔하임구 공항 정원 부근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초동 조사 결과 사고 원인은 도로 결빙으로 인한 미끄러짐으로, 지금까지 사망자 9명, 부상자 17명이 집계되었으며, 위급 상황에 처해 생사의 기로에 놓인 환자도 다수로 확인됐습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고들이 전부 악화된 이유는 다름아닌 「인형 안전 임시 조치」입니다. 도로의 유지보수를 맡는 인부 인형, 교통정리를 해야 할 경찰 인형들이 현장에 파견되지 못해, 광범위한 교통 체증이 발생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프랑크푸르트 내 병원들의 응급실에서 환자를 받아야 할 의료 인형도 「인형 안전 임시 조치」로 인해 직무 정지 상태여서, 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의 치료가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취재에 따르면, 이번 사고의 희생자 중에는 산부인과로 향하던 임산부 한 명이 포함되어 있으며, 골든 타임을 놓쳐 뱃속의 아기까지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지하철 S8호선, 마인츠 어린이병원역 바깥.
도시 곳곳에서 모여든 하얀 가운의 시위자들이, 이 의료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사립 병원과 양호원들로 이루어진 의료 단지에 집결했다.
인형 통제 철회하라!! 의료붕괴 해결하라!!
모든 국민의 의료권을 보장하라!!!
적십자기를 흔들고 구호 피켓을 높이 든 시위대의 행렬은 세찬 강물처럼 파죽지세로 행진했다.
그들이 프랑크푸르트의 여타 병원들처럼 업무가 마비된 마인츠 어린이 병원을 지나 향한 곳은, 이전부터 인간만 고용하기로 유명한 첨단 고급 요양원 "성 마리아 요양 센터"였다.
미아, 여기서 내려 줘.
이 앞은 시위대로 길이 꽉 막혔어.
...응.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할게, 정말 이렇게 할 거야?
아 벌써 몇십 번째야, 나 마음 정했다니까!? 기필코 그레이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말 거라고!
그리고, 지금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지휘관뿐이야.
하지만 널 보러 오지도 않고 계속 수하 인형만 내세우는데, 정말 믿을 수 있을까?
"교관" 씨 말대로라면, 지금은 중요한 일로 바빠서 다 끝나는 대로 만나겠댔지...
내 기우면 좋겠지만, 그 사람은 당장 네 도움이 필요해서 급하게 공수표 하나 끊어 준 걸지도 몰라.
뭐어, 기댈 곳이 있었으면 나한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겠지.
지금 안전 조치 때문에 단속 무지 빡세져서 도시 밖에 있는 인형들은 들어오지도 못하잖아.
내가 대신 통행 허가를 받아 주는 것 말곤 달리 방도가 없어.
...마음 굳혔다면 더는 말 안 할게.
응. 아무튼, 언니한테 줄 꽃은? 아직도 샴페인색 장미를 좋아하려나?
꽃은 뒷좌석에 있어.
네 사촌언니는 널 엄청 아끼잖아, 뭘 주든 다 좋아할 거야.
넬레는 뒷좌석에서 꽃다발을 집어 들고는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에휴... 그런 소리 들으니까 자괴감 든다.
......
우리 집안 사람들 모두 나를 투명인간 취급 아니면 겉으로는 잘해 주는 척하면서 뒷담화나 까고, 진심으로 신경써 주는 사람은 사촌언니뿐이니...
가능하면 언니를 끌어들이고 싶진 않지만...
도와줄 사람이 언니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네...
다 이해해 줄 거야.
...그러면 좋겠다.
넬레는 마음을 다잡아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소란스러운 인파 때문에 넬레는 벽에 바짝 붙어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인파는 여기저기서 구호를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수시로 시위 전단지가 눈앞에서 흩날렸다.
하지만 머리 위로 굳게 닫힌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오만하게도 길거리의 "소음"을 차단했다.
생명은 평등하다! 의료 인형 규제 웬말이냐! 웬말이냐!
생명은 평등하다! 의료 인형 규제 웬말이냐! 웬말이냐!
요양 센터 입구 맞은편의 길에서, 시위대는 진압방패를 든 경찰들의 저지선에 가로막혔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거센 파도처럼, 그들의 난잡한 외침과 순수한 분노의 고함은 하늘로 솟구쳤다.
이곳은 병원입니다!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물러나십시오! 모두 물러나십시오!
지금 우리 애들이 죽어가는데! 우리 보고 조용히 하라 이거냐!
네놈들이나 물러나라! 이 기득권의 개들아!!!
