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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 허입자쌍

악마의 탄생

장마가 그치지 않던 날... 모든 것은 몽환처럼.

-76-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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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9년 X월 X일, 베를린, 오버슈타인 가 저택

발라드

......

그날은 장마가 이어지던 어느날의 오후였다. 그의 기억 속 마지막 며칠은 줄곧 날씨가 엉망이었다.

자신이 병상 앞에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엔 침대 옆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심전도에 붙어 있었다. 생명 신호가 오르내리다 점차 평평하게 내려앉고, 끝내 아무런 파동도 없이 멎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은 끝내 그의 악의를 직접 선사했다.

집사

도련님, 끝났습니다. 이분들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맙시다.

저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은 천사는커녕, 의사조차 아니었다. 손안에서 사라져가는 생명에 아무런 존중도 없었고, 보통의 업계 종사자들처럼 유가족에게 유감이나 최선을 다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의료 인원

오버슈타인 님, 실험체의 생명 반응이 소멸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프로젝트의 향후 실험 방향은 재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오버슈타인

알겠네.

교단 쪽은... 최대한 빨리 새 인선을 뽑을 수 있도록 즉시 지시를 내리게.

발라드

...제게 맡겨 주실 수 있을까요? 아버지.

오버슈타인

발라드?

마치 이제야 막 자신의 아들이 곁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아챈 것처럼, 오버슈타인은 연로하면서도 전혀 흐릿함이 없는 눈동자를 아래로 떨궜다.

그 미숙한 소년은 단지 몸을 돌리고 자신 있는 미소와 공손함을 얼굴에 띄웠다.

발라드

패러데우스의 운영 방식은 누나가 살아 있을 때 많이 지켜봐서, 각종 절차는 전부 숙지하고 있어요.

"성녀"의 남동생이라는 신분도 꽤 쓸모 있을 거구요.

그리고... 저도 요즘 몇 가지 연구를 하고 있어요. 아직 라플라스 선생님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분명 아버지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오버슈타인

호오...

오버슈타인은 마치 자신의 아들을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떠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버슈타인

어설프게 어른 흉내 내는 건 이제 그만둬라, 발라드. 너는 아직 어려.

누나의 죽음이 너에게 큰 충격이었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발라드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도 제가 진지하단 걸 알고 계시고, 제 방식이 가능성 있다고 여기시니까 이렇게 시간을 들여 대화하고 계신 거잖아요.

그저 지금까지 저한테 관심이 없으셔서, 제게 정말 그런 능력이 있는지 모르실 뿐이죠.

오버슈타인

계속 말해보거라.

발라드

방금 말씀드린대로예요, 아버지. 지금 아버지께는 패러데우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죠.

사실 가장 적합한 사람은 라플라스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자신의 연구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교단을 맡기면 그냥 방치해버리겠죠. 그런 결과는 아버지께서도 원하지 않으실 거고요.

제가 나이가 어려서 사람들이 얕볼 수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예전에 누나가 했던 것처럼, 저도 선생님을 보좌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전 누나보다 더 잘할 수 있어요. 저는 더 똑똑하고,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지도 아니까요.

오버슈타인

...발라드, 네 또래는 보통 이럴 때 누나 옆에서 우는 게 정상이야.

발라드

제 또래 애들은 보통 죽음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해요, 아버지.

오버슈타인

적절한 인선을 찾기 전까진 너의 장난을 용서해줄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다는 걸 명심해라.

발라드

고마워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아버지.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병상 위 차가운 시신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의료 인원

실험체의 후속 처리에 관해서는...

발라드

...내가 처리할게. 물론, 라플라스 선생님께 넘기기 전에... 철저하게 검사해야지.

그리고 오버슈타인 가의 영애로서, 누나에겐 성대한 장례식과 고별회를 치러야 해. 우리 가문에 먹칠을 하고 싶진 않잖아?

의료 인원

무, 물론입니다!

집사

...도련님!

연로한 집사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무릎을 꿇고 허겁지겁 발라드의 손을 받쳐 들었다.

발라드

......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집사

세상에... 빨리 붕대 가져와! 이 멍청한 것들!

도련님, 이건 대체 어디서 이렇게...

발라드

...아마 실험 기재 때문일 거야. 실험 기재들은... 다 날카로운 것들이니까

그는 다시 손을 움켜쥐고, 피가 손금 따라 흘러내리도록 그냥 내버려뒀다.

