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슬픈 기사
그녀는 차가운 배양 캡슐을 어루만졌다. 자신을 낳은 자궁은 이제 그녀의 무덤이 될 것이다.
......
모든 것이 0으로 돌아갔다.
네메아란을 증명하던 데이터가 백스페이스키에 의해 한 글자씩 사라졌다.
마침내, 오로지 공백인 세계만 남았다.
네메아란의 몸은 눈송이처럼 천천히, 가볍게 세상에 흩날렸다.
몸부림치며 컨셔스 파노라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흩날리던 눈송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네메아란은 홀로 배양 캡슐이 가득한 실험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태어난 그녀는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
네메아란은 차가운 배양 캡슐을 쓰다듬었다. 그녀를 탄생시킨 자궁은 결국 그녀의 무덤이 될 운명이었다.
텅 빈 채 탁한 액체만이 남아 있는 배양 캡슐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정의하고 요약하려 애썼다.
혹은, 묘비에 남길 한 줄의 문구를.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제대로 된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고, 지리멸렬한 단편들과 어렴풋이 지나가는 기억의 잔상뿐이었다.
......
주위를 둘러보며 짧은 생을 되짚어본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은 한 번도 제대로 무언가를 소유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쓸만한 도구로 태어나, 가치가 없어지자 도구로서 종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도구에게는 자아를 가질 자격도, 무언가를 소유할 자격도 없었다.
단 하나, 그녀가 가졌던 것이 있다면...
다른 도구와의 짧은 만남이었다.
공허한 생명 속에서 떠돌던 네메아란은 스쳐 지나가는 색채를 보았다.
사나를 처음 본 순간, 그녀는 배양 캡슐 안에 갇혀 있었다. 화려한 복장은 그녀의 연약한 몸을 짓눌러버릴 것만 같았다.
네메아란이 캡슐 옆에 서있는 것을 느낀 사나는 창백한 얼굴을 돌렸다.
...누구야?
나는 네메아란이란다. 앞으로 내가 너의 모든 관리 유지 업무를 맡을 거란다.
엄마는?
라플라스 님께서는 더 중요한 실험을 추진해야 해서, 이미 내게 모든 주의 사항을 알려주셨단다.
그래.
사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려 배양 캡슐의 두꺼운 유리 덮개를 바라보았다.
다음 조정을 마치면 너는 완전무결에 가까워질 것이고, 기한 없는 휴면 상태에 들어가야 한단다.
휴면 중에도 내가 너의 상태를 계속 지켜볼 거야.
......
다른 의문이 없다면 이만 가보마.
한 가지 부탁해도 돼?
물론이다.
네메아란은 아베르누스의 물자 배급 페이지를 열어 사나를 위한 목록을 작성하려 했다.
리틀 데이지 한 송이.
리틀 데이지?
항상 내 꿈에 나와... 꿈속에서 리틀 데이지는 새하얗게, 군데군데 피어있어.
엄마랑 나는 꽃밭을 걷고 있고...
아, 맞아, 그 꽃의 라틴어 학명은 Bellium minutum L.이야.
......
아베르누스 물자 창고에 그런 물자는 없었다.
안 될까?
......
네메아란은 고개를 들어 배양 캡슐 안의 사나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한때 그녀처럼 캡슐 안에 갇힌 채 바깥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었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의문에 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찾아보마.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거라.
응.
사나는 캡슐 안에서 싱긋 웃었다. 그건 마치 번쩍이고 사라지는 불꽃놀이 같았다.
......
자신을 주시하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네메아란은 평소처럼 사나의 배양 캡슐을 열고 각종 수치를 기록했다.
배양 캡슐과 사나의 연결 부위를 점검하던 중, 네메아란의 소매가 살짝 펄럭이고, 납작하게 말린 꽃 한 송이가 사나의 손 옆으로 떨어졌다.
사나는 눈을 뜨고 네메아란의 여느 때처럼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 말없이 말린 꽃을 조용히 챙겼다.
...고마워.
네메아란은 이에 대답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기록만 마치고 뒤돌아 떠났다.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했다.
그런데 사나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나?! 뭐하는 거니!
나는, 원래부터 지옥의 문지기였으니까.
애초에 복음중추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안 돼——
사나는 싱긋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내렸다.
네메아란은 황급히 손을 뻗어,
가까스로 사나의 손을 붙잡았다.
사나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이었다.
있잖아, 나는 누구야?
...너는, 너란다.
응. 잘 가, 엄마.
사랑해.
사나는 손을 놓았다.
덥석.
이번엔 네메아란이 사나의 손을 붙잡았다.
온몸의 힘을 다해 사나를 단단히 붙잡아, 그녀의 생명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힘을 줄수록 그녀는 자신의 몸을 옥죄는 족쇄가 점점 더 강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사나를 단단히 붙잡는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단단히 쥐는 것만 같았다.
......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네메아란은 알고 있었다.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항상 뒤를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는 존재.
그 존재의 이름은 죽음.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것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네메아란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나의 가녀린 손이 아직도 손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됐다.
이걸로 됐다.
네메아란은 마지막 저항을 그만두었다.
죽음의 덩굴은 방해가 사라지자, 네메아란의 몸을 타고 올라 거침없이 휘감았다.
살갗 구석구석을 고통으로 가득 채우고, 뼈마디 하나하나를 비통함으로 옥죄었다.
...내겐 애초에 무언가를 바랄 자격조차 없지.
도구라면, 도구답게 각오해야 하는 법이니...