분노가 담긴 깃대가 파도처럼 일어, 맹렬하게 진압방패를 두들겼다.
저기,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아가씨, 지금 성 마리아 요양 센터는 휴원 중입니다.
제 사촌언니 병문안하러 왔어요.
증명서와 방문 허가증 제시해 주십시오.
넬레는 차분히 투명한 서류 봉투를 꺼내, 미리 꼼꼼하게 준비한 서류를 하나씩 제시했다.
이동식 단말기에 정보를 입력해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통행로를 열으라 손짓했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시위대는 뿌리쳤지만, 그들의 외침은 뿌리치지 못한 넬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메이어 씨, 코넬리아 슈펠 씨가 방문하셨습니다.
안내 간호사가 버튼을 누르자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열린 방으로부터 나온 바람은 상쾌했다. 바깥으로 난 발코니의 거대한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화창한 햇빛이 방 구석구석을 비춰, 넬레는 순간 눈이 부셨다.
구석의 축음기에선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잔잔하게 흘러나왔고, 공기 중 풍기는 천연 과일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넬레야!
딸이라며? 진짜 축하해 언니!
이게 얼마만이니, 너무 보고 싶었어!
사촌언니가 침상에서 일어나려 하는 걸 본 넬레는 황급히 달려가 제지했다.
어휴 언니야, 얌전히 누워있어야지 왜 일어나려고 그래.
아하하... 우리 넬레 봐서 흥분했나 봐.
널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너 대학교 졸업식?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걸 뭐.
넬레는 의자를 끌어당겨 침상 옆에 앉았다.
몸은 괜찮아?
나야 쌩쌩하지~
너야말로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 얼굴도 엄청 초췌하네.
요즘 따라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봐.
...갈라테아 때문이야?
......응.
하아... 아직도 외출할 때마다 조마조마해. 사람들이 다들 갑자기 날 때리려고 달려올 것 같아서...
조심하렴,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며칠 전만 해도 그 인형 살인 사건이 있었잖아?
나도 정말 엄청 무서웠어, 우리 집 인형들은 모두 검사 통과해서 망정이지...
응... 진짜, 세상살이 불안해서 보디가드를 잔뜩 데리고 있어야 그나마 안심이 될 지경이야.
집에서 붙여 준 인형들은 검사 통과했어?
미아는 통과했는데, 몇 명이 아직 수속을 못 밟아서...
그럼 안 되지!
그럼 아직 검사 못 받은 인형들은 지금 어디 있어? 내가 가서 허가증 따 줄게.
지금 오펜바흐구 외곽의 임시 보관소에 있어, 총 8명.
그리폰 인형 쪽 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넬레는 한시름 놓았다.
8명? 잘했어, 이제야 좀 많이 데리고 다닐 줄 아는구나.
갈라테아 그룹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때 불 난 뒤로 매일 악몽을 꾼다니까...
아 진짜 갈라테아 얘기만 나오면 열이 뻗치네!
메이어가 넬레의 손을 꼬옥 쥐고 인상을 팍 썼다.
네가 그토록 존경하던 그레이 교수가 설마 윤리관도 없는 살인마였다니!
그년 때문에 너까지 욕먹고 있는 거 아니니...
......
우리 넬레 어떡해... 우리 집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한 앤데...
어떻게 장래가 창창한 애를 망쳐 놓는지 원...
...됐어, 언니.
넬레는 가슴 속에서 아우성치는 진실을 억누르면서 사촌언니의 손을 고쳐쥐었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까 긍정적으로 내다봐야지.
그렇지... 그래서, 앞으로 어떡할지 계획 세웠니?
아직은. 일단 여기저기 일자리 알아보는 중이야.
그런데 갈라테아 일 터졌던 게 너무 커선지, 이력서에서 그 한 줄만 보면 다들 기겁을 하더라구...
하아...
일자리는 언니도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네... 외할아버지 댁에 연락은 해봤어?
엄마 돌아가시고 안 찾아뵌 지 벌써 몇 년 됐잖아.
어차피 우리 꼴도 보기 싫어하시는데.
얘가, 외할아버지는 입만 독하지 실제로는 너 엄청 걱정하고 계신다?
너도 알잖아, 우리 집안의 우리 세대는 죄다 공부머리 나빠서 대학 붙는 것마저 외할아버지가 건물 몇 채나 기부하고서야 됐던 거.
완전 실력으로 붙어서 장학금까지 받은 사람은 너뿐이야!
......
그러니까 시간 날 때 외할아버지 뵈러 좀 가고 그래, 알았지? 어르신 혼자 화이트존의 요양원에서 지내느라 얼마나 외로운데, 너 보면 엄청 반길 거야.
