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시간의 끝에서
마카로프 권총에서 쏘아진 총알이 긴 세월을 지나 목표에 정중했다.
파사네리 보호 구역, 버려진 고성 앞.
니토 몇 명이 나와 라플라스를 마중했다.
라플라스 님, 저희가 세이프하우스로 모시겠습니다. 몰리도 언니는 금방 도착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라플라스는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전혀 아랑곳않으며 묵묵히 니토들의 뒤를 따랐다.
멀리 떨어진 위치.
아마리스는 조준경을 통해 그 인물이 고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가 곧이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운명이라는 폭군의 화살을 묵묵히 인내하는 것과, 일어서서 세상의 끝없는 고난에 저항하는 것...
과연 어느 쪽이 더 고결한 행위일까?
고성의 복도.
하얀 니토가 라플라스를 세이프하우스까지 데리고 왔다.
라플라스 님, 저희는 밖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러마.
냉담하게 끄덕이고, 라플라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엄습했다.
버려진 고성이란 환경에 걸맞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라플라스에게 걸맞는 냄새였다.
......
등불에서 이토록 멀어진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라플라스는 창가 앞에 가만히 섰다. 만약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이 과학자가 지금 어떤 새로운 연구 과제를 생각 중일지 궁금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실험이 막바지에 도달해 그저 기다릴 뿐인 것처럼.
이젠 가열한 플라스크 속 용액이 식기만을 기다릴 뿐.
수치도 절차도 손볼 필요 없었다.
그리고 곧 드러날 결과는...
하지만 라플라스에게 기대나 환희 같은 감정은 없었다. 그저 잔잔한 평온함뿐이었다.
...노쇠한 육체의 기능은 역시 정신력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구나.
젊어서 청춘을 즐기고, 늙어서 명성을 즐기는 것도 세속적인 즐거움이지...
시간이란 틀을 깨부수는 생물의, 그 희로애락의 동력은 또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때, 문앞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라플라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하지만 문을 여는 이는 없었고, 그저 문짝 너머로 하얀 니토의 신음이 들렸다.
라플...... 안을... 조심......
상황을 파악한 라플라스가 문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잠겨 있었다.
라플라스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을 옷의 안주머니로 넣었다.
거기엔 6발 남은 브라우닝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아베르누스의 실험실에서 보낸 라플라스는 자연광을 몸소 느껴본지도 오래되었다.
실험실에선 언제나 작업용 등이 환하게 주변을 밝혔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분명 실외는 화창한 날씨건만...
이 안은 그저 어둠이었다.
인간의 귀는 니토만큼 예민하지 않다.
하지만 호흡도 마찬가지.
인간은 니토처럼 호흡을 완벽하게 감출 수도 없다.
그래서 라플라스는 눈치챘다. 저 앞의 어둠 속에, 누군가가 숨어있었다.
뚜벅... 뚜벅...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늘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마카로프 권총을 겨눈 한 젊은이였다.
......
낯선 얼굴. 하지만 익숙한 눈빛이었다.
골수까지 파고드는 증오, 오장육부를 달구는 분노가 담긴 눈빛.
...누구지?
상대가 당장 방아쇠를 당길 의도가 없음을 한눈에 간파한 라플라스는 저 젊은 여성에게 약간 흥미가 생겼다.
마사 마이트너... 사형수... 라플라스.
당신은 인간에서 악마로 완전히 타락했어.
흥미로운 시각이구나, 나는 지금 이 모습이 더욱 나다운 것이라 생각하는데.
누군가를 배신하면 똑같이 배신당하는 법이야.
마음의 준비는 진작부터 되어 있었단다.
솔직히, 너를 본 순간 누가 나를 팔았는지 알았어.
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너는 왜 여기 왔지?
내가 살아있는 인간을 못 본 지가 참 오래되어서 말이야.
......그레이 블랙웰.
기억해?
물론이지, 내 후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였는걸.
그런데, 당신은... 당신을 그토록 존경하던 그분을... 죽어서 눈도 감지 못하게 만들었어.
죽어서 눈도 감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를 전성기에 인류 육체 기능의 한계를 돌파시켜 주었고, 그를 기준으로 최적화된 상태를 유지시켜 주었는데?
그레이는 유일하게 다른 인간과 섞이지 않은 니토야.
그녀는 자신이 꿈에도 바라 마지않던 모든 것을 얻었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외과의가 되었지.
영원히 활짝 핀 꽃과도 같은 모습... 이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
행복? 당신이 말하는 행복이란, 그분을 완전히 뇌사시키고, 당신의 설계한 괴물의 의식으로 시신을 모욕하는 짓을 말하는 거야?
그분은 당신을 존경하고 우러러봤는데...!
그 시절 홉킨스 대학에서, 나는 그녀에게 무얼 바라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단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지.
의학의 역사는 하양과 검정의 대치로 점철되어 있다. 지혈 겸자와 리스턴 나이프가 발명되기 전만 해도, 수술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의학의 길에서, 가장 완벽한 회색이 되겠다.
생명의 하양으로, 죽음의 검정에 대항하겠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이상을 실현시켜 주었어. 그녀는 이제 영원한 "미스 그레이"야.
...그 영원함의 대가가 뭔데?
