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침묵
어둠이 여러분의 창문을 두드릴 때, 명심하세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꾸는 겁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바꾸게 두지 마세요.
심야, 넬레의 방.
따뜻하고 푹신한 이부자리 덕분일까, 넬레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몸에 감고 뒤척이며 잠꼬대까지 하면서.
수강 신청... 시작...한드으...
시스, 테엠... 또 터져써어어...
아... 아! 놓쳤드아! 수업... 그레이 교수임...
하이델베르크 대학, 제3기초강의동 복도.
급한 발소리를 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넬레가 복도의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5분 일찍 도차아악!
휴우, 하마터면 그레이 교수님 강연을 놓칠 뻔했――!!!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넬레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평소라면 썰렁할 터인 복도가, 지금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같이 안간힘으로 고개를 쭉 빼들거나 팔을 높이 들어 강의실 안쪽을 녹화하려는 것으로 보아, 여기 모인 이들 모두 그레이 교수의 공개 강연을 들으러 왔음이 분명했다.
......
아니 어떻게 시작 30분 전부터 복도 자리밖에 안 남아?
그레이 교수님 얼마나 인기 많은데. 우리 의대 쪽은 수강 신청 시즌만 되면 쟁탈전 벌어지는 순위 0위 수업이야.
게다가 이번 강연에서 논문을 어떻게 쓰는지도 보여 주신댔어! 나 지금 논문 때문에 진짜 머리 터질 거 같았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논문...? 아, 최근에 발표한 그 자폐증의 뇌기능이 어쩌구 하던 그거 말이지? 그래서 강의 제목이――
너 보니까 아직 논문 걱정 없나 보네? 나한테 자리 좀 양보해 주라!
응? 아 뭐하는 거야 밀지 마!
틈새가 없던 인파의 장벽이 흔들렸다. 그리고 어떡할까 고민하던 넬레는, 그 틈새 사이로 기적처럼 난 "통로"를 포착하고 눈을 반짝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야, 누가 나 밀었어!
지가 나 밀었으면서 무슨 소리야!
가방으로 급소를 보호하면서, 넬레는 혼잡한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길을 더듬어 나아갔다.
으아악 다들 밀지 마! 조금만 자리를 양보하면——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를 마법의 주문 삼아 장애물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윽고 학생들 사이로 빛이 보였다. 종착점이 머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장애물까지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한 넬레의 시야가 한순간에 탁 트였다. 그리고...
괜찮아요, 학생?
괘,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우선 출석하시죠.
그레이 교수의 말을 듣고 조수가 리스트를 들고왔다.
학생의 이름을 찾아서 서명하세요.
아, 저... 실은, 이 강연 수강 신청에 떨어져서...
그래서... 방청하려고 온 거라...
그 말에 주위의 학생들이 술렁였다.
괜찮아요. 강의실 크기 때문에 수강 인원 제한으로 인해 등록에 실패해서 방청하러 온 학생이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강연 시간이 조금 긴 편이므로, 자리가 없는 분은 출석 체크하면서 조수에게 방석을 받으세요.
학생도 성명과 전공을 등록해 주세요.
아, 네...
응용물리학과 1학년, 코넬리아 슈펠입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가까이서 들은 학생들이 불만으로 다시 한 번 술렁였다.
응용물리학과? 아니 그쪽이 우리 의학과 수업은 왜 들어?
그래! 우리 과만 해도 수강 신청 떨어진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아예 딴 전공이면 괜히 자리 차지하지 좀 마!
......
그레이가 검지를 세웠다.
여러분, 정숙하세요.
강의실은 바로 조용해졌다.
이번 「자폐증과 뇌기능 네트워크」 강연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공개 강연입니다. 전공에 상관 없이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수강할 수 있습니다.
코넬리아 학생, 방석 받고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후, 넬레는 제일 앞줄 자리 옆의 빈 바닥을 찾아 서둘러 앉았다.
그러고 보니, 저도 응용물리학과와 제법 인연이 있답니다.
제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응용물리학과에 아는 선배가 한 명 있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꾸준한 노력은 양립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그 선배는 예외였죠.
지금까지도 그 선배만큼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에 꾸준한 노력파인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제가 장래 때문에 망설일 때에도 그 선배는 더욱 놀라운 결정을 했죠. 원래 전공에서 이룩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신흥 연구 분야로 뛰어들었다면, 믿겨지시나요?
여러분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하자면...
그레이가 가장 앞줄에 있는 학생 한 명의 탁자를 톡 두드렸다.
학생은 전공이 무엇이죠?
