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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 허입자쌍

여신의 메아리

"내 심장이 불길에 집어삼켜지면...""나의 피가 너와 함께 나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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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의 어느 삼림지.

발라드

헉... 헉...

어둠 속에서, 발라드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심장은 가쁘게 뛰는데, 다리는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으로 피로를 호소했다.

하물며...

발라드

......

등에 무겁고 네모난 상자까지 메고 있으니, 당연했다.

이런 걸 메고서 이렇게나 한참 달린 것만 해도 엄청난 고난인데, 추격자가 쫓아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발라드는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서,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뇌가 지금 인지하는 것은 단 두 가지.

하나는 도망치는 것.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것.

다른 하나는 뒤를 돌아보는 것. 수시로 뒤를 돌아봐, 추격자에게 따라잡히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

발라드

...쯧.

저 뒤에선 여전히 깜빡이는 불빛이 몇 번이고 그의 등을 비출 뻔했다.

저 추격자는 인내심 강한 사냥꾼처럼, 사냥감이 포위망을 벗어나도 침착하게 다시 거리를 좁혀 왔다.

발라드로선 침을 뱉고 오기로 다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히, 직접 폭력을 휘두르기엔 너무나도 연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로 기댈 곳마저 없는 상황. 반드시 스스로 해내야만 했다.

루니샤?

빌, 시간이 없어. 저들이 우릴 따라잡을 거야.

발라드

누나...

루니샤?

달려, 빌. 달려.

지금은 숨 돌릴 시간도 없어.

허공에 떠 있는 누나의 의연한 얼굴에, 발라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누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과연, 전술 손전등의 불빛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병사

발자국이다!

이쪽이 맞아! 계속 추적한다!

등불이 점점 가까워졌다.

추격자의 실루엣마저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

끼잉...

발라드가 이를 악물고 다시 달리려던 그때, 뒤에서 신음이 들렸다.

그 신음에 반사적으로 발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빌이, 그 말티즈 빌이 뒷다리가 가시덩굴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발라드

괜찮아 빌, 내가 풀어 줄게...

한계를 넘어선 강행군으로 인한 메스꺼움을 참으면서, 발라드는 조심조심 빌의 뒷다리를 가시덩굴에서 꺼냈다.

말티즈

끼잉... 끼잉...

기뻐하며 발라드의 품에 몸을 문지르는 이 강아지도 이미 한계.

한낱 애완견에 불과한 빌은 당연히 체력이 사냥개나 군견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발라드

걱정 마. 누나가 널 버리지 않았으니까, 나도 널 버리지 않을게.

우리는 가족이잖아, 그치?

말티즈

끼잉... 멍!

그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하얀 강아지는 발라드의 뺨에 코를 문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숨 돌릴 새는 주어지지 않았다. 눈부신 하얀 빛이 그들을 비췄다.

병사

꼼짝 마! 손 들어!

저 목소리를 듣건대 아직 저들과 거리가 조금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이대로 순순히 붙잡힐 마음은 없다.

발라드는 빌을 옆구리에 끼고, 다른 팔로는 깡통을 단단히 붙잡고서, 두 다리를 움직여 다시 정신 없이 앞으로 달려갔다.

타앙!

총성이 깊은 밤 숲속의 정적을 깼다.

몸이 꿰뚫는 무쇠 총탄이 발라드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환상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그토록 궁리했던 그였지만, 결국 한 가지 오산을 하고 말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냉혈한이 될 수 있는지, 이렇게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그 지저분한 늙은이는 딸의 시신마저 토막낼 수 있는 작자. 그러니 아들의 목숨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수 있다.

점점 가까워지는 병사의 발소리를 들으며, 땅에 고꾸라진 발라드는 의식이 피외 함께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눈이 감기기 전까지, 그의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오버슈타인 가 저택의 서재.

약 30분 전.

오버슈타인

그러니까, 루니샤의 뇌 절편은 하나도 빠짐없어야 한다는 건가?