무수한 시체들이 지금 당신의 발밑에서 차 원념에 울부짖고 있는데, 잠이 오긴 해?
의학이란 원래부터 시체의 산을 밝고 넘어서 일구어낸 기적 아닌가?
장기 이식이 현실화된 이래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하는 일은 기본이 됐지 않니?
의학의 기적이란 인류가 자연에 대항하는 기적이야!
그 길에 쌓인 백골은 의술을 행하는 이들을 향한 경종이라고! 이건 놀이도 장난도 아니야!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도 수많은 의학계의 선구자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난제를 극복해 이뤄낸 기적인데!
그런데, 당신 같은 마귀의 눈에는... 그들이, 그저 대가라고...?
인류는 유전자의 노예니까.
선별 과정에서 적응 못한 개체는 대가로서 도태될 뿐이지.
그리고, 이제 우리의 유전자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게 될 거다.
그럼 아예 당신부터 니토가 되지 그랬어!?
그리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완전면역체의 수술을 집도하는 자는 반드시 순수한 인간이어야만 하거든.
그런 생물은 인외에 대한 지배력이 무시무시해서 말이다.
나는 줄곧 시간과 경주해 왔단다.
인간은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라도 시간을 들여야만 진리에 접촉할 수 있는데, 정작 무르익고 나면 그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수명은 얼마 남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지.
그러니, 나는 반드시 한정된 시간 안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유지해 이 수술을 완성해야만 해.
그리고, 이제 성공하기 직전이지.
아니, 당신은 실패할 거야.
그럴지도,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너무나도 좁으니까. 그런데, 내 뒤를 이을 놈도 딱히 재능을 타고난 녀석은 아니라서 말이야... 녀석은 자기 손으로 성공 가능성을 90%에서 한없이 0에 가깝게 만들고 말았어.
당신도 그 인간도 사이좋게 손잡고 지옥으로 떨어져.
당신들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재난이야.
멀쩡한 것이 거의 남지 않은 이 공장에서, 그레이는 생채기 하나 없이 페허 위에 우뚝 섰다.
반면 대치하는 브라메드는 기진맥진해서 헤베에게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수준이었다.
저거, 그레이가 아니에요... 패러데우스조차도 아닌 거 같아요...
......
헤베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브라메드를 한심한 눈초리로 흘겨봤다.
그레이는 진작에 죽었잖니, 저건 그거 빈 껍데기를 부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녀석은 조종자가 내리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야.
그 조종 수단을 끊어버릴 순 없을까요?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란다.
어차피 여기 남아있어 봐야 방해만 되는데.
...해보죠.
브라메드는 한 발짝 물러나 그레이의 시스템 취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반면, 그레이는 이미 격전은 치른 뒤인데도 담담히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곤 다시 헤베를 향해 공세에 나섰다.
헤베의 움직임은 가벼운 동시에 광풍처럼 날렵해서, 마치 몰아치는 바늘의 폭풍 같았다.
은밀하고, 신속하고, 치명적이었다.
그레이는 상대의 속도에 즉각 반응하며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는 전투의 템포가 완전히 상대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틈틈이 헤베의 눈동자에서 어떠한 마크가 만짝였지만, 같은 패러데우스인 탓인지 그레이가 절묘한 타이밍에 시선을 돌린 탓인지, 각인이 제대로 새겨지질 않았다.
이상해... 저 녀석, 컨셔스 파노라마가 불완전해요. 클라우드 마인드맵 같지도 않고. 전혀 새로운 AI 지휘 시스템인 것 같아요.
그걸 파괴해.
......
돌연 그레이가 헤베의 견제를 뿌리치고 브라메드에게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뻐억!
피하지 못한 브라메드는 가까스로 방어 태세를 갖춰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바닥을 몇 바퀴 뒹굴고 구석에 부딪혀 멈춘 그녀는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헤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네메아란 언니, 이건 저의 인지 범위를 벗어났어요.
알았다, 바로 라플라스 님께 연락하마.
지금 우리가 가진 수단으로는 녀석을 해치울 수 없어.
아마리스 얼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사 박사...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자신이 설계한 시스템에 아직도 똑같은 약점이 있다는 걸 모를려나?
리벨리온이 전송한 화면을 통해, 아마리스는 드디어 고치 계획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고치와도 같은 배양 캡슐 안에 잠들어 있는 소녀를.
연결해 줘.
방금 AN-94가 시도해봤는데, 시스템이 엄청 튼튼해서 전자 공격을 아주 들이부었는데도 멀쩡해.
그래서 내가 있는 거지.
엘리아나가 파괴한 건, 걔에게 대응하는 의식의 호수였어. 그건 에너지를 빼앗는 곳이지.
그럼 나에게 대응하는 건? 분명 "고치"일 거야. 모든 에너지의 불순물이 모이는 곳.
"고치"... 그거야말로 전부 부숴버릴 수 있는 진정한 열쇠야.
...스티븐스 520 말로는, 엘마가 서머 가든을 닫은 후로 연결 가능한 구멍은 "나쟈"와 "루니샤"만 남았고, 열쇠도 두 자루 남겼댔어. 그리고 내가 그중 하나로 "나쟈"를 영구적으로 닫았으니, 여기 있는 이게 바로 마지막인...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그래도, 이 설계의 기반은 대충 짐작이 가.
