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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6 · 합성곱 핵

황량의 세계에 타오르는 불

용감한 선택을 한 넬레는 추격당했다. 외조부의 마지막 도움을 받아 무사히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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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존.

J 요원은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의 저 슈타지 건물을 매우 진지하게 바라봤다.

지금 그의 손에는 방금 수령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소식을 받았을 땐 머릿속이 붕붕거렸다.

이런 직업 종사자에겐 흔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서류를 봉투에서 끄집어냈다.

J

케인 슈바벤...

임무 중... 순직...

J

라이트 거보다 몇 장은 더 두껍네... 이게 정식 요원으로서의 대우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이 슬픔을 누구와 나눠야 할지 몰랐다.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테니까.

삐삑.

마침 지휘관에게서 통신이 왔다.

J

...지휘관?

지휘관

<color=#00CCFF>J... 지금 어디야?</color>

<color=#00CCFF>너한테...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color>

J

무슨 일입니까?

지휘관

<color=#00CCFF>아마리스한테 연락해서... 넬레 씨 어딨는지 찾아줘.</color>

......

타타탕!

매섭게 날아드는 총탄 세례에 넬레는 자신 뒤로 탄흔이 궤적을 그리는 것까지 보였다.

넬레

아마리스 씨! 상대가 너무 많아요!

아마리스

나도 알아!

넬레

저거 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아마리스

...글쎄.

넬레를 데리고 좁디 좁은 골목길을 달리는 동시에 추격자까지 저지하느라, 아마리스의 탄창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아마리스

저기! 저 앞의 건물로 들어가!

저 안에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어! 지형으로 따돌려보자고!

넬레

네!

아마리스는 넬레를 먼저 들여보내고 추격자를 다시 한 번 저지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탄창의 수를 가늠해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두 사람의 급한 발소리가 썰렁한 복도 끝까지 메아리쳤다.

아마리스

이쪽!

넬레

...저어... 저, 처음으로, 체력의, 중요성을 깨달았, 어요...

아마리스

정형외과 의사는 몸 튼튼하던데.

넬레

그야... 정형외과의는 다, 목수니까요...

어깨 탈골부터, 계단 조립까지...

아마리스

지금 그딴 의사 개그 할 시간 아니거든!?

넬레

네에... 하아... 돌아가면 운동 열심히 할 거야아...

아마리스

내 뒤 바짝 따라와.

넬레

아... 네...

뒤쫓아오는 발소리는 아직 멀어도 아마리스는 사방을 경계하며 넬레를 데리고 전진했다.

그런데 그때, 저 앞의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리스

누가 온다!

넬레

......!

아마리스가 총을 들어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겨눴다.

저 정체불명의 "추격자"는 큰 소리를 내며 당돌하게 계단의 마지막 한 칸을 내려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넬레

아, 아니,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아마리스

......

J였다. 빛을 등진 탓에 얼굴이 그늘져서 잘 보이진 않아도, 분명히 J였다.

넬레

...왜 말이 없어요?

넬레가 J에게 두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마리스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아마리스

안 돼.

넬레

네? 왜요?

아마리스

......

J

당신을 쫓는 사람들 중 슈타지가 있으니까죠.

물론 다른 쪽 사람들도 있지만요.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구 시청 청사 앞에서 한 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부은 피와 땀과 돈이 죄다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는데.

넬레

......

J

그레이의 결백이 당신의 목숨보다 중요했어요?

이미 죽은 사람인데, 당신은 더 살아야죠...

넬레

...이건 저의 인생이 걸린 신념이에요.

사람이 살아서 신념 하나 관철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J

넬레 씨... 대체 왜 그럽니까?

출신 좋고 재능도 뛰어나서 앞날이 아주 창창한 사람이... 지금 이런 일 때문에...

다 한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고요, 당신 목숨까지도!

넬레

태어났으니 죽는 날도 오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죽느냐가 다를 뿐이지!

출신은 선택 못 하니까,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선택해야죠!

J

......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넬레는 밝은 눈빛으로, 두려움의 그늘 한 점 없었다.