내가 알기로는, 5분의 1 정도는 없어도 실험에 큰 영향을 끼치진 않을 텐데.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보게, 라플라스.

통신 너머의 라플라스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아주 무심하게 반응했다.

라플라스

각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옳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험에 대입하려면 자세히 따져봐야죠.

발라드가 훔쳐 달아난 절편은 뇌 조직에서도 전교련피질부터 측두엽 내측까지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이는 전두엽에서 해마의 기억 부호화 회로를 관통하는 부분으로, 인간의 뇌에서 인지 및 사고 능력을 담당하는 부위죠.

이 부분이 없으면 앞으로의 실험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버슈타인

편히 말하게.

라플라스

발라드는 뇌 절편만 훔친 게 아닙니다. 10분 내로 외과 수술 환경을 구성할 수 있는 자동화 장치도 가져갔습니다.

본디 군의관을 위해 개발된 물건으로, 아직 프로토타입이지만 최소한의 수술 환경은 충족시킬 수 있죠.

오버슈타인

그것들을 도둑맞지 않았다면, 우리의 계획을 완수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라플라스

사흘이면 됩니다.

오버슈타인

......

오버슈타인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장교에게 입을 열었다.

오버슈타인

목표의 회수를 우선해라.

금지령을 해제하고, 실탄 사용을 허가한다.

대령

예.

외람되오나 각하, "목표"의 회수 방침은...

오버슈타인

요즘에서야 깨달았다만, 내 신경쓰지도 않았던 아들놈이 아주 의외의 재능을 가졌더군.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나도 녀석만한 나이쯤에 말썽을 조금 피운 적 있으니.

녀석이 이 고비를 넘는다면, 흔쾌히 내 후계자로 길들이려 하네.

못 한다면 아들은 딸만 못하단 뜻이겠지.

대령

그 말씀은...?

오버슈타인

놈의 운명은 놈이 스스로 정하도록 해라.

자네에겐 12시간만 줄 테니, 지체 말도록.

대령

예.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숲 속의 오두막.

어떤, 기나긴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발라드

누나!

발라드가 몸부림치며 깨어났다.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병실의 천장도, 철근 콘크리트로 다져진 감옥도 아니었다.

통나무를 쌓아 만든 오두막. 그는 그 안에 피워진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정신을 차렸다.

말티즈도 주인이 깨어난 것을 눈치채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애완견이 으레 그리하듯 달려들어 축축한 혓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발라드

빌...

어라...? 나, 살아있네?

어떻게 된 거지?

??

내려와 솜뭉치야~

네 주인님 방금 깨어났으니까, 함부로 만지면 안 돼~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가 절로 돌려졌다.

그 방울 같은 목소리의 주인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발라드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발라드

누... 누나...?

헛것은 아닌지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의 균형을 잡는 것조차 깜빡할 만큼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누나를 닮은 소녀

엑?

"누나"도 그의 행동에 놀라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발라드는 허공에 헛손질을 하며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발라드는 30분이나 들여 여러 번 살펴본 뒤에야 가까스로 이 유전학이 던지는 사소한 농담을 받아들였다.

이 소녀의 이름은 "니타". 누나를 조금 닮았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발라드

...실례했어, 미안해.

상황을 정리하고, 발라드는 오두막의 내부를 살펴봤다. 자신이 가져온 물건들은 전부 한쪽에 멀쩡하게 놓여 있었다.

자동화 수술 환경 구성 키트도 침대 옆에 얌전히 놓여, 누가 열어본 흔적도 없었다.

뇌 절편도 장치 위에 있었다.

니타

괜찮아. 어깨에 총을 맞고 넘어질 때 머리를 부딪혔으니, 사람 얼굴을 헷갈릴 수도 있지.

니타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냈다.

발라드

그러니까... 네가 날 구한 거야?

눈앞의 소녀는 따끈한 수프 한 그릇을 건넸다. 발라드는 손을 내밀다 총상을 입은 어깨를 움직이는 바람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이때, 그는 자신의 머리와 어깨에 붕대가 꼼꼼하게 감긴 것을 알아챘다.