불완전한 면역체 "나쟈"는 대조군으로서 의식의 호수에 일방적으로 연결한 거야. 그래서 실패하고 매말라버렸지.
"고치"야말로 사형수가 디자인한 진짜 그릇이야.
완전한 "루니샤"는 반드시 의식의 호수와 고치 양쪽 모두 동시에 연결 가능한 능력을 지녔어야 해.
그런데, "루니샤"는 벌써 우화했지... 여기 남아있는 건 잉여 데이터뿐이야.
그럼 엘마가 남긴 열쇠는 쓸모없다고?
그렇진 않아, 대신 우린 시간과 경주해야 해.
아직 통로가 완전히 뚫리지 않았으니까.
아직 이 "고치"의 껍데기를 이용해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야.
그야 나는 달의 아이, 신의 축복을 받은 선물인걸.
사형수... 정말 고마워. 내게 이런 선물을 줘서.
아마리스는 자신의 마인드맵 공간에 들어갔다. 이곳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이곳이 다시 쓸모가 생길 줄이야.
엘리아나... 의식의 호수에서, 마지막 순간에 넌 무슨 생각을 했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기라도 했으려나?
...에이, 넌 죽어도 못 깨닫겠지.
그냥 그런 걸로 하자, 어차피 난 너를 절대 용서 안 할 건데 뭐.
너도 나한테 아무 해명도 안 할 테니까.
가볍게 손을 들어 문을 열자, 문 너머에는 푸른 빛이 감도는 달빛이 있었다.
헤베의 공격이 더 빠르고 빈번해졌다.
채앵!
그레이는 가까스로 헤베의 공격을 자신의 칼날로 막아냈다.
헤베 언니...
안간힘으로 일어서려던 브라메드는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헤베는 뭐라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안색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기회를 붙잡은 그레이는 다시 힘을 모아 공격을 질렀다.
퍼억!
......
검은 그림자가 시야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와 자신을 밀어냈다.
몰리도였다.
하지만 몰리도의 상태도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왜 돌아왔어? 라플라스 님은?
이따 얘기해요.
몰리도는 기계 의족을 펼쳐 브라메드와 헤베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
계속 추격합니까? 지시를.
아니, 네 임무는 완료됐어. 기지로 복귀해.
알겠습니다.
"고치"의 모든 잉여 데이터를 삭제하고 난 아마리스는 저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감개무량한 날이라니.
날씨... 진짜 좋다...
게다가 오늘 하루에서 제일 멋진 때가 다가오고 있네...
황혼.
잠깐 스쳐 지나가는 황혼.
인형의 미련을 모르는 하늘에, 밤의 장막이 드리웠다.
어디 어떻게 생긴 낯짝인지 보자고, 사형수.
네가 여기에 나타난 목적은 안다.
그래도 같은 분야의 선배로서 후계자에게 유언을 남길 시간은 주지 않으련?
네 입장을 고려해도, 그와의 통신을 엿들을 가치가 있을 텐데.
...사탄의 참회라면, 기꺼이 들어드리죠.
그렇다면 실망하겠구나.
라플라스는 손에 쥔 브라우닝 권총을 내려놓고 통신기를 들었다.
삐빅.
평소에는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연결되던 통신이, 오늘은 유난히도 빨랐다.
...선생님.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실험의 후속 호송은 네메아란이 직접 맡았고, 지금쯤이면 화이트존에 도착했을 거다.
Avernus C. Hela의 01.59번에서 20.01번 부분은 거의 다 완료됐고, 온도는 섭씨 25도, 습도 40%로 유지하는 걸 잊지 마라.
그리고 이번 수술의 실행 가능 기간은 앞으로 5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절대 놓치지 말고.
흥. 걱정 마셔, 그건 당신보다 내가 훨씬 잘 아니까.
반면에 당신은 모르는 게 잔뜩이지. 예를 들자면...
누가 원해서 당신이 죽는지, 알아?
그야 너겠지.
이유는 알고 싶어?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는 그저 내가 당부한 대로 나머지 작업을 마무리짓기만 하면 돼.
당신이 없어야 이 수술이 완벽해질 수 있어.
부디 내 일지와 주석을 따라 실행했으면 좋겠구나, 윌리엄.
너의 재능과 능력은 완벽한 결과에 도달하기엔 역부족이야.
그래? 하지만 내 업적과 명성은 당신을 아득히 뛰어넘게 될걸?.
당신이랑, 당신이 라이벌이라 여기는 것들을 전부 포함해서 말이야.
제일 중요한 이 마지막 수술은, 오직 나만이 완성할 수 있어.
......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바라마. 내가 바라는 바도 이루어지길 빌고.
막상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조금 걱정되는구나.
지금 당신에겐 걱정할 시간도 없어.
아무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들어주지.
어쩌면, 흄은 평생 무명으로 남고 너는 끝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과학 연구의 길에서, 너는... 나는 물론이고, 쇼는 고사하고, 페르시카리아에게조차 너는 뒤떨어져.
루니샤는 어떻게 너처럼 멍청한 것을 동생으로 뒀을까.
툭.
