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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5 · 고립된 숲

검은 방

마인츠 대학 실험실에서 아마리스는 새로운 파트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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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츠구의 대학촌.

신분 증빙 자료를 꼼꼼히 챙긴 아마리스가 마인츠 대학 교문에 당도했다.

아마리스

안녕하세요, 콘스탄스 씨가 신청한 실험실 조수 인형입니다. 코드 넘버 LA892, 여기 인증 정보요.

경비원

......

경비원은 잔뜩 의심하는 눈초리로 자료를 받아 확인했다.

당연히 검문기에서도 아무런 경고가 뜨지 않았지만, 경비원은 동료까지 불러서는 보안 검사까지 하는 등 아마리스를 좀처럼 놔주지 않았다.

결국 거듭 확인한 결과 아무런 의심 요소를 찾아내지 못해, 경비원은 하는 수 없이 아마리스를 통과시켰다.

경비원

들어가라.

아마리스

네, 고마워요.

실험동 쪽으로 가면서 힐끗 곁눈질하니, 두 경비원들은 순찰을 도는 척 계속 뒤를 따라왔다.

아마리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곤 혈기왕성한 대학생 무리를 스쳐지났다.

행인1

어? 야, 저 사람 통행증 색깔 봐봐. 인형인가 봐.

행인2

엑... 요즘 길거리에서 인형을 다 보네, 모조리 회수된 줄 알았더니...

행인1

소리 줄여, 저놈이 듣고 달려들어서 자폭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행인2

대놓고 학교 안을 돌아다니는데 검문 통과한 인형이겠지... 그래도 가까이 가진 말자.

불쑥 튀어나온 바위를 피해 가는 시냇물처럼, 사람들은 아마리스를 피해 양쪽으로 비켰다.

물론, 아마리스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편했다. 그렇게 걷던 중...

삐익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평생 다시는 울릴 일 없을 줄 알았던, 오랫동안 침묵하던 전용 통신 채널로.

아마리스

......

통신 요청은 한 서린 귀신처럼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마리스

......

누구야?

스티븐스 520

<color=#99CC33>저예요.</color>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color=#99CC33>지금 들어왔나요? 문 앞에서 막히진 않았죠?</color>

<color=#99CC33>만약 얼간이들이 안 들여보내 준다면 지금 제가 보낸 인증 코드를 제시하세요. 흄 박사의 VIP 코드예요, 생전에 그 대학에 건물을 기부하셨거든요.</color>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color=#99CC33>여보세요? 대답 좀 해요!</color>

스티븐스 520

<color=#99CC33>이상하다, 신호는 멀쩡한데... 전설급 인형이 경비원 몇 명한테 쩔쩔맬 것 같진 않지만...</color>

아마리스

......

문 진작에 넘어서 지금 가는 중이야.

그것보다, 왜 이 채널로 연락했어? 일반 채널 쓰면 어디 덧나?

스티븐스 520

<color=#99CC33>당신의 시스템에서 이 채널의 보안성이 가장 높아서요.</color>

<color=#99CC33>왜요, 이 채널 요금 받나요? 구독비라면 낼 테니 염려 마세요.</color>

아마리스

......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기분이었지만, 입밖으로 뱉어낼 수도 없었다.

결국, 아마리스는 대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리스

됐고 일단 끊어, 금방 도착하니까.

스티븐스 520

<color=#99CC33>그러죠.</color>

마인츠 대학, VIP 응접실.

스티븐스 520이 제공한 주소를 찾아 아마리스가 들어온 곳은 아주 사치스러운 방이었다.

그리고 스티븐스 520은 그 한가운데서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스티븐스 520

어서 와요, 아마리스.

아마리스

......

어.

아마리스는 테이블에 푸짐하게 차려진 디저트와, 척 보기에도 고가가 분명한 스티븐스 520의 치마를 힐끗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일부러 테이블에 몸을 툭 부딪혔다.

다층 트레이에 정교하게 쌓인 디저트의 탑이 무너질 뻔하자 스티븐스 520은 미간을 찌푸렸다.

스티븐스 520

조심하세요.

아마리스

응.

건성으로 대답하고, 아마리스는 스티븐스 520의 맞은편에 앉더니 대뜸 주전자를 들어 부리로 상대의 찻잔을 넘어뜨렸다. 따끈따끈한 홍차는 그대로 엎질러져, 곧장 그녀의 치마를 흠뻑 적셨다.

스티븐스 520

<size=50>꺄아아악!!</size>

<size=50>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size>

아마리스

미안.