배양 캡슐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네메아란이 본 것은 평온한 얼굴뿐이었다.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없이, 오직 평온한 얼굴.
됐다... 어떠한 미련도 가지지 말아야 해...
네메아란은 두 눈을 감고 담담히 끝없는 어둠을 받아들였다.
전투기 편대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랜 폭격으로 프랑크푸르트는 이미 혼란의 도가니였다.
조금 전 그들이 집중 타격했던 목표 시설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전투기의 엔진 소리는 구름을 뚫고 지면까지 울려 퍼졌다.
프랑크푸르트 상공에 진입한 그들을 맞이하듯, 도시 곳곳에 숨어 있던 대공 차량이 포문을 열며 포효했다.
파편탄이 고도 3km 상공에서 터지며 회색의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더 높은 고도에서 비행 중인 편대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발악 때문에 전투기 편대는 프랑크푸르트 지상 부대가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구역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매 둥지, 지상의 전략적 요충 도로가 사거리에 진입, 공격 명령 대기 중.
공격 허가한다.
알겠다, 하강 개시.
알겠다.
소통이 빠르게 이루어진 뒤, 편대가 차례로 하강했다.
각 전투기는 플랩을 펼치고 목표를 향해 급강하했다.
콰아앙!
격렬한 폭발과 함께 한 줄의 불꽃이 피어났고, 자욱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매 둥지, 폭격 완료. 임무 목표 파괴, 적 전투기 비상 착륙 공간 없음.
매 둥지 수신, 복귀하라.
편대는 다시 고도를 높이며 상승했다. 상승 중 호위기가 지면을 한 번 더 힐끗 내려다보았다.
타오르는 불길이 도로 위에 그린 거대한 붉은 용이 마인강 위에 누워 있었다.
콘크리트로 구축되어 있는 지하 방어 진지 안에서 프랑크푸르트 제1경비단은 간신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상에서 한 마디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지길 바랐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끊임없이 지하로 실려 오는 부상자와, 무기와 장비가 전멸했다는 비보뿐이었다.
최신 정보, A66 고속도로 서측 구간이 적에게 파괴.
도움이 필요해...
누가 됐든 뭐가 됐든 좋아, 총이든 탄약이든, 무엇보다 병력이 필요해.
아무것도 없이는 우리는 그저 신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
공습 경보가 또다시 프랑크푸르트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프랑크푸르트구, SOP2가 들것을 들고 바쁘게 어둡고 좁은 건물 복도로 들어섰다. 먼지, 화약 냄새가 피비린내와 뒤섞여 코를 자극했다.
SOP2는 3층에 도착했다. 천장이 이미 무너져 내려 머리 위로 시커먼 밤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어느 "방" 안에 들어서자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몇 분 계십니까?
우리 티나 좀 살려주세요... 제 옆에 있습니다...
어르신과 여기 깔려있는 어린이 한 명 맞습니까? 다친 곳 있습니까?
예... 전 모르겠지만... 애가 많이 다쳤어요... 얘 먼저... 얘 먼저 구해주세요...
......
나무 판자 가져와! 붕대도!
지휘관! 나도 도우러 왔어!
SPAS-12는 조명등을 들고 아래로 비추며 무너진 바닥 틈새를 최대한 밝히려 애썼다.
SOP2는 들것을 내려놓고 폐허 속으로 뛰어들어 옷장 같은 물건에서 나무 판자 하나를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붕대와 함께 지휘관에게 건넸다.
...할머니! 할머니!
지휘관은 아이의 부상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머리에 여러 군데 외상이 있었지만, 팔의 부상이 가장 심각했다.
지휘관은 조심스럽게 어린이의 팔을 간단히 붕대로 감싼 뒤, SOP2에게 나무판을 끼워 넣으라고 지시했다.
좋아, 팔은 다 감쌌어! 이제 나무판을 네 밑에 깔고, 널 끌어당길 거야.
걱정 말고, 넌 괜찮을 거야! 날 믿으렴!
......
아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지휘관과 인형들을 바라봤다.
안 무서워, 우리 모두 착한 사람이야!
지휘관, 준비 됐어요.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당겨, 힘 조절 조심하고!
알았어!
간다, 하나, 둘, 셋!
할머니!!!
찌이익! 나무판이 지면의 콘크리트와 마찰하며 소리를 냈고, 아이는 마침내 잔해 속에서 벗어났다.
오른팔 외에는 심한 외상이 없지만, 대퇴골은... 나중에 치료해야 할 것 같아.
SOP2, 아이를 먼저 차에 태우고 기다려.
응! 바로 갈게!
SOP2는 들것을 반듯하게 펼친 뒤, 옆에서 대기 중이던 SPAS-12와 함께 아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잔해에 눌려 아픈 무릎도 신경 쓸 겨를 없이, 지휘관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잔해 더 깊은 곳에 갇힌 노인을 살폈다.
그곳은 아직 침실이라는 걸 알아볼 순 있는 곳이었고, 노인은 벽 구석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중앙의 침대는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에 짓눌려 있었고, 피가 스며나와 고여 있었다.
창밖에서 울리던 공습 경보가 멈추자, 도시는 순식간에 오싹할 정도로 적막해졌다.
......
먼지투성이에 주름이 가득한 손이 비좁은 틈새에서 뻗어나와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애썼다.
...구해줘요... 아직 죽긴 싫어요...
손전등 불빛 아래, 노인의 흐릿한 눈동자가 생존 본능으로 가득 찬 눈물을 머금고 반짝였다.