니타

엄청 심하게 다쳤길래 데리고 왔어.

이 솜뭉치 녀석이 널 건드리지도 못하게 해서 고생했다구~

니타가 빌을 안아 들었다. 벌써 무척 친해진 모양이었다.

발라드

...구해 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병사들을 어떻게 따돌린 거야?

니타

후후~!

우리 가족은 대대로 이 숲에서 사냥꾼 일을 하면서 살아왔거든! 이 주변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어.

네가 말한 그 사람들은 숲을 몇 바퀴 뺑뺑이 돌아서 금방 따돌렸지~

발라드

이 주변은 오염이 꽤 심한 편인데... 사냥꾼을 포함한 대부분이 다 이주한 걸로 알고.

니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근데 난 방사능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 편인 거 같아서, 그냥 계속 여기서 살고 있어.

발라드

...그럼, 난 어떻게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니타

여자애라고 얕봤다간 큰코다친다구!

멧돼지도 혼자 들고 올 수 있는데, 너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발라드

내가 범죄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니타

에~이, 너 같은 꼬맹이가 무슨 범죄자야?

그리고, 네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 해도, 날 이길 수 있겠어?

발라드

......

니타

그건 그렇고, 너 정말 한눈에 딱 엄청 지쳐 보이더라.

꼬맹이면서 그렇게 인상 잔뜩 찌푸리고 있고, 기절했는데도 몸이 엄청 굳었고.

잘 보니까 다크 서클도 엄청 진하고...

옷차림이랑 말투를 봐선 잘 사는 집 애인 거 같은데, 무슨 일로 그렇게 고생을 했어?

아직 학교 다닐 나이 아니야?

발라드

......

루니샤?

빌, 저길 봐.

누나의 목소리에, 빌은 방에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방송 자막

<color=#00CCFF>――르트 화이트존의 삼림지대에서 특경대가 현재 도주한 밀수범을 체포하기 위해 수색 작전 중입니다.</color>

<color=#00CCFF>범인을 목격하신 시민께서는 다음 연락처로 제보 바랍니다. ...</color>

화면 속에선 숲 주변을 서치라이트로 훑고 지나가는 군용 헬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춰졌다. 실상을 모르는 사람에겐 정말로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잡으려는 작전처럼 보일 것이었다.

발라드

......

니타

세상에, 무서워라... 저 사람들이 아까 그 사람들이야?

루니샤?

너도 아버지를 알잖아. 옹고집에,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인간.

숨어봤자 자신의 손바닥 안이라고 너에게 알리는 거야.

발라드

...그럴지도.

발라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누구를 향한 건지 의문스러울 만큼 가볍게 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궁리했다.

잠시 후,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의 숲 속 오두막.

오두막의 주인 니타는 뜨개질로 시간을 떼웠고, 빌은 그런 그녀 옆에 기대어 푹 잠들었다.

루니샤?

그는 우릴 놓아 주지 않을 거야, 빌.

여기에 숨어있어 봤자, 결국엔 들켜.

...그는 너의 도전을 개의치 않아. 네가 그의 살을 한 점 물어뜯는다면 오히려 칭찬할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아무것도 안 한다면 네가 죽더라도 신경쓰지 않을 거야.

누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발라드

......

루니샤?

빌, 너도 이젠 알겠지?

우리가 이 궁지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을.

루니샤는 발라드가 품에 안은 뇌 절편이 담긴 용기를 가리키고, 모닥불 쪽을 가리켰다.

발라드

...쟤, 누나랑 엄청 닮았어.

루니샤?

그렇다면 분명 쟤가 어울리겠지.

발라드

......

루니샤?

알잖아 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네가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그에게 증명해야, 너에게 이용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지금의 너로서는 그를 이길 수 없어. 그의 자만심을 이용해야 해. 그의 살을 조금씩 파먹는 거야.

...그래서, 나의 복수를 해야지.

발라드

......

루니샤?