그 눈빛에 J는 그날의 화재가 떠올랐다. 한 주택 건물을 거의 통째로 집어삼켰던 그 대화재가.

그때, 그는 자괴감과 괴로움, 울분에 통곡하다 구토까지 했다.

그러다 뒤를 돌아봤을 때 보았던 넬레의 눈은 지금처럼 맑고 밝았다.

그땐 그저 활활 타오르는 불에 비친 탓이겠지 싶었지만, 이제야 그는 깨달았다. 저 아가씨는 항상 저 맑은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결심하고, J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J

아마리스, 넌 어느 편이야?

아마리스

빛이 나는 사람 편.

J

......뭐?

아마리스

어쩔 수가 없어, 내 기반 설정이 이렇거든. 달빛은 다른 빛을 받아 반사하는 거잖아? 난 선천적으로 빛나는 걸 좋아해.

아마리스가 넬레의 앞에 섰다.

추격자들이 이미 따라잡았다. 바깥의 기척으로 보아 건물은 포위되고 출입구는 막혔을 터.

J

사람 참 많이도 끌고 왔네... 부서 몇 개는 동원했나?

아마리스

이런 게 또 나 같은 전술인형의 홈그라운드지.

J

호오? 근데 넌 전쟁용이잖아, 민간인 보호는 네 보유 스킬에 없지 않냐?

아마리스

이게 날 너무 수박 겉핥기로만 아네...

잘 됐네, 내 실력을 보여 주겠어!

타앙!

타타탕!!

총성이 시작됐다.

아마리스는 넬레를 감싸면서 반격했다.

하지만 이런 엄폐물도 없는 복도에서 비무장한 민간인을 지키기는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웠다.

아마리스

내 뒤에서 나오지 마!

넬레

하, 하지만 뒤에도...!

그런데, 총성이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넬레가 뒤에서 난 총성을 똑똑히 들었다.

몇 년 전 대학 입시 합격 통지를 조회할 때 마우스를 누르던 소리처럼, 처음으로 위급 환자를 소생시켰을 때 들었던 심전도계의 소리처럼, 라플라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때처럼...

넬레는 눈을 질끈 감고, 운명의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쿠웅!

몸이 넘어져 무언가에 깔린 감각이 들었다.

J

진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넬레

J 씨?!

J가 몸을 날려 넬레를 덮쳐서 탄환을 피한 것이었다.

넬레

왜... 당신이...

당신도 슈타지잖아요?

아마리스

수다 떨지 말고 빨랑 일어나서 방에 숨어!

J

가요!

넬레

아, 네!

J는 넬레를 확 끌어당겨 안고 아마리스의 엄호를 받으며 황급히 모퉁이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인간 둘에 인형 하나.

셋은 계속 움직였다.

아마리스

...넬레, 여기서 탈출하고 나면 꼭 J한테서 떨어져. 아주 멀리.

이 녀석 분명 나중에 슈타지한테 머리통 날아갈 거야.

J

아니 넌 그렇게 내가 아니꼽냐?

아마리스

응, 대놓고 말할 만큼.

아무튼 끝나면 각자 자기 갈 길 가자고. 난 슈타지로 안 돌아가.

J

으악! 나 다쳤어!

다리가... 아이고 내 다리!

넬레

엑, 지금 총 맞았나요?!

어디예요? 보여줘 봐요!

아마리스

그래 얼른 보여줘, 상처 알아서 아물기 전에!

J

......

아마리스

넬레, 이 자식 헛소리는 그냥 무시해. 이게 어디서 꾀병을 부려!

넬레

......

J

넬레 씨... 제 단 하나뿐이던 친구가... 없어졌어요...

넬레

...제가 친구 같은 게 되어 줄 순 있는데요.

J

임무도 망치고... 이제 직장에서 짤리겠죠...

넬레

...직장은 뭐어, 낙하산 탈 수도 없으면 알아서 방법을 찾아야겠죠.

그치만 J 씨 꼴로는... 으음... 저, 정 다른 직장 못 구하면... 제가... 제가 먹여 살려는 드릴게요...