...구해드리겠습니다.
지휘관은 기울어진 바닥에서 살짝 몸을 물렸다. 갑자기 혀끝에서 단맛이 느껴졌고, 그제야 자신의 입술이 건조해 갈라져 피가 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시 서쪽에서 갑자기 폭죽처럼 연속적인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에는 드문드문 섬광이 터졌지만, 어제에 비해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또 공습이 시작됐어요. 지휘관, 서둘러야 해요!
...우리 여기서 죽는 건가요?
지휘관은 함부로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의 희망을 끊을 수도 없었다.
티나를 생각하십시오. 애가 다쳤는데 어르신이 병원에서 돌봐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허 속의 노인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딘가 부상을 입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으려 했다.
노인의 침묵을 눈치챈 지휘관은 손전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자면 안 돼요! 눈을 뜨세요!
갑자기 AR-15에게 AR-18의 통신이 들어왔다.
지휘관, 적이 또 다시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긴급하니 즉시 지하 방공호로 피하십시오.
......
지휘관,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십시오!
시간 얼마 남았어?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
지휘관! 일단 후퇴해요!
지휘관이 무사해야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요!
...안 돼.
이 사람을 포기할 순 없어, 빨리 움직여!
10분 후, 밤하늘은 불길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예광탄이 번쩍이는 순간, 고공을 가로지르는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폭발음은 끊이지 않는 불꽃놀이처럼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끌어냈어. 조심해...
상태는 어때?
지휘관, 이분 출혈이 심각해요!
방금까진 상처가 눌려 있었지만 지금 움직이면...
지휘관이 고개를 숙여 보니, 노인의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가 보였다. 노인의 입술과 뺨은 이미 새하얗게 창백해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살려...줘요...
빨리 차에 태워!
인형들은 지휘관을 중심에 감싸고 함께 구급차로 내달렸다.
빨리 타, 출발해!
만신창이인 도로 위, 구급차가 전력을 다해 방공 피난 시설을 향해 달렸다
......
전투기 편대가 프랑크푸르트 상공을 지나며 기체 하부를 열고 원통형 물체들을 연이어 투하했다.
그 물체들은 희미한 구름층을 뚫고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떨어졌다.
빨리, 더 서둘러!
알고 있어요!
액셀은 이미 끝까지 밟고 있었고, 도로 끝의 지하 주차장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고 있었다...
폭탄? 망했다!
지휘관의 가슴이 철렁했다.
끼이익!! AR-15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퍼엉!!! 물체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지휘관!
......!
AR-15가 조수석으로 몸을 던져 지휘관 대신 충격파를 막으려 했다.
......
하지만 예상했던 폭발과 화염은 찾아오지 않았다. 길게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고, AR-15가 몸을 일으켰고, 지휘관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휘관, 우리 무사해요.
파지직... 길가의 전봇대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펑! 스파크가 터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기쁨은 곧 더 큰 공포와 분노에 휩쓸려 갔고, 지휘관의 미소도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탄소섬유탄이야!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의 불도 꺼져 길거리가 어둠에 잠겼다.
통신이 울리고, AR-15가 즉시 연결했다.
지휘관님, 프랑크푸르트 구역의 한 거주지가 폭격을 당해 최소 10명이 갇혀 구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람 보냈어?
엘모호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력을 제외하고, 모든 소대와 차량이 이미 파견되었습니다. 지휘관님, 더 이상 투입할 인력이 없습니다...
경찰서와 구조대는?
이미 정보 공유했지만...
RO635가 흐린 말꼬리를 지휘관은 바로 이해했다. 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경찰이든 구조대든, 아니면 다른 자발적인 구조 노력 모두 역부족일 뿐이었다.
구조 소대가 복귀하면 부대를 재편성해.
RO, 동쪽 교외의 주요 출구 도로를 즉시 점검해야 해. AR-18과 데이터 공유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지휘관님. 바로 배정하겠습니다.
혹시 그쪽에 다친 인형 있나요? 지원이 필요한가요?
......
지휘관님?
난 괜찮아.
하지만 지휘관님의 목소리가... 무척 괴로워 보이는데...
혹시 어디 다치셨나요?
......
방금 적군이 탄소섬유탄을 투하했어.
RO, 프랑크푸르트의 전력망은 이제 완전히 마비됐어.
전기 없는 현대화 도시는 시멘트의 무덤에 불과해.
......
지휘관은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때마다 현실이 어김없이 내 머리를 내리쳐.
600만 명의 재난, 600만 명의...
지휘관님, 지휘관님은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을 하셨어요!
지휘관님이 조직한 구조대만으로도 백 명 가까이 구조했고, 지휘관님께 자극받아 자발적으로 나선 구조대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어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이 재난 속에서, 지휘관님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잖아요...
안 돼...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해...
프랑크푸르트가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 순간마다 나쁜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과거의 전투가 모두 국지전이었다면, 지금은 철저히 민간인을 향한 재앙 그 자체였다.
적어도... 적어도 시민들이 프랑크푸르트를 떠날 수 있는 통로는 반드시 열어야 해.
그 일이라면 우리가 누구보다 잘할 수 있죠, 지휘관님.
인형들을 재집결시켜 기본적인 계획을 세워놓겠습니다.
그래.
지휘관님도, 꼭 몸 조심하세요.