오버슈타인의 사람들은 결국 여길 찾아내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물론이고 나도 화를 피할 수 없어.

저들이 나를 두 번 죽이는 꼴을, 그냥 두고볼 거야?

발라드

......

아니.

등 뒤의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며, 발라드에게 남은 마지막 이성까지 모조리 갉아먹었다.

발라드

절대 안 되지.

그는 침대 옆에 놓인 검은 상자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

상자는 곧바로 안에서부터 정밀한 기계음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발라드의 마음 속 마지막 양심은 무뎌져 끝내 사라졌다.

“My mother has killed me,

My father is eating me,

My brothers and sisters sit under the table,

Picking up my bones,

And they bury them

under the cold marble stones♪”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숲 속의 오두막.

콰앙!

군 병사

발라드 폰 오버슈타인! 너는 포위――헉?!

군 병사

제기랄... 우읍, 우웨엑...!

발라드

...딱 좋은 타이밍이야.

발라드가 뒤로 돌아, 창백하게 질려 총을 드는 것조차 잊어버린 군인 2명을 맞이했다.

발라드

어서 와, 어서 와... 아, 지금 현장 화면 보고 계시죠, 아버지?

저녁 식사 시간일 텐데 비위 상하게 해서 죄송해요.

잘 훈련받은 병사들도 눈앞의 참상에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벽, 바닥, 복도, 그리고 통로까지...

흩뿌려진 피와 널브러진 팔다리가 마치 거친 캔버스 위에 그려진 난잡한 낙서 같았다.

그리고 이 지옥 같은 광경의 한가운데에는 순진무구함을 넘어 태연하게 미소짓고 있는 남자아이가, 흡사 악마의 화신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저 끔찍한 미소에 더해 앞머리가 피로 흥건하니, 몹시 기괴한 몰골이었다.

군 병사

꼬, 꼼짝 마! 발라드, 널 체포하겠다!

병사는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발라드는 시꺼먼 총구를 마주했는데도 여전히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천천히 머리 위로 들었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때, 방에 드리운 그늘 속에서 다른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끌며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 같아 보였다.

군 병사

누구냐! 너도 꼼짝 마! 손 들어!

니타?

...적대적 위협을 확인.

병사가 총구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는 건물 내로 진입 전에 사전 조사 보고를 들었다. "목표" 외에, 이곳에 거주하는 사냥꾼이 있다고.

비록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잠깐 당황했지만, 입수한 정보와 손에 쥔 무기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바로 총구를 돌렸다. 그런데 돌연 목에서 단맛이 느껴져 무심코 고개를 숙였고, 가슴에 뻥 뚫린 큼지막한 구멍을 보았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목은 깔끔하게 잘려 나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병사는 순식간에 쓰러졌다.

발라드

허락도 없이 함부로 사람을 물면 안 되지.

발라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턱짓하며 가볍게 손을 튕겼다.

"괴물"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발라드

이 "선물"은 마음에 드시나요? 아버지.

선두에서 총구를 내리지 않는 군인의 얼굴이 분노로 뒤틀려 가는 꼴을, 발라드는 아주 태연하게 지켜봤다.

대령

...정말입니까?

대령

......

대령

...알겠습니다.

그는 발라드와 그의 앞에 선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발라드에게 오버슈타인의 화상 통신을 들이밀었다.

오버슈타인

그건 뭐지?

발라드

"니토"입니다.

보신 대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도구죠.

오버슈타인

...네 선생님은 콧방귀를 뀌겠지만, 나는 인정해 주마.

그래도 구체적인 답변은 들어야겠어.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발라드

아버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요.

저는 그냥, 누나의 유산을 제가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얼간이나 쓰레기가 건드리게 할 바에야, 제가 다루는 게 훨씬 낫잖아요?

봐요, 전 이런 상황에서도 혼자서 실험체를 하나 만들어냈어요.

아버지가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물론 충분한 자원도 함께 말이죠...

아버지가 마음껏 지배할 제국을 만들어 드릴게요.