J

망했다, 수천만 소녀들의 꿈이 마침내 끝이로구나아... 다시는 미녀에게 커피도 못 쏘고...

넬레

......

아마리스

그냥 지금 이놈 머리통 날려버릴까?

이때, 넬레의 통신기가 울렸다.

넬레

...외조부님?

포크트

<color=#00CCFF>정말이지, 너는 네 어미보다 사고뭉치구나.</color>

넬레

......

포크트

<color=#00CCFF>대체 왜...</color>

<color=#00CCFF>아니, 됐다. 누가 시켰는지만 말하거라.</color>

넬레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에요. 다 제가 제 의지로 한 일입니다.

포크트

<color=#00CCFF>......</color>

넬레

순수히 제 이념에서 비롯된 행위입니다.

넬레는 통신 너머에서 한숨을 쉬는 걸 들었다.

포크트

<color=#00CCFF>네 어미는 가정을 위한다고 대들더니,</color>

<color=#00CCFF>너는 이념을 위한다고 나한테 대드는 거냐?</color>

넬레

죄송합니다 외조부님, 그쪽에까지 폐를 끼쳐서요.

그냥 당당하게 말하세요, 저는 진작에 당신과 의절한 사이라고요.

포크트

<color=#00CCFF>이놈의 자식! 내가 그리 말한다고 누가 믿을 거 같아!?</color>

포크트

<color=#00CCFF>하아... 내 마지막으로, 네 외조부로서 할 일을 해 주마.</color>

<color=#00CCFF>앞으로 너와 나는 정말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color>

외조부가 통신을 끊었다.

넬레

......

참, 아까 대답을 못 들었는데... J 씨 진짜 여기 왜 왔어요? J 씨도 명령을 받아서 온 거예요?

J

그게... 슈타지가 저와 넬레 씨의 관계를 알아서 저는 차출되지 않았습니다.

지휘관이 연락해서는 넬레 씨를 지켜 달라 부탁했어요.

넬레

...그럼 어떡하려고요?

J

일 끝나면 가서 진술서 쓰고 퇴직 준비해야죠 뭐.

아마리스

그리고 살처분 당하고 말이지.

J

......

또 통신이 울렸다.

넬레

제 거 아니에요.

J

...아, 제 거네요.

J가 천천히 통신기를 들어, 슈타지의 채널을 열었다.

Q

<color=#00CCFF>...먼저 축하할게.</color>

J

백수 된 걸요?

Q

<color=#00CCFF>너 말고 코넬리아 슈펠 씨.</color>

<color=#00CCFF>목숨줄 조금 더 길어졌다고 전해.</color>

J

예?

Q

<color=#00CCFF>혼자 건물 밖으로 나오라고 해.</color>

<color=#00CCFF>너와 아마리스는 그 다음에 떠나고.</color>

J

지금 그게 넬레 씨를 꾀어내려는 수작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습니까?

Q

<color=#00CCFF>그럴 거 같더라, 네 지능으론 내 솜씨를 못 따라오지.</color>

J

이익...

Q

<color=#00CCFF>슈타지 거기서 전원 철수했어. 지금 건물 밖에 있는 사람은 프랑크푸르트 경찰이야.</color>

<color=#00CCFF>내 말 믿어, 지금 넬레 씨한테 가장 안전한 장소는 프랑크하임 여자교도소밖에 없어.</color>

J

......

통신은 그대로 끊어졌다.

언제 도로가 정리되었는지 멀쩡한 경찰차가 건물 앞에 서 있어서, 반쯤 무너진 건물만이 프랑크푸르트에 폭격이 떨어졌다고 증명하는 듯했다.

경찰

코넬리아 슈펠 씨, 맞습니까?

넬레

...맞습니다.

경찰

코넬리아 슈펠 씨, 당신은 영안실에 무단 침입, 그레이 블랙웰의 시신을 훔쳐 심사를 거치지 않은 실험에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을 불법 침입, 과학 연구 윤리와 법규를 위반한 시체 절도 및 훼손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넬레

알겠습니다.

경찰

따라오시죠,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넬레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