통신을 끊은 지휘관은 백미러를 힐끗 보았다. 얼굴이 피범벅인 아이가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맞은편에 총을 든 채 앉아 있는 인형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SOP2는 아이를 바라보며 입가를 살짝 올려,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안녀엉~ 히히~
......
자아~ 잘 봐봐, 내가 개인기 하나 보여줄게!
SOP2가 얼굴을 구겨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이는 예상대로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어? 왜 울어!?
이상하네, 이거 AR-15한테 하면 항상 통했는데...!
으아아앙...!
SOP2, 빨리 달래. 안 그러면 네 대가리를 따서 이 애한테 축구공으로 줘버릴 거야!
알았어! 알았어!
아, 아직 비장의 무기가 있어!
SOP2가 소고기 통조림을 꺼내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줄게! 이거 맛있는 거라구!
훌쩍...
여자애의 울음이 점차 잦아들자, SOP2는 서둘러 통조림을 따서 내밀었다.
소고기 향이 순식간에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소고기 통조림... 그저 평범한 군수 물자이지만...
지휘관의 오래된 기억 속 깊은 한 조각을 건드렸다.
......
딸깍. 맞은편 여자가 소고기 통조림을 열자, 소고기 향이 순식간에 열차칸 내부를 가득 채웠다.
지휘관은 군침이 도는 것을 참으며 억지로 시선을 창밖 풍경에 고정하려 했다.
야, 벙어리 꼬마. 이따 저녁밥 뭐 먹을 거야?
맞은 편의 녀석은 하필 이럴 때 달라붙었다.
......
네가 내 동생을 하겠다고 하면, 이 통조림 한 입 정도는 먹게 해줄 수 있는데~
......
찡그린 눈으로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노려보면서, 지휘관은 콧구멍을 파고드는 향기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열차가 속력을 줄였다.
열차가 곧 멈추겠네. 짐 잘 챙겨라, 꼬마야.
열차가 멈춘 동안은 도둑놈들의 축제 시간이니까.
헬린의 말에 호응하듯이 두 남자가 열차칸에 들어서며 잔뜩 낄낄거렸다.
이거 대박 났네!
그 할망구가 돈을 이렇게나 많이 들고다닐 줄은 몰랐다니까!
흐흥, 이게 다 내 연기력 덕분이지. 몇 마디 꼬드겼더니 날 죽은 아들로 착각하고 챙겨주더라고.
캬하하하하, 그 아들이 죽어서 잘 됐지, 안 그러면 우리가 속일 수 있었겠냐.
지휘관은 화가 치밀었다. 방금 정수기 앞에서 눈물 흘리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대가 몇 명인지, 체격이 어떤지 따질 겨를도 없이 지휘관은 벌떡 일어나 두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
너 뭐야?!
그 돈, 주인한테 돌려줘!
내가 왜애!? 내가 실력으로 딴 건데 네가 뭐라고?
지휘관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지만, 상대방의 경험이 더 풍부했다.
고작 몇 초만에 지휘관은 둘 중 한명에게 붙잡혔고, 다른 한 명에게 두들겨 맞았다.
그만해라, 열차 곧 멈춘다.
괜히 까불고 말이야!
......
곁눈질로 보니, 객실 안의 승객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는 않았다.
지휘관은 노인의 심정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파왔다.
쿠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남자 중 한 명이 날렵한 업어치기에 바닥에 내던져졌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너어!
다른 남자도 반응할 틈도 없이 다리 걸기에 넘어졌고, 턱에 차기를 맞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가만히 서서 뭐해? 놈들이 훔친 돈을 뒤져서 찾아야지.
지휘관은 도둑들이 훔친 물건을 되찾았고, 헬린은 열차 경찰을 불렀다.
도둑맞은 물건의 주인인 노인이 찾아와 헬린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저한테 고맙다 하지 마세요, 이 꼬맹이가 다 한 거예요.
아아! 또 만났구나. 고맙구나! 정말 착한 아이야!
...천만에요.
노인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경찰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지휘관은 창문 너머로 승강장에 서서 아쉬운 듯 손을 흔드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맙구나! 몸 건강하게 집에 돌아가렴!
......
열차가 승강장을 떠나면서 노인의 모습은 점점 작아졌고, 결국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툭.
작은 케이스가 앞에 놓였다.
너 벙어리 아니었구나? 겉은 차가워 보여도 가슴은 뜨겁잖아.
자, 이 통조림 너 줄게, 불의에 용감하게 나선 상이야!
지휘관은 고집 부리며 고개를 돌렸다.
소고기 통조림?
필요없거든!
얘가 무슨 소리래! 이건 전쟁 났을 때 돈이랑 다름없다구!
딱봐도 맛없어 보이는걸.
쯧쯧.
상대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뚜껑을 연 통조림을 다시 지휘관에게 내밀었다.
풍겨오는 소고기의 향기가 지휘관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무너뜨리려 했다.
네가 전장에 나가 보면, 통조림 하나 먹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게 될 거야.
또 나이 자랑하네.
하하, 이 꼬맹이 좀 보소. 그냥 주는 게 아니야.
나중에 소고기 통조림 받으면 꼭 갚아야 한다?
쳇, 그래, 갚으면 되잖아! 고작 통조림 하나 뭐가 아깝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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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0으로 돌아갔다.
네메아란을 증명하던 데이터가 백스페이스키에 의해 한 글자씩 사라졌다.
마침내, 오로지 공백인 세계만 남았다.
네메아란의 몸은 눈송이처럼 천천히, 가볍게 세상에 흩날렸다.