임상의학입니다.
만약 학생에게 지금 당장 핵물리학으로 전과하라 한다면, 이번 학기 내로 단편 논문이라도 제출할 수 있을까요?
에... 못하죠, 지금 제가 배우는 거랑 전혀 다르잖아요.
그렇겠죠. 이것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 선배는 고작 2년도 되지 않아 저와 함께 인류 의학의 전망에 대해 거침없이 토론할 만큼의 의학 박사급 지식을 터득했습니다. 심지어는 여가시간을 활용해 SCI급 논문을 3편이나 발표하기도 했죠.
우와...
그 선배와는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주 편지를 통해 학술적 성과를 교환하고 있어요.
다만 그저 대단하다고 이 선배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에?
제가 이 선배를 만난 것은 제가 진로로 고민하던 때입니다.
베를린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에게, 이 계급과 자원이 고착화된 세상에서 발전을 도모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죠.
더군다나, 그땐 지금보다도 학벌주의가 더 심각했어요. 의학을 전공하는 것과 의사가 되는 것 사이에마저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으니까요.
가문의 후광을 받지 않는 의사가 오히려 더 드물었고, 가족 구성원 중 아주 약간이라도 의학계 배경이 있다면 무조건 앞날이 순탄했죠.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학이라는 이 학문을 사랑하지만, 아무런 배경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경험을 더 쌓든 학문을 더 깊게 파고들든... 앞날이 막막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응용물리학과의 선배가, 아무런 배경도 없는 저를 글로벌급 연구 프로젝트에 초대했죠. 이름만 올리면 세계의 어떤 내로라하는 병원에도 취직할 수 있을 정도의 프로젝트에.
그 선배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레이, 나는 누구보다 네가 재능을 타고났다고 믿어. 내 곁으로 와, 너는 의학계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될 거야. 너의 합류가 이 세대의 모두에게 큰 영향을 줄 거야."
사람들은 제게 자주 묻습니다, 이렇게까지 이룬 것이 많으면서 왜 여전히 대학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지. 왜 더 많은 걸 할 시간에 직접 연구생의 논문을 검토하는지.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제 실험실에서의 일 외에 일주일에 4번 방문 강연을 하고 있죠.
물론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여러분과 같은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기 떄문입니다. 그때, 선배가 저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
저의 실험실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실습을 희망하시는 분은 제 조수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당신이 프랑크푸르트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든, 바이에른의 작은 주택에서 살든, 전혀 상관 없습니다.
의학을 사랑하고, 병을 치료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품은 이라면 그 누구나.
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습니다.
강단 아래의 모두는 조금 전까지의 불만과 불쾌함을 전부 잊은 듯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자아, 그럼 강의를 시작할까요?
그레이의 강연은 그레이와 그녀를 둘러싼 수줍게 웃는 어린이 자폐증 환자들 여럿의 사진으로 끝을 맺었다.
이번 수업은 여기까지. 여러분, 모두에게 수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레이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기가 무섭게 강의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요동쳤고, 넬레는 감동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레이 교수의 전문성, 그리고 자폐증 환자를 상대할 때의 인내심과 상냥함이 넬레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끝내기 전 5분간 질문 시간을 갖겠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아직 감동에 젖어 있어선지 먼저 선뜻 나서는 학생은 없었다.
강연 내용에 한해서 질문하실 것 없습니다. 다른 학술면에서도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 말에 넬레가 얼른 손을 들었다.
그레이 교수님, 교수님이 최근 발표하신 논문과 추천 학술지를 읽어봤습니다. 교수님은 인형 기술과 인류 신경학 사이의 연관성에 관심이 높으신 것 같으십니다.
그래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의 신경망을 원형으로, 만약 미래에 인형이 정말로 인간과 같은 독립적인 자아와 감정, 의식을 지니게 된다면, 인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거라고 보시나요?
아주 좋은 질문이군요.
확실히, 저는 근래 이 방면의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는 얽힌 범위가 매우 넓어서, 제가 주목하는 과제는 거의 진전이 없다고 볼 수 있겠어요. 인형 기술이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한 영향에 관해선...
그레이가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런 기술이, 인류에게 복이 될지 해가 될지는 저로서도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마치, 제르튀르너가 모르핀을 진통제로 분류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는 오늘날 인류가 모르핀으로 무슨 짓을 할지 꿈에도 상상 못했을 겁니다.
기술에 죄는 없다는 말씀인가요?