윌리엄이 통신을 끊었다.
라플라스는 다시 앞의 총을 겨누고 있는 낯선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봐?
아가씨, 총을 똑바로 쥐질 못하네. 사람 죽이는 거 처음이야?
내 다른 학생과는 전혀 다르구나.
...이 거리에선 총 잘 못 쥐어도 당신 한 명쯤이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인데도, 라플라스는 태연히 손에 든 태블릿의 화면을 확인했다. 헤베가 공유한 데이터였다.
이 그레이, 네가 만들었니?
라플라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젊은이를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살펴봤다.
그러다, 넬레의 가슴에서 메달을 보곤 깨달음의 미소를 지었다.
아하, 그레이의 제자구나.
그 메달은 나와 그녀가 같이 디자인했지. 후배들에게 나눠 주길 참 좋아했는데.
당신은 선생님을 입에 올릴 자격 없어!
과학의 신도로서, 나는 종교적인 개념을 결코 신봉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너를 보니, 세상에는 정말로 인과율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 같구나.
내 진정한 후계자는... 바로 너였어.
그 말에 넬레는 두 눈을 부릅 떴다.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천부적인 재능이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합이지.
추구하는 길의 지식을 얻는 것 자체가 쾌락이야.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레이를 해부하면서, 지식과 쾌락을 얻었잖니.
어때, 나의 작품은 훌륭하지? 정말 기쁘구나, 이런 데서 나의 진정한 후계자를 만나게 되다니.
그레이나 윌리엄보다도, 네가 나를 닮았어.
웃기지 마!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원한이야! 이 일로 내가 얻은 건 하나도 없어!
의학도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없어. 둘은 차이가 없어요, 아가씨.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의 분비가 가져다주는 쾌감에, 아무런 차이도 없어.
난 당신 같은 악마이랑 전혀 달라!
그래, 어쩌면 예전엔 나도 미지를 추구했을지도 모르지.
난제를 극복하면 엄청 흥분할 줄 알았어, 하지만 니토 같은 괴물을 봤을 때...
내가 느낀 건 괴로움과 역겨움뿐이었어.
라플라스... 당신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어겼어.
그것만큼은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는데.
라플라스는 손 안의 태블릿을 옆에 툭 던졌다.
그레이의 말이 맞았구나. 가문의 내력도, 자원의 불균형도, 전부 쓸모 없어...
진정으로 타고나서 즐기는 자 앞에선 전혀 쓸모 없어.
인정하든 않든... 너야말로 내 최고의 제자야.
넬레는 오열하며 소리쳤다.
아니야! 당신은 내 스승이 아니야!
당신에게 내 스승이 될 자격 따위 없어!
내 스승은 그레이 선생님뿐이라고!
지식은 곧 저주.
재능이 바로 저주.
언젠가는 너도 인정하게 될 거야, 내게서 얻은 것이야말로 네가 평생 추구했던 것이란 사실을.
"헬라" 프로젝트 일지의 패스워드는――
결국 방아쇠는 당겨졌다.
조준은 엉망이었지만, 분노로 온힘을 다해 겨냥했다.
이 헛소리만 지껄이는 여자를 향해.
스승이 눈부시다며 우러러봤던 선배를 향해.
이딴 빌어먹을 악마는...
죽어야 해!
반드시 죽어야 해!
죽어!
SFDSEGBWQE1345......
자신의 피웅덩이 위로 쓰러져 육신으로부터 생명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그녀는 담담히 마지막 한마디를 쥐어짜냈다.
나에게... 계승이 바로... 영생...
아아... 이 순간에서야... 진정으로... 살아...있......
스르륵...
아마리스가 창문을 열고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라플라스의 시체를 지나쳐, 넬레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에서 권총을 놓게 했다.
이제 다 끝났어.
미안해요 아마리스 씨... 이건 당신의 임무였는데...
저는 쏠 자격 없는데... 제가 멋대로...
응, 밖에서 다 들었어.
네...? 그럼 왜...
너랑 나는 다르니까.
난 결과만 있으면 되지만, 넌 해명이 필요했잖아?
상대에게 기대를 품어야 비로소 해명을 원하는 법이거든.
......
너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레이가 그토록 존경하던 이 "선배님"이, 너에게 고충으로 가득하고 장황한 이유를 늘어놓길 기대했을지도 몰라.
정말 그레이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구나, 하고 너 스스로를 납득시키도록.
그래서 난 이 인간의 해명 따위 안 들으려고 했어.
그런 걸 들었다간 나도 모르게 이 인간을 정말 "어머니"처럼 느끼게 됐을지도. 정말로 그런 어머니였다면... 그럼 나도 엄청 괴로울 테니까.
......
넬레는 넋없이 창문을 바라봤다. 두꺼운 커튼 때문에, 바깥으로부터 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몇 시죠?
일단 밤.
......
일기예보에서 내일은 흐리다던데.
하지만 서광은 나타났지.
내일은 서광과 함께 찾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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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네리 보호 구역, 버려진 고성 앞.
니토 몇 명이 나와 라플라스를 마중했다.
라플라스 님, 저희가 세이프하우스로 모시겠습니다. 몰리도 언니는 금방 도착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라플라스는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전혀 아랑곳않으며 묵묵히 니토들의 뒤를 따랐다.