그리고 말 좀 잘 하면 어디 일자리 구해 줄지도 모르고.
화이트존...?
아아 그렇지, 넌 안 가봤겠구나? 그럼 외할아버지 뵈러 가는 김에 거기 구경도 하고 마음도 진정시키고 그러렴.
...알았어. 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외할아버지 자주 뵈러 가라셨으니, 약속 지켜야지.
그리고 말이야아...
메이어는 넬레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봤다.
그 시선에 넬레는 약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왜, 왜 그래...?
넬레야, 너 관심 있는 사람 아직도 없구나?
어?! 아, 그, 그런 건 흥미 없어서...
얘도 참, 이제 그럴 나인데 좋은 남자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지!
언니가 몇 명 소개시켜 줄까? 최근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 밑의 연구생이 인물이 참——
스톱 스톱! 이제 막 출산한 사람이 뭐라는 거야!
지금은 언니 몸이랑 아기를 더 챙겨야지!
그런 일은 하나도 안 급하니까 언니가 몸조리 잘하고 퇴원한 다음에 얘기하자.
내가 언제 퇴원할지 어떻게 아니... 아 그렇지!
넬레, 언니 친구 소개시켜 줄게.
그, 그럴 필요 없다니깐!
이 언니한테 맡기고 내일 바로 언니 친구 만나러 가. 제법 친한 사인데, 연예인이었다가 지금은 보건부 장관한테 시집간 사람이야. 그 장관도 외할아버지가 밀어준 사람이고.
그래, 이렇게 된 거 외할아버지 뵈러 가는 것도 걔가 시간 잡아 주면 되겠다.
메이어는 핸드백을 열어 명함 한 장을 꺼내 넬레에게 주었다.
"미스 헤베"... 요즘 시대에 아직도 종이 명함을 쓰는 사람이 다 있네?
어머, 헤베 씨 엄청 유명했는데 몰라? 고전 영화 리메이크가 유행했을 때 되게 잘 나가는 배우였어.
아주 흑백 필름 찢고 나온 것 같은 클래식한 미인상이야, 취향도 엄청 클래식하고.
어... 언니, 고맙지만 그 사람도 분명 엄청 바쁠 텐데, 나 때문에 시간 잡아먹으면 미안하잖아...
뭘 새삼스럽게, 이번에 신세 지고 다음에 갚으면 되지.
그리고 마침 올해 보건부에 젊은 대학생들 몇 명 들어왔으니까, 너랑 말 통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언니 친구한테 얘기해 봐.
속으로는 한숨을 푹 쉬면서, 넬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았어.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넬레는 메이어를 꼭 껴안았다.
목적을 달성한 기쁨과, 사촌언니에 대한 미안함을 얼굴에 드러내면서.
지휘관, 계획의 첫 단계는 달성했어요.
정말 약속대로 저와 만나 주실 건가요?
철컥.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루니샤가 돌아왔다.
저 보고 싶으셨어요?
......
그 목소리에 지휘관은 부스스 눈을 떴다. 손발이 꽁꽁 묶인 탓에 잠자리가 영 불편했다.
장소 옮기게?
아직은요.
루니샤는 싱긋 웃으며 구속을 풀어 주었다.
내가 이대로 도망칠 거란 걱정은 안 해? 대성당 밖은 사람이 잔뜩인 길거리인데.
걱정 안 해요, 빌이 제 가슴 속에 폭탄을 심어둬서, 당신이 제게서 50m 이상 멀어지면 폭발하거든요.
......
그리고, 지휘관님은 절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
지휘관은 얼얼한 손발의 관절을 풀면서 테이블 앞에 앉아 술 한 잔을 따랐다.
지휘관님은 성당에 다니시나요?
...맞혀 봐.
제 기억에, 당신이 종교인이란 흔적은 없네요.
맞아, 난 신 안 믿어.
왜요?
지금까지 마주쳤던 모든 역경을, 나는 매번 나 자신과 내 곁의 인형들의 힘으로 빠져나왔어.
그런데 신이 있다면 그때마다 대체 어디 있었지? 정말 있다면, 왜 나를 이런 구렁텅이에 빠뜨린 걸까?
하지만 지금 당신이 여기서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다 신의 안배 덕분이죠.
그녀가 무수한 죽음의 실타래 속에서, 당신이 살아남는 한 가닥을 찾아내 엮어서 길게 잇고 있기에, 당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거예요.
......
느껴지지 않으세요? 지금도 그녀는 연민 어린 눈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데.
