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AL FOLKBLUES(하편)」
전술적 승리가 전략상 변수를 해결하진 못한다.
마흐리안의 존재 덕분에, 안젤리아 씨는 우리와 거의 항상 함께 행동했다.
마흐리안의 기억 속에서 엿본 음모에 수백만 베를린 시민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안젤리아 씨도 그걸 알면서 무시할 리 없었다.
다만, 안젤리아 씨도 따로 조사하는 단서가 있었다. 함께 베를린 곳곳에 숨겨진 폭탄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닥터 그레이"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보가 그녀임을 감안해도 너무 과격했다. 나도 차마 두고볼 수가 없어서, 조급한 마음으로 움직이다간 큰일날 것이라고 충고했다. 마흐리안 덕분에 패러데우스의 꼬리를 우리 손에 쥐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놈들이 먼저 튀어나올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일은 우리의 예상대로 진행되어, 마침내 그 익숙한 양옥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도 보았다.
댄들라이가 그걸 보며 한탄을 늘어놓고 있을 때, 닥터 그레이... 아니, 패러데우스의 니토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와 양옥을 포위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힘을 합쳐 무사히 이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베를린 시가지, 통일절 기념 연회가 열리는 호텔의 바깥.
후으읍...
숨을 크게 들이마셔 봐도 여전히 긴장감이 가라앉질 않았다.
양복 넥타이가 너무 꽉 조여서 숨쉬기도 어려운 탓도 있었다.
덜컹.
내가 이 어색한 옷차림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트럭의 화물칸이 열리면서 익숙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여긴 제가 지켜보면 되는데, 같이 안 들어가십니까?
...내가 변장해도 웨이트리스 같아 보이겠냐.
이런 일은 젊은 녀석들한테 맡겨야지.
아니, 댁도 아직 젊거든요? 무슨 할망구도 아니고...
이게 뒤질라고――
선배님들, 싸우시면 안 돼요.
......저기, 카린은?
티격대는 저들 사이에서 나와 함께 잠입할 파트너가 보이지 않자, 조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후훗, 부끄러울 것 없어요.
자아, 어서 지휘관님께 보여드려요.
잠깐만요, 마음의 준비가... 꺄아악 잡아당기지 말라니까요!
아, 알아서 걸을게요! 그만!
화물칸 더 안쪽에서 가벼운 웃음소리와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흐리안이 차에서 내렸다.
그 뒤로 쭈뼛거리는 사람을 데리고 나오면서.
보세요,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으으... 마흐리안 씨이이...
부끄럽다고 했는데에...
마흐리안이 살짝 손을 당기자, 얼굴이 홍당무인 소녀가 그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몸매에 딱 맞춰 재단된 흑백 메이드복을 입고, 상징적인 주황빛 장발에 포인트를 주는 프릴이 붙은 깜찍한 헤어밴드를 쓴 그녀.
항상 씩씩하다 못해 활력이 넘치던 소녀가, 지금은 꼼지락꼼지락 치맛자락을 주무르고,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간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뇌가 정지한 것 같았다.
항상 곁에서 바쁘게 일하는 카린이, 이런 옷차림을 하니... 이렇게나 달라 보일 줄이야.
지... 지휘관니임...
웃지 마세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도 마세요!
아... 아니, 안 웃었어.
그냥...
예쁘다.
간신히 어설픈 몇 마디 쥐어짜낸 것만으로도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잘 어울려.
......네?
카리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허리를 쭉 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구겨진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시간 없어 이것들아, 파티에 놀러 왔냐? 우린 잠입 조사하러 온 거라고.
준비 다 됐으면 빨랑 들어가.
안젤리아가 눈치도 없이 이 묘한 분위기를 깨뜨려 버렸다. 그리곤 우리에겐 퉁명스런 눈초리를, 라이트에겐 손에 쥔 단말기를 툭 던졌다.
뭘 해야 하는진 안 까먹었지?
...물론이죠.
루돌프 폰 오버슈타인에게 접근해 조사하고, 특히 그와 패러데우스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다.