제 말은, 과학의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에 묶인 우리는 미래를 예견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우리가 올바르다 생각하는 일을 흔들림 없이 행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지 알 수 있죠?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그 선배님처럼, 전공 분야를 뛰어넘는 연구를 한 선택이 성공했기에 그분이 모두에게 옳다고 평가받았잖아요.
일반인에 불과한 저희는 어떡해야 올바른 선택인지 알 수 있죠?
올바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선택했기에 올바른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온힘을 다해 올바르게 만들라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교수님.
넬레는 그레이의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 당시만 해도, 그녀는 그레이 교수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질문 시간이 끝나자, 그레이가 메달을 집어 보였다.
떠나기 전 여러분께 선물을 드리려 합니다.
이 선물은 방금 저 학생분의 질문과도 다소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래에 어떤 길을 가게 되든, 분명 이 세상에 드리운 어둠으로부터 유혹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의 도덕성과는 무관합니다, 이 세계 자체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니까요.
그레이의 손 안에서, 메달은 형광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둠이 여러분의 창문을 두드릴 때, 명심하세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꾸는 겁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바꾸게 두지 마세요.
이 메달이, 여러분이 어느 날 망설여질 때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와아아!
강의실의 학생들은 불길처럼 열정적으로 일어나 강단으로 몰려들어 그레이의 조수를 에워쌌다.
넬레는 자리에서 주저하다, 결국 메달을 받기를 포기했다.
방청하러 온 응용물리학과 학생인데, 저런 걸 받자니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슈펠 학생.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자 무언가가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받아보니, 바로 그 메달이었다.
앗... 교수님...!
인사하려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레이는 이미 인파에 감싸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운 알람 시계가 넬레를 깨웠다.
아직 비몽사몽인 넬레가 허전한 손바닥을 몇 번 쥐락펴락하다, 문득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났다.
메달!
넬레는 바로 집 안을 온통 뒤졌다.
다행히 얼마 안 지나 졸업 사진을 넣어 둔 상자 속에서 그 메달을 찾아냈다.
메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하지만 그날의 "그레이"는...
......
고통이 심장을 움켜쥐어, 숨도 쉬기 버거웠다.
눈물이 망가진 스포이트처럼 뚝뚝 흘렀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신을 딴 데 돌리기 위해 넬레는 눈물을 훔치고 주방에 달려들어갔다.
쾅!
넬레가 음식을 한아름 안고서 J가 감금된 방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J 요원, 밥 먹어요.
......
J는 바닥에서 부스스 일어나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여오세여 아가시... 지금 새벽 3시 40분이에요...
이 시간에 먹는 끼니는 대체 뭐라고 부릅니까, 예?
그래서, 안 먹어요?
차가운 어조와 붉게 부은 눈두덩이, 그리고 어렴풋한 술냄새... J는 지금 넬레의 신경을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직감이 들었다.
먹어요, 먹을게요.
......
J는 넬레가 가져온 반찬통의 뚜껑을 열면서 슬쩍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요.
지휘관이 화나게 했어요?
어휴, 그 인간은 꼭 그렇게 매정하고 쌀쌀맞아서 문제라니까요. 툭하면 문자 씹어서 사람 걱정시키고, 화나게 만들고...
아뇨... 지휘관한테선 도움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문자는 꽤 금방금방 답장해 주던데요.
......
그럼 무슨 일로 그렇게 예민해졌어요?
...그냥요.
올바른 일을 하려고요.
올바른 일?
...네, 선생님은 제게 올바른 일을 하라고 가르쳤어요.
뭐어 그러셔요, 뭘 할 셈인지 물어도 안 알려 주시겠구만.
그럼 그 선생님 얘기나 합시다. 자주 밥 사 주고 그랬어요?
아뇨.
이유도 없이 밥 사 주는 사람은 다 꿍꿍이 있는 사람이라잖아요.
쓰으읍 젠장 반박할 수가 없네...
그럼 넬레 씨가 그 선생 얘기 해보세요.
제가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분이 쓰신 「복내측 시상하핵 전전두엽 피질이 ADS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설명」 이란 논문을 보고예요. 당신도 들어봤죠? 엄청 유명한 논문이었으니까.
뭐, 전 그때만 해도 상측 두구 피질 연구 쪽의 전망이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요.
............
지구 언어 맞아요?
그럼 뭐 외계 언어게요?
아무튼,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당시 인기 있었던 연구에서, 현대의 보편적인 발달 집단에서 상측 두구 회백질의 부피가 ToM 형성과 관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얼마 안 가 제 방향성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선생님의 연구실이 발표한 논문이, MRI 스캔을 토대로 연구한 결과 ASD에 그러한 관련성이 없음을 증명했거든요.