지휘관은 루니샤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잔을 비웠다.
그 눈빛,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군요.
너, 지금 말투가 댄들라이랑 엄청 비슷했어.
항상 녀석이 이상한 소리만 재잘대서 귀찮아했는데, 이러고 있자니 갑자기 보고 싶어지네.
.......
지휘관은 다 마신 술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의 소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루니샤, 같이 도망치자.
제가 왜요?
그럼 묻자, 왜 여기 남으려 해?
빌이 시켰으니까요.
......
말해보세요, 제가 왜 도망쳐야 하죠?
너는 윌리엄이 원하는 "누나"가 아니니까.
루니샤의 눈에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
그렇지 않다면 네가 여기 있을 리 없지.
윌리엄 자식이 자기 "누나" 되살리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쳐댔는데, 설마 이런 데다 내버려두겠어?
......
제가 이 부분을 잘라내기만 하면, 빌은 절 보러 올 거예요. 예전처럼.
...잘라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진작에 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루니샤인 동시에 댄들라이이자 M4A1이야.
...나와 약속을 한 M4.
그들이 절대 순순히 잘려나가게 가만 있을 리가 없지!
닥쳐요!
――스윽.
세상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쓴웃음을 지으며, 지휘관은 다시 미지의 여정에 올랐다.
...철컥.
넬레가 호텔 문을 열자 미아가 바로 맞이했다.
다녀왔어.
어때, 일 잘 풀렸어?
응... 언니가 통행 허가 받아 줬어.
자, 여기. 나중에 교관 씨 보면 줘.
알았어.
미아는 통행 허가증 몇 장을 조심스럽게 받아서 백에 집어넣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하아... 언니가 외할아버지 뵈러 화이트존에 가래, 일자리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포크트 씨가 너한테 좀 엄격하시긴 해도, 일자리 하나 알아봐 주는 것쯤은 부탁할 수 있을 거야.
도와 달라 하려고 가는 게 아니야, 그냥 엄마 유언 따라서 얼굴 보러 가는 거야.
그럼 왜 그렇게 고민해?
후우...
내일, 외할아버지 보러 가기 전에 언니 친구도 만나래. 맞선 자리 알아봐 주겠다고.
풉.
뭘 웃어!?
아니, 그냥 웃긴 일 생각나서.
......
넬레는 소파에 흐느적 드러누웠다.
솔직히 거절하려 했는데, 내가 언니를 이용해서 지휘관의 인형들한테 통행 허가증 준다고 생각하니...
대답한 이상 보러 가야지.
가서 대충 핑계 대면서 빠져나오면 되잖아?
응...
넬레는 발을 툭툭 털어 슬리퍼를 벗었다.
어렸을 적엔 사촌언니 빼고 친척들 다 싫었어. 하나같이 가식적에,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용해 먹을 생각만 잔뜩이라서.
그런데... 이젠 나도 그런 꼴이 된 거 같네...
아니야, 넬레.
그 사람들은 그냥 숨쉬듯 타인을 이용해 먹지만, 넌 달리 방도가 없어서 타인에게 기대는 거야.
...일 다 끝나면 가서 사과할 거야.
그나저나, 교관 씨한테선 뭐 소식 없어?
아직은. 여전히 안전 조치 때문에 도시 밖에 발이 묶였어.
그럼 빨리 통행 허가증 줘야겠다.
...그래.
그래도 한 번 더 충고할게, 넬레. 그들과 엮이는 건 너무 위험해.
알아, 하지만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어.
선생님이... 이렇게 모멸받으면서 돌아가시게 둘 순 없어.
미아, 지금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지휘관뿐이야.
......
미아는 마지못해 한숨을 푹 쉬곤 물건을 잘 챙기고 나갈 채비를 했다.
교관 만나러 갈게.
가서 지휘관에 대해서도 꼭 물어봐.
응.
좀 쉬고 있어, 내일 힘든 만남이 두 번이나 있을 예정이잖아.
으으... 아라썽...
미아는 방을 나섰고, 넬레는 기운 없이 세수하러 움직였다.
전체 대사 보기 (184줄)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 더러운 지하철역 안.
늘상 피로에 절어 무엇에도 관심 없던 승강장의 승객들은 지금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지하철역의 스크린 아래 모여 보는 생방송 뉴스 때문이었다.
