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의 주름
라플라스의 유언이 아직도 넬레의 귓가를 맴돌았고, 두 손을 피에 적신 그녀는 다시 곤경에 빠졌다.
일상과는 현저히 다른 소리.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는 가까이서 나는 건지 멀리서 들려오는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길의 양쪽으로는 행인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덫에 빠진 쥐떼처럼 갈팡질팡 도망쳤다.
한편 넬레는 그저 세상이 빠르게 무너지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으아아아악!!!!
폭격이다!!! 사람 살려——
......
아찔한 비현실감. 길가에서 도주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 황폐한 고성에 나오고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옆에는 아마리스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라 느껴질 만큼 조금 아플 정도로.
지하 셸터로 가긴 늦었어... 일단 다른 데 숨자! 지금 길거리는 위험해!
...네!
폭발음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아마리스는 넬레를 데리고 인파를 헤쳐 길가의 어느 상점으로 달려갔다.
빨리 들어가! 빨리!
시야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마리스가 잡아끌어 주지 않았다면 넬레는 사방에서 터지는 굉음에 똑바로 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틀비틀 문을 넘어서자 겁에 질린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넬레는 그 얼굴들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아마리스가 바로 그녀를 두껍고 튼튼한 나무 테이블 밑으로 숨겼으니까.
여기 가만 있어, 머리 보호하고!
넬레는 당부에 따라 테이블 밑에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영혼과 기억을 담는 중요한 부위를 감쌌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콰앙...
콰아앙...
마치 한 세기가 흐른 느낌. 무너지는 소리가 점점 가라앉아 갔고, 넬레의 심박도 점점 차분해졌다.
얼마 후, 무척이나 든든하던 테이블 밑에서 기어나오니 아마리스가 바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폭격... 멈췄나요?
지금은.
왜 갑자기 폭격이...
지휘관한테 정보 받았는데, 프랑크푸르트와 모스크바가 동시에 신소련 반군의 기습을 받았어.
이건 전쟁이야.
......
"전쟁". 무척이나 요원하게 들리는 단어.
하지만 골똘히 생각해 보면 한시도 우리에게서 멀어진 적 없었던 단어.
넬레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빵집인 것을 깨달았다. 이 작은 가게 안에서, 빵 선반 주위로 피난민들이 잔뜩 뭉쳐 있었다.
가게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고, 푹신하고 맛있을 빵은 바닥을 뒹굴며 몇 개는 이미 잔뜩 짓밟히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도 들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두들기거나 옆사람에게 무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짓을 하냐고...
젠장, 신호가 먹통이라 인터넷 접속도 안 되네...
으으... 집에 가고 싶어...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 밀려, 넬레는 아마리스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단 한 칸도 차오르지 않는 신호에 넬레도 한숨을 푹 쉬곤 통화 시도를 관뒀다.
아마리스 씨, 정부에서 소식이나 행동 지침 발표한 것 없나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라든가요.
그냥 형식적인 통지만 있었어. "시민들은 통신을 유지하며 지하 방공 시설로 대피하라."
......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더 폭격할 징후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방공 시설로 가자.
지금 지상은 어디도 안전하지 않아.
네. 가장 가까운 지하 방공 시설이면... 지하철역?
응, 가까이에 마인츠대학역이 있어.
달린다면 아마 5분 안에 도착할——
퍼엉!
돌연 길거리에서 큰 폭발이 일었다.
쾅! 쾅! 쾅!
빵집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곧장 돌진해 오는, 불이 붙은 자동차 한 대가 내는 소리였다.
콰아앙!!
사람들의 비명을 집어삼키며, 차량은 빵집의 출입구를 들이받고 단단히 끼인 채로 멈췄다.
맙소사, 유리 좀 봐! 온통 피야! 안에 있는 사람들 엄청 다쳤나 봐!
...저기, 혹시 신호 터지는 사람 있어요? 경찰차든 구급차든 불러야죠.
전화가 돼도 지금 상황에서 올 수 있을까요... 의료 인형이라도 있었으면 금방 구했을 텐데...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넬레가 서둘러 문을 들이받은 차로 달려가 운전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운전자는 겉보기엔 겁에 질려 눈을 부릅뜬 채여서, 넬레가 말을 걸어보았다.
괜찮으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억... 허억...