외계어 맞구만요 뭐...
넬레는 어느새 맥주 한 캔을 비우고 하나 더 땄다.
아 기다려 봐요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까.
우선 선생님의 그 논문부터 분석해 줄게요.
............
넬레가 아주 능숙하게 10편이 넘는 문헌 자료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J는 마라톤 회의에 맞먹을 지옥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얼마 후, 실컷 문헌을 분석해서 평정심을 되찾은 넬레가 넋이 나간 J를 내버려두고 실험실로 왔다.
그리고, 지휘관에게 통신을 걸었다.
지휘관님, 저예요.
들립니다, 넬레 씨.
내일... 아니,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말 마음을 굳히셨습니까?
네.
페르시카 박사님께 연락해 주시겠어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그분께 연락하라 전달하죠.
...이런 시간에 연락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통신을 종료한 넬레는 점점 다시 슬픔에 젖어들었다.
손에 메달을 꼭 쥐고서, 그녀는 조용히 그레이의 시신이 든 보디백 옆에 앉았다.
......
선생님... 저는 지금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나요?
방은 정적에 빠져, 유일한 소음인 에어컨의 가동음이 더욱 크게 들렸다.
응용물리학에서 임상의학으로 전과하고 선생님을 몇 년이나 따라다녔는데...
언제 바꿔치기 당한 건지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손 안의 메달이 하얀 전등의 빛을 반사해 넬레의 씁쓸한 미소를 비췄다.
선생님... 지금부터 제가 선생님의 몸으로 무얼 하려는지 아신다면...
그래도 여전히 상냥하게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부스럭..."
실험복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마치, 오래 전 선생님의 실험실에서 실험에 몰두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방해하지 않으려고 뒤에서 몰래 지켜보고 가려다 실험복이 스쳐서 들키던 때처럼.
이는 그레이 선생님만의 상냥한 관심 표현이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우리가 올바르다 생각하는 일을 흔들림 없이 행하는 것뿐이죠.
또, 넬레는 그레이 선생님이 따뜻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감싸 주는 기분이 들었다.
지익...
보디백의 지퍼가 내려졌다.
가장 먼저 넬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복부에 올려진 그레이의 팔.
그리고 그 가늘고 새하얀 팔에 이어진, 상냥하게 자신을 일으켜 세워 주던 손.
하지만 그 손에 온기는 없었다. 잔혹하리만치 차갑기만 했다.
......
탁자 옆의 기록 장치에 대고, 넬레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현재 시각, 11월 4일 오전 4시 45분.
이것은... 앞으로의 실험을 위한 녹화 영상이며, 부검은 코넬리아 슈펠 본인이 진행한다.
그리고 그녀는 위생면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그레이의 시신에 묻은 때를 닦아냈다.
기초 청결 작업 완료. 이어서 그레이 선생님의 신체에서 개조된 부위를 확인한다.
넬레는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헤집어, 그레이의 머리에서부터 개조 흔적을 살폈다.
두부에 뇌외과 수술 흔적을 발견. 상세 사항은 아직 알 수 없음.
차례대로 목, 어깨, 팔을 검사한 다음, 넬레는 살며시 그레이의 손을 들었다.
왼팔은 소실. 오른손은 손바닥이 개조되어, 중지와 약지 사이로 갈라진다...
철컥.
실험실 문이 열려 넬레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코니?
......
수술복 차림인 콘스탄스는 실험대 위에 놓인 그레이의 시신과 눈이 빨갛게 부은 넬레를 번갈아 바라봤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대뜸 바꾼 실험 방향을 우리 둘이서 철야해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잖아.
콘스탄스는 가방을 내려놓고 실험실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나 말고 너 도와줄 사람 또 있어?
......
고마워.
콘스탄스는 차분하게 기록 작업을 이어받았다.
네가 이러려는 이유는 아직도 이해 못하겠지만, 적어도 옳다고 생각하니까 이 일을 하는 거겠지.
게다가, 너 한 번 마음먹으면 죽어도 안 바꾸는 고집쟁이를 무슨 수로 말려.
난...
잔말 됐고, 얼른 작업 시작하자!
문득 떠오른 기억과 겹쳐 보인 이 눈앞의 장면에, 넬레는 마침내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응.
그렇게 두 사람이 실험 준비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어느덧 드리운 서광이 조금씩 밤하늘을 물들여 떠오르는 태양의 윤곽을 드러냈다.
전체 대사 보기 (188줄)
심야, 넬레의 방.