멀리 떨어진 위치.
아마리스는 조준경을 통해 그 인물이 고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가 곧이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운명이라는 폭군의 화살을 묵묵히 인내하는 것과, 일어서서 세상의 끝없는 고난에 저항하는 것...
과연 어느 쪽이 더 고결한 행위일까?
고성의 복도.
하얀 니토가 라플라스를 세이프하우스까지 데리고 왔다.
라플라스 님, 저희는 밖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러마.
냉담하게 끄덕이고, 라플라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엄습했다.
버려진 고성이란 환경에 걸맞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라플라스에게 걸맞는 냄새였다.
......
등불에서 이토록 멀어진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라플라스는 창가 앞에 가만히 섰다. 만약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이 과학자가 지금 어떤 새로운 연구 과제를 생각 중일지 궁금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실험이 막바지에 도달해 그저 기다릴 뿐인 것처럼.
이젠 가열한 플라스크 속 용액이 식기만을 기다릴 뿐.
수치도 절차도 손볼 필요 없었다.
그리고 곧 드러날 결과는...
하지만 라플라스에게 기대나 환희 같은 감정은 없었다. 그저 잔잔한 평온함뿐이었다.
...노쇠한 육체의 기능은 역시 정신력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구나.
젊어서 청춘을 즐기고, 늙어서 명성을 즐기는 것도 세속적인 즐거움이지...
시간이란 틀을 깨부수는 생물의, 그 희로애락의 동력은 또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때, 문앞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라플라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하지만 문을 여는 이는 없었고, 그저 문짝 너머로 하얀 니토의 신음이 들렸다.
라플...... 안을... 조심......
상황을 파악한 라플라스가 문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잠겨 있었다.
라플라스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을 옷의 안주머니로 넣었다.
거기엔 6발 남은 브라우닝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아베르누스의 실험실에서 보낸 라플라스는 자연광을 몸소 느껴본지도 오래되었다.
실험실에선 언제나 작업용 등이 환하게 주변을 밝혔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분명 실외는 화창한 날씨건만...
이 안은 그저 어둠이었다.
인간의 귀는 니토만큼 예민하지 않다.
하지만 호흡도 마찬가지.
인간은 니토처럼 호흡을 완벽하게 감출 수도 없다.
그래서 라플라스는 눈치챘다. 저 앞의 어둠 속에, 누군가가 숨어있었다.
뚜벅... 뚜벅...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늘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마카로프 권총을 겨눈 한 젊은이였다.
......
낯선 얼굴. 하지만 익숙한 눈빛이었다.
골수까지 파고드는 증오, 오장육부를 달구는 분노가 담긴 눈빛.
...누구지?
상대가 당장 방아쇠를 당길 의도가 없음을 한눈에 간파한 라플라스는 저 젊은 여성에게 약간 흥미가 생겼다.
마사 마이트너... 사형수... 라플라스.
당신은 인간에서 악마로 완전히 타락했어.
흥미로운 시각이구나, 나는 지금 이 모습이 더욱 나다운 것이라 생각하는데.
누군가를 배신하면 똑같이 배신당하는 법이야.
마음의 준비는 진작부터 되어 있었단다.
솔직히, 너를 본 순간 누가 나를 팔았는지 알았어.
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너는 왜 여기 왔지?
내가 살아있는 인간을 못 본 지가 참 오래되어서 말이야.
......그레이 블랙웰.
기억해?
물론이지, 내 후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였는걸.
그런데, 당신은... 당신을 그토록 존경하던 그분을... 죽어서 눈도 감지 못하게 만들었어.
죽어서 눈도 감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를 전성기에 인류 육체 기능의 한계를 돌파시켜 주었고, 그를 기준으로 최적화된 상태를 유지시켜 주었는데?
그레이는 유일하게 다른 인간과 섞이지 않은 니토야.
그녀는 자신이 꿈에도 바라 마지않던 모든 것을 얻었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외과의가 되었지.
영원히 활짝 핀 꽃과도 같은 모습... 이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
행복? 당신이 말하는 행복이란, 그분을 완전히 뇌사시키고, 당신의 설계한 괴물의 의식으로 시신을 모욕하는 짓을 말하는 거야?
그분은 당신을 존경하고 우러러봤는데...!
그 시절 홉킨스 대학에서, 나는 그녀에게 무얼 바라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단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지.
의학의 역사는 하양과 검정의 대치로 점철되어 있다. 지혈 겸자와 리스턴 나이프가 발명되기 전만 해도, 수술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의학의 길에서, 가장 완벽한 회색이 되겠다.
생명의 하양으로, 죽음의 검정에 대항하겠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이상을 실현시켜 주었어. 그녀는 이제 영원한 "미스 그레이"야.
...그 영원함의 대가가 뭔데?
무수한 시체들이 지금 당신의 발밑에서 차 원념에 울부짖고 있는데, 잠이 오긴 해?
의학이란 원래부터 시체의 산을 밝고 넘어서 일구어낸 기적 아닌가?
장기 이식이 현실화된 이래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하는 일은 기본이 됐지 않니?
의학의 기적이란 인류가 자연에 대항하는 기적이야!