그 양옥은 그놈 소유야, 가문 대대로 내려온 집이지. 놈들 사이에 관계가 없을 리가 없어.
신경도 안 쓰시겠지만, 제가 보기엔 좀 더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는데 말이죠... 댁들이 그 양옥을 헤집고 나온 뒤로, 슈타지 쪽에서 지원이 완전 뚝 끊어졌다고요.
이 감시 차량도 창고에 처박혀서 아주 낡을 대로 낡은 건데, 설마 이걸 다시 몰고 나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패러데우스의 실체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다신 없을 기회야.
어쩌면 놈들의 심장을 찌를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절대 놓쳐선 안 돼.
맞아요, 훈작사가 더는 개입할 필요 없다고 그토록 신신당부했는데도 이러고 있잖아요.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으니, 이렇게 된 거 수확이라도 확실하게 거둬야죠.
그 양반 이야긴 꺼내지도 마. 분명히 다른 꿍꿍이속이 있어.
그런데, 용케도 지휘관님과 카리나 씨를 연회 스태프로 끼워넣으셨네요.
다 내가 시스템을 해킹해서 데이터를 수정한 덕분이야. 슈타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
통일절 기념식이 매우 중요한 행사긴 해도, 슈타지의 권한으로 연회 스태프 두 명을 추가하는 것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상하리만치 저항이 거셌어요.
누가 훼방을 놓은 거겠죠. 저도 하마터면 해킹을 들킬 뻔했다니까요.
전자전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 상대는 처음이에요. 어쩌면 저 바로 다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재밌는 것이... 마치, 제가 침투할 줄 미리 알고서 대기하고 있던 것 같았어요.
......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기나 해.
항상 통신 상태 주의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공유해. 우리도 언제든지 지원할 테니까.
예.
로빈.
응?
돌아오시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가고 싶은 곳이라니, 어딘데?
...저에게, 무척 중요한――
미안해요 마흐리안 씨, 저희 이만 출발해야 해요!
빨리요 지휘관님, 연회 곧 시작해요!
앗, 잠깐만!
카리나가 등을 떠미는 통에, 나는 미안한 얼굴로 마흐리안에게 웃어 보이곤 함께 호텔로 돌입했다.
...지휘관님 바보.
잠시 후, 호텔 연회장.
하아...
연회가 한창인 가운데, 카리나는 구석에서 지금 이곳에 흔하디 흔한 메이드처럼 가만히 서서 저 건배를 나누는 거물 인사들을 훑어봤다.
불쌍한 마흐리안 씨를 질투하다니... 나도 참 유치하다 진짜.
...아니야, 이게 다 지휘관님 탓이야!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시면 안 당황하고 배겨!?
그리고... 나 예쁘다고 띄워 주시다 말고, 마흐리안 씨한테...
조금 전 지휘관의 그 표정을 다시 떠올리자 마음이 또 들뜨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면서, 치맛자락을 집고 나지막이 흥얼거리며 제자리에서 조금씩 스텝도 밟을 정도로.
...지금 이게 뭐하는 거람.
바보 같이 들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임무에 집중하자, 집중...
이어폰을 톡톡 두드려 잡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카리나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연회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휘황찬란한 연회장. 부드러운 금색 빛이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로부터 은은히 흘러내려, 단정한 옷차림인 내빈들의 미소를 환히 비추었다.
공기 중엔 샴페인과 온갖 진미의 향이 어우러져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완벽하고도 조화로운 풍경을 자아냈다.
이 완벽한 그림 속에서, 우리는 관람자의 눈에 가장 띄지 않을 반점이었다.
카리나가 은빛 쟁반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사뿐사뿐 지나는 모습은, 발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더해져서 정말 우아했다.
얼굴에 흠 잡을 데 없는 미소를 걸고서, 마주치는 손님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동작도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반대편 구역을 맡았다. 팔꿈치에 하얀 냅킨을 걸친 채, 손님들에게 와인을 따라 주거나 비워진 접시를 치웠다.