따뜻하고 푹신한 이부자리 덕분일까, 넬레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몸에 감고 뒤척이며 잠꼬대까지 하면서.
수강 신청... 시작...한드으...
시스, 테엠... 또 터져써어어...
아... 아! 놓쳤드아! 수업... 그레이 교수임...
하이델베르크 대학, 제3기초강의동 복도.
급한 발소리를 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넬레가 복도의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5분 일찍 도차아악!
휴우, 하마터면 그레이 교수님 강연을 놓칠 뻔했――!!!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넬레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평소라면 썰렁할 터인 복도가, 지금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같이 안간힘으로 고개를 쭉 빼들거나 팔을 높이 들어 강의실 안쪽을 녹화하려는 것으로 보아, 여기 모인 이들 모두 그레이 교수의 공개 강연을 들으러 왔음이 분명했다.
......
아니 어떻게 시작 30분 전부터 복도 자리밖에 안 남아?
그레이 교수님 얼마나 인기 많은데. 우리 의대 쪽은 수강 신청 시즌만 되면 쟁탈전 벌어지는 순위 0위 수업이야.
게다가 이번 강연에서 논문을 어떻게 쓰는지도 보여 주신댔어! 나 지금 논문 때문에 진짜 머리 터질 거 같았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논문...? 아, 최근에 발표한 그 자폐증의 뇌기능이 어쩌구 하던 그거 말이지? 그래서 강의 제목이――
너 보니까 아직 논문 걱정 없나 보네? 나한테 자리 좀 양보해 주라!
응? 아 뭐하는 거야 밀지 마!
틈새가 없던 인파의 장벽이 흔들렸다. 그리고 어떡할까 고민하던 넬레는, 그 틈새 사이로 기적처럼 난 "통로"를 포착하고 눈을 반짝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야, 누가 나 밀었어!
지가 나 밀었으면서 무슨 소리야!
가방으로 급소를 보호하면서, 넬레는 혼잡한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길을 더듬어 나아갔다.
으아악 다들 밀지 마! 조금만 자리를 양보하면——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를 마법의 주문 삼아 장애물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윽고 학생들 사이로 빛이 보였다. 종착점이 머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장애물까지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한 넬레의 시야가 한순간에 탁 트였다. 그리고...
괜찮아요, 학생?
괘,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우선 출석하시죠.
그레이 교수의 말을 듣고 조수가 리스트를 들고왔다.
학생의 이름을 찾아서 서명하세요.
아, 저... 실은, 이 강연 수강 신청에 떨어져서...
그래서... 방청하려고 온 거라...
그 말에 주위의 학생들이 술렁였다.
괜찮아요. 강의실 크기 때문에 수강 인원 제한으로 인해 등록에 실패해서 방청하러 온 학생이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강연 시간이 조금 긴 편이므로, 자리가 없는 분은 출석 체크하면서 조수에게 방석을 받으세요.
학생도 성명과 전공을 등록해 주세요.
아, 네...
응용물리학과 1학년, 코넬리아 슈펠입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가까이서 들은 학생들이 불만으로 다시 한 번 술렁였다.
응용물리학과? 아니 그쪽이 우리 의학과 수업은 왜 들어?
그래! 우리 과만 해도 수강 신청 떨어진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아예 딴 전공이면 괜히 자리 차지하지 좀 마!
......
그레이가 검지를 세웠다.
여러분, 정숙하세요.
강의실은 바로 조용해졌다.
이번 「자폐증과 뇌기능 네트워크」 강연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공개 강연입니다. 전공에 상관 없이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수강할 수 있습니다.
코넬리아 학생, 방석 받고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후, 넬레는 제일 앞줄 자리 옆의 빈 바닥을 찾아 서둘러 앉았다.
그러고 보니, 저도 응용물리학과와 제법 인연이 있답니다.
제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응용물리학과에 아는 선배가 한 명 있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꾸준한 노력은 양립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그 선배는 예외였죠.
지금까지도 그 선배만큼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에 꾸준한 노력파인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제가 장래 때문에 망설일 때에도 그 선배는 더욱 놀라운 결정을 했죠. 원래 전공에서 이룩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신흥 연구 분야로 뛰어들었다면, 믿겨지시나요?
여러분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하자면...
그레이가 가장 앞줄에 있는 학생 한 명의 탁자를 톡 두드렸다.
학생은 전공이 무엇이죠?
임상의학입니다.
만약 학생에게 지금 당장 핵물리학으로 전과하라 한다면, 이번 학기 내로 단편 논문이라도 제출할 수 있을까요?