그 길에 쌓인 백골은 의술을 행하는 이들을 향한 경종이라고! 이건 놀이도 장난도 아니야!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도 수많은 의학계의 선구자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난제를 극복해 이뤄낸 기적인데!
그런데, 당신 같은 마귀의 눈에는... 그들이, 그저 대가라고...?
인류는 유전자의 노예니까.
선별 과정에서 적응 못한 개체는 대가로서 도태될 뿐이지.
그리고, 이제 우리의 유전자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게 될 거다.
그럼 아예 당신부터 니토가 되지 그랬어!?
그리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완전면역체의 수술을 집도하는 자는 반드시 순수한 인간이어야만 하거든.
그런 생물은 인외에 대한 지배력이 무시무시해서 말이다.
나는 줄곧 시간과 경주해 왔단다.
인간은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라도 시간을 들여야만 진리에 접촉할 수 있는데, 정작 무르익고 나면 그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수명은 얼마 남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지.
그러니, 나는 반드시 한정된 시간 안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유지해 이 수술을 완성해야만 해.
그리고, 이제 성공하기 직전이지.
아니, 당신은 실패할 거야.
그럴지도,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너무나도 좁으니까. 그런데, 내 뒤를 이을 놈도 딱히 재능을 타고난 녀석은 아니라서 말이야... 녀석은 자기 손으로 성공 가능성을 90%에서 한없이 0에 가깝게 만들고 말았어.
당신도 그 인간도 사이좋게 손잡고 지옥으로 떨어져.
당신들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재난이야.
멀쩡한 것이 거의 남지 않은 이 공장에서, 그레이는 생채기 하나 없이 페허 위에 우뚝 섰다.
반면 대치하는 브라메드는 기진맥진해서 헤베에게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수준이었다.
저거, 그레이가 아니에요... 패러데우스조차도 아닌 거 같아요...
......
헤베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브라메드를 한심한 눈초리로 흘겨봤다.
그레이는 진작에 죽었잖니, 저건 그거 빈 껍데기를 부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녀석은 조종자가 내리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야.
그 조종 수단을 끊어버릴 순 없을까요?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란다.
어차피 여기 남아있어 봐야 방해만 되는데.
...해보죠.
브라메드는 한 발짝 물러나 그레이의 시스템 취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반면, 그레이는 이미 격전은 치른 뒤인데도 담담히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곤 다시 헤베를 향해 공세에 나섰다.
헤베의 움직임은 가벼운 동시에 광풍처럼 날렵해서, 마치 몰아치는 바늘의 폭풍 같았다.
은밀하고, 신속하고, 치명적이었다.
그레이는 상대의 속도에 즉각 반응하며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는 전투의 템포가 완전히 상대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틈틈이 헤베의 눈동자에서 어떠한 마크가 만짝였지만, 같은 패러데우스인 탓인지 그레이가 절묘한 타이밍에 시선을 돌린 탓인지, 각인이 제대로 새겨지질 않았다.
이상해... 저 녀석, 컨셔스 파노라마가 불완전해요. 클라우드 마인드맵 같지도 않고. 전혀 새로운 AI 지휘 시스템인 것 같아요.
그걸 파괴해.
......
돌연 그레이가 헤베의 견제를 뿌리치고 브라메드에게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뻐억!
피하지 못한 브라메드는 가까스로 방어 태세를 갖춰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바닥을 몇 바퀴 뒹굴고 구석에 부딪혀 멈춘 그녀는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헤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네메아란 언니, 이건 저의 인지 범위를 벗어났어요.
<color=#00CCFF>알았다, 바로 라플라스 님께 연락하마.</color>
<color=#00CCFF>지금 우리가 가진 수단으로는 녀석을 해치울 수 없어.</color>
아마리스 얼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사 박사...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자신이 설계한 시스템에 아직도 똑같은 약점이 있다는 걸 모를려나?
리벨리온이 전송한 화면을 통해, 아마리스는 드디어 고치 계획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고치와도 같은 배양 캡슐 안에 잠들어 있는 소녀를.
연결해 줘.
<color=#00CCFF>방금 AN-94가 시도해봤는데, 시스템이 엄청 튼튼해서 전자 공격을 아주 들이부었는데도 멀쩡해.</color>
그래서 내가 있는 거지.
엘리아나가 파괴한 건, 걔에게 대응하는 의식의 호수였어. 그건 에너지를 빼앗는 곳이지.
그럼 나에게 대응하는 건? 분명 "고치"일 거야. 모든 에너지의 불순물이 모이는 곳.
"고치"... 그거야말로 전부 부숴버릴 수 있는 진정한 열쇠야.
<color=#00CCFF>...스티븐스 520 말로는, 엘마가 서머 가든을 닫은 후로 연결 가능한 구멍은 "나쟈"와 "루니샤"만 남았고, 열쇠도 두 자루 남겼댔어. 그리고 내가 그중 하나로 "나쟈"를 영구적으로 닫았으니, 여기 있는 이게 바로 마지막인...</color>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그래도, 이 설계의 기반은 대충 짐작이 가.
불완전한 면역체 "나쟈"는 대조군으로서 의식의 호수에 일방적으로 연결한 거야. 그래서 실패하고 매말라버렸지.
