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성곱 핵
EP.15.6 · 합성곱 핵

포효하는 불바람처럼

갑작스러운 폭격에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다. 딜레마에 빠진 지휘관은 시민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74-A-2

1 / 248
전체 대사 보기 (203줄)

공습 경보가 맹렬하게 울어댔다.

이에 호응하는 것은 전투기의 굉음, 그리고 시내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폭발 소리.

오펜바흐구 한구석에서, FIM-92 대공 미사일을 소지한 소대가 건물에 몸을 바짝 붙이고 달렸다.

대원

대장님, 타 소대와 통신이 끊어졌습니다!

대장

전자기 교란이군.

우리 전자전 부대가 지금 대항 중일 거다.

대원

...마지막 통신을 받고 이미 10분이나 지났습니다.

대장

방공 사령부와 공항이 파괴돼서 우린 제공권을 잃었다.

하지만 저항을 포기해선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나설 때다!

모두가 날카로운 노이즈에 감정이 더욱 흔들리지 않도록, 부대장은 소대에게 통신기를 끄도록 지시했다.

그때, 스펀지처럼 구멍 난 도로 옆에서 고사포와 방공차량들이 검은 밤하늘을 향해 포탑을 들어 30mm 기관포를 갈겼다.

이미 파괴되어 시꺼먼 연기와 불길이 치솟는 "금속 잔해들"을 대신해 응징하려는 듯이.

대장

대공 반격 준비.

소대원들은 자리를 잡고 밤하늘을 가르는 저 그림자를 조준해, 지시기가 연속으로 발하는 신호음을 듣고 방아쇠를 당겼다.

슈웅!

발사기를 떠난 미사일은 도시의 상공에 하얀 호선을 그렸다.

무장통제사

미사일! 6시 하방!

전투조종사

......!

뒤의 전우가 소리치자, 전투조종사는 즉시 대 전자전 시스템을 켜는 동시에 전투기를 급선회시키며 플레어를 방출했다.

겨우 1초. 그 사이에 미사일은 하얀 연기를 남기며 전투기의 꼬리날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전투조종사

——XX!

전투조종사는 과중력에서 회복하자마자 숨 대신 욕설을 토해냈다.

무장통제사

좋은 소식이다! 적 전자전 부대의 정보를 확인!

무장통제사가 레이다 감시기를 주시했다.

지금 감시기에 표시되고 있는 건 그들에 대항하는 프랑크푸르트의 전자전 부대였다.

무장통제사

끝장내자고.

무장통제사가 감시기 옆의 버튼을 누르자, 지상의 전자전 부대를 나타내는 반점이 정확하게 조준됐다.

무장통제사

뇌관 해제.

공대지 미사일 발사.

전투기 날개 아래에 장착된 공대지 미사일이 풀려나, 저 앞의 어둠을 향해 날아갔다.

10초도 안 되어 그 어둠의 한가운데서 불길이 치솟았고, 이를 축하하듯 레이다 감시기에서 그 반점이 사라졌다.

그 시각, 도로.

프랑크푸르트 전역에 울려 퍼지는 공습 경보.

빨리 반응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시를 벗어나고자 차를 몰았다.

때문에 도시 출구 방향의 고속도로가 동맥을 틀어막은 혈전처럼 순식간에 붉은 후미등으로 가득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년 차주인

<size=50>빨랑 좀 가라고 망할!!</size>

<size=50>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해!?</size>

깜깜한 밤하늘 아래 피난길에 오른 이 차주는 패닉에 빠져 마구 경적을 울려댔다.

이는 기름통에 떨어진 불똥처럼 번져 나가, 고속도로 곳곳에서 더 많은 경적이 울리기 시작했다.

차내 라디오

<color=#00CCFF>...방공...치직...대피...치직...</color>

점점 커져 가는 라디오의 노이즈는 이내 방송의 목소리마저 집어삼켜, 듣는 이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이어서 대기가 떨리는 굉음이 났다. 라디오가 아니라, 저 시꺼먼 밤하늘에서.

뒷좌석의 아이는 차창문에 서린 김을 닦고 밖을 두리번댔지만 숨을 쉬는 사이에 다시 김이 서려서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

아빠, 저거 무슨 소리야? 엄청 시끄러워!

중년 차주인

저건——

전투기 한 대가 아래에 달린 새하얀 미사일을 자랑하듯 저공을 가로질러, 대기를 찢는 굉음이 그 아래 모두의 고막을 강타했다.