...의미 없이 울부짖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오버슈타인 가 저택의 정원.

발라드

쓰읍...

루니샤

미안해... 모래랑 톱밥이 살에 박혔어. 먼저 상처를 깨끗이 씻어내야 붕대를 감을 수 있어.

루니샤가 작은 핀셋을 들고 발라드의 상처에서 이물질을 하나하나 골라냈다.

하지만 살점이 엉켜 있어, 아무리 조심스럽게 해도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발라드가 애써 참으려 했지만, 결국 신음을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라드

으...

루니샤

미안해, 내가 아프게 했구나. 참느라 힘들지?

하지만 이건 꼭 필요한 고통이야. 아프다고 피하면 상처는 절대 낫지 않을 거야.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그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타일렀다. 마치 진짜 간호사처럼.

그러나 곧 그녀의 맑은 두 눈에 다시 걱정이 차오르더니 손을 내밀었다.

루니샤

정말 많이 아프면 내 손 꼭 잡으렴.

루니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가 같이 감당해줄게.

이어서 그녀는 발라드의 동의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발라드

......

발라드는 멍하니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순간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루니샤가 다시 손을 움직였고, 상처 속 신경을 건드리자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이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발라드

윽... 아!

반사적으로 발라드는 자신의 주먹과 루니샤의 손을 꽉 쥐었다.

루니샤

......

그러나 루니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발라드가 그녀의 손을 살짝 놓자, 그 하얀 손은 자신이 꽉 쥔 탓에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루니샤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 소독이 끝났다.

루니샤가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발라드는 눈치 챘다...

자신의 상처를 처리하기 위해 루니샤는 내내 두 무릎을 정원의 자갈길에 꿇고 있었던 것이다.

치맛자락 아래 드러난 무릎은 이미 시뻘겋게 부어오르고 긁힌 상처로 가득했다.

그녀가 거즈와 소독약을 가져온 뒤에도, 발라드의 시선은 자기만큼이나 성치 않은 그 무릎에서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루니샤

어쩌다 이렇게 맞았어?

발라드

처음엔 두 명뿐이라 그나마 상대할만했어.

근데 나중엔 점점 더 많아져서 결국 당했어.

발라드는 말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누나의 시선을 피했다.

발라드

마지막엔 몇 명이 나를 땅바닥에 눌러놓고, 뚱땡이한테 자전거를 타고 내 몸 위를 지나가게 했어...

루니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대체 누가 그런 거야? 누나한테 말해줘!

반드시 그놈들한테 자기들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너한테 제대로 사과하게 해야 해.

루니샤는 벌떡 일어나 눈빛에 맹렬한 불꽃이 일었다.

발라드가 그녀의 화난 표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발라드

소용없어, 못 찾을 거야. 그 놈들은 나랑 같은 반도 아니고, 그냥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양아치들이니까.

루니샤

아무리 찾기 힘들어도 그런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

대체 무슨 이유로 널 괴롭힌 거야? 돈을 뺏으려던 거야?

발라드

...아니야, 학교에서 나올 때부터 강아지 한 마리가 날 따라왔는데, 내가 먹을 걸 좀 줬더니 두 명이 다가왔어.

걔네가 날 밀치고 강아지를 억지로 빼앗았어. 강아지는 겁먹어서 계속 멍멍거리면서 짖었고...

내가 대화로 해결해 보자고 했는데, 그 강아지가 자기네 오늘 장난감이라면서 내가 방해하면 대신 나를 가지고 놀겠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조금만 혼내주려 했는데, 되려 얻어맞았어.

한심하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루니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루니샤는 상처를 모두 감싼 뒤, 손을 내밀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발라드

응, 아무튼... 놈들은 강아지를 땅바닥에 눌러놓고, 나한테 했던 것처럼 자전거로 깔아뭉갰어...

가면서 또 한 번 날 팼고...

이야기를 다 들은 루니샤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 굳어 있었다.

루니샤

내일부턴 우리 같이 등하교하자.

내가 같이 있으면 아무도 빌을 괴롭히지 못할 거야.

발라드

난 그냥... 모르겠어, 이해가 안 돼...

발라드는 자기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뜯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았다.

발라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불합리하지 않아...?

발라드는 팅팅 붓고 충혈된 두 눈을 마구 문질렀다. 쥐어뜯은 머리카락이 마구 떨어졌다.

이 시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고귀한 학원 강사들이 가르친 세상의 이치, 철학, 법률, 존재와 만물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교육조차 지금 그의 처지에 대한 해답은 되어주지 못했다.