몸부림치며 컨셔스 파노라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흩날리던 눈송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네메아란은 홀로 배양 캡슐이 가득한 실험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태어난 그녀는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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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아란은 차가운 배양 캡슐을 쓰다듬었다. 그녀를 탄생시킨 자궁은 결국 그녀의 무덤이 될 운명이었다.
텅 빈 채 탁한 액체만이 남아 있는 배양 캡슐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정의하고 요약하려 애썼다.
혹은, 묘비에 남길 한 줄의 문구를.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제대로 된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고, 지리멸렬한 단편들과 어렴풋이 지나가는 기억의 잔상뿐이었다.
......
주위를 둘러보며 짧은 생을 되짚어본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은 한 번도 제대로 무언가를 소유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쓸만한 도구로 태어나, 가치가 없어지자 도구로서 종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도구에게는 자아를 가질 자격도, 무언가를 소유할 자격도 없었다.
단 하나, 그녀가 가졌던 것이 있다면...
다른 도구와의 짧은 만남이었다.
공허한 생명 속에서 떠돌던 네메아란은 스쳐 지나가는 색채를 보았다.
사나를 처음 본 순간, 그녀는 배양 캡슐 안에 갇혀 있었다. 화려한 복장은 그녀의 연약한 몸을 짓눌러버릴 것만 같았다.
네메아란이 캡슐 옆에 서있는 것을 느낀 사나는 창백한 얼굴을 돌렸다.
...누구야?
나는 네메아란이란다. 앞으로 내가 너의 모든 관리 유지 업무를 맡을 거란다.
엄마는?
라플라스 님께서는 더 중요한 실험을 추진해야 해서, 이미 내게 모든 주의 사항을 알려주셨단다.
그래.
사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려 배양 캡슐의 두꺼운 유리 덮개를 바라보았다.
다음 조정을 마치면 너는 완전무결에 가까워질 것이고, 기한 없는 휴면 상태에 들어가야 한단다.
휴면 중에도 내가 너의 상태를 계속 지켜볼 거야.
......
다른 의문이 없다면 이만 가보마.
한 가지 부탁해도 돼?
물론이다.
네메아란은 아베르누스의 물자 배급 페이지를 열어 사나를 위한 목록을 작성하려 했다.
리틀 데이지 한 송이.
리틀 데이지?
항상 내 꿈에 나와... 꿈속에서 리틀 데이지는 새하얗게, 군데군데 피어있어.
엄마랑 나는 꽃밭을 걷고 있고...
아, 맞아, 그 꽃의 라틴어 학명은 Bellium minutum L.이야.
......
아베르누스 물자 창고에 그런 물자는 없었다.
안 될까?
......
네메아란은 고개를 들어 배양 캡슐 안의 사나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한때 그녀처럼 캡슐 안에 갇힌 채 바깥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었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의문에 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찾아보마.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거라.
응.
사나는 캡슐 안에서 싱긋 웃었다. 그건 마치 번쩍이고 사라지는 불꽃놀이 같았다.
......
자신을 주시하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네메아란은 평소처럼 사나의 배양 캡슐을 열고 각종 수치를 기록했다.
배양 캡슐과 사나의 연결 부위를 점검하던 중, 네메아란의 소매가 살짝 펄럭이고, 납작하게 말린 꽃 한 송이가 사나의 손 옆으로 떨어졌다.
사나는 눈을 뜨고 네메아란의 여느 때처럼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 말없이 말린 꽃을 조용히 챙겼다.
...고마워.
네메아란은 이에 대답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기록만 마치고 뒤돌아 떠났다.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했다.
그런데 사나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나?! 뭐하는 거니!
나는, 원래부터 지옥의 문지기였으니까.
애초에 복음중추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안 돼——
사나는 싱긋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내렸다.
네메아란은 황급히 손을 뻗어,
가까스로 사나의 손을 붙잡았다.
사나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이었다.
있잖아, 나는 누구야?
...너는, 너란다.
응. 잘 가, 엄마.
사랑해.
사나는 손을 놓았다.
덥석.
이번엔 네메아란이 사나의 손을 붙잡았다.
온몸의 힘을 다해 사나를 단단히 붙잡아, 그녀의 생명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힘을 줄수록 그녀는 자신의 몸을 옥죄는 족쇄가 점점 더 강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사나를 단단히 붙잡는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단단히 쥐는 것만 같았다.
......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네메아란은 알고 있었다.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항상 뒤를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는 존재.
그 존재의 이름은 죽음.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것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네메아란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나의 가녀린 손이 아직도 손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됐다.
이걸로 됐다.
네메아란은 마지막 저항을 그만두었다.
죽음의 덩굴은 방해가 사라지자, 네메아란의 몸을 타고 올라 거침없이 휘감았다.
살갗 구석구석을 고통으로 가득 채우고, 뼈마디 하나하나를 비통함으로 옥죄었다.
...내겐 애초에 무언가를 바랄 자격조차 없지.
도구라면, 도구답게 각오해야 하는 법이니...
배양 캡슐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네메아란이 본 것은 평온한 얼굴뿐이었다.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없이, 오직 평온한 얼굴.
됐다... 어떠한 미련도 가지지 말아야 해...
네메아란은 두 눈을 감고 담담히 끝없는 어둠을 받아들였다.
전투기 편대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랜 폭격으로 프랑크푸르트는 이미 혼란의 도가니였다.
조금 전 그들이 집중 타격했던 목표 시설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전투기의 엔진 소리는 구름을 뚫고 지면까지 울려 퍼졌다.