그리고 그 정도 충격으론 부족했는지, 도시의 마른 밤하늘이 번개가 친 것처럼 새하얗게 번쩍였다.

비도 오지 않는데 천둥이 치고, 기념일도 아닌데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차의 백미러에 비치는 프랑크푸르트는 빛이 아니라 불길로 환하고, 커다란 버섯구름이 곳곳에서 치솟았다.

중년 차주인

제기랄... 차에서 내리자!

겁에 질린 차주인은 꽉 막힌 도로를 다시 한 번 보고는, 이를 악물고서 난폭하게 차를 갓길로 몰아 세운 뒤 아이를 안아 들고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내달렸다.

그런 모습에 위험하다며 다급히 경적을 울리는 차들도 있었고, 욕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공황은 전염병처럼 퍼져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도시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상공의 비행기 한 대가 무언가에 충돌한 듯 우익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수백 m 상공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차들이 지네처럼 늘어선, 바로 저 고속도로를 향해서.

고속도로의 차량들 위로 불꽃과 연기를 내뿜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점점 커져...

행인

<size=50>으아아아아아아악!!!</size>

퍼어어엉!!!

떨어진 불덩이가 도로를 집어삼켰다.

추락한 비행기가 멈춘 곳에선 큰 불이 활활 타올랐다.

시꺼먼 연기가 치솟고, 뭔지 모를 파편과 흙먼지가 사방에 떨어졌다.

그보다 수백 m 뒤에서, 사람들이 찌그러진 차에서 기어나오며 오열했다.

젊은 부인

아가! 우리 아가——!

피투성이인 남자

<size=50>제니!! 안 돼! 제발 눈을 떠!!!</size>

피웅덩이 속 청년

<size=50>살려줘! 아아아악 내 다리!! 누가 구해줘요!!!</size>

순간 세상이 무음 영화처럼 변했다. 모두가 목놓아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그걸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사고" 현장의 가장 바깥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찌그러진 차 문을 힘겹게 열고 두 손 두 발로 기어나왔다. 눈썹에 기다란 흉터가 있는 그는 지금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노인

여기가 어디지... 프리첼...

노인은 막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차량의 행렬을 거슬러 절뚝절뚝 도시로 걸어갔다.

그 주변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차에서 빠져나와, 일행을 부축하며 정신없이 도망쳤다.

갑작스레 닥친 재난.

이 재난은 과연 언제 끝이 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RO635

<size=50>이 사람 아직 살아있어! 빨리 문을 뜯어!</size>

M4 SOPMOD II

알았어! 으쌰!

AR-15

걱정 마세요, 구하러 왔습니다.

......

AR-15

상처 누르고 있어. SOP2, 들것에 올리자. 하나, 둘, 셋!

RO635

SOP2, 좀 살살 하라고 했지!

M4 SOPMOD II

아, 알았어...

......

RO635

조금만 참으세요! 의료 인형이 왔습니다, 살 수 있어요!

......

엘모호.

태양은 어김없이 떠올라, 연기가 피어나는 프랑크푸르트와 도로 위에 선 엘모호를 비췄다.

도로 위는 여전히 피비린내와 화약의 냄새가 풍기고, 부상자의 신음소리가 일었다.

100여 명의 경상자는 앉거나 누워서, 피로에 절여진 채 막연하게 기다렸다.

AR-18

<color=#00CCFF>현재 프랑크푸르트 전역에서 지속적인 전자기 교란이 발생 중입니다. 아이네이아스 회의실은 그리폰 인형 간의 통신만 유지할 수 있고, 타 인원과의 연결은 아직 불가능합니다.</color>

지휘관

알았다. 다른 정보는?

AR-18

<color=#00CCFF>확인된 바로는 프랑크푸르트 국제 공항, 서측 교외의 군용 공항, 타우누스산의 방공 미사일 진지 모두 공습으로 무력화됐고, 아직까지도 신소련의 지상 부대는 포착되지 않았습니다.</color>

<color=#00CCFF>더불어 그로스 주석이 대국민 담화로 민주독일이 전시 태세로 돌입하였음을 선포했습니다.</color>

지휘관은 끓어오르는 살의를 식히려고 다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켰다.

지휘관

지금 도시의 상황은? 주민들의 피해는 어느 정도야?

그리고 시내에서 잠복 중이던 리벨리온과 404는...

AR-18

<color=#00CCFF>현재 주민들은 방공 시설로 대피 중이며, 리벨리온과 404는 세이프하우스에 있어 아직은 안전합니다.</color>

<color=#00CCFF>하지만, 지휘관.</color>

지휘관

뭐지?