발라드

인간은 만물 중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존재라면서? 그런데 왜 그딴 인간이 존재하는 거지? 언젠가 처벌받고, 언젠가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보복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거야?

이런 불합리한 일이 정말 허용돼도 되는 거야?

인류를 창조한 존재는 왜 우리 뇌가 이런 불합리한 행위를 떠올릴 수 있게 만든 거야?

그저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때리고.

발라드

모든 사람이 그런 거야? 아니면 그놈들만 그런 거야?

발라드의 목소리는 점점 더 분에 찬 목소리로 변해갔고, 루니샤가 닦아준 눈물 자국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스로 눈물을 닦아보려 했지만, 슬픔과 분함은 마치 범람하는 홍수처럼 그를 삼켜버렸다.

갑자기 루니샤가 팔로 발라드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코에 기분 좋은 향기가 덮쳤다.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 기분 좋은 향기는 재스민 향기였다.

안정되고 평온한 힘이 발라드를 감싸자, 가슴속 슬픔은 금세 사라지고 그 자리를 따뜻함이 가득 채웠다.

발라드

...누나?

루니샤

그들만 그런 게 아니야. 세상 모두가 그래. 빌,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매정하고, 잔혹하고, 굶주려 있어... 온통 죄악을 기르는 땅이고, 어디나 부조리한 약육강식뿐이야...

그래도 우리가 서로 곁에 있어 준다면,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야.

내가 빌을 지켜줄게. 빌, 누나를 믿을 수 있어?

발라드는 루니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루니샤의 상처 입은 무릎으로 가득했다.

발라드

...왜?

루니샤

뭐가 왜?

발라드

왜 나를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야?

루니샤

왜냐니... 빌은 내 동생이고, 나는 빌의 누나니까.

누나는 원래 동생을 지켜줘야 하잖아, 너는 아직 어리니까...

언젠가 네가 커서 더 강해지면, 그땐 네가 누나를 지켜줘야 해.

루니샤

그럼, 지금 당장 너를 괴롭힌 애들을 혼내주러 가자...

비가 내리던 그 날, 발라드는 처음으로 "누나"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기분 좋은 재스민 향이 나는 단어였다.

오버슈타인 가 저택의 정원.

다음날, 오버슈타인 가문의 유서 깊은 저택 정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발라드는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거대한 저택은 조문객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모두 검은 상복을 입고, 각자 하얀 국화를 들고서 커다란 관짝 앞으로 다가가 추모했다.

...정말 웃기는 연극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관에 다가가는 길에, 발라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는 평소에 일이 바쁘지 않으면 연구에만 몰두하며, 자신에게는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린 시절은 온통 어둠과 참담함에 뒤덮여 있었다.

오직 누나만이 색을 지닌 한 줄기 빛이었다. 세상 속에서 아직 약간의 따스함이 남은 구석을 발라드에게 밝혀주던 빛이었다.

어느새 발라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관 앞에 와 있었다.

장례식의 중심이었던 이곳도 처음 추모가 끝난 뒤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을 그저 또 하나의 만남을 갖는 장소로 여겼을 뿐이었다.

발라드

우린 꼭 다시 만날 거야...

...누나.

그는 손짓으로 곁에 있던 시종들에게 관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

집사

...여기에 두시겠다고요? 확실하십니까, 도련님?

오버슈타인 님께서는 연구소로 옮기라고 하셨는데...

발라드

할아범이 나보다 내 아버지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해?

집사

아뇨...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집사는 서둘러 일꾼들에게 관을 내려놓으라고 지시한 뒤, 곧바로 옆으로 물러섰다.

발라드

...됐어. 다 나가.

여긴 다른 사람이 맡을 거니까.

작업 인원

그... 알겠습니다.

작업 인원

그럼 저희는 이만...

탕!

일꾼들이 뒤돌아 그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발라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 뒤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비록 그가 개조를 하여 반동을 최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속으로 사격하니 역시 손이 얼얼해졌다.

집사

<size=50>무, 무슨 짓을 하신겁니까!? 도련님!</size>

발라드

...미안, 케인 할아범.

하지만, 이 일은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되거든.

집사

돈만 좀 쥐여주면 되는 일입니다! 영감님께서 절대로...

발라드는 총구를 내리지 않은 채, 차갑게 눈앞의 노인을 겨눴다.