의식 혼미. 제정신으로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넬레의 눈에 운전자는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드러나지 않은 부위에 심각한 외상을 입었을 수도 있어.
아마리스 씨, 유리 깨 주세요. 제가 들어가서 응급처치가 가능한지 확인하겠어요.
......
그냥 유리 부수고 끌어내면 안 돼?
안 돼요. 천천히, 반듯하게 지면에 내려놓아야 해요.
그렇게 부상이 심각한가... 내가 먼저 들어가볼게.
아마리스가 먼저 차 위로 올라 넬레를 끌어당겨 주었다.
그러자 보인 운전자의 가슴에 흥건한 피에, 넬레는 숨을 들이켰다.
흉부에 뚜렷한 외상... 늑골이 골절됐을 수도 있어요, 옮길 때 특히 조심해야 해요.
하지만 빨리 응급처치라도 하지 않으면 구급차를 불러도 못 버틸 텐데...
......
알았어.
아마리스는 최대한 조심조심 차창 유리를 깨뜨리고 조수석을 통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넬레도 바로 그 뒤를 따라, 함께 운전자를 조심조심 들어 차 밖으로 옮겼다.
......
길가에 반듯하게 눕힌 운전자의 얼굴은 피와 눈물로 범벅이어서, 괴로운 건지 평온한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저...끅...
말하지 마세요, 우선 부상 확인할게요.
운전자의 상의를 살며시 들추니, 이미 복부와 흉부가 피범벅에 부러진 갈비뼈의 단면마저 선명하게 보였다.
이를 본 넬레가 기겁하며 갖고 있던 헝겊을 꺼냈지만, 대체 어디부터 지혈해야 할지가 의문이었다.
......
늦었어.
그래도, 뭐라도...
넬레는 할 수 있는 만큼 응급처치를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운전자에게서 흘러나온 피웅덩이가 넬레의 발치를 적셔 갔다.
고마...어억...
......
목소리는 목구멍에 걸려 다 말하지도 못하고 끊어졌다.
넬레...
......
운전자의 숨이 멎었다.
담담히 비통해하며, 아마리스는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부상이 너무 심각했어. 네가 뭘 해도 곧 죽었을 거야.
......
넬레는 지금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운전자의 피가 잔뜩 묻은 자신의 손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
두 손을 물들인 붉은색이,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눈 속에서 흔들렸다.
의학도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없어. 둘은 차이가 없어요, 아가씨.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의 분비가 가져다주는 쾌감에, 아무런 차이도 없어.
지식은 곧 저주.
재능이 바로 저주.
언젠가는 너도 인정하게 될 거야, 내게서 얻은 것이야말로 네가 평생 추구했던 것이란 사실을.
지금은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으니 일단은 이 사람 신원 확인하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유가족을 검색할게.
지금은 통신 문제로 통화는 안 되니까 문자라도 보내자.
...넬레?
넬레! 너 괜찮아?
......
넬레?
아마리스... 씨...
그때, 다시 공습 경보가 울려 퍼졌다.
아마리스도 놀라 날아오르는 새떼를 보았다.
지하철역으로 가자.
......
넋이 나간 넬레를 끌면서, 아마리스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도로만큼 엉망인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가 무섭게 지하철역 안에서 메아리치는 소음과 아우성이 봉인에서 풀려난 원혼처럼 두 사람을 덮쳤다.
하지만 넬레에겐 그 소리도 전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 망할 여자가, 콱 죽어버리지 그래!?
지옥에나 떨어져라 쓰레기야! 너 같은 사람 때문에 난민들이 정부를 못 믿는 거라고!
너 간첩이지!? 당장 네 고향으로 꺼져!
어두운 감정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 담쟁이덩굴처럼 들러붙었다.
그 어두움에, 넬레는 마치 자신이 이 어두컴컴한 지하철역의 그늘에 녹아들 것만 같았다.
으아아앙! 엄마아!!
아 XX 밀지 좀 마! 다른 사람한테 양보해 달라고 해!
대체 폭격은 언제 끝나는 거야?
......
넬레, 이쪽으로 와.
아마리스가 인파를 헤치고 그나마 여유가 있는 구석으로 넬레를 데려왔다.
여기서 기다리면서 확실한 정보가 오면 움직이자.
...기운 좀 내.
...네, 네, 전 괜찮아요.