에... 못하죠, 지금 제가 배우는 거랑 전혀 다르잖아요.
그렇겠죠. 이것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 선배는 고작 2년도 되지 않아 저와 함께 인류 의학의 전망에 대해 거침없이 토론할 만큼의 의학 박사급 지식을 터득했습니다. 심지어는 여가시간을 활용해 SCI급 논문을 3편이나 발표하기도 했죠.
우와...
그 선배와는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주 편지를 통해 학술적 성과를 교환하고 있어요.
다만 그저 대단하다고 이 선배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에?
제가 이 선배를 만난 것은 제가 진로로 고민하던 때입니다.
베를린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에게, 이 계급과 자원이 고착화된 세상에서 발전을 도모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죠.
더군다나, 그땐 지금보다도 학벌주의가 더 심각했어요. 의학을 전공하는 것과 의사가 되는 것 사이에마저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으니까요.
가문의 후광을 받지 않는 의사가 오히려 더 드물었고, 가족 구성원 중 아주 약간이라도 의학계 배경이 있다면 무조건 앞날이 순탄했죠.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학이라는 이 학문을 사랑하지만, 아무런 배경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경험을 더 쌓든 학문을 더 깊게 파고들든... 앞날이 막막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응용물리학과의 선배가, 아무런 배경도 없는 저를 글로벌급 연구 프로젝트에 초대했죠. 이름만 올리면 세계의 어떤 내로라하는 병원에도 취직할 수 있을 정도의 프로젝트에.
그 선배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레이, 나는 누구보다 네가 재능을 타고났다고 믿어. 내 곁으로 와, 너는 의학계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될 거야. 너의 합류가 이 세대의 모두에게 큰 영향을 줄 거야."
사람들은 제게 자주 묻습니다, 이렇게까지 이룬 것이 많으면서 왜 여전히 대학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지. 왜 더 많은 걸 할 시간에 직접 연구생의 논문을 검토하는지.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제 실험실에서의 일 외에 일주일에 4번 방문 강연을 하고 있죠.
물론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여러분과 같은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기 떄문입니다. 그때, 선배가 저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
저의 실험실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실습을 희망하시는 분은 제 조수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당신이 프랑크푸르트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든, 바이에른의 작은 주택에서 살든, 전혀 상관 없습니다.
의학을 사랑하고, 병을 치료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품은 이라면 그 누구나.
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습니다.
강단 아래의 모두는 조금 전까지의 불만과 불쾌함을 전부 잊은 듯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자아, 그럼 강의를 시작할까요?
그레이의 강연은 그레이와 그녀를 둘러싼 수줍게 웃는 어린이 자폐증 환자들 여럿의 사진으로 끝을 맺었다.
이번 수업은 여기까지. 여러분, 모두에게 수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레이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기가 무섭게 강의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요동쳤고, 넬레는 감동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레이 교수의 전문성, 그리고 자폐증 환자를 상대할 때의 인내심과 상냥함이 넬레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끝내기 전 5분간 질문 시간을 갖겠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아직 감동에 젖어 있어선지 먼저 선뜻 나서는 학생은 없었다.
강연 내용에 한해서 질문하실 것 없습니다. 다른 학술면에서도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 말에 넬레가 얼른 손을 들었다.
그레이 교수님, 교수님이 최근 발표하신 논문과 추천 학술지를 읽어봤습니다. 교수님은 인형 기술과 인류 신경학 사이의 연관성에 관심이 높으신 것 같으십니다.
그래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의 신경망을 원형으로, 만약 미래에 인형이 정말로 인간과 같은 독립적인 자아와 감정, 의식을 지니게 된다면, 인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거라고 보시나요?
아주 좋은 질문이군요.
확실히, 저는 근래 이 방면의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는 얽힌 범위가 매우 넓어서, 제가 주목하는 과제는 거의 진전이 없다고 볼 수 있겠어요. 인형 기술이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한 영향에 관해선...
그레이가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런 기술이, 인류에게 복이 될지 해가 될지는 저로서도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마치, 제르튀르너가 모르핀을 진통제로 분류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는 오늘날 인류가 모르핀으로 무슨 짓을 할지 꿈에도 상상 못했을 겁니다.
기술에 죄는 없다는 말씀인가요?
제 말은, 과학의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에 묶인 우리는 미래를 예견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우리가 올바르다 생각하는 일을 흔들림 없이 행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지 알 수 있죠?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그 선배님처럼, 전공 분야를 뛰어넘는 연구를 한 선택이 성공했기에 그분이 모두에게 옳다고 평가받았잖아요.