AR-18

<color=#00CCFF>엘모호는 크기가 거대하여 정찰기가 위협적인 군사 목표로 인지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지금 엘모호에 계시는 것은 리스크가 큽니다.</color>

<color=#00CCFF>잠시 이탈하여 안전한 방어 진지로 피하시는 것을 건의합니다.</color>

지휘관

아니. 저들에게 있어 프랑크푸르트엔 고가치 목표가 잔뜩이니, 아직 우리처럼 작은 외래 인사에겐 눈이 돌아가진 않을 거야.

네메아란이 홀로 외출한 건 아주 드문 기회니 이대로 놓쳐서는 안 돼.

AR-18

<color=#00CCFF>...알겠습니다.</color>

<color=#00CCFF>몇 가지 방안을 수립할 테니, 그때까지 부디 안전에 주의해 주십시오.</color>

통신을 종료하고, 지휘관은 지휘실로 들어온 RO635에게 고개를 돌렸다.

RO635

지휘관님, 부근의 경상자들은 간단히 응급처치하고 인근 지하 방공 시설로 안내했습니다.

중환자는... 우리에겐 약품이 부족해 병원 측의 협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휘관

병원에 아직 여유는 있대?

RO635

저희가 알기론, 병상이 이미 포화 상태라 환자를 추가 수용할 장소를 물색 중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지휘관

뭐지?

RO635

공습으로 인해 시내의 주요 도로가 파괴됐거나 버려진 차들로 꽉 막힌 상태입니다.

도저히 구급차가 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지휘관

경찰에서는 뭐래?

RO635

연락이 안 됩니다. 모든 연락 수단이 먹통입니다.

지휘관

......

우리가 환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건?

RO635

도로의 파손이 심각해서 우리도 차량으로 이동이 불가능해요.

한다면 인형이 한 명씩 맡아 호송할 수밖에 없는데, 이동에 얼마나 걸릴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지휘관

그럼 할 수 있는 만큼 해봐.

RO635

알겠습니다.

지휘관

인형들 피해 상황은?

RO635

현재 일부가 부품 마모로 교체가 필요한 것 외에 심각한 손상은 없습니다.

아, M99에게 약간의 트러블이 있어요. 찌그러진 차체 안에 낀 사람을 꺼내려고 자신의 오른팔을 뜯어버려서 지금 수복실에 있습니다.

지휘관

수복에 문제가 있는 거야? 그건 상황 끝나고 얘기하자.

RO635

아뇨, 수복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설명할지 난처해, RO635가 잠깐 뜸을 들였다.

RO635

한 부상자가 M99의 그 팔과 토끼 인형을 주웠는데, 그 사람이 계속 M99와 같이 가겠다고 해서 일단 엘모호에 탑승시켰습니다.

지휘관

......

그건 내가 처리할게.

넌 계속 병원과 연락하고, 엘모호 관련 작업 배정은 AR-15가 돕게 해.

RO635

예.

엘모호의 접객실.

들어오자마자, 지휘관은 RO635의 묘사에 부합하는 부상자를 발견했다.

머리는 새하얗지만 허리는 꼿꼿한 노인. 외견상 6~70대로 판단되고, 계단 위에 점잖게 앉아 깍지손을 무릎 위에 놓은 그는 왼쪽 눈썹 위에서 거의 귀까지 이어지는 깊은 흉터가 눈에 띄었다.

그런 그의 옆에 가느다란 인형의 팔 한 짝이, 상처로 가득한 그의 손에는 새하얀 토끼 인형이 꼭 붙들려 있었다.

지휘관

어르신, 어르신께서 주우신 물건은 저희 인형 M99의 것입니다. 돌려주시겠습니까?

지휘관은 노인의 옆에 쪼그려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지휘관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한참 후에야 말을 알아들었다.

노인

...이건 내거야, 우리 프리첼이 내게 부쳐 준 거라고.

지휘관

증거 있으신가요?

노인

프리첼이 나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도 써 줬어!

힐롬가 12번지, 받는이 벨드! 20... 그래, 2046년 12월 25일!

노인이 잠시 또 머뭇거리며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갑자기 침울한 눈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노인

아니야... 내 것이 아니야...

프리첼이, 토끼는 우리 손주 한스에게 준댔는데... 2살짜리 애니까 토끼를 좋아할 테지...