<color=#00CCFF>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2시 정오 뉴스입니다. 아침 수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의 후속 보도를 전해드리겠습니다.</color>
<color=#00CCFF>금일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 프랑크푸르트시 A661번 고속도로 공항 구역 7km 밖, 671번 고속도로 노이젠부르크구 입구 방면, 그리고 로엔하임구 공항 정원 부근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잇따라 발생했습니다.</color>
<color=#00CCFF>초동 조사 결과 사고 원인은 도로 결빙으로 인한 미끄러짐으로, 지금까지 사망자 9명, 부상자 17명이 집계되었으며, 위급 상황에 처해 생사의 기로에 놓인 환자도 다수로 확인됐습니다.</color>
<color=#00CCFF>이렇게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고들이 전부 악화된 이유는 다름아닌 「인형 안전 임시 조치」입니다. 도로의 유지보수를 맡는 인부 인형, 교통정리를 해야 할 경찰 인형들이 현장에 파견되지 못해, 광범위한 교통 체증이 발생하였습니다.</color>
<color=#00CCFF>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프랑크푸르트 내 병원들의 응급실에서 환자를 받아야 할 의료 인형도 「인형 안전 임시 조치」로 인해 직무 정지 상태여서, 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의 치료가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color>
<color=#00CCFF>취재에 따르면, 이번 사고의 희생자 중에는 산부인과로 향하던 임산부 한 명이 포함되어 있으며, 골든 타임을 놓쳐 뱃속의 아기까지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color>
프랑크푸르트 지하철 S8호선, 마인츠 어린이병원역 바깥.
도시 곳곳에서 모여든 하얀 가운의 시위자들이, 이 의료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사립 병원과 양호원들로 이루어진 의료 단지에 집결했다.
<size=50>인형 통제 철회하라!! 의료붕괴 해결하라!!</size>
<size=50>모든 국민의 의료권을 보장하라!!!</size>
적십자기를 흔들고 구호 피켓을 높이 든 시위대의 행렬은 세찬 강물처럼 파죽지세로 행진했다.
그들이 프랑크푸르트의 여타 병원들처럼 업무가 마비된 마인츠 어린이 병원을 지나 향한 곳은, 이전부터 인간만 고용하기로 유명한 첨단 고급 요양원 "성 마리아 요양 센터"였다.
미아, 여기서 내려 줘.
이 앞은 시위대로 길이 꽉 막혔어.
...응.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할게, 정말 이렇게 할 거야?
아 벌써 몇십 번째야, 나 마음 정했다니까!? 기필코 그레이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말 거라고!
그리고, 지금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지휘관뿐이야.
하지만 널 보러 오지도 않고 계속 수하 인형만 내세우는데, 정말 믿을 수 있을까?
"교관" 씨 말대로라면, 지금은 중요한 일로 바빠서 다 끝나는 대로 만나겠댔지...
내 기우면 좋겠지만, 그 사람은 당장 네 도움이 필요해서 급하게 공수표 하나 끊어 준 걸지도 몰라.
뭐어, 기댈 곳이 있었으면 나한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겠지.
지금 안전 조치 때문에 단속 무지 빡세져서 도시 밖에 있는 인형들은 들어오지도 못하잖아.
내가 대신 통행 허가를 받아 주는 것 말곤 달리 방도가 없어.
...마음 굳혔다면 더는 말 안 할게.
응. 아무튼, 언니한테 줄 꽃은? 아직도 샴페인색 장미를 좋아하려나?
꽃은 뒷좌석에 있어.
네 사촌언니는 널 엄청 아끼잖아, 뭘 주든 다 좋아할 거야.
넬레는 뒷좌석에서 꽃다발을 집어 들고는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에휴... 그런 소리 들으니까 자괴감 든다.
......
우리 집안 사람들 모두 나를 투명인간 취급 아니면 겉으로는 잘해 주는 척하면서 뒷담화나 까고, 진심으로 신경써 주는 사람은 사촌언니뿐이니...
가능하면 언니를 끌어들이고 싶진 않지만...
도와줄 사람이 언니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네...
다 이해해 줄 거야.
...그러면 좋겠다.
넬레는 마음을 다잡아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소란스러운 인파 때문에 넬레는 벽에 바짝 붙어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인파는 여기저기서 구호를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수시로 시위 전단지가 눈앞에서 흩날렸다.
하지만 머리 위로 굳게 닫힌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오만하게도 길거리의 "소음"을 차단했다.
<size=50>생명은 평등하다! 의료 인형 규제 웬말이냐! 웬말이냐!</size>
<size=50>생명은 평등하다! 의료 인형 규제 웬말이냐! 웬말이냐!</size>
요양 센터 입구 맞은편의 길에서, 시위대는 진압방패를 든 경찰들의 저지선에 가로막혔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거센 파도처럼, 그들의 난잡한 외침과 순수한 분노의 고함은 하늘로 솟구쳤다.
