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길
이 순간을 위해 그로스는 한참을 기다렸다.
민주독일 내무부, 장관 사무실.
쿠웅!
사무실의 문이 억지로 열렸다.
갑작스런 소란에, 사무실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여기는 내무부 장관 사무실입니다! 이게 무슨——
하지만 그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무장 병력이 들이닥쳤다.
비서 앞에 나타난 것은 현임 국가안전국 국장 로미 리펜슈탈, 그리고 이곳에 없어야 할 인물, 휴고 에베르라인 경비단장 펠릭스.
...장관님께선 현재 각료 회의 및 국방위원회 관련 회의 중이십니다.
아무리 슈타지라도 이러한 몰상식한 짓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민주독일이 전시 상황일 경우 내무 보안 업무는 일시적으로 국가안전국이 인수한다.
수석 비서는 회의실을 잡아서, 모든 산하 부서장들에게 회의실로 집합하라고 통지할 것.
나와 펠릭스 단장이 함께 앞으로의 업무를 배정하겠다.
무슨...!
로미 국장! 이건 반란이야!
민주독일을 향한 반역죄라고!
유감이지만 반역자는 너네 장관이라서.
네가 못 하겠다면...
로미가 옆의 넋두리가 나간 차관을 툭 쳤다.
너, 승진이다.
각 부서장들에게 당장 회의실로 집합하라고 통지해.
...예.
저기... 장관님이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놈은 민주독일의 중요 군사 기밀을 신소련 반군의 수장 카터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다.
국가반역죄, 국가기밀누설죄, 공직원 비밀유지 의무 위반죄, 직무유기죄 등의 혐의로 현재 체포됐다.
...알겠습니다.
차관들의 지시에 따라 차관보들이 부리나케 각 부서에 통신을 걸었다.
호프만의 사무실.
통신이 울렸다.
호프만은 잔에 든 커피를 저으며 통신을 연결했다.
지금 세상이 아주 혼돈의 구렁텅이입니다, K 요원. 이 며칠 동안 우리가 연락한 횟수가 지난 1년간보다 많아요.
......
"혼돈은 수렁이 아닙니다. 사다리죠."
하하, K 요원은 여전히 저를 잘 아시는군요.
그게 이번 통신 내용의 전부라면 이만 끊겠습니다.
물론 아닙니다. 요즘 우리 모두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잖습니까?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긴장을 풀어야죠.
호프만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앉아, 자신과 함께 밤을 지샌 넥타이를 다시 고쳐 묶었다.
국장님 쪽에서 새로운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입니까?
예. 우리는 이제 특경, 민방위, 인민경찰 기동부대의 관리 권한을 얻었습니다.
신속대응사단 사단장도 우리의 이후 행동에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했죠.
이상할 정도로 순조롭군요.
울릭 주석 쪽은 어떻습니까?
당내에서 정식으로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전력을 다해 그로스 주석과 함께하겠다고.
좋습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프랑크푸르트까지 얼마 남았죠?
감청 위험이 있으니 자세한 좌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아직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길인데 울릭 주석을 암살하려는 자를 벌써 6명 처리했습니다.
심문은 해봤나요?
하나같이 실패하자마자 자결하더군요.
......
울릭 주석의 상태는요?
아직 다친 곳도 없고 침착합니다. 암살자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분이 프랑크푸르트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죠.
......
철컥.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커피 두 잔과 디저트를 내려놓곤 바로 밖으로 나갔다.
이 사치스럽게 단장된 회의실에는 단 두 명밖에 없어, 넓다란 공간이 매우 썰렁했다.
그런 가운데 한참 지속되던 침묵을, 한 사람이 먼저 깼다.
설마 이 회의실을 고를 줄은 몰랐군.
마지막으로 여기서 일을 논한 게, 자네가 통일사회당 서기장이 된 걸 축하하던 때였지?
이곳을 택한 것은 당신에게 선전포고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지막 만회의 기회를 드리고자 함이죠.
통일사회당은 저와 선배님 모두가 필요합니다.
민주독일에도 말입니다.
그 위선자의 낯짝 집어치우게.
자네의 야심은 민주독일을 완전히 파탄낼 게야.
당신의 야심은 인류를 파멸시킬 테고요.
"유적"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어. 자네가 그걸 쓰든 아니든,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
인류가 모두 눈을 감는다고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일세.
기술은... 언제나 시대를 이끄는 명맥이야.