아마리스는 건성으로 사과하고는 자신 쪽의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스티븐스 520은 인상이 잔뜩 구겨진 채 손수건으로 치마에 묻은 차를 닦으려고 애썼다.

스티븐스 520

당신 예절 교육을 대체 어떻게 받은 거예요!?

아마리스

지휘관이 준다고 한 물건은?

스티븐스 520

......

아직 성질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스티븐스 520은 침착하게 작은 상자를 꺼내 아마리스의 앞에 놓았다.

스티븐스 520

여기요.

상자에는 얇은 쇳조각이 들어 있었다.

엘리아나의 군번줄, 그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유품.

물론, 그 통신 채널을 제외한다면.

아마리스는 시큰둥한 눈으로 스윽 살펴보고는 바로 그걸 외투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아마리스

...딴 건 없어?

스티븐스 520

네.

아마리스

좋아, 임무 이야기하자.

스티븐스 520

지휘관이 우리에게 맡긴 임무는——

아마리스

잠깐, 우리?

스티븐스 520

네, 이 임무는 저와 당신이 함께 수행해요.

아마리스

......

필요 없어, 나 혼자서 충분해.

스티븐스 520

착각 마세요, 지휘관이 분부한 일이에요.

저는 본디 엘모호의 아이네이아스 회의실 관리를 맡았지만, 그 권한을 다른 인형에게 전권 양도했어요. 당신 일에 결코 차질을 빚지 않도록요.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그럼 이어서 말할게요.

임무 내용은, 코넬리아 슈펠 씨의 신변 안전을 지키는 동시에 그녀의 실험이 성공하도록 보조하는 것이에요.

다만 실험이 종료되면 그레이는 우리가 데려갑니다.

아마리스

즉, 넬레 씨의 보디가드 겸 실험실 조수 일?

스티븐스 520

네.

아마리스

그런 거라면 너 혼자 할 수 있지 않아?

스티븐스 520

이보세요, 이 임무에서 저는 당신의 서포트 역할이거든요?

아마리스

......

지휘관한테 말 좀 해야겠어, 이 임무 인선 엄청 잘못됐다고.

스티븐스 520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 바로 실험실로 가야 하니 가면서 따져 보시던지요.

스티븐스 520은 툴툴대면서 최대한 치마의 물기를 짜내고 문 밖으로 나갔다.

스티븐스 520

아 참, 제가 출발하기 전 자기가 서광 소대원이라는 인형이 말을 걸었어요. 이름이 SCR이랬던가?

그녀가 당신에게, 자기들은 언제든지 임무에 나설 준비가 됐다고 전해 달랬어요.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들과 바꿔 달라 하면 되겠네요, 연락해보겠어요?

아마리스

......

됐어.

태양이 없는데 서광은 무슨.

스티븐스 520

무슨 뜻이죠?

아마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프랑크푸르트구, 도시 출입 검문소로 향하는 도로 위.

브리짓은 두꺼운 증빙 자료를 넘겨보면서 투덜댔다.

브리짓

이해가 안 돼...

스털링

무엇이 말이지?

브리짓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휙휙 바뀔 수가 있지?

지난번 회의 때만 해도, Q는 이디스와 다그마르한테 엘모호를 이 잡듯 뒤져서라도 쓸모 있는 걸 찾아내라 했어.

그런데 오늘은 당장 엘모호를 우리가 들어가기 전 모습으로 원상복구하라잖아!

스털링

그래, 그랬지.

하지만 Q 요원도 알 테지, 수사 흔적은 완전히 지울 수 없음을. 그렇기에 물자도 조금 보태 주는 거다.

브리짓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무슨 일이길래 갑자기 엘모호를 돌려주는 거냐고.

그리고 문득 든 생각에 브리짓이 목소리를 낮췄다.

브리짓

그 지휘관, 상당한 거물이라던데...

혹시 다른 연줄을 찾아낸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설마 몸으로 유혹한 건 아니겠지?

스털링

몸으로...? 놀라운 상상력이로군.

브리짓

그럼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이러냐고! 그 그리폰의 지휘관이 우리 슈타지의 손에서 그렇게 커다란 차량을 돌려받는다는데!

슈타지가 여태까지 압수품을 돌려주는 것 봤어?!

스털링

봤지, 지금.

참, 이디스에게 연락해 현재 상황을 물어봐라.

브리짓

응? 아, 알았어.

브리짓

이디스.