프랑크푸르트 상공에 진입한 그들을 맞이하듯, 도시 곳곳에 숨어 있던 대공 차량이 포문을 열며 포효했다.
파편탄이 고도 3km 상공에서 터지며 회색의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더 높은 고도에서 비행 중인 편대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발악 때문에 전투기 편대는 프랑크푸르트 지상 부대가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구역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매 둥지, 지상의 전략적 요충 도로가 사거리에 진입, 공격 명령 대기 중.
<color=#00CCFF>공격 허가한다.</color>
알겠다, 하강 개시.
<color=#00CCFF>알겠다.</color>
소통이 빠르게 이루어진 뒤, 편대가 차례로 하강했다.
각 전투기는 플랩을 펼치고 목표를 향해 급강하했다.
콰아앙!
격렬한 폭발과 함께 한 줄의 불꽃이 피어났고, 자욱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매 둥지, 폭격 완료. 임무 목표 파괴, 적 전투기 비상 착륙 공간 없음.
<color=#00CCFF>매 둥지 수신, 복귀하라.</color>
편대는 다시 고도를 높이며 상승했다. 상승 중 호위기가 지면을 한 번 더 힐끗 내려다보았다.
타오르는 불길이 도로 위에 그린 거대한 붉은 용이 마인강 위에 누워 있었다.
콘크리트로 구축되어 있는 지하 방어 진지 안에서 프랑크푸르트 제1경비단은 간신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상에서 한 마디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지길 바랐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끊임없이 지하로 실려 오는 부상자와, 무기와 장비가 전멸했다는 비보뿐이었다.
<color=#00CCFF>최신 정보, A66 고속도로 서측 구간이 적에게 파괴.</color>
도움이 필요해...
누가 됐든 뭐가 됐든 좋아, 총이든 탄약이든, 무엇보다 병력이 필요해.
아무것도 없이는 우리는 그저 신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
공습 경보가 또다시 프랑크푸르트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프랑크푸르트구, SOP2가 들것을 들고 바쁘게 어둡고 좁은 건물 복도로 들어섰다. 먼지, 화약 냄새가 피비린내와 뒤섞여 코를 자극했다.
SOP2는 3층에 도착했다. 천장이 이미 무너져 내려 머리 위로 시커먼 밤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어느 "방" 안에 들어서자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몇 분 계십니까?
우리 티나 좀 살려주세요... 제 옆에 있습니다...
어르신과 여기 깔려있는 어린이 한 명 맞습니까? 다친 곳 있습니까?
예... 전 모르겠지만... 애가 많이 다쳤어요... 얘 먼저... 얘 먼저 구해주세요...
......
나무 판자 가져와! 붕대도!
지휘관! 나도 도우러 왔어!
SPAS-12는 조명등을 들고 아래로 비추며 무너진 바닥 틈새를 최대한 밝히려 애썼다.
SOP2는 들것을 내려놓고 폐허 속으로 뛰어들어 옷장 같은 물건에서 나무 판자 하나를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붕대와 함께 지휘관에게 건넸다.
...할머니! 할머니!
지휘관은 아이의 부상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머리에 여러 군데 외상이 있었지만, 팔의 부상이 가장 심각했다.
지휘관은 조심스럽게 어린이의 팔을 간단히 붕대로 감싼 뒤, SOP2에게 나무판을 끼워 넣으라고 지시했다.
좋아, 팔은 다 감쌌어! 이제 나무판을 네 밑에 깔고, 널 끌어당길 거야.
걱정 말고, 넌 괜찮을 거야! 날 믿으렴!
......
아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지휘관과 인형들을 바라봤다.
안 무서워, 우리 모두 착한 사람이야!
지휘관, 준비 됐어요.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당겨, 힘 조절 조심하고!
알았어!
간다, 하나, 둘, 셋!
<size=50>할머니!!!</size>
찌이익! 나무판이 지면의 콘크리트와 마찰하며 소리를 냈고, 아이는 마침내 잔해 속에서 벗어났다.
오른팔 외에는 심한 외상이 없지만, 대퇴골은... 나중에 치료해야 할 것 같아.
SOP2, 아이를 먼저 차에 태우고 기다려.
응! 바로 갈게!
SOP2는 들것을 반듯하게 펼친 뒤, 옆에서 대기 중이던 SPAS-12와 함께 아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잔해에 눌려 아픈 무릎도 신경 쓸 겨를 없이, 지휘관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잔해 더 깊은 곳에 갇힌 노인을 살폈다.
그곳은 아직 침실이라는 걸 알아볼 순 있는 곳이었고, 노인은 벽 구석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중앙의 침대는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에 짓눌려 있었고, 피가 스며나와 고여 있었다.
창밖에서 울리던 공습 경보가 멈추자, 도시는 순식간에 오싹할 정도로 적막해졌다.
......
먼지투성이에 주름이 가득한 손이 비좁은 틈새에서 뻗어나와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애썼다.
...구해줘요... 아직 죽긴 싫어요...
손전등 불빛 아래, 노인의 흐릿한 눈동자가 생존 본능으로 가득 찬 눈물을 머금고 반짝였다.
...구해드리겠습니다.
지휘관은 기울어진 바닥에서 살짝 몸을 물렸다. 갑자기 혀끝에서 단맛이 느껴졌고, 그제야 자신의 입술이 건조해 갈라져 피가 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시 서쪽에서 갑자기 폭죽처럼 연속적인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에는 드문드문 섬광이 터졌지만, 어제에 비해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또 공습이 시작됐어요. 지휘관, 서둘러야 해요!