루돌프 선배님, 언제까지고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세계를 보십시오.
지금의 세계? 지금의 세계는 3차 대전의 연속일세.
그 3차 대전에서, 나와 내 전우들은 우리 조국을 수호해냈어.
맞습니다. 그 누구도 역사를 부정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지금 선배님의 눈에는 과거만 보이고 미래가 없군요.
자네는 결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해.
그건 제가 드릴 말입니다.
유적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 인류를 파멸시킬 무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네. 하지만, 우리의 적이 누구지?
우리의 적은 저 멀리 남극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네.
아니오, 우리의 적은 바로 여기가 아니라 당신의 가슴 속에 있습니다. 거기에 묻힌 늙은 야심이죠.
그 말에 오버슈타인이 대노했다.
그로스! 자네를 맨 앞줄까지 올려 준 게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겐가!
여전히 감복하고 있는 바입니다.
간판으로 저를 택해 주신 것에 말이죠.
그로스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하지만 선배님이야말로 망각하셨군요. 제가 이 간판이 된 것 자체가, 저에겐 입장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배님은 그 자격마저 잃으신 지 오래고요.
간판이 될 자격 따위 필요 없네. 내게 필요한 건... 언제든 간판을 갈아치울 권력이야.
두꺼운 합금 문짝이 거칠게 쿵 닫히며, 오버슈타인이 회의실을 떠났다.
불쾌하게 끝난 담화, 혹은...
선전포고라 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로스가 수석 비서에게 턱짓했다.
훈작사에게 연락하게.
예.
통신을 연결하고 수석비서는 인사하고 물러났다.
존경하는 각하, 결단을 내리신 듯하군요.
우리에겐 미래가 필요합니다.
인류에게도 미래가 필요하죠.
불씨를 전승해야만 미래가 있습니다.
.....
오버슈타인은, 한때 가장 존경했던 지도자이자 동행자였습니다.
허나 그는 과거에 살고 있죠.
그로스는 사무실 의자를 끌어당기고 천천히 앉아, 탁상에 놓인 오버슈타인과의 합석 사진에 시선을 향했다.
뛰어난 기술관료로서, 숨구멍 없는 귀족 정치에서 능력으로 출세한 사람이죠.
3차 대전에서 정세를 바로잡았던 인물이었지만, 뜻밖의 사고에 묶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아내와 딸의 불상사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죠.
흔한 일이죠, 연세가 든 겁니다.
그 일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족을 배신했습니다.
자신의 성씨도 배신했고.
이 자리에 앉지 못했고, 내려놓지도 못했어요.
평생을 고귀하게 살아왔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늙은 몸뚱이와 금쪽같은 아들 하나만 남은 것이죠.
운명은 반복될 뿐입니다.
...그래서, 각하의 답변은?
우리가 인류의 희망을 보존해야 하듯이...
오버슈타인 가문에도, 희망을 남겨 주시지요.
각하의 지지가 루련 설립의 원동력이 될 겁니다.
SED 사무실.
화이트존은 폭격의 여파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 굴지의 방어 조치와, "매우 비싼" 목숨들이 있으니까.
세상에는 날 때부터 다른 이들보다 비싼 목숨이 있다.
그 값어치는 그 사람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선사할지가 아니라, 타인에게 얼마나 큰 절망을 선사할지에 따라 정해진다.
아직도 기다리실 겁니까?
당신의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전하거라, 곧 패배할 거라고.
...그 말씀은 전달할 수 없습니다.
안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리고 네메아란은 사무실을 떠나,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가장 좋은 결말을 준비해 뒀기에.
텅 빈 실험실에 들어서서, 네메아란은 손끝으로 지나는 모든 구석을 훑었다.
평소 질리도록 보았던 이 물건들이, 지금 이 순간엔 미련마저 느끼게 했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오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한숨 놓이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는 통신 채널에 연결했다.
축하드립니다.
어.
그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단답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네메아란은 몇 번을 주저하다 결국 직접 입을 열었다.
...간청이 있습니다.
뭔데?
진정한 죽음을 원합니다.
...넌 이제 필요 없어. 마음대로 해.
알겠습니다. 부디, 이 결말이 당신과 루니샤 아가씨 모두에게 만족스럽기를.
저는 조용히 죽겠습니다.
......
윌리엄이 먼저 통신을 끊었다. 네메아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마지막 업무에 착수했다.
헤베.
네.