일반인에 불과한 저희는 어떡해야 올바른 선택인지 알 수 있죠?
올바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선택했기에 올바른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온힘을 다해 올바르게 만들라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교수님.
넬레는 그레이의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 당시만 해도, 그녀는 그레이 교수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질문 시간이 끝나자, 그레이가 메달을 집어 보였다.
떠나기 전 여러분께 선물을 드리려 합니다.
이 선물은 방금 저 학생분의 질문과도 다소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래에 어떤 길을 가게 되든, 분명 이 세상에 드리운 어둠으로부터 유혹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의 도덕성과는 무관합니다, 이 세계 자체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니까요.
그레이의 손 안에서, 메달은 형광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둠이 여러분의 창문을 두드릴 때, 명심하세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꾸는 겁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바꾸게 두지 마세요.
이 메달이, 여러분이 어느 날 망설여질 때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와아아!
강의실의 학생들은 불길처럼 열정적으로 일어나 강단으로 몰려들어 그레이의 조수를 에워쌌다.
넬레는 자리에서 주저하다, 결국 메달을 받기를 포기했다.
방청하러 온 응용물리학과 학생인데, 저런 걸 받자니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슈펠 학생.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자 무언가가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받아보니, 바로 그 메달이었다.
앗... 교수님...!
인사하려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레이는 이미 인파에 감싸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운 알람 시계가 넬레를 깨웠다.
아직 비몽사몽인 넬레가 허전한 손바닥을 몇 번 쥐락펴락하다, 문득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났다.
메달!
넬레는 바로 집 안을 온통 뒤졌다.
다행히 얼마 안 지나 졸업 사진을 넣어 둔 상자 속에서 그 메달을 찾아냈다.
메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하지만 그날의 "그레이"는...
......
고통이 심장을 움켜쥐어, 숨도 쉬기 버거웠다.
눈물이 망가진 스포이트처럼 뚝뚝 흘렀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신을 딴 데 돌리기 위해 넬레는 눈물을 훔치고 주방에 달려들어갔다.
쾅!
넬레가 음식을 한아름 안고서 J가 감금된 방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J 요원, 밥 먹어요.
......
J는 바닥에서 부스스 일어나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여오세여 아가시... 지금 새벽 3시 40분이에요...
이 시간에 먹는 끼니는 대체 뭐라고 부릅니까, 예?
그래서, 안 먹어요?
차가운 어조와 붉게 부은 눈두덩이, 그리고 어렴풋한 술냄새... J는 지금 넬레의 신경을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직감이 들었다.
먹어요, 먹을게요.
......
J는 넬레가 가져온 반찬통의 뚜껑을 열면서 슬쩍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요.
지휘관이 화나게 했어요?
어휴, 그 인간은 꼭 그렇게 매정하고 쌀쌀맞아서 문제라니까요. 툭하면 문자 씹어서 사람 걱정시키고, 화나게 만들고...
아뇨... 지휘관한테선 도움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문자는 꽤 금방금방 답장해 주던데요.
......
그럼 무슨 일로 그렇게 예민해졌어요?
...그냥요.
올바른 일을 하려고요.
올바른 일?
...네, 선생님은 제게 올바른 일을 하라고 가르쳤어요.
뭐어 그러셔요, 뭘 할 셈인지 물어도 안 알려 주시겠구만.
그럼 그 선생님 얘기나 합시다. 자주 밥 사 주고 그랬어요?
아뇨.
이유도 없이 밥 사 주는 사람은 다 꿍꿍이 있는 사람이라잖아요.
쓰으읍 젠장 반박할 수가 없네...
그럼 넬레 씨가 그 선생 얘기 해보세요.
제가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분이 쓰신 「복내측 시상하핵 전전두엽 피질이 ADS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설명」 이란 논문을 보고예요. 당신도 들어봤죠? 엄청 유명한 논문이었으니까.
뭐, 전 그때만 해도 상측 두구 피질 연구 쪽의 전망이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요.
............
지구 언어 맞아요?
그럼 뭐 외계 언어게요?
아무튼,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당시 인기 있었던 연구에서, 현대의 보편적인 발달 집단에서 상측 두구 회백질의 부피가 ToM 형성과 관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얼마 안 가 제 방향성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선생님의 연구실이 발표한 논문이, MRI 스캔을 토대로 연구한 결과 ASD에 그러한 관련성이 없음을 증명했거든요.
외계어 맞구만요 뭐...