북적이는 인파 한가운데서도 그녀의 손과 실험복에 묻은 혈흔은 역시 눈에 띄었다.
묵직한 폭음이 지하철의 통로에서 메아리쳤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서서, 광주리에 갇힌 귀뚜라미처럼 하염없이 저 무엇인지 모를 적에 떨어야 했다.
으아아아앙——
쿠릉... 쿠르릉...
대지의 진동에 지하철역의 모든 조명이 흔들리고 깜빡이며 스포트라이트처럼 겁에 질린 얼굴들을 비췄다.
쩌걱—— 퍼엉!
천장의 노후화된 석고 타일과 유리도 깨져, 사람들 위로 떨어졌다.
천장이 무너진다!! 도망쳐어어어!!!
아아악!! 밀지 마! 밀지 말라고!!!
......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 이 지옥같은 아비규환에서 어둡고 기괴한 광경을 자아냈다.
뚝 끊어진 목소리, 파묻힌 탄식, 성에 받친 비명...
피할 곳이 없기에 더더욱, 저 절망에 찬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마리스는 넬레를 감싸고 저 아비규환으로부터 그녀의 시선을 가려 주었다.
잠시후 폭격의 여파가 서서히 잠잠해져 아우성이 점차 흐느낌으로 가라앉아, 아마리스도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
아무래도 한동안은 소란스럽겠네.
폭격은... 언제 끝날까요?
다들 그렇게 묻더라.
3차 대전 때도 그랬어.
모두가 항상,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라 물었지.
......
거짓된 희망을 주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버텨. 참아. 어떻게든 살아남아.
하지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우리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도 아니고, 우리가 뭘 한다고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다음 해돋이까지 살아남는 것. 그뿐이야.
......
정말 버틸 수 있을까요?
넌 할 수 있어, 넬레.
넌 내가 보아 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이야.
......
거짓말.
맘대로 생각해.
아무튼,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식사는 해야지? 가서 음식이랑 물 구해올게.
너 지금 12시간 넘게 아무것도 못 먹었단 자각은 있어?
지적당하고서야 넬레는 피로와 허기를 느꼈고, 그런 그녀를 아마리스가 한쪽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까.
...당신도 조심해요, 지금 다치면 수리할 곳도 없어요.
풋, 전술인형 얕보지 마.
네...
넬레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자를 내려놓는 아마리스를 지켜봤다.
조심해요.
내가 할 말이야.
넬레, 잘 들어.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마. 누가 도와 달라 해도 대답하지 마.
......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어디 가지도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알았지?
...네.
무슨 일 있으면 통신기로 연락해.
그거 그리폰 특제품이라, 지휘관이랑은 문제 없이 연락 가능해.
지금 거기다 슈타지 전용 채널도 추가했고.
어느 쪽이든 다 내가 들을 수 있어.
네...
그리고 아마리스는 빠른 걸음으로 구호 물품을 찾으러 떠났다.
이제 넬레에겐 실컷 멍때릴 시간이 생겼다.
......
지금 넬레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시뻘건 두 손. 절대 씻기지 않을 피와 죄악이 묻은 것처럼 느껴졌다.
말라붙은 혈흔은, 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묻었다.
한 번 피가 묻으면...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죄의 낙인...
지식은 곧 저주.
재능이 바로 저주.
......
언젠가는 너도 인정하게 될 거야, 내게서 얻은 것이야말로 네가 평생 추구했던 것이란 사실을.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삐삐삐!
다급한 호출음이 넬레의 생각을 끊었다.
넬레 씨!
지금 아마리스하고 어디 있습니까!?
...J 씨? 지금 마인츠 대학 지하철역에 있어요.
아, 그래요? 다행이에요.
아마리스는 지금 구호 물품 구하러 갔어요.
아 예, 그것도 다행이네요.
...그게 원래는, 그레이에 관한 일에서 그만 손 떼라고 연락한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는 일도 전부 했습니다.
그 마카로프 권총도 지휘관한테 돌려주고요.
넬레 씨는 메스를 쥐어야지, 총을 쥐어선 안 됩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제 손엔 이미 피가 잔뜩 묻었는데요... 피범벅이 된 손을, 정말 깨끗이 씻을 수 있나요?
어... 지금 세면대 못 찾아서 하는 말인가요? 물이 없음 알코올로라도 닦으면 되죠.