오버슈타인

...재밌구나, 발라드.

마치 네 선생님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발라드

라플라스 선생님의 능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죠.

하지만, 아버지의 아들은 저예요. 오직 저만이 진심으로 아버지를 위할 수 있어요.

오버슈타인

...네 실험체와 뇌 절편 전부 가지고 돌아와라.

한번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구나, 좀 더 적당한 곳에서 말이다.

발라드

...알겠습니다, 아버지.

오버슈타인

깨끗이 청소하는 거 잊지 말고.

이젠 어린애도 아니잖느냐.

삑.

통신이 끊어졌다.

발라드가 니토에게 턱짓했다.

발라드

들었지?

깨끗이 청소해.

니토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령

뭣――

발라드에게서 가장 가까운 대령의 목이 제일 먼저 날아갔고, 발라드는 그의 손에서 통신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실에서 메아리치는 총성과 일방적인 학살을 뒤로하고서.

윌리엄

......

루니샤?

왜 그래, 빌?

윌리엄

...아무것도 아니야. 옛날 일이 좀 떠올라서.

오랜 시간 면밀히 계획을 실행하면서, 그는 수많은 시제품을 "사용"해봤다.

그중 윌리엄이 성질을 참을 만했던 것은 몇 되지 않았다. 10876호 면역체가 바로 그런 예외 사례였다.

그녀도 그때 그 실험체처럼, 그의 누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윌리엄

본 마을 상황은 어때?

하얀 니토

전부 아버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진행 중입니다. 오늘자 기록 일지도 전송하였으니, 확인해 주십시오.

다만, 계획을 진행하려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10876호는 아직 미성숙합니다.

윌리엄

...알았어.

윌리엄은 니토가 전송한 일지를 받고 각종 수치를 상세히 체크했다.

오늘의 데이터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어느 극비 데이터를 꺼내, 그것과 하나씩 비교해 보았다.

윌리엄

면역력, 인격 데이터, 정신 상태...

...훗, 쓰레기긴 해도, 그나마 제일 나은 쓰레기네.

10876호의 데이터를 본체의 데이터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깐깐한 그라도 곡선 차트가 거의 일치하다시피 중첩되는 것을 보고 10876호에게 더 바랄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마 그랬기에 그녀의 각종 행위를 용인했을 것이다. 간지럽지도 않은 행동쯤,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쓰레기에겐 과분한 대우였다.

루니샤

데이터가 뛰어나다고 네가 이렇게까지 할 리 없어.

빌,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다 알아.

윌리엄

......

예리하네, 누나.

귓가에 다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도취될 것만 같았다.

윌리엄

데이터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쓰레기 중에서 우수할 뿐이지.

쓰레기는 결국 쓰레기에 불과해.

하지만...

윌리엄이 뜸을 들이며 방의 어느 한구석을 바라봤다. 거기엔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루니샤가 있었다.

손을 뻗었지만, 실체가 만져지지는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통과해 허공을 가로지를 뿐, 아무런 실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그림만으로도 그에게는 무척 소중했다.

윌리엄

사랑하는 루니샤 누나랑 닮은 구석이 있어서려나.

계획의 일부로서, 저 쓰레기는 가치가 있어.

10876호는 틀림없이 누나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해 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누나의 동생은 이제 어른이 돼서, 누나를 지켜 줄 수 있게 됐어...

루니샤의 모습이 잠깐 깜빡이더니, 어느래 윌리엄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윌리엄은 지그시 눈을 감고, 누나의 향기를 잔뜩 들이마시며 뇌까지 떨리는 기분을 만끽했다.

잠시 후, 루니샤의 모습이 서서히 옅어져 이윽고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윌리엄은 그제서야 눈을 뜨고 벌벌 떠는 니토를 바라봤다.

윌리엄

...왜, 뭐라도 봤어?

하얀 니토

아, 아...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님...

윌리엄

흥... 그렇겠지.