프랑크푸르트의 상황은 어떠하냐?
이아손의 상자는 계획대로 전부 배치를 마쳤어요.
전부 가동해라.
네? 예정보다 이르지 않나요? 게다가 폭격은 이제 막——
지금 가동해.
...알겠어요.
헤베와의 통신을 종료하고, 바로 다음 통신을 연결했다.
브라메드.
대답이 없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했나.
브라메드에겐 그냥 메시지만 남겼다. 아베르누스에서 반출된 마지막 물자를 받으라고.
이어서 마지막으로, 벌침 시스템을 열었다.
자신에게 더없이 익숙한 곳에서, 그녀는 능숙한 조작으로 스틱스에게 화이트존 진입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인터페이스를 닫은 다음, 라플라스가 남긴 부분을 열어 읽기 권한을 몰리도에게 공유했다.
이걸로... 전부인가.
약간의 황홀감까지 느껴졌다.
"손이 비었다." 지금까지는 자신과 연이 없을 것만 같았던 문장이었다.
네메아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오버슈타인, 카터 등 인물들의 프로필을 꺼내 하나씩 벌침 시스템에 첨가했다.
새 자료를 추가하는 동시에 읽기 권한도 재조정했다.
삐익.
갑자기 에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생소한 일은 아니니 차분하게 백그라운드 제어 단말을 불러내 처리했다.
삐익. 삐익. 삐익.
더 많은 에러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
이 통제를 잃은 공간을 바라보는 네메아란은, 오히려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날 때로구나.
벌침 시스템이 요란하게 경보를 울리며, 시스템에 침입한 해커의 상세 리스트를 띄웠다.
하지만,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고 창을 닫았다.
그리고 공간의 끝자락을 주시하며,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 순간을 평생토록 기다려 온 것처럼.
전체 대사 보기 (124줄)
민주독일 내무부, 장관 사무실.
쿠웅!
사무실의 문이 억지로 열렸다.
갑작스런 소란에, 사무실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여기는 내무부 장관 사무실입니다! 이게 무슨——
하지만 그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무장 병력이 들이닥쳤다.
비서 앞에 나타난 것은 현임 국가안전국 국장 로미 리펜슈탈, 그리고 이곳에 없어야 할 인물, 휴고 에베르라인 경비단장 펠릭스.
...장관님께선 현재 각료 회의 및 국방위원회 관련 회의 중이십니다.
아무리 슈타지라도 이러한 몰상식한 짓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민주독일이 전시 상황일 경우 내무 보안 업무는 일시적으로 국가안전국이 인수한다.
수석 비서는 회의실을 잡아서, 모든 산하 부서장들에게 회의실로 집합하라고 통지할 것.
나와 펠릭스 단장이 함께 앞으로의 업무를 배정하겠다.
무슨...!
로미 국장! 이건 반란이야!
<size=50>민주독일을 향한 반역죄라고!</size>
유감이지만 반역자는 너네 장관이라서.
네가 못 하겠다면...
로미가 옆의 넋두리가 나간 차관을 툭 쳤다.
너, 승진이다.
각 부서장들에게 당장 회의실로 집합하라고 통지해.
...예.
저기... 장관님이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놈은 민주독일의 중요 군사 기밀을 신소련 반군의 수장 카터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다.
국가반역죄, 국가기밀누설죄, 공직원 비밀유지 의무 위반죄, 직무유기죄 등의 혐의로 현재 체포됐다.
...알겠습니다.
차관들의 지시에 따라 차관보들이 부리나케 각 부서에 통신을 걸었다.
호프만의 사무실.
통신이 울렸다.
호프만은 잔에 든 커피를 저으며 통신을 연결했다.
지금 세상이 아주 혼돈의 구렁텅이입니다, K 요원. 이 며칠 동안 우리가 연락한 횟수가 지난 1년간보다 많아요.
<color=#00CCFF>......</color>
<color=#00CCFF>"혼돈은 수렁이 아닙니다. 사다리죠."</color>
하하, K 요원은 여전히 저를 잘 아시는군요.
<color=#00CCFF>그게 이번 통신 내용의 전부라면 이만 끊겠습니다.</color>
물론 아닙니다. 요즘 우리 모두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잖습니까?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긴장을 풀어야죠.
호프만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앉아, 자신과 함께 밤을 지샌 넥타이를 다시 고쳐 묶었다.
국장님 쪽에서 새로운 소식입니다.