아 참, 전시 상황에선 알코올도 중요 자원이지 참. 그리고 넬레 씨 성격상 분명 남한테 양보할 거고... 그럼...
......
J가 대뜸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넬레에게 전송했다.
일회용 장갑 잘 쓰잖습니까, 그거 끼세요!
봐요, 이러면 깨끗하죠?
사진 속 J는 손에 일회용 의료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당신은 의사잖아요, 손에 피 묻는 건 당연해요.
지저분한 게 싫으면 장갑을 끼면 됩니다.
......
여보세요? 넬레 씨?
...알겠어요.
네, 그럼 안전한 데에 계속 계시고, 나중에 다시 연락합시다.
J가 통신을 끊었다.
이게 장갑을 낀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저기, 안녕하세요...
주저하는 인사말이 그녀를 깨웠다.
먼지투성이에, 잠든 아이를 품에 안은 낯선 여자였다.
가운을 입으신 걸 보니, 혹시 의사이신가요?
전...
우리 아이가 계속 열이 나고 있어요. 오늘 병원에 데려가려 했는데, 가던 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지금 열이 너무 심해서 의식도 흐릿하고, 걱정이 돼요. 혹시 상태를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
품에 안긴 아이에게 시선이 향했다. 동그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 아이는 심지어 손발에 가벼운 경련 증상까지 보였다.
의학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위급한 상태였다.
...저기요?
손바닥의 붉은 자국은 달군 쇠로 찍은 낙인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듯해, 뚜렷하고 깊은 고통이 전해져왔다.
귓가에는 기억의 심연에서 소용돌이치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몸부림치고, 망설이고, 괴로워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넬레는 고개를 들어 본인으로서의 대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지금 제 손이 좀 더러워서, 제 주머니에서 의료용 장갑을 좀 꺼내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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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는 현저히 다른 소리.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는 가까이서 나는 건지 멀리서 들려오는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길의 양쪽으로는 행인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덫에 빠진 쥐떼처럼 갈팡질팡 도망쳤다.
한편 넬레는 그저 세상이 빠르게 무너지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size=50>으아아아악!!!!</size>
<size=50>폭격이다!!! 사람 살려——</size>
......
아찔한 비현실감. 길가에서 도주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 황폐한 고성에 나오고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옆에는 아마리스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라 느껴질 만큼 조금 아플 정도로.
지하 셸터로 가긴 늦었어... 일단 다른 데 숨자! 지금 길거리는 위험해!
...네!
폭발음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아마리스는 넬레를 데리고 인파를 헤쳐 길가의 어느 상점으로 달려갔다.
빨리 들어가! 빨리!
시야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마리스가 잡아끌어 주지 않았다면 넬레는 사방에서 터지는 굉음에 똑바로 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틀비틀 문을 넘어서자 겁에 질린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넬레는 그 얼굴들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아마리스가 바로 그녀를 두껍고 튼튼한 나무 테이블 밑으로 숨겼으니까.
여기 가만 있어, 머리 보호하고!
넬레는 당부에 따라 테이블 밑에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영혼과 기억을 담는 중요한 부위를 감쌌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콰앙...
콰아앙...
마치 한 세기가 흐른 느낌. 무너지는 소리가 점점 가라앉아 갔고, 넬레의 심박도 점점 차분해졌다.
얼마 후, 무척이나 든든하던 테이블 밑에서 기어나오니 아마리스가 바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폭격... 멈췄나요?
지금은.
왜 갑자기 폭격이...
지휘관한테 정보 받았는데, 프랑크푸르트와 모스크바가 동시에 신소련 반군의 기습을 받았어.
이건 전쟁이야.
......
"전쟁". 무척이나 요원하게 들리는 단어.
하지만 골똘히 생각해 보면 한시도 우리에게서 멀어진 적 없었던 단어.
넬레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빵집인 것을 깨달았다. 이 작은 가게 안에서, 빵 선반 주위로 피난민들이 잔뜩 뭉쳐 있었다.
가게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고, 푹신하고 맛있을 빵은 바닥을 뒹굴며 몇 개는 이미 잔뜩 짓밟히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도 들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두들기거나 옆사람에게 무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짓을 하냐고...
젠장, 신호가 먹통이라 인터넷 접속도 안 되네...