"고치"야말로 사형수가 디자인한 진짜 그릇이야.
완전한 "루니샤"는 반드시 의식의 호수와 고치 양쪽 모두 동시에 연결 가능한 능력을 지녔어야 해.
그런데, "루니샤"는 벌써 우화했지... 여기 남아있는 건 잉여 데이터뿐이야.
<color=#00CCFF>그럼 엘마가 남긴 열쇠는 쓸모없다고?</color>
그렇진 않아, 대신 우린 시간과 경주해야 해.
아직 통로가 완전히 뚫리지 않았으니까.
아직 이 "고치"의 껍데기를 이용해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야.
그야 나는 달의 아이, 신의 축복을 받은 선물인걸.
사형수... 정말 고마워. 내게 이런 선물을 줘서.
아마리스는 자신의 마인드맵 공간에 들어갔다. 이곳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이곳이 다시 쓸모가 생길 줄이야.
엘리아나... 의식의 호수에서, 마지막 순간에 넌 무슨 생각을 했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기라도 했으려나?
...에이, 넌 죽어도 못 깨닫겠지.
그냥 그런 걸로 하자, 어차피 난 너를 절대 용서 안 할 건데 뭐.
너도 나한테 아무 해명도 안 할 테니까.
가볍게 손을 들어 문을 열자, 문 너머에는 푸른 빛이 감도는 달빛이 있었다.
헤베의 공격이 더 빠르고 빈번해졌다.
채앵!
그레이는 가까스로 헤베의 공격을 자신의 칼날로 막아냈다.
헤베 언니...
안간힘으로 일어서려던 브라메드는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헤베는 뭐라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안색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기회를 붙잡은 그레이는 다시 힘을 모아 공격을 질렀다.
퍼억!
......
검은 그림자가 시야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와 자신을 밀어냈다.
몰리도였다.
하지만 몰리도의 상태도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왜 돌아왔어? 라플라스 님은?
이따 얘기해요.
몰리도는 기계 의족을 펼쳐 브라메드와 헤베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
계속 추격합니까? 지시를.
아니, 네 임무는 완료됐어. 기지로 복귀해.
<color=#00CCFF>알겠습니다.</color>
"고치"의 모든 잉여 데이터를 삭제하고 난 아마리스는 저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감개무량한 날이라니.
날씨... 진짜 좋다...
게다가 오늘 하루에서 제일 멋진 때가 다가오고 있네...
황혼.
잠깐 스쳐 지나가는 황혼.
인형의 미련을 모르는 하늘에, 밤의 장막이 드리웠다.
어디 어떻게 생긴 낯짝인지 보자고, 사형수.
네가 여기에 나타난 목적은 안다.
그래도 같은 분야의 선배로서 후계자에게 유언을 남길 시간은 주지 않으련?
네 입장을 고려해도, 그와의 통신을 엿들을 가치가 있을 텐데.
...사탄의 참회라면, 기꺼이 들어드리죠.
그렇다면 실망하겠구나.
라플라스는 손에 쥔 브라우닝 권총을 내려놓고 통신기를 들었다.
삐빅.
평소에는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연결되던 통신이, 오늘은 유난히도 빨랐다.
<color=#00CCFF>...선생님. 유언이라도 남기려고?</color>
실험의 후속 호송은 네메아란이 직접 맡았고, 지금쯤이면 화이트존에 도착했을 거다.
Avernus C. Hela의 01.59번에서 20.01번 부분은 거의 다 완료됐고, 온도는 섭씨 25도, 습도 40%로 유지하는 걸 잊지 마라.
그리고 이번 수술의 실행 가능 기간은 앞으로 5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절대 놓치지 말고.
<color=#00CCFF>흥. 걱정 마셔, 그건 당신보다 내가 훨씬 잘 아니까.</color>
<color=#00CCFF>반면에 당신은 모르는 게 잔뜩이지. 예를 들자면...</color>
<color=#00CCFF>누가 원해서 당신이 죽는지, 알아?</color>
그야 너겠지.
<color=#00CCFF>이유는 알고 싶어?</color>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는 그저 내가 당부한 대로 나머지 작업을 마무리짓기만 하면 돼.
<color=#00CCFF>당신이 없어야 이 수술이 완벽해질 수 있어.</color>
부디 내 일지와 주석을 따라 실행했으면 좋겠구나, 윌리엄.
너의 재능과 능력은 완벽한 결과에 도달하기엔 역부족이야.
<color=#00CCFF>그래? 하지만 내 업적과 명성은 당신을 아득히 뛰어넘게 될걸?.</color>
<color=#00CCFF>당신이랑, 당신이 라이벌이라 여기는 것들을 전부 포함해서 말이야.</color>
<color=#00CCFF>제일 중요한 이 마지막 수술은, 오직 나만이 완성할 수 있어.</color>
......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바라마. 내가 바라는 바도 이루어지길 빌고.
막상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조금 걱정되는구나.
<color=#00CCFF>지금 당신에겐 걱정할 시간도 없어.</color>
<color=#00CCFF>아무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들어주지.</color>
어쩌면, 흄은 평생 무명으로 남고 너는 끝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과학 연구의 길에서, 너는... 나는 물론이고, 쇼는 고사하고, 페르시카리아에게조차 너는 뒤떨어져.