<color=#00CCFF>좋은 소식입니까?</color>
예. 우리는 이제 특경, 민방위, 인민경찰 기동부대의 관리 권한을 얻었습니다.
신속대응사단 사단장도 우리의 이후 행동에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했죠.
<color=#00CCFF>이상할 정도로 순조롭군요.</color>
울릭 주석 쪽은 어떻습니까?
<color=#00CCFF>당내에서 정식으로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전력을 다해 그로스 주석과 함께하겠다고.</color>
좋습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프랑크푸르트까지 얼마 남았죠?
<color=#00CCFF>감청 위험이 있으니 자세한 좌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color>
<color=#00CCFF>아직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길인데 울릭 주석을 암살하려는 자를 벌써 6명 처리했습니다.</color>
심문은 해봤나요?
<color=#00CCFF>하나같이 실패하자마자 자결하더군요.</color>
......
울릭 주석의 상태는요?
<color=#00CCFF>아직 다친 곳도 없고 침착합니다. 암살자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color>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분이 프랑크푸르트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color=#00CCFF>최선을 다하죠.</color>
......
철컥.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커피 두 잔과 디저트를 내려놓곤 바로 밖으로 나갔다.
이 사치스럽게 단장된 회의실에는 단 두 명밖에 없어, 넓다란 공간이 매우 썰렁했다.
그런 가운데 한참 지속되던 침묵을, 한 사람이 먼저 깼다.
설마 이 회의실을 고를 줄은 몰랐군.
마지막으로 여기서 일을 논한 게, 자네가 통일사회당 서기장이 된 걸 축하하던 때였지?
이곳을 택한 것은 당신에게 선전포고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지막 만회의 기회를 드리고자 함이죠.
통일사회당은 저와 선배님 모두가 필요합니다.
민주독일에도 말입니다.
그 위선자의 낯짝 집어치우게.
자네의 야심은 민주독일을 완전히 파탄낼 게야.
당신의 야심은 인류를 파멸시킬 테고요.
"유적"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어. 자네가 그걸 쓰든 아니든,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
인류가 모두 눈을 감는다고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일세.
기술은... 언제나 시대를 이끄는 명맥이야.
루돌프 선배님, 언제까지고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세계를 보십시오.
지금의 세계? 지금의 세계는 3차 대전의 연속일세.
그 3차 대전에서, 나와 내 전우들은 우리 조국을 수호해냈어.
맞습니다. 그 누구도 역사를 부정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지금 선배님의 눈에는 과거만 보이고 미래가 없군요.
자네는 결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해.
그건 제가 드릴 말입니다.
유적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 인류를 파멸시킬 무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네. 하지만, 우리의 적이 누구지?
우리의 적은 저 멀리 남극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네.
아니오, 우리의 적은 바로 여기가 아니라 당신의 가슴 속에 있습니다. 거기에 묻힌 늙은 야심이죠.
그 말에 오버슈타인이 대노했다.
그로스! 자네를 맨 앞줄까지 올려 준 게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겐가!
여전히 감복하고 있는 바입니다.
간판으로 저를 택해 주신 것에 말이죠.
그로스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하지만 선배님이야말로 망각하셨군요. 제가 이 간판이 된 것 자체가, 저에겐 입장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배님은 그 자격마저 잃으신 지 오래고요.
간판이 될 자격 따위 필요 없네. 내게 필요한 건... 언제든 간판을 갈아치울 권력이야.
두꺼운 합금 문짝이 거칠게 쿵 닫히며, 오버슈타인이 회의실을 떠났다.
불쾌하게 끝난 담화, 혹은...
선전포고라 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로스가 수석 비서에게 턱짓했다.
훈작사에게 연락하게.
예.
통신을 연결하고 수석비서는 인사하고 물러났다.
<color=#00CCFF>존경하는 각하, 결단을 내리신 듯하군요.</color>
우리에겐 미래가 필요합니다.
인류에게도 미래가 필요하죠.
<color=#00CCFF>불씨를 전승해야만 미래가 있습니다.</color>
.....
오버슈타인은, 한때 가장 존경했던 지도자이자 동행자였습니다.
<color=#00CCFF>허나 그는 과거에 살고 있죠.</color>
그로스는 사무실 의자를 끌어당기고 천천히 앉아, 탁상에 놓인 오버슈타인과의 합석 사진에 시선을 향했다.