으으... 집에 가고 싶어...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 밀려, 넬레는 아마리스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단 한 칸도 차오르지 않는 신호에 넬레도 한숨을 푹 쉬곤 통화 시도를 관뒀다.
아마리스 씨, 정부에서 소식이나 행동 지침 발표한 것 없나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라든가요.
그냥 형식적인 통지만 있었어. "시민들은 통신을 유지하며 지하 방공 시설로 대피하라."
......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더 폭격할 징후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방공 시설로 가자.
지금 지상은 어디도 안전하지 않아.
네. 가장 가까운 지하 방공 시설이면... 지하철역?
응, 가까이에 마인츠대학역이 있어.
달린다면 아마 5분 안에 도착할——
퍼엉!
돌연 길거리에서 큰 폭발이 일었다.
쾅! 쾅! 쾅!
빵집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곧장 돌진해 오는, 불이 붙은 자동차 한 대가 내는 소리였다.
콰아앙!!
사람들의 비명을 집어삼키며, 차량은 빵집의 출입구를 들이받고 단단히 끼인 채로 멈췄다.
맙소사, 유리 좀 봐! 온통 피야! 안에 있는 사람들 엄청 다쳤나 봐!
...저기, 혹시 신호 터지는 사람 있어요? 경찰차든 구급차든 불러야죠.
전화가 돼도 지금 상황에서 올 수 있을까요... 의료 인형이라도 있었으면 금방 구했을 텐데...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넬레가 서둘러 문을 들이받은 차로 달려가 운전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운전자는 겉보기엔 겁에 질려 눈을 부릅뜬 채여서, 넬레가 말을 걸어보았다.
괜찮으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억... 허억...
<color=#A9A9A9>의식 혼미. 제정신으로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color>
넬레의 눈에 운전자는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color=#A9A9A9>드러나지 않은 부위에 심각한 외상을 입었을 수도 있어.</color>
아마리스 씨, 유리 깨 주세요. 제가 들어가서 응급처치가 가능한지 확인하겠어요.
......
그냥 유리 부수고 끌어내면 안 돼?
안 돼요. 천천히, 반듯하게 지면에 내려놓아야 해요.
그렇게 부상이 심각한가... 내가 먼저 들어가볼게.
아마리스가 먼저 차 위로 올라 넬레를 끌어당겨 주었다.
그러자 보인 운전자의 가슴에 흥건한 피에, 넬레는 숨을 들이켰다.
흉부에 뚜렷한 외상... 늑골이 골절됐을 수도 있어요, 옮길 때 특히 조심해야 해요.
하지만 빨리 응급처치라도 하지 않으면 구급차를 불러도 못 버틸 텐데...
......
알았어.
아마리스는 최대한 조심조심 차창 유리를 깨뜨리고 조수석을 통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넬레도 바로 그 뒤를 따라, 함께 운전자를 조심조심 들어 차 밖으로 옮겼다.
......
길가에 반듯하게 눕힌 운전자의 얼굴은 피와 눈물로 범벅이어서, 괴로운 건지 평온한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저...끅...
말하지 마세요, 우선 부상 확인할게요.
운전자의 상의를 살며시 들추니, 이미 복부와 흉부가 피범벅에 부러진 갈비뼈의 단면마저 선명하게 보였다.
이를 본 넬레가 기겁하며 갖고 있던 헝겊을 꺼냈지만, 대체 어디부터 지혈해야 할지가 의문이었다.
......
늦었어.
그래도, 뭐라도...
넬레는 할 수 있는 만큼 응급처치를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운전자에게서 흘러나온 피웅덩이가 넬레의 발치를 적셔 갔다.
고마...어억...
......
목소리는 목구멍에 걸려 다 말하지도 못하고 끊어졌다.
넬레...
......
운전자의 숨이 멎었다.
담담히 비통해하며, 아마리스는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부상이 너무 심각했어. 네가 뭘 해도 곧 죽었을 거야.
......
넬레는 지금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운전자의 피가 잔뜩 묻은 자신의 손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
두 손을 물들인 붉은색이,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눈 속에서 흔들렸다.
의학도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없어. 둘은 차이가 없어요, 아가씨.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의 분비가 가져다주는 쾌감에, 아무런 차이도 없어.
지식은 곧 저주.
재능이 바로 저주.
언젠가는 너도 인정하게 될 거야, 내게서 얻은 것이야말로 네가 평생 추구했던 것이란 사실을.