루니샤는 어떻게 너처럼 멍청한 것을 동생으로 뒀을까.
툭.
윌리엄이 통신을 끊었다.
라플라스는 다시 앞의 총을 겨누고 있는 낯선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봐?
아가씨, 총을 똑바로 쥐질 못하네. 사람 죽이는 거 처음이야?
내 다른 학생과는 전혀 다르구나.
...이 거리에선 총 잘 못 쥐어도 당신 한 명쯤이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인데도, 라플라스는 태연히 손에 든 태블릿의 화면을 확인했다. 헤베가 공유한 데이터였다.
이 그레이, 네가 만들었니?
라플라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젊은이를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살펴봤다.
그러다, 넬레의 가슴에서 메달을 보곤 깨달음의 미소를 지었다.
아하, 그레이의 제자구나.
그 메달은 나와 그녀가 같이 디자인했지. 후배들에게 나눠 주길 참 좋아했는데.
당신은 선생님을 입에 올릴 자격 없어!
과학의 신도로서, 나는 종교적인 개념을 결코 신봉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너를 보니, 세상에는 정말로 인과율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 같구나.
내 진정한 후계자는... 바로 너였어.
그 말에 넬레는 두 눈을 부릅 떴다.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천부적인 재능이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합이지.
추구하는 길의 지식을 얻는 것 자체가 쾌락이야.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레이를 해부하면서, 지식과 쾌락을 얻었잖니.
어때, 나의 작품은 훌륭하지? 정말 기쁘구나, 이런 데서 나의 진정한 후계자를 만나게 되다니.
그레이나 윌리엄보다도, 네가 나를 닮았어.
웃기지 마!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원한이야! 이 일로 내가 얻은 건 하나도 없어!
의학도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없어. 둘은 차이가 없어요, 아가씨.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의 분비가 가져다주는 쾌감에, 아무런 차이도 없어.
난 당신 같은 악마이랑 전혀 달라!
그래, 어쩌면 예전엔 나도 미지를 추구했을지도 모르지.
난제를 극복하면 엄청 흥분할 줄 알았어, 하지만 니토 같은 괴물을 봤을 때...
내가 느낀 건 괴로움과 역겨움뿐이었어.
라플라스... 당신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어겼어.
그것만큼은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는데.
라플라스는 손 안의 태블릿을 옆에 툭 던졌다.
그레이의 말이 맞았구나. 가문의 내력도, 자원의 불균형도, 전부 쓸모 없어...
진정으로 타고나서 즐기는 자 앞에선 전혀 쓸모 없어.
인정하든 않든... 너야말로 내 최고의 제자야.
넬레는 오열하며 소리쳤다.
<size=50>아니야! 당신은 내 스승이 아니야!</size>
<size=50>당신에게 내 스승이 될 자격 따위 없어!</size>
<size=50>내 스승은 그레이 선생님뿐이라고!</size>
지식은 곧 저주.
재능이 바로 저주.
언젠가는 너도 인정하게 될 거야, 내게서 얻은 것이야말로 네가 평생 추구했던 것이란 사실을.
"헬라" 프로젝트 일지의 패스워드는――
결국 방아쇠는 당겨졌다.
조준은 엉망이었지만, 분노로 온힘을 다해 겨냥했다.
이 헛소리만 지껄이는 여자를 향해.
스승이 눈부시다며 우러러봤던 선배를 향해.
이딴 빌어먹을 악마는...
죽어야 해!
반드시 죽어야 해!
<size=50>죽어!</size>
SFDSEGBWQE1345......
자신의 피웅덩이 위로 쓰러져 육신으로부터 생명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그녀는 담담히 마지막 한마디를 쥐어짜냈다.
나에게... 계승이 바로... 영생...
아아... 이 순간에서야... 진정으로... 살아...있......
스르륵...
아마리스가 창문을 열고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라플라스의 시체를 지나쳐, 넬레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에서 권총을 놓게 했다.
이제 다 끝났어.
미안해요 아마리스 씨... 이건 당신의 임무였는데...
저는 쏠 자격 없는데... 제가 멋대로...
응, 밖에서 다 들었어.
네...? 그럼 왜...
너랑 나는 다르니까.
난 결과만 있으면 되지만, 넌 해명이 필요했잖아?
상대에게 기대를 품어야 비로소 해명을 원하는 법이거든.
......
너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레이가 그토록 존경하던 이 "선배님"이, 너에게 고충으로 가득하고 장황한 이유를 늘어놓길 기대했을지도 몰라.
정말 그레이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구나, 하고 너 스스로를 납득시키도록.
그래서 난 이 인간의 해명 따위 안 들으려고 했어.
그런 걸 들었다간 나도 모르게 이 인간을 정말 "어머니"처럼 느끼게 됐을지도. 정말로 그런 어머니였다면... 그럼 나도 엄청 괴로울 테니까.
......
넬레는 넋없이 창문을 바라봤다. 두꺼운 커튼 때문에, 바깥으로부터 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몇 시죠?
일단 밤.
......
일기예보에서 내일은 흐리다던데.
하지만 서광은 나타났지.
내일은 서광과 함께 찾아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