뛰어난 기술관료로서, 숨구멍 없는 귀족 정치에서 능력으로 출세한 사람이죠.
3차 대전에서 정세를 바로잡았던 인물이었지만, 뜻밖의 사고에 묶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아내와 딸의 불상사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죠.
<color=#00CCFF>흔한 일이죠, 연세가 든 겁니다.</color>
그 일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족을 배신했습니다.
자신의 성씨도 배신했고.
이 자리에 앉지 못했고, 내려놓지도 못했어요.
<color=#00CCFF>평생을 고귀하게 살아왔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늙은 몸뚱이와 금쪽같은 아들 하나만 남은 것이죠.</color>
운명은 반복될 뿐입니다.
<color=#00CCFF>...그래서, 각하의 답변은?</color>
우리가 인류의 희망을 보존해야 하듯이...
오버슈타인 가문에도, 희망을 남겨 주시지요.
<color=#00CCFF>각하의 지지가 루련 설립의 원동력이 될 겁니다.</color>
SED 사무실.
화이트존은 폭격의 여파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 굴지의 방어 조치와, "매우 비싼" 목숨들이 있으니까.
세상에는 날 때부터 다른 이들보다 비싼 목숨이 있다.
그 값어치는 그 사람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선사할지가 아니라, 타인에게 얼마나 큰 절망을 선사할지에 따라 정해진다.
아직도 기다리실 겁니까?
당신의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전하거라, 곧 패배할 거라고.
...그 말씀은 전달할 수 없습니다.
안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리고 네메아란은 사무실을 떠나,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가장 좋은 결말을 준비해 뒀기에.
텅 빈 실험실에 들어서서, 네메아란은 손끝으로 지나는 모든 구석을 훑었다.
평소 질리도록 보았던 이 물건들이, 지금 이 순간엔 미련마저 느끼게 했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오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한숨 놓이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는 통신 채널에 연결했다.
축하드립니다.
<color=#00CCFF>어.</color>
그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단답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네메아란은 몇 번을 주저하다 결국 직접 입을 열었다.
...간청이 있습니다.
<color=#00CCFF>뭔데?</color>
진정한 죽음을 원합니다.
<color=#00CCFF>...넌 이제 필요 없어. 마음대로 해.</color>
알겠습니다. 부디, 이 결말이 당신과 루니샤 아가씨 모두에게 만족스럽기를.
저는 조용히 죽겠습니다.
<color=#00CCFF>......</color>
윌리엄이 먼저 통신을 끊었다. 네메아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마지막 업무에 착수했다.
헤베.
<color=#00CCFF>네.</color>
프랑크푸르트의 상황은 어떠하냐?
<color=#00CCFF>이아손의 상자는 계획대로 전부 배치를 마쳤어요.</color>
전부 가동해라.
<color=#00CCFF>네? 예정보다 이르지 않나요? 게다가 폭격은 이제 막——</color>
지금 가동해.
<color=#00CCFF>...알겠어요.</color>
헤베와의 통신을 종료하고, 바로 다음 통신을 연결했다.
브라메드.
대답이 없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했나.
브라메드에겐 그냥 메시지만 남겼다. 아베르누스에서 반출된 마지막 물자를 받으라고.
이어서 마지막으로, 벌침 시스템을 열었다.
자신에게 더없이 익숙한 곳에서, 그녀는 능숙한 조작으로 스틱스에게 화이트존 진입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인터페이스를 닫은 다음, 라플라스가 남긴 부분을 열어 읽기 권한을 몰리도에게 공유했다.
이걸로... 전부인가.
약간의 황홀감까지 느껴졌다.
"손이 비었다." 지금까지는 자신과 연이 없을 것만 같았던 문장이었다.
네메아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오버슈타인, 카터 등 인물들의 프로필을 꺼내 하나씩 벌침 시스템에 첨가했다.
새 자료를 추가하는 동시에 읽기 권한도 재조정했다.
삐익.
갑자기 에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생소한 일은 아니니 차분하게 백그라운드 제어 단말을 불러내 처리했다.
삐익. 삐익. 삐익.
더 많은 에러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
이 통제를 잃은 공간을 바라보는 네메아란은, 오히려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날 때로구나.
벌침 시스템이 요란하게 경보를 울리며, 시스템에 침입한 해커의 상세 리스트를 띄웠다.
하지만,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고 창을 닫았다.
그리고 공간의 끝자락을 주시하며,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 순간을 평생토록 기다려 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