이디스

<color=#00CCFF>무슨 일이야?</color>

브리짓

그쪽 일은 어때, 잘 되어 가?

이디스

<color=#00CCFF>저번에 우리 같이 했던 신경쇠약 놀이 기억하지?</color>

<color=#00CCFF>몇 초 동안 모든 그림 카드를 외운 다음 뒤집고 섞어서 짝을 맞추는 놀이.</color>

브리짓

기억하지... 그런데 그게 왜?

이디스

<color=#00CCFF>지금 엘모호 상황이 신경쇠약 슈퍼 울트라 하드 모드야!</color>

<color=#00CCFF>저 머저리 인간 요원들... 저 녀석들이 여길 원상복구하는 건 절대 무리라고...</color>

브리짓

......

이디스

<color=#00CCFF>너희 어디까지 왔어? 빨리 와, 여기 상황 심각해!</color>

브리짓

알았어...

통신을 종료한 브리짓은 맥이 빠지는 듯했다.

스털링

상황이 어떻지?

브리짓

...Q가 주는 보상으로 그리폰의 지휘관이 만족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마인츠 대학 실험동의 복도.

스티븐스 520을 따라 실험동으로 들어온 아마리스는 발걸음부터가 매우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리스

내가 말했지, 난 지금 더 중요한 임무가 있다고. 그런데 나한테 이런 허드렛일을 시켜?

그 커다란 그리폰에서 보디가드 일을 맡을 인형 하나도 없겠냐고!

그리고 파트너 교체 요구할 거야.

AR-18

<color=#00CCFF>이유는 방금 설명했다.</color>

<color=#00CCFF>다시 듣고 싶다면 너의 마인드맵 기록으로 확인해라.</color>

아마리스

알아! 다 들었어!

임무 안 바꿔 줄 거면 됐으니까 파트너만이라도 바꿔 달라고!

AR-18

<color=#00CCFF>스티븐스 520보다 이 임무에 적합한 인선은 없다.</color>

아마리스

흄 박사가 이 학교에 건물을 기증해서?

AR-18

<color=#00CCFF>파트너 교체 요청은 기각한다. 다른 용무 있는가?</color>

아마리스

......

말 안 통하는 느낌에서 아주 그리운 맛이 다 나네!

AR-18

<color=#00CCFF>질의 사항 없다면 진지하게 임무에 임하기 바란다, 정기 보고도 잊지 말고.</color>

통신은 단칼에 끊어졌다.

아마리스는 발작처럼 몸부림치려다, 결국 체념하고 통신기를 내렸다.

스티븐스 520

표정을 보아하니, 기각당했군요?

아마리스

......

아마리스는 눈빛으로 고소해 하는 스티븐스 520을 무시하고 실험실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스티븐스 520

그런데 당신, 왜 자꾸 저한테 신경질이에요? 초면에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정말 모르겠네요, 제가 당신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나...

아마리스

......

푸념을 듣자 아마리스가 걸음을 멈췄다.

아마리스

모르겠다고? 멋대로 비공개 통신 채널을 쓴 주제에 되게 당당하다?

스티븐스 520

아아, 그 암호화 채널을 쓴 것 때문이었군요?

그건 보안성이 높아서 썼다고 말했잖아요. 그렇게 불편했다면 제가 새로 채널 하나 개설하죠 뭐.

아마리스

......

아마리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 스티픈스 520의 두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마리스

그 통신 채널, 해킹할 때 원래 사용자가 누군지 보기는 했어?

스티븐스 520

...지금 보죠.

그와 동시에, 아마리스가 외투 주머니에서 조금 전의 그 쇳조각을 꺼내 위에 새겨진 이름을 보였다.

"엘리아나"

아마리스

그건 나와 엘리아나의 전용 통신 채널이야.

그 말을 들은 스티븐스 520의 머릿속에서, 눈앞의 인형과 그 프로필 사진의 쌀쌀맞은 얼굴이 겹쳐 보였다.

스티븐스 520

...죄송해요, 정중히 사과드릴게요. 엘리아나의 것인지도 몰랐고, 당신이 그걸 그토록 소중히 하는지도 몰랐어요.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두 분의 관계가 그만큼 끈끈하고, 그 군번줄과 통신 채널이 엘리아나의 소유물임을 알았다면 절대 그리 함부로 다루지 않았을 거예요.

스티븐스 520은 정중히 사과했다. 그런데, 사과를 받는 입장인 아마리스의 표정이 왠지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아마리스

누가 걔랑 사이 좋대?

스티븐스 520

네?