이따금씩 시선이 테이블 위로 카리나와 교차했지만, 누가 눈치채기도 전에 아무 일도 아닌 듯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빈들의 얼굴을 모조리 확인해 보았지만, 가장 중요한 그 인물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다소 한적한 기둥 뒤에서, 쟁반을 교체하러 온 카리나와 잠시 합류했다.
그쪽은 어때?
없어요... 주연회장, 사이드 홀, 2층의 휴게실 몇 군데까지 서빙하면서 다 살펴봤는데...
오버슈타인이 전혀 보이질 않아요. 그 사람 정말 여기 오는 거 맞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봐 슈타지, 정보 확실한 거 맞아?
...이럴 리가 없어. 오늘 밤의 주역은 그 인간이야, 곧 연설할 차례라고.
왜 아직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
혹시 빠뜨린 곳이 있는 건 아닐까요?
...이거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우리 모두 딜레마에 빠져, 이제 어떡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저기... 안녕하세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양복 차림의 한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긴장한 자세에, 도움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의 가슴팍에 좀 특이하면서도 눈에 익은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리폰?
꼬마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길을 잃었어요.
나와 잠깐 시선을 교환한 카리나가 나서서 능숙하게 대처했다.
괜찮아요, 누나가 안내해 줄게요~
상냥하게 웃으며, 카리나는 소년의 손을 잡고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모퉁이 뒤로 사라지는 그들을 지켜본 뒤, 나는 다시 임무에 집중했다.
안젤리아 씨, 들리십니까?
목표가 아직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변수가 발생한 모양인데, 어떡할까요?
...일단 대기해.
오버슈타인은 신중한 놈이야. 우리가 움직인 걸 눈치챘을 수도 있어.
이런 때일수록 흔들려선 안 돼. 너흰――?
갑자기 통신 너머의 목소리가 멈추더니, 대신 손이 황급히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이 심상찮음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안젤리아 씨?
젠장...!
야! 임무는 됐으니까 당장 거기서 나와! 빨리!
안젤리아 씨의 목소리가 돌연 몹시 날카롭고 다급해졌다.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그녀의 패닉에 빠진 목소리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죠?!
방금 베를린 대공망에 경보가 울렸어! 엄청난 수의 미확인 비행체가 도시로 고속 접근 중이야! 목표는——
뚜우우우우우우우————————
안젤리아 씨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다급한 외침은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삼켜졌다.
몸에 흐르는 혈액이 모조리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척추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오한이 치솟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내가 취한 유일한 반응은...
카린!
나는 곧장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바닥을 박차고 나아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 메이드복을 입은 뒷모습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부리나케 내지른 첫 걸음조차 바닥에 닿지 못했다.
콰아아앙!!!!!
새하얀 섬광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지면이 요동치고,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그 무엇도 막지 못할 충격파가 연회장의 발코니로부터 들이닥쳤다. 유리, 테이블, 패닉에 빠진 사람들, "물체"라면 가릴 것 없이 전부 종이쪼가리마냥 흩날리고, 찢어졌다.
내 몸뚱이도 허공에 내동댕이쳐져서, 눈앞의 천지가 몇 번이고 뒤집히는 찰나에 어둠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어둠.
끝없고, 차가움 어둠.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동시에 심해로 빠진 것처럼 아무런 무게감도 들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죽은 걸까?
......관님... ...휘관님...!
누굴까?
멀리 흐릿하게 들리지만, 왠지 익숙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오는 울먹임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려 하면서, 의식의 파편이 하나둘씩 다시 모여 맞춰졌다.
이윽고, 어둠이 흔들리는 주황빛으로 바뀌었다.
지휘관님! 정신이 들어요?! 다행이다...! 다행이다아...
몽롱한 시야가 점차 아리따운 얼굴로 선명해졌다.
카린이 울고 있었다.
카린...
입을 열었더니 나온 목소리가 나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날뛰며, 모든 것을 종말의 색으로 물둘이는 저 불길은...
정신 차리셨죠!? 얼른 탈출해요, 제가 꺼내드릴게요!
카리나는 내