<size=50>이곳은 병원입니다!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size>
<size=50>물러나십시오! 모두 물러나십시오!</size>
<size=50>지금 우리 애들이 죽어가는데! 우리 보고 조용히 하라 이거냐!</size>
<size=50>네놈들이나 물러나라! 이 기득권의 개들아!!!</size>
분노가 담긴 깃대가 파도처럼 일어, 맹렬하게 진압방패를 두들겼다.
저기,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아가씨, 지금 성 마리아 요양 센터는 휴원 중입니다.
제 사촌언니 병문안하러 왔어요.
증명서와 방문 허가증 제시해 주십시오.
넬레는 차분히 투명한 서류 봉투를 꺼내, 미리 꼼꼼하게 준비한 서류를 하나씩 제시했다.
이동식 단말기에 정보를 입력해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통행로를 열으라 손짓했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시위대는 뿌리쳤지만, 그들의 외침은 뿌리치지 못한 넬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메이어 씨, 코넬리아 슈펠 씨가 방문하셨습니다.
안내 간호사가 버튼을 누르자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열린 방으로부터 나온 바람은 상쾌했다. 바깥으로 난 발코니의 거대한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화창한 햇빛이 방 구석구석을 비춰, 넬레는 순간 눈이 부셨다.
구석의 축음기에선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잔잔하게 흘러나왔고, 공기 중 풍기는 천연 과일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넬레야!
딸이라며? 진짜 축하해 언니!
이게 얼마만이니, 너무 보고 싶었어!
사촌언니가 침상에서 일어나려 하는 걸 본 넬레는 황급히 달려가 제지했다.
어휴 언니야, 얌전히 누워있어야지 왜 일어나려고 그래.
아하하... 우리 넬레 봐서 흥분했나 봐.
널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너 대학교 졸업식?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걸 뭐.
넬레는 의자를 끌어당겨 침상 옆에 앉았다.
몸은 괜찮아?
나야 쌩쌩하지~
너야말로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 얼굴도 엄청 초췌하네.
요즘 따라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봐.
...갈라테아 때문이야?
......응.
하아... 아직도 외출할 때마다 조마조마해. 사람들이 다들 갑자기 날 때리려고 달려올 것 같아서...
조심하렴,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며칠 전만 해도 그 인형 살인 사건이 있었잖아?
나도 정말 엄청 무서웠어, 우리 집 인형들은 모두 검사 통과해서 망정이지...
응... 진짜, 세상살이 불안해서 보디가드를 잔뜩 데리고 있어야 그나마 안심이 될 지경이야.
집에서 붙여 준 인형들은 검사 통과했어?
미아는 통과했는데, 몇 명이 아직 수속을 못 밟아서...
그럼 안 되지!
그럼 아직 검사 못 받은 인형들은 지금 어디 있어? 내가 가서 허가증 따 줄게.
지금 오펜바흐구 외곽의 임시 보관소에 있어, 총 8명.
그리폰 인형 쪽 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넬레는 한시름 놓았다.
8명? 잘했어, 이제야 좀 많이 데리고 다닐 줄 아는구나.
갈라테아 그룹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때 불 난 뒤로 매일 악몽을 꾼다니까...
아 진짜 갈라테아 얘기만 나오면 열이 뻗치네!
메이어가 넬레의 손을 꼬옥 쥐고 인상을 팍 썼다.
네가 그토록 존경하던 그레이 교수가 설마 윤리관도 없는 살인마였다니!
그년 때문에 너까지 욕먹고 있는 거 아니니...
......
우리 넬레 어떡해... 우리 집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한 앤데...
어떻게 장래가 창창한 애를 망쳐 놓는지 원...
...됐어, 언니.
넬레는 가슴 속에서 아우성치는 진실을 억누르면서 사촌언니의 손을 고쳐쥐었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까 긍정적으로 내다봐야지.
그렇지... 그래서, 앞으로 어떡할지 계획 세웠니?
아직은. 일단 여기저기 일자리 알아보는 중이야.
그런데 갈라테아 일 터졌던 게 너무 커선지, 이력서에서 그 한 줄만 보면 다들 기겁을 하더라구...
하아...
일자리는 언니도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네... 외할아버지 댁에 연락은 해봤어?
엄마 돌아가시고 안 찾아뵌 지 벌써 몇 년 됐잖아.
어차피 우리 꼴도 보기 싫어하시는데.
얘가, 외할아버지는 입만 독하지 실제로는 너 엄청 걱정하고 계신다?