지금은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으니 일단은 이 사람 신원 확인하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유가족을 검색할게.
지금은 통신 문제로 통화는 안 되니까 문자라도 보내자.
...넬레?
넬레! 너 괜찮아?
......
넬레?
아마리스... 씨...
그때, 다시 공습 경보가 울려 퍼졌다.
아마리스도 놀라 날아오르는 새떼를 보았다.
지하철역으로 가자.
......
넋이 나간 넬레를 끌면서, 아마리스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도로만큼 엉망인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가 무섭게 지하철역 안에서 메아리치는 소음과 아우성이 봉인에서 풀려난 원혼처럼 두 사람을 덮쳤다.
하지만 넬레에겐 그 소리도 전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color=#00CCFF>이 망할 여자가, 콱 죽어버리지 그래!?</color>
<color=#00CCFF>지옥에나 떨어져라 쓰레기야! 너 같은 사람 때문에 난민들이 정부를 못 믿는 거라고!</color>
<color=#00CCFF>너 간첩이지!? 당장 네 고향으로 꺼져!</color>
어두운 감정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 담쟁이덩굴처럼 들러붙었다.
그 어두움에, 넬레는 마치 자신이 이 어두컴컴한 지하철역의 그늘에 녹아들 것만 같았다.
으아아앙! 엄마아!!
<size=50>아 XX 밀지 좀 마! 다른 사람한테 양보해 달라고 해!</size>
대체 폭격은 언제 끝나는 거야?
......
넬레, 이쪽으로 와.
아마리스가 인파를 헤치고 그나마 여유가 있는 구석으로 넬레를 데려왔다.
여기서 기다리면서 확실한 정보가 오면 움직이자.
...기운 좀 내.
...네, 네, 전 괜찮아요.
북적이는 인파 한가운데서도 그녀의 손과 실험복에 묻은 혈흔은 역시 눈에 띄었다.
묵직한 폭음이 지하철의 통로에서 메아리쳤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서서, 광주리에 갇힌 귀뚜라미처럼 하염없이 저 무엇인지 모를 적에 떨어야 했다.
으아아아앙——
쿠릉... 쿠르릉...
대지의 진동에 지하철역의 모든 조명이 흔들리고 깜빡이며 스포트라이트처럼 겁에 질린 얼굴들을 비췄다.
쩌걱—— 퍼엉!
천장의 노후화된 석고 타일과 유리도 깨져, 사람들 위로 떨어졌다.
<size=50>천장이 무너진다!! 도망쳐어어어!!!</size>
<size=50>아아악!! 밀지 마! 밀지 말라고!!!</size>
......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 이 지옥같은 아비규환에서 어둡고 기괴한 광경을 자아냈다.
뚝 끊어진 목소리, 파묻힌 탄식, 성에 받친 비명...
피할 곳이 없기에 더더욱, 저 절망에 찬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마리스는 넬레를 감싸고 저 아비규환으로부터 그녀의 시선을 가려 주었다.
잠시후 폭격의 여파가 서서히 잠잠해져 아우성이 점차 흐느낌으로 가라앉아, 아마리스도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
아무래도 한동안은 소란스럽겠네.
폭격은... 언제 끝날까요?
다들 그렇게 묻더라.
3차 대전 때도 그랬어.
모두가 항상,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라 물었지.
......
거짓된 희망을 주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버텨. 참아. 어떻게든 살아남아.
하지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우리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도 아니고, 우리가 뭘 한다고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다음 해돋이까지 살아남는 것. 그뿐이야.
......
정말 버틸 수 있을까요?
넌 할 수 있어, 넬레.
넌 내가 보아 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이야.
......
거짓말.
맘대로 생각해.
아무튼,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식사는 해야지? 가서 음식이랑 물 구해올게.
너 지금 12시간 넘게 아무것도 못 먹었단 자각은 있어?
지적당하고서야 넬레는 피로와 허기를 느꼈고, 그런 그녀를 아마리스가 한쪽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까.
...당신도 조심해요, 지금 다치면 수리할 곳도 없어요.
풋, 전술인형 얕보지 마.
네...
넬레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자를 내려놓는 아마리스를 지켜봤다.
조심해요.
내가 할 말이야.
넬레, 잘 들어.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마. 누가 도와 달라 해도 대답하지 마.