쓰레기는 시야도 좁아서 쓰레기지.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그 소리에 하얀 니토는 목숨이라는 실이 끊어진 것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쓰레기"의 최후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윌리엄은 벌침 시스템을 열어 실시간 감시 시스템에 접속했다.

감시 화면에 나타난 것은 본 마을이었다.

부자1

성녀님! 나랑 사진 한 장 찍자!

부자2

성녀 아가씨, 내 몸에 사인 좀 해 주오! 어디든지 좋아!

10876호

사, 사람이 너무 많아요...! 부탁이에요, 그만 나가게 해 주세요...!

윌리엄

...구역질나네.

10876호의 오늘 상태를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 하필이면 이딴 역겨운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윌리엄은 질색하며 바로 화면을 꺼버렸다.

윌리엄

촌스럽고, 유치하고, 치졸한 주제에 운만 좋은 쓰레기들.

권력을 손에 쥔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바닥 없는 번식욕뿐인가?

두뇌피질이 퇴화한 돼지들 같으니...

그렇게 경멸하며, 그는 어제자 녹화 영상을 틀었다.

10876호

......

화면 중심의 10876호는 말없이 난민 환자를 진단했다.

그리고 환자의 상처에 신비한 문양을 그린 후, 일련의 의식을 치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민

으음... 내가, 왜 여기에...?

10876호

이제 걱정 마세요, 잠시 쉬면 돼요.

혼절했다 깨어나 어리둥절해하는 난민을 뒤로하고, 하얀 옷차림의 성녀는 떠나려 했다.

난민들

성녀님! 성녀님! 신께 감사드립니다!

이리야

주님의 연민으로 성녀께서 강림하였도다!

윌리엄

...무분별한 자비는 재해나 다름없는데.

10876호, 내가 그딴 쓰레기들한테 낭비하라고 너한테 그런 능력을 준 줄 알아?

아니면, 진심으로 쓰레기를 사람이랑 같은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쓰레기가 좋으면, 쓰레기들이랑 같이 죽어버려.

하지만 화면을 일시정지한 윌리엄은 미간이 지끈거렸다.

10876호가 성격까지 누나와 몹시 흡사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루니샤

빌, 사랑하는 내 동생.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거야. 그곳의 생명들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어.

그곳이야말로, 약속의 땅.

지복의 정경이 펼쳐진 곳.

주께서 내리신 거룩한 선물.

새로이 탄생한 지고지상의, 만물을 위한 순수한 낙원.

윌리엄

아니야, 누나... 아무나 낙원에 갈 자격이 있는 건 아니야...

어릴 적의 우리는 너무나도 멍청해서, 세상 모두가 구원받을 존재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잊어버린 거지, 이 세상엔 시꺼먼 구렁텅이 속에서 죽어 마땅한 쓰레기가 넘쳐난다는 걸.

화면 속의 10876호와 그녀를 둘러싼 난민들을 다시 흘겨본 그는 구역질이 났다.

윌리엄

낙원에는... 우리만 있으면 돼.

그때, 갑자기 실험실의 문이 열리더니 느리고 무거운, 네 발로 땅을 기는 소리가 들어왔다.

윌리엄

아아, 너구나... 빌.

늙어서 더 하얗게 보이는 소형견이 절뚝이며, 낑낑대며 다가왔다.

15년 전 그와 누나가 그들의 손으로 구한 바로 그 말티즈였다.

그의 털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 윤기를 잃었고, 작지만 튼튼했던 네 다리는 하나가 이미 완전히 위축된 상태였다.

윌리엄은 그를 안아 들고 가여워했다.

윌리엄

아아, 우리 귀염둥이, 늙어버린 꼴 좀 봐. 이래서는 진짜로 같이 누나를 다시 만날 수가 없잖아...

윌리엄의 말에 대답하듯, 그와 같은 이름인 말티즈가 그의 품속에서 점점 허약해지며 숨이 가빠졌다.

곧이어 심장의 박동이 느려지고, 호흡도 날숨만 나올 뿐 들숨을 쉬지 못했다.