너도 알잖아, 우리 집안의 우리 세대는 죄다 공부머리 나빠서 대학 붙는 것마저 외할아버지가 건물 몇 채나 기부하고서야 됐던 거.
완전 실력으로 붙어서 장학금까지 받은 사람은 너뿐이야!
......
그러니까 시간 날 때 외할아버지 뵈러 좀 가고 그래, 알았지? 어르신 혼자 화이트존의 요양원에서 지내느라 얼마나 외로운데, 너 보면 엄청 반길 거야.
그리고 말 좀 잘 하면 어디 일자리 구해 줄지도 모르고.
화이트존...?
아아 그렇지, 넌 안 가봤겠구나? 그럼 외할아버지 뵈러 가는 김에 거기 구경도 하고 마음도 진정시키고 그러렴.
...알았어. 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외할아버지 자주 뵈러 가라셨으니, 약속 지켜야지.
그리고 말이야아...
메이어는 넬레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봤다.
그 시선에 넬레는 약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왜, 왜 그래...?
넬레야, 너 관심 있는 사람 아직도 없구나?
어?! 아, 그, 그런 건 흥미 없어서...
얘도 참, 이제 그럴 나인데 좋은 남자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지!
언니가 몇 명 소개시켜 줄까? 최근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 밑의 연구생이 인물이 참——
스톱 스톱! 이제 막 출산한 사람이 뭐라는 거야!
지금은 언니 몸이랑 아기를 더 챙겨야지!
그런 일은 하나도 안 급하니까 언니가 몸조리 잘하고 퇴원한 다음에 얘기하자.
내가 언제 퇴원할지 어떻게 아니... 아 그렇지!
넬레, 언니 친구 소개시켜 줄게.
그, 그럴 필요 없다니깐!
이 언니한테 맡기고 내일 바로 언니 친구 만나러 가. 제법 친한 사인데, 연예인이었다가 지금은 보건부 장관한테 시집간 사람이야. 그 장관도 외할아버지가 밀어준 사람이고.
그래, 이렇게 된 거 외할아버지 뵈러 가는 것도 걔가 시간 잡아 주면 되겠다.
메이어는 핸드백을 열어 명함 한 장을 꺼내 넬레에게 주었다.
"미스 헤베"... 요즘 시대에 아직도 종이 명함을 쓰는 사람이 다 있네?
어머, 헤베 씨 엄청 유명했는데 몰라? 고전 영화 리메이크가 유행했을 때 되게 잘 나가는 배우였어.
아주 흑백 필름 찢고 나온 것 같은 클래식한 미인상이야, 취향도 엄청 클래식하고.
어... 언니, 고맙지만 그 사람도 분명 엄청 바쁠 텐데, 나 때문에 시간 잡아먹으면 미안하잖아...
뭘 새삼스럽게, 이번에 신세 지고 다음에 갚으면 되지.
그리고 마침 올해 보건부에 젊은 대학생들 몇 명 들어왔으니까, 너랑 말 통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언니 친구한테 얘기해 봐.
속으로는 한숨을 푹 쉬면서, 넬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았어.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넬레는 메이어를 꼭 껴안았다.
목적을 달성한 기쁨과, 사촌언니에 대한 미안함을 얼굴에 드러내면서.
<color=#A9A9A9>지휘관, 계획의 첫 단계는 달성했어요.</color>
<color=#A9A9A9>정말 약속대로 저와 만나 주실 건가요?</color>
철컥.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루니샤가 돌아왔다.
저 보고 싶으셨어요?
......
그 목소리에 지휘관은 부스스 눈을 떴다. 손발이 꽁꽁 묶인 탓에 잠자리가 영 불편했다.
장소 옮기게?
아직은요.
루니샤는 싱긋 웃으며 구속을 풀어 주었다.
내가 이대로 도망칠 거란 걱정은 안 해? 대성당 밖은 사람이 잔뜩인 길거리인데.
걱정 안 해요, 빌이 제 가슴 속에 폭탄을 심어둬서, 당신이 제게서 50m 이상 멀어지면 폭발하거든요.
......
그리고, 지휘관님은 절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
지휘관은 얼얼한 손발의 관절을 풀면서 테이블 앞에 앉아 술 한 잔을 따랐다.
지휘관님은 성당에 다니시나요?
...맞혀 봐.
제 기억에, 당신이 종교인이란 흔적은 없네요.
맞아, 난 신 안 믿어.
왜요?
지금까지 마주쳤던 모든 역경을, 나는 매번 나 자신과 내 곁의 인형들의 힘으로 빠져나왔어.