아마리스

...난 걔 밥맛이야.

아마리스

<color=#99CC33>상관 없으니까 마음대로 써.</color>

<color=#99CC33>앞으로 나와 통신할 때는 이 채널만 쓰기다, 알았어?</color>

스티븐스 520

엣...? 아니 그럼 대체 뭣 때문에 화낸 거예요!?

아마리스

.......

아마리스의 마인드맵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던 중, 시선이 스티븐스 520의 치맛자락에 묻은 차 얼룩에 꽂혔다.

아마리스

화 안 났어. 난 그냥 치마 입은 인형이 싫어.

스티븐스 520

.......

이번엔 스티븐스 520의 분노가 폭발 직전까지 치솟았다.

스티븐스 520

엘마가 사라져서 세상이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만...!

아마리스

축하해, 바로 그 빈자리 채워져서.

아마리스가 보란듯이 이죽거렸고, 스티븐스 520의 "패버린다 수치"가 급속도로 상승했다.

그렇게 세기의 난투극이 발발하려던... 그때.

복도 끝자락의 문이 철컥 열리고 안에서 피로에 절은 얼굴이 스윽 고개를 내밀었다.

콘스탄스

거기... 두 분...?

스티븐스 520

아, 안녕하신가요, 저희가 이 실험실에 배정된 조수 인형이에요.

콘스탄스

오셨군요...

제가 콘스탄스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마리스가 먼저 들어가 보니, 첨단 실험 도구들로 가득한 실험실은 그야말로 돼지우리 꼴이었다.

실험 보고서와 참고 문헌으로 쌓아 올린 참호, 세척하지 않은 실험 용기들이 쏟아지기 직전인 싱크대, 위험 표시가 붙은 재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탁상... 난장판의 수준이 셰릴의 침실에 견줄 만하다고, 아마리스는 생각했다.

콘스탄스

이번 회차 실험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요, 넬레는 안에 있으니 이후의 사항은 걔랑 상의하시면 돼요.

스티븐스 520

고마워요 콘스탄스 씨. 그런데 정말 피곤해 보이시네요...?

콘스탄스

네에... 24시간 넘게 못 잤거든요... 이제 잠깐 눈 좀 붙여야죠...

반 시간... 아니 한 시간 정도 넬레 도와주세요.

콘스탄스는 말도 다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접이식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마리스

...콘스탄스 씨?

그녀는 이미 깊은 수면에 빠진 뒤였다.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넬레 씨를 보러 가죠, 그녀가 우리의 호위 대상이잖아요.

그리고 스티븐스 520은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들고 바닥의 장애물을 넘나들면서 실험실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임무 브리핑의 묘사에 부합하는 인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티븐스 520

코넬리아 슈펠 씨, 맞으신가요?

넬레

저 맞아요, 지휘관님이 보내신 인형인가요?

스티븐스 520

네, 저는 스티븐스 520, 이쪽은 아마리스입니다.

넬레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죄송하지만 바로 깨끗한 플라스크 하나 가져와 주시겠어요?

스티븐스 520

가세요.

아마리스

왜 내가 가?

스티븐스 520

저는 치마라서 이런 곳에선 이동하기 불편해요. 혹시라도 중요한 물건을 넘어뜨리면 큰일이잖아요?

아마리스

......

아마리스는 방금 보았던 깨끗한 실험 도구가 든 바구니로 가, 속에서 플라스크 하나를 꺼내 넬레에게 건넸다.

넬레

고마워요.

아, 코니는 만났나요?

스티븐스 520

몹시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인다고 했어요.

걱정 마세요, 바이탈 체크 결과 급사 위험은 없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넬레

하하, 다행이네요... 그럼 걔가 깰 때까지 대신 저 좀 도와주세요.

스티븐스 520

얼마든지요.

스티븐스 520은 자연스럽게 넬레의 곁으로 가서 차분히 그녀의 각종 작업을 보조해 주기 시작했다.

반면 아마리스는 영 어색한 느낌으로 문가에 몸을 기댔다.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왜 가만히 서 있어요? 어서 저쪽 싱크대의 실험 도구들 세척하세요.

아마리스는 살짝 찡그리고 묵묵히 움직였다.

스티븐스 520

세척 다 했나요?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다 했으면 이것도 마저 세척해 주세요.

스티븐스 520은 벌써 한 바구니를 가득 채운 더러워진 실험 도구들을 아마리스의 옆에 내려놓았다.

아마리스

야!

스티븐스 520

왜요?

아마리스

......