집사

도... 도련님...?

발라드

내가 방금 "아무도"라고 말했지? 케인 할아범.

탕!

또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노인의 경악한 눈동자는 빛을 서서히 잃었다.

손뼉 소리가 울렸다.

발라드

......!

오버슈타인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구나, 발라드.

발라드

...아버지!?

느리고 박자감 있는 박수와 함께 울려 퍼진 그 중후한 목소리는, 발라드에게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한적하던 골목길을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나타나 순식간에 꽁꽁 틀어막아 버렸다.

발라드

아버지가 어떻게...!?

오버슈타인

확실히 나는 너에게 관심이 부족했지, 발라드. 그런데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을 줄이야.

오버슈타인

하지만 내게 대들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발라드

<size=50>...닥쳐! 아버지! 누나는 이미 죽었어! 이제 또 뭘 더 바라는 건데!</size>

당신 딸이잖아! 편히 땅에 묻어주면 안 되는 거냐고!

오버슈타인

...나는 네 누나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그만큼 너도 똑같이 사랑하지, 발라드.

하지만 너는 아직 어려서 네 누나가 한 희생이 얼마나 값진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거란다.

발라드

절대... 절대 누나한테 손대게 하지 않아...

오버슈타인

...넌 내 아들이야, 발라드.

그러니 네가 내게 총을 겨눈 걸 용서하는 거다.

하지만 두 번은 없어.

발라드

안 돼, 기다려... 건들지 마!

오버슈타인의 지시에 따라 몇몇 검은 옷의 보디가드들이 즉시 발라드 곁으로 와서 그를 끌어냈다.

발라드는 저항할 틈도 없이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고 의식을 잃었다.

오버슈타인 연구소.

밤이 깊어 고요해진 틈을 타, 작고 왜소한 그림자가 연구소 바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라드는 손에 쥔 단말기로 위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했다.

오버슈타인은 그를 집 안에 가두고 하인들에게 감시를 명했다.

하지만 누나를 위해,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굳세며, 날렵했다.

무기가 없어도, 어리석은 하인들이 가둬둘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발라드

여기다...

연구소는 경계가 삼엄하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안전 규정에 따라 건물에는 언제든 열 수 있는 창문 몇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건 발라드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왜소한 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쿵!

창문을 넘는 순간, 발라드는 균형을 잃고 오른쪽 무릎을 창틀에 세게 부딪쳐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발라드

크윽...!

무릎 안쪽에서 칼로 베인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뼈가 하나 부러진 걸지도 모르겠다.

젠장,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size=50>빌어먹을!!!</size>

5분 후, 그는 숨을 잔뜩 들이마신 뒤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라드

......

아무도 그의 침입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어두운 복도에는 발라드의 절뚝이는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는 방향을 세심히 확인하며 무릎의 통증을 꾹 참았다.

발라드

바보 같아... 진짜 바보 같아.

그는 어느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텅 비어서 아무도 없었다.

발라드

......

또 다른 문을 열어봐도 없었다.

발라드

......

어둠 속에서 발라드는 기계처럼 문을 하나하나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릎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지만,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눠주던 그 사람은 지금 어딘가 어두운 구석에서 그가 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라드

...기다려, 누나.

지금 갈 테니까...

발라드

나는 정말 누나의 남동생으로서 실격이야.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누나를 여기 혼자 두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혼자서 말은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모든 걸 뒤덮고 있으니, 그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구원자인 걸까, 아니면 누나의 따뜻함을 구걸하는 나약한 동생인 걸까?

이제 와서까지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는 걸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단지 확실한 건, 그는 문을 열었을 때 사랑하는 누나가 미소지으며 이 모든 게 장난이었다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 재스민 향이 감도는 비 오는 날을 함께 보내길 바랐다...

발라드

누나...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공기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는 다친 다리를 이끌고 어둠 속을 나아가며, 홀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홀로 참았다.

??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가 같이 감당해줄게.

귓가에 울려 퍼진 건 예전에 누나가 해줬던 말이었다. 발라드는 벽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발라드

이 빌어먹을...

악마!

쓰레기!

버러지!

짐승들!

내 누나를 돌려줘!

발라드의 분노가 입밖으로 그대로 튀어나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연구소에 잠입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오버슈타인을 저주했고, 이 연구소의 모든 것을 향해 저주를 쏟아냈다...

그는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벽을 발로 차며 분노로 자신의 무력함을 감추려 했다...