...우리 여기서 죽는 건가요?
지휘관은 함부로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의 희망을 끊을 수도 없었다.
티나를 생각하십시오. 애가 다쳤는데 어르신이 병원에서 돌봐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허 속의 노인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딘가 부상을 입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으려 했다.
노인의 침묵을 눈치챈 지휘관은 손전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자면 안 돼요! 눈을 뜨세요!
갑자기 AR-15에게 AR-18의 통신이 들어왔다.
<color=#00CCFF>지휘관, 적이 또 다시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긴급하니 즉시 지하 방공호로 피하십시오.</color>
......
<color=#00CCFF>지휘관,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십시오!</color>
시간 얼마 남았어?
<color=#00CCFF>예측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color>
......
지휘관! 일단 후퇴해요!
지휘관이 무사해야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요!
...안 돼.
이 사람을 포기할 순 없어, 빨리 움직여!
10분 후, 밤하늘은 불길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예광탄이 번쩍이는 순간, 고공을 가로지르는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폭발음은 끊이지 않는 불꽃놀이처럼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끌어냈어. 조심해...
상태는 어때?
지휘관, 이분 출혈이 심각해요!
방금까진 상처가 눌려 있었지만 지금 움직이면...
지휘관이 고개를 숙여 보니, 노인의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가 보였다. 노인의 입술과 뺨은 이미 새하얗게 창백해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살려...줘요...
빨리 차에 태워!
인형들은 지휘관을 중심에 감싸고 함께 구급차로 내달렸다.
빨리 타, 출발해!
만신창이인 도로 위, 구급차가 전력을 다해 방공 피난 시설을 향해 달렸다
......
전투기 편대가 프랑크푸르트 상공을 지나며 기체 하부를 열고 원통형 물체들을 연이어 투하했다.
그 물체들은 희미한 구름층을 뚫고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떨어졌다.
빨리, 더 서둘러!
알고 있어요!
액셀은 이미 끝까지 밟고 있었고, 도로 끝의 지하 주차장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고 있었다...
폭탄? 망했다!
지휘관의 가슴이 철렁했다.
끼이익!! AR-15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퍼엉!!! 물체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지휘관!
......!
AR-15가 조수석으로 몸을 던져 지휘관 대신 충격파를 막으려 했다.
......
하지만 예상했던 폭발과 화염은 찾아오지 않았다. 길게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고, AR-15가 몸을 일으켰고, 지휘관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휘관, 우리 무사해요.
파지직... 길가의 전봇대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펑! 스파크가 터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기쁨은 곧 더 큰 공포와 분노에 휩쓸려 갔고, 지휘관의 미소도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탄소섬유탄이야!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의 불도 꺼져 길거리가 어둠에 잠겼다.
통신이 울리고, AR-15가 즉시 연결했다.
<color=#00CCFF>지휘관님, 프랑크푸르트 구역의 한 거주지가 폭격을 당해 최소 10명이 갇혀 구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color>
...사람 보냈어?
<color=#00CCFF>엘모호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력을 제외하고, 모든 소대와 차량이 이미 파견되었습니다. 지휘관님, 더 이상 투입할 인력이 없습니다...</color>
경찰서와 구조대는?
<color=#00CCFF>이미 정보 공유했지만...</color>
RO635가 흐린 말꼬리를 지휘관은 바로 이해했다. 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경찰이든 구조대든, 아니면 다른 자발적인 구조 노력 모두 역부족일 뿐이었다.
구조 소대가 복귀하면 부대를 재편성해.
RO, 동쪽 교외의 주요 출구 도로를 즉시 점검해야 해. AR-18과 데이터 공유하는 것도 잊지 말고.
<color=#00CCFF>알겠습니다, 지휘관님. 바로 배정하겠습니다.</color>
<color=#00CCFF>혹시 그쪽에 다친 인형 있나요? 지원이 필요한가요?</color>
......
<color=#00CCFF>지휘관님?</color>
난 괜찮아.
<color=#00CCFF>하지만 지휘관님의 목소리가... 무척 괴로워 보이는데...</color>
<color=#00CCFF>혹시 어디 다치셨나요?</color>
......
방금 적군이 탄소섬유탄을 투하했어.
RO, 프랑크푸르트의 전력망은 이제 완전히 마비됐어.
전기 없는 현대화 도시는 시멘트의 무덤에 불과해.
<color=#00CCFF>......</color>
지휘관은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때마다 현실이 어김없이 내 머리를 내리쳐.
600만 명의 재난, 600만 명의...
<color=#00CCFF>지휘관님, 지휘관님은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을 하셨어요!</color>
<color=#00CCFF>지휘관님이 조직한 구조대만으로도 백 명 가까이 구조했고, 지휘관님께 자극받아 자발적으로 나선 구조대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어요!</color>
<color=#00CCFF>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이 재난 속에서, 지휘관님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잖아요...</color>
안 돼...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해...
프랑크푸르트가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 순간마다 나쁜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과거의 전투가 모두 국지전이었다면, 지금은 철저히 민간인을 향한 재앙 그 자체였다.
적어도... 적어도 시민들이 프랑크푸르트를 떠날 수 있는 통로는 반드시 열어야 해.
<color=#00CCFF>그 일이라면 우리가 누구보다 잘할 수 있죠, 지휘관님.</color>
<color=#00CCFF>인형들을 재집결시켜 기본적인 계획을 세워놓겠습니다.</color>
그래.