지휘관이 손을 뻗어 M99의 팔을 집으려 하자, 노인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노인

지금 프리첼이 저 밖에서 목숨 걸고 너희를 지키는데, 걔 아이한테 줄 장난감을 가져가려 해!?

지휘관

...그럼 프리첼이란 분에게 연락드릴까요, 아니면 어르신을 힐롬가로 모셔드릴까요?

그 말에 노인이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서서히 눈빛이 맑아졌다.

노인

프리첼은... 이미 집에 돌아왔어...

갑자기, 구슬 같은 눈물이 노인의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인

그 쬐끄만 상자에 담겨져서...

신소련 놈들한테 죽은 게 아니라, 자기 동포의 손에 죽었어...

노인은 회상에 잠겼다.

노인

아직도 기억해... 2024년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서...

그 작은 핏덩이가 어느새 훌쩍 크더니, 지 아비처럼 나라와 국민을 지키겠다면서 입대해가지고는... 착한 애야.

그런데 난 한스를 잘 돌보지 못했어... 대폭격 때... 난 좋은 아비도, 좋은 할아비도 아니야...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두 손으로 얼굴의 눈물을 마구 닦으면서도 여전히 꼿꼿한 그의 등은, 뼛속까지 새겨진 그의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듯했다.

하지만 손을 내려놓는 노인의 얼굴은 약간 붉게 부었다.

노인

...미안하구먼, 내가 또 노망이 났었나 봐. 가져가시게.

지휘관

아뇨,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군인은 모두가 영웅입니다.

어르신도 영웅이십니다.

노인

자네 모습을 보아하니... 군인이군?

대답이 목구멍에 걸려 지휘관은 잠깐 침묵했다.

지휘관

...네.

저도 한때 군인이었습니다.

노인

고맙네, 용감한 젊은이. 프리첼이 살아있었다면 자네와 좋은 친구가 됐을 텐데.

지휘관

...인형들을 시켜 가까운 지하 방공 시설로 모시겠습니다. 걸으실 수 있으십니까?

노인

그래, 내 집이 바로 근처야.

노인은 무릎을 쓰다듬으며 발을 풀었다.

노인

고맙네, 비록 자네가 우리 도시를 폭격한 놈들과 같은 소련인이라도...

그래도, 감사하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소련의 「병사의 시」야. 자네도 꼭 자네 나라의 영웅이 되기를 빔세.

지휘관

...고맙습니다.

지휘관은 M99의 팔을 집고 일어서, 접객실을 나왔다.

지휘관

RO, M99의 팔을 돌려받아서 수복실로 보냈어.

RO635

<color=#00CCFF>수고하셨습니다, 그 어르신을 달래느라 고생하셨죠?</color>

지휘관

......

잠깐 좀 쉴 테니 엘모호를 부탁해.

RO635

<color=#00CCFF>네, 지휘관님. 제게 맡겨 주세요.</color>

양옆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건물의 행렬을 따라, 엘모호는 썰렁한 거리 위를 천천히 행진했다.

지휘관은 푹신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밤새 벌인 구조 작전으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넋을 잃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지휘관

「병사의 시」라...

대체 얼마만에 듣는 제목이지...

......

시끌벅적한 열차칸.

아직 풋풋하고 어리숙했던 지휘관은, 저마다 떠나보내는 이들을 배웅 나온 인파의 사이를 헤집고 나와 짐가방을 들고 열차에 올랐다.

좌석으로 오니, 지휘관의 자리는 웬 껄렁한 얼굴의 남성이 차지한 채로 맞은편에 앉은 여성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여성은 의외로 시원시원한 기품에, 조금 낡았지만 깔끔한 군복 차림이었다.

먼저 짐가방을 선반에 올려놓은 뒤, 지휘관은 약간의 짜증을 담아 그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로먼

응? 아아 미안미안, 일부러 자리 차지한 건 아냐.

난 로먼이라 하는데, 너는 그 옷차림을 보니... 학교 가나 봐?

지휘관

......

듣는 둥 마는 둥, 지휘관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좌석에 앉았다.

로먼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 다시 맞은편의 여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먼

죄송함다, 방금 어디까지 했죠?

??

..."그들도 우리 동포야, 단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었을 뿐."

로먼

아 그랬죠! 정말 흥미로운 관점이에요, 지금 유행하는 건 우리의 적에 대한 완전한 부정 아님까.

그들을 동족으로 보긴커녕 아예 인간 취급도 안 하잖아요.

??

전쟁의 필연적인 과정이지. 적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마음껏 폄훼하는 거.