발라드

제기랄... 제기랄...

그는 힘없이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발라드

누나... 지금 누나가 곁에 있었다면, 내가 울음을 참을 수 있었을까?

그는 환상을 품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누나가 곁에 있어 준다면, 자신은 이렇게 나약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 사소한 환상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끝없는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누나의 죽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행복은 산산조각 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영원히 누나의 작은 빌로 남을 것이고, 누나는 언제까지나 다정한 누나인 루니샤일 것이다.

아니, 설령 누나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 해도 방법은 있다. 누나의 몸만 되찾을 수 있다면, 아직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

??

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금 메아리쳤다.

발라드

누구야?!

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발라드

방금 들렸어... 분명히 들렸단 말이야!

목소리는 앞쪽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라드

...저건?

문득, 복도 끝에 있는 시커먼 쇠로 된 문짝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주변과 하나처럼 녹아든 그 문은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웠다.

발라드

...누나... 누나!

누나, 거기 안에 있는 거야?

발라드는 순식간에 몸을 일으키고는 쏜살같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잠겨 있지 않은 그 문을 보면서, 누나의 목소리가 그 안에서 들려온 것이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칠흑 같았고, 발라드는 벽을 더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발라드

누나는 분명히 여기 있어...

틀림없어, 누나가 나를 부르고 있는 거야!

갑자기 그의 손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스위치의 감촉이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방 안의 조명이 서서히 밝혀졌다.

발라드는 누나의 모습을 간절히 기대했다. 분명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하지만 발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잠들어 있는 누나가 아니라 지옥도였다.

발라드

...앗... 아아...

......

천장의 불빛이 켜지자, 그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매의 윤곽, 약간 창백한 얼굴... 틀림없는 그녀, 루니샤였다.

하지만...

머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목 아래는 매끄럽게 잘린 단면만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포르말린에 잠긴 채, 원통형 용기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발라드

누나...

이성이 그대로 멈췄다. 뻔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월한 기능을 가진 두뇌는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정 기능이 붕괴하면서, 그의 인지 능력마저 함께 붕괴해버렸다.

발라드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원통형 용기 속의 조명은 천장에 있는 형광등보다 늦게 켜졌지만,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하나씩 차례대로 켜졌다.

가장 먼저, 루니샤의 팔과 다리가 보였다...

허벅지, 종아리, 발목, 팔꿈치...

상박, 하박, 약지...

그다음은 장기였다.

위, 소장, 간...

왼쪽 신장, 췌장, 오른쪽 폐, 혈관...

마지막으로 드러난 건 가지런히 나열된 뇌를 얇게 자른 조각들, 그것들은 조심스럽게 어느 한 부분 빠짐 없이 보관되어 있었다.

발라드

웁... 우웩...

척추가 주도하는 생리 반응이, 뇌가 기능을 잃자 몸을 지배했다.

발라드는 순식간에 무릎을 꿇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오직 하나의 명령만을 내렸다. 위를 비우는 것.

하지만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물과 시큼한 위액밖에 없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위를 계속해서 쥐어짰다.

위 속은 이미 텅 비었지만, 구토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고통은 20분 넘게 계속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발라드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이건 누나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본 건... 아니,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아냐... 이건 분명 환상이야, 그냥...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 공허한 눈과 다시 눈을 맞출 용기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소리친 탓에 그의 뇌는 산소 부족 상태에 빠지고, 귓가엔 웅웅거리는 이명이 끊이지 않았다.

계속된 구토와 격한 감정 때문에 눈앞이 흐려졌다.

??

빌...

갑자기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라드

누나...?

??

빌... 나야...

왜 그러니?

발라드

누나!!

고개를 번쩍 들자, 그는 다시 포르말린으로 가득 찬 용기들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몽롱한 환영 너머로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그리고 그 흐릿한 윤곽들이 천천히 하나로 합쳐지더니, 점점 또렷한 형상을 이루었다.

발라드

누나!

그가 기억하는 기억 속의 익숙한 얼굴이 다시 떠오르자, 발라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손을 내밀어 허공에 떠 있는 누나와 손을 맞잡았다.

루니샤?

악몽이라도 꿨니? 우리 착한 빌.

안색이 너무 안 좋잖아...

루니샤?

무서워하지 마, 이제 괜찮아. 누나가 네 곁에 있으니까, 이제 전부 지나갔어...

악몽에서 깨어나서 다행이야, 빌...

루니샤?

오버슈타인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