......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어디 가지도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알았지?
...네.
무슨 일 있으면 통신기로 연락해.
그거 그리폰 특제품이라, 지휘관이랑은 문제 없이 연락 가능해.
지금 거기다 슈타지 전용 채널도 추가했고.
어느 쪽이든 다 내가 들을 수 있어.
네...
그리고 아마리스는 빠른 걸음으로 구호 물품을 찾으러 떠났다.
이제 넬레에겐 실컷 멍때릴 시간이 생겼다.
......
지금 넬레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시뻘건 두 손. 절대 씻기지 않을 피와 죄악이 묻은 것처럼 느껴졌다.
말라붙은 혈흔은, 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묻었다.
한 번 피가 묻으면...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죄의 낙인...
지식은 곧 저주.
재능이 바로 저주.
......
언젠가는 너도 인정하게 될 거야, 내게서 얻은 것이야말로 네가 평생 추구했던 것이란 사실을.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삐삐삐!
다급한 호출음이 넬레의 생각을 끊었다.
<color=#00CCFF>넬레 씨!</color>
<color=#00CCFF>지금 아마리스하고 어디 있습니까!?</color>
...J 씨? 지금 마인츠 대학 지하철역에 있어요.
<color=#00CCFF>아, 그래요? 다행이에요.</color>
아마리스는 지금 구호 물품 구하러 갔어요.
<color=#00CCFF>아 예, 그것도 다행이네요.</color>
<color=#00CCFF>...그게 원래는, 그레이에 관한 일에서 그만 손 떼라고 연락한 거예요.</color>
<color=#00CCFF>당신은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는 일도 전부 했습니다.</color>
<color=#00CCFF>그 마카로프 권총도 지휘관한테 돌려주고요.</color>
<color=#00CCFF>넬레 씨는 메스를 쥐어야지, 총을 쥐어선 안 됩니다.</color>
<color=#00CCFF>알았어요?</color>
하지만 제 손엔 이미 피가 잔뜩 묻었는데요... 피범벅이 된 손을, 정말 깨끗이 씻을 수 있나요?
<color=#00CCFF>어... 지금 세면대 못 찾아서 하는 말인가요? 물이 없음 알코올로라도 닦으면 되죠.</color>
<color=#00CCFF>아 참, 전시 상황에선 알코올도 중요 자원이지 참. 그리고 넬레 씨 성격상 분명 남한테 양보할 거고... 그럼...</color>
......
J가 대뜸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넬레에게 전송했다.
<color=#00CCFF>일회용 장갑 잘 쓰잖습니까, 그거 끼세요!</color>
<color=#00CCFF>봐요, 이러면 깨끗하죠?</color>
사진 속 J는 손에 일회용 의료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color=#00CCFF>당신은 의사잖아요, 손에 피 묻는 건 당연해요.</color>
<color=#00CCFF>지저분한 게 싫으면 장갑을 끼면 됩니다.</color>
......
<color=#00CCFF>여보세요? 넬레 씨?</color>
...알겠어요.
<color=#00CCFF>네, 그럼 안전한 데에 계속 계시고, 나중에 다시 연락합시다.</color>
J가 통신을 끊었다.
<color=#A9A9A9>이게 장갑을 낀다고 해결될 문제일까?</color>
저기, 안녕하세요...
주저하는 인사말이 그녀를 깨웠다.
먼지투성이에, 잠든 아이를 품에 안은 낯선 여자였다.
가운을 입으신 걸 보니, 혹시 의사이신가요?
전...
우리 아이가 계속 열이 나고 있어요. 오늘 병원에 데려가려 했는데, 가던 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지금 열이 너무 심해서 의식도 흐릿하고, 걱정이 돼요. 혹시 상태를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
품에 안긴 아이에게 시선이 향했다. 동그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 아이는 심지어 손발에 가벼운 경련 증상까지 보였다.
의학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위급한 상태였다.
...저기요?
손바닥의 붉은 자국은 달군 쇠로 찍은 낙인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듯해, 뚜렷하고 깊은 고통이 전해져왔다.
귓가에는 기억의 심연에서 소용돌이치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몸부림치고, 망설이고, 괴로워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넬레는 고개를 들어 본인으로서의 대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지금 제 손이 좀 더러워서, 제 주머니에서 의료용 장갑을 좀 꺼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