그런데 신이 있다면 그때마다 대체 어디 있었지? 정말 있다면, 왜 나를 이런 구렁텅이에 빠뜨린 걸까?
하지만 지금 당신이 여기서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다 신의 안배 덕분이죠.
그녀가 무수한 죽음의 실타래 속에서, 당신이 살아남는 한 가닥을 찾아내 엮어서 길게 잇고 있기에, 당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거예요.
......
느껴지지 않으세요? 지금도 그녀는 연민 어린 눈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데.
지휘관은 루니샤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잔을 비웠다.
그 눈빛,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군요.
너, 지금 말투가 댄들라이랑 엄청 비슷했어.
항상 녀석이 이상한 소리만 재잘대서 귀찮아했는데, 이러고 있자니 갑자기 보고 싶어지네.
.......
지휘관은 다 마신 술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의 소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루니샤, 같이 도망치자.
제가 왜요?
그럼 묻자, 왜 여기 남으려 해?
빌이 시켰으니까요.
......
말해보세요, 제가 왜 도망쳐야 하죠?
너는 윌리엄이 원하는 "누나"가 아니니까.
루니샤의 눈에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
그렇지 않다면 네가 여기 있을 리 없지.
윌리엄 자식이 자기 "누나" 되살리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쳐댔는데, 설마 이런 데다 내버려두겠어?
......
제가 이 부분을 잘라내기만 하면, 빌은 절 보러 올 거예요. 예전처럼.
...잘라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진작에 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루니샤인 동시에 댄들라이이자 M4A1이야.
...나와 약속을 한 M4.
그들이 절대 순순히 잘려나가게 가만 있을 리가 없지!
<size=50>닥쳐요!</size>
――스윽.
세상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쓴웃음을 지으며, 지휘관은 다시 미지의 여정에 올랐다.
...철컥.
넬레가 호텔 문을 열자 미아가 바로 맞이했다.
다녀왔어.
어때, 일 잘 풀렸어?
응... 언니가 통행 허가 받아 줬어.
자, 여기. 나중에 교관 씨 보면 줘.
알았어.
미아는 통행 허가증 몇 장을 조심스럽게 받아서 백에 집어넣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하아... 언니가 외할아버지 뵈러 화이트존에 가래, 일자리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포크트 씨가 너한테 좀 엄격하시긴 해도, 일자리 하나 알아봐 주는 것쯤은 부탁할 수 있을 거야.
도와 달라 하려고 가는 게 아니야, 그냥 엄마 유언 따라서 얼굴 보러 가는 거야.
그럼 왜 그렇게 고민해?
후우...
내일, 외할아버지 보러 가기 전에 언니 친구도 만나래. 맞선 자리 알아봐 주겠다고.
풉.
뭘 웃어!?
아니, 그냥 웃긴 일 생각나서.
......
넬레는 소파에 흐느적 드러누웠다.
솔직히 거절하려 했는데, 내가 언니를 이용해서 지휘관의 인형들한테 통행 허가증 준다고 생각하니...
대답한 이상 보러 가야지.
가서 대충 핑계 대면서 빠져나오면 되잖아?
응...
넬레는 발을 툭툭 털어 슬리퍼를 벗었다.
어렸을 적엔 사촌언니 빼고 친척들 다 싫었어. 하나같이 가식적에,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용해 먹을 생각만 잔뜩이라서.
그런데... 이젠 나도 그런 꼴이 된 거 같네...
아니야, 넬레.
그 사람들은 그냥 숨쉬듯 타인을 이용해 먹지만, 넌 달리 방도가 없어서 타인에게 기대는 거야.
...일 다 끝나면 가서 사과할 거야.
그나저나, 교관 씨한테선 뭐 소식 없어?
아직은. 여전히 안전 조치 때문에 도시 밖에 발이 묶였어.
그럼 빨리 통행 허가증 줘야겠다.
...그래.
그래도 한 번 더 충고할게, 넬레. 그들과 엮이는 건 너무 위험해.
알아, 하지만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어.
선생님이... 이렇게 모멸받으면서 돌아가시게 둘 순 없어.
미아, 지금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지휘관뿐이야.
......
미아는 마지못해 한숨을 푹 쉬곤 물건을 잘 챙기고 나갈 채비를 했다.
교관 만나러 갈게.
가서 지휘관에 대해서도 꼭 물어봐.
응.
좀 쉬고 있어, 내일 힘든 만남이 두 번이나 있을 예정이잖아.
으으... 아라썽...
미아는 방을 나섰고, 넬레는 기운 없이 세수하러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