<color=#00CCFF>지휘관님도, 꼭 몸 조심하세요.</color>
통신을 끊은 지휘관은 백미러를 힐끗 보았다. 얼굴이 피범벅인 아이가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맞은편에 총을 든 채 앉아 있는 인형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SOP2는 아이를 바라보며 입가를 살짝 올려,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안녀엉~ 히히~
......
자아~ 잘 봐봐, 내가 개인기 하나 보여줄게!
SOP2가 얼굴을 구겨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이는 예상대로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어? 왜 울어!?
이상하네, 이거 AR-15한테 하면 항상 통했는데...!
<size=50>으아아앙...!</size>
SOP2, 빨리 달래. 안 그러면 네 대가리를 따서 이 애한테 축구공으로 줘버릴 거야!
알았어! 알았어!
아, 아직 비장의 무기가 있어!
SOP2가 소고기 통조림을 꺼내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줄게! 이거 맛있는 거라구!
훌쩍...
여자애의 울음이 점차 잦아들자, SOP2는 서둘러 통조림을 따서 내밀었다.
소고기 향이 순식간에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소고기 통조림... 그저 평범한 군수 물자이지만...
지휘관의 오래된 기억 속 깊은 한 조각을 건드렸다.
......
딸깍. 맞은편 여자가 소고기 통조림을 열자, 소고기 향이 순식간에 열차칸 내부를 가득 채웠다.
지휘관은 군침이 도는 것을 참으며 억지로 시선을 창밖 풍경에 고정하려 했다.
야, 벙어리 꼬마. 이따 저녁밥 뭐 먹을 거야?
맞은 편의 녀석은 하필 이럴 때 달라붙었다.
......
네가 내 동생을 하겠다고 하면, 이 통조림 한 입 정도는 먹게 해줄 수 있는데~
......
찡그린 눈으로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노려보면서, 지휘관은 콧구멍을 파고드는 향기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열차가 속력을 줄였다.
열차가 곧 멈추겠네. 짐 잘 챙겨라, 꼬마야.
열차가 멈춘 동안은 도둑놈들의 축제 시간이니까.
헬린의 말에 호응하듯이 두 남자가 열차칸에 들어서며 잔뜩 낄낄거렸다.
이거 대박 났네!
그 할망구가 돈을 이렇게나 많이 들고다닐 줄은 몰랐다니까!
흐흥, 이게 다 내 연기력 덕분이지. 몇 마디 꼬드겼더니 날 죽은 아들로 착각하고 챙겨주더라고.
캬하하하하, 그 아들이 죽어서 잘 됐지, 안 그러면 우리가 속일 수 있었겠냐.
지휘관은 화가 치밀었다. 방금 정수기 앞에서 눈물 흘리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대가 몇 명인지, 체격이 어떤지 따질 겨를도 없이 지휘관은 벌떡 일어나 두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
너 뭐야?!
그 돈, 주인한테 돌려줘!
내가 왜애!? 내가 실력으로 딴 건데 네가 뭐라고?
지휘관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지만, 상대방의 경험이 더 풍부했다.
고작 몇 초만에 지휘관은 둘 중 한명에게 붙잡혔고, 다른 한 명에게 두들겨 맞았다.
그만해라, 열차 곧 멈춘다.
<size=50>괜히 까불고 말이야!</size>
......
곁눈질로 보니, 객실 안의 승객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는 않았다.
지휘관은 노인의 심정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파왔다.
쿠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남자 중 한 명이 날렵한 업어치기에 바닥에 내던져졌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너어!
다른 남자도 반응할 틈도 없이 다리 걸기에 넘어졌고, 턱에 차기를 맞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가만히 서서 뭐해? 놈들이 훔친 돈을 뒤져서 찾아야지.
지휘관은 도둑들이 훔친 물건을 되찾았고, 헬린은 열차 경찰을 불렀다.
도둑맞은 물건의 주인인 노인이 찾아와 헬린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저한테 고맙다 하지 마세요, 이 꼬맹이가 다 한 거예요.
아아! 또 만났구나. 고맙구나! 정말 착한 아이야!
...천만에요.
노인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경찰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지휘관은 창문 너머로 승강장에 서서 아쉬운 듯 손을 흔드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맙구나! 몸 건강하게 집에 돌아가렴!
......
열차가 승강장을 떠나면서 노인의 모습은 점점 작아졌고, 결국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툭.
작은 케이스가 앞에 놓였다.
너 벙어리 아니었구나? 겉은 차가워 보여도 가슴은 뜨겁잖아.
자, 이 통조림 너 줄게, 불의에 용감하게 나선 상이야!
지휘관은 고집 부리며 고개를 돌렸다.
소고기 통조림?
필요없거든!
얘가 무슨 소리래! 이건 전쟁 났을 때 돈이랑 다름없다구!
딱봐도 맛없어 보이는걸.
쯧쯧.
상대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뚜껑을 연 통조림을 다시 지휘관에게 내밀었다.
풍겨오는 소고기의 향기가 지휘관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무너뜨리려 했다.
네가 전장에 나가 보면, 통조림 하나 먹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게 될 거야.
또 나이 자랑하네.
하하, 이 꼬맹이 좀 보소. 그냥 주는 게 아니야.
나중에 소고기 통조림 받으면 꼭 갚아야 한다?
쳇, 그래, 갚으면 되잖아! 고작 통조림 하나 뭐가 아깝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