아마리스는 손 안의 실험 도구를 내려놓고 스티븐스 520에게 몸을 돌렸다.

아마리스

이봐 아가씨, 난 이런 후방에서 보모 노릇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AR-18이 사람 모자라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절대 안 왔어!

난 지금 패러데우스와 싸우는 최전선에 있어야 해! 더 중요한 임무가 있단 말이야!

스티븐스 520

그게 무슨 임무인가요?

아마리스

......

서광팀이 마치지 못한 임무.

스티븐스 520

하지만 아까는 엘리아나가 없으니 서광팀도 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

아마리스의 복잡한 표정을 살피는 스티븐스 520가 번뜩 깨달았다.

스티븐스 520

당신――

아마리스

됐어.

넌 서광팀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몰라.

스티븐스 520

...그럼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 주겠어요?

아마리스

......

스티븐스 520

말도 안 하면 제가 이해해 드릴 수 없는데요?

아마리스

너한테 이해받을 필요도 없어.

스티븐스 520

저도 딱히 관심 없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우조잖아요? 저는 저의 전우조에 대해 잘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아마리스

......

넬레

"폭연"이에요.

실험에 몰두하던 넬레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스티븐스 520

폭연?

넬레

아음속으로 퍼지는 연소파 말이에요.

서광팀은 엔진에 주입된 연료처럼 "격발"할 조건을 충족할 만큼 소모되면 폭연을 일으켜요.

넬레

그리고, 엘리아나가 바로 폭연을 일으키도록 선택받은 인형이에요.

스티븐스 520

한 소대가... 단 한 명을 위해 존재한다...?

아마리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넬레가 멀리 있는 자료 더미를 가리켰고, 아마리스는 장애물의 산을 넘어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아마리스

넬레 씨... 이거...

전부 극비 자료 아니야?

넬레

네.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건 제 스승님이 남기신 복음중추 관련 자료예요.

아마리스

......

넬레

저기 저건 스티븐스 520 씨가 제공한 흄 박사의 「인류 지성 연구」 최신판.

그 뒤에 있는 건 쇼 박사님의 관련 연구 자료.

당신 앞 테이블에 쌓여 있는 건 페르시카 박사님과 리코리스 박사님의 관련 연구 자료고요.

하던 일을 멈추고, 넬레는 피로로 충혈된 눈으로 아마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마리스는 그 벌건 눈동자에서 피로감이 아닌 냉정함을 느꼈다.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는 빙하처럼 차가운 냉정함을.

넬레

서광팀, 그리고 엘리아나에 대한 당신의 복잡한 심정은 이해해요.

그건 단순히 사랑이나 원한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스티븐스 520

......

넬레

저는 지금 제 스승님을 되살리려 하고 있어요.

니토로 개조당하기 전의 그분을, 저는 엄청 존경해서 항상 그분의 발자취를 따랐어요.

하지만, 니토로 개조당한 후는... 생전의 그분이 들으시면 까무러치고도 남을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시신을 보고 있자니, 대체 어떤 표정으로 마주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마리스

......

넬레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요.

패러데우스는 선생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어요. 목숨, 명예, 결백... 모든 걸요.

저는 선생님의 오명을 씻고 명예를 되찾아 드리겠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은 선생님을 반드시 다시 니토의 형상으로 되살려야만 해요.

저 두 눈을 바라보는 아마리스는 한 마디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넬레

패러데우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 모두 여기 있지 않았겠죠.

당신은 군용 인형으로서 전선에서 활약하고, 저는 연구원으로서 실험실에서 수치를 기록했을 테니.

모두, 내키지 않는 일을 위해 여기 서 있을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아마리스

...그랬겠지.

넬레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여긴 후방이 아니에요.

여기가 바로 전선이죠.

패러데우스에 대항하는 최전선요.

아마리스

......

넬레

마지막 단계도 마쳤어요. 이제... 그레이 선생님을 깨우겠습니다.

스티븐스 520

저는 넬레 씨를 보조할 테니, 테스트 작업은 당신이 맡으세요.

아마리스

응.

스티븐스 520은 넬레를 따라 실험실 뒤의 암실로 들어갔다.

스티븐스 520

아마리스?

스티븐스 520

이 임무가 끝난 뒤에, 우리 천천히 얘기 좀 해요.

어쩌면... 우리도 좀 더 잘 어울릴 수 있을 거예요.

아마리스

...아마도.

위이잉——

기기가 가동하면서, 아마리스는 마치 지옥에서 되돌아온 발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