넬레는 어느새 맥주 한 캔을 비우고 하나 더 땄다.
아 기다려 봐요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까.
우선 선생님의 그 논문부터 분석해 줄게요.
............
넬레가 아주 능숙하게 10편이 넘는 문헌 자료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J는 마라톤 회의에 맞먹을 지옥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얼마 후, 실컷 문헌을 분석해서 평정심을 되찾은 넬레가 넋이 나간 J를 내버려두고 실험실로 왔다.
그리고, 지휘관에게 통신을 걸었다.
지휘관님, 저예요.
<color=#00CCFF>들립니다, 넬레 씨.</color>
내일... 아니,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color=#00CCFF>......</color>
<color=#00CCFF>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말 마음을 굳히셨습니까?</color>
네.
페르시카 박사님께 연락해 주시겠어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color=#00CCFF>알겠습니다, 그분께 연락하라 전달하죠.</color>
...이런 시간에 연락해서 죄송해요.
<color=#00CCFF>괜찮습니다.</color>
통신을 종료한 넬레는 점점 다시 슬픔에 젖어들었다.
손에 메달을 꼭 쥐고서, 그녀는 조용히 그레이의 시신이 든 보디백 옆에 앉았다.
......
선생님... 저는 지금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나요?
방은 정적에 빠져, 유일한 소음인 에어컨의 가동음이 더욱 크게 들렸다.
응용물리학에서 임상의학으로 전과하고 선생님을 몇 년이나 따라다녔는데...
언제 바꿔치기 당한 건지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손 안의 메달이 하얀 전등의 빛을 반사해 넬레의 씁쓸한 미소를 비췄다.
선생님... 지금부터 제가 선생님의 몸으로 무얼 하려는지 아신다면...
그래도 여전히 상냥하게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부스럭..."
실험복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마치, 오래 전 선생님의 실험실에서 실험에 몰두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방해하지 않으려고 뒤에서 몰래 지켜보고 가려다 실험복이 스쳐서 들키던 때처럼.
이는 그레이 선생님만의 상냥한 관심 표현이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우리가 올바르다 생각하는 일을 흔들림 없이 행하는 것뿐이죠.
또, 넬레는 그레이 선생님이 따뜻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감싸 주는 기분이 들었다.
지익...
보디백의 지퍼가 내려졌다.
가장 먼저 넬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복부에 올려진 그레이의 팔.
그리고 그 가늘고 새하얀 팔에 이어진, 상냥하게 자신을 일으켜 세워 주던 손.
하지만 그 손에 온기는 없었다. 잔혹하리만치 차갑기만 했다.
......
탁자 옆의 기록 장치에 대고, 넬레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현재 시각, 11월 4일 오전 4시 45분.
이것은... 앞으로의 실험을 위한 녹화 영상이며, 부검은 코넬리아 슈펠 본인이 진행한다.
그리고 그녀는 위생면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그레이의 시신에 묻은 때를 닦아냈다.
기초 청결 작업 완료. 이어서 그레이 선생님의 신체에서 개조된 부위를 확인한다.
넬레는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헤집어, 그레이의 머리에서부터 개조 흔적을 살폈다.
두부에 뇌외과 수술 흔적을 발견. 상세 사항은 아직 알 수 없음.
차례대로 목, 어깨, 팔을 검사한 다음, 넬레는 살며시 그레이의 손을 들었다.
왼팔은 소실. 오른손은 손바닥이 개조되어, 중지와 약지 사이로 갈라진다...
철컥.
실험실 문이 열려 넬레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코니?
......
수술복 차림인 콘스탄스는 실험대 위에 놓인 그레이의 시신과 눈이 빨갛게 부은 넬레를 번갈아 바라봤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대뜸 바꾼 실험 방향을 우리 둘이서 철야해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잖아.
콘스탄스는 가방을 내려놓고 실험실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나 말고 너 도와줄 사람 또 있어?
......
고마워.
콘스탄스는 차분하게 기록 작업을 이어받았다.
네가 이러려는 이유는 아직도 이해 못하겠지만, 적어도 옳다고 생각하니까 이 일을 하는 거겠지.
게다가, 너 한 번 마음먹으면 죽어도 안 바꾸는 고집쟁이를 무슨 수로 말려.
난...
잔말 됐고, 얼른 작업 시작하자!
문득 떠오른 기억과 겹쳐 보인 이 눈앞의 장면에, 넬레는 마침내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응.
그렇게 두 사람이 실험 준비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어느덧 드리운 서광이 조금씩 밤하늘을 물들여 떠오르는 태양의 윤곽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