윌리엄

네 잘못이 아니야. 15년은 소형견의 수명 한계니까, 정말 노력한 거지.

그리고 윌리엄은 고개를 돌려, 벌침 시스템의 화면을 바라봤다.

때마침 10876호가 난민들에게 세례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윌리엄

10876호... 신세계로 갈 자격이 있는 게 누구인지, 누가 보다 가치 있는 존재인지, 내가 가르쳐 주겠어...

너는 죽지 않아. 누나의 연민을 받은 피조물로서, 너는 신세계로 가는 방주의 표가 주어질 거야...

다행인 줄 알라고, 넌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운이 좋은 거니까.

이윽고 말티즈가 완전히 숨을 거뒀다. 하지만 윌리엄은 신경쓰지 않았다. 슬퍼하는 대신, 조심스레 털을 깎고 수술대 위에 반듯이 눕혀 고정했다.

그 옆의 다른 수술대에는 방금 죽은 하얀 니토가 누워 있었다.

윌리엄

아까 얌전히 뇌사만 시키길 잘했다니까.

심폐 기능까지 정지했으면 귀찮았겠어...

윌리엄은 수술도구를 가져와 7번 칼자루와 10번 칼날을 조립했다.

그의 손가락의 연장선이 된 칼날을 뻗어, 운명이 정반대로 갈린 두 심장을 향했다.

윌리엄

우리 귀염둥이, 내가 집도해서 다행인 줄 알아... 대다수는 이런 행운을 못 누려...

윌리엄

이 수술이 끝나면, 넌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거야... 길어진 수명으로, 진짜 주인이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걸 기다릴 수 있어...

먼저, 말티즈의 심장이 적출됐다. 윌리엄은 그걸 받쳐들고, 입을 맞추고, 탐욕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그의 코끝은 움찔거렸지만, 코 안을 가득 채운 냄새는 피비린내가 아니었다.

재스민의 향기였다.

윌리엄

걱정 마, 꼬맹아... 내 임무가 바로 네가 그리워하는 주인을 다시 나타나게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 전에 네가 먼저 깨어나야지?

말티즈

끄으응...

얼마 안 지나 말티즈의 신음이 수술실 안에 다시 울려 퍼졌다.

윌리엄

그래... 바로 이 소리야...

15년 전, 누나가 너의 기도를 절개할 때도 바로 이런 소리를 냈었지...

윌리엄

아직 모자라, 우리 귀염둥이... 너는, 이것보다 훨씬 좋은――

말티즈

끼이잉!!

도취된 윌리엄의 절개와 봉합이 반복됐다. 마치, 수술이 정밀한 의료 행위가 아니라 손끝과 칼날로 연주되는 생명의 왈츠인 것처럼.

수술대의 말티즈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윌리엄은 자신의 "예술"에 완전히 심취해,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수술이 끝났다. 말티즈는 깨어나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윌리엄은 손을 씻은 후 병상 앞에 서서, 자신의 피조물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은 강아지를 향한 듯하면서도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윌리엄

사랑하는 누나, 드디어 내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됐어...

다음은... 너야...

삐삐삐!

방의 정적을 깨는 다급한 알림음이 혼잣말하던 윌리엄의 주의를 돌렸다.

난데없는 방해에 인상을 찌푸리고, 윌리엄은 설비를 조작해 메시지를 확인했다.

윌리엄

...신세계로 가기 전에, 구세계의 해충은 역시 한 번 구제할 필요가 있겠어.

윌리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실험실을 나섰다.

그가 켜둔 채로 떠난 화면에는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5분 전, 한 무장한 인형 부대가 본 마을에 침입했다. 그 부대를 이끄는 자는 인간 지휘관. 그가 10876호를 데려갔다.

니토가 전송한 정보에는 흐릿한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화질도 나쁘고 윌리엄이 "해충"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그는 그 특별한 해충을 알아봤다.

10876호가 쓰레기 중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듯이, 저 그리폰의 지휘관은 수많은 해충들 중에서 그에게 가장 많은 말썽을 일으킨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