그래야 죽일 때 죄책감도 덜해지니까 말이야.

하지만, 살인은 결국 살인이야. 그점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아.

로먼

이야아, 말 진짜 잘하심다!

지휘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컵을 탁상에 쿵 내려놨다.

??

이쪽 친구는 별로 맘에 안 드나 봐?

지휘관

.....

지휘관은 계속 그들을 무시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 신호를 냈다.

로먼

열차 출발하네요, 그럼 이만 자리로 돌아가보겠슴다.

이따 또 봐요, 헬린 선배!

헬린

그래.

로먼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좁은 열차칸이 조용해졌다.

바깥에서 승객들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아우성이 지휘관에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우는 여인

이반! 자기야! 꼭 살아서 돌아와! 기다릴게!

슬픈 노인

아이고 내 손주, 편지 자주 보내렴! 알았지!?

우는 아이

아빠! 가지 마 아빠아아아아! 기차에서 내려어어어!

지휘관

......

지휘관은 저 소음에 짜증내며 시선을 돌렸다가 맞은편 자리에서 미소짓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헬린

안녕. 이름 뭐야?

지휘관

......

헬린

너도 배웅 나온 사람 없나 봐?

지휘관

......

헬린

저기, 미안한데 혹시 벙어리야?

괜찮아, 나 수화 조금 할 줄 알아.

여자는 정말로 수화인 것 같은 손동작을 해 보였다. 하지만 지휘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컵을 들고 정수기로 걸어갔다.

......

물은 받았지만 바로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지휘관은 창문 밖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노인

저기, 젊은이? 미안한데 요 병 좀 열어 주지 않겠나?

언제 왔는지, 한 노인이 지휘관의 소매를 당기며 울었다.

노인

뜨신 물 담은 게 식어서 그런지, 내 힘으론 안 열리지 뭔가.

지휘관

도와드릴게요.

지휘관은 손쉽게 병뚜껑을 열었다.

지휘관

뜨거운 물 다시 받으시려는 거죠?

노인

맞어.

지휘관은 노인 대신 물병을 헹궈 다시 뜨거운 물을 받은 다음, 뚜껑도 살짝 느슨하게 잠그고 돌려주었다.

노인

아이구, 이거 고마우이.

지휘관

천만에요.

노인

옷을 보아하니, 군사학교 가나?

지휘관

...네, 올해 수보로프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노인

널 보니 우리 로빈이 생각나는구먼...

지휘관

로빈... 그 사람도 군사학교를 다니나요?

노인

로빈은 세상을 떠났어. 전장에서.

3개월 전의, 그...

지휘관

...죄송합니다.

노인

아니야, 젊은이가 왜 미안혀. 로빈도 너처럼 파릇파릇했지. 내 눈엔 몇 살을 먹어도 어린애긴 했지만...

지휘관

......

노인이 갑자기 행낭을 뒤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건빵 한 봉지를 꺼내 지휘관에게 들이밀었다.

지휘관

아, 아뇨, 병뚜껑을 열어드렸을 뿐인데 이러실 것 없습니다!

노인

받아 둬! 그냥 받아 줘.

그런 말을 하는 노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노인

난 녀석이 입대하는 걸 반대해서, 싸우다 삐져서는 떠나던 날 역까지 배웅을 안 나갔어.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마음에 안 들었어도 가서 안아 주고 잘 다녀와라 했어야 했는데...

지휘관

......

노인

그러니까 받아, 우리 로빈 대신 받는 거라 치고.

하는 수 없이, 지휘관은 그 묵직한 건빵 한 봉지를 받았다.

지휘관

...네, 잘 먹을게요.

노인

대신, 너도 꼭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 네 가족이 기다릴 게야.

가슴이 철렁했다. 기다리는 가족 따위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

할머니도 몸조심하세요.

노인

나는 내 동생 집에 가. 걔가 병들어서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거든.

집에 돈 되는 건 다 팔아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지휘관

네, 동생분도 건강해지시길 빌어요.

천천히 자리로 돌아가는 노인을 지켜보고, 지휘관도 물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열차는 봄날의 평원을 가로지르며 먼 곳을 향해 달렸다.

단조롭고 지루한 열차의 소리를 들으며...

2050년의 지휘관은, 천천히 눈꺼풀을 닫고 혼란한 꿈속에 빠졌다.

2050년의 신소련도 전쟁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엔 희망이 있었다.

길가에 피어난 백합처럼, 희망은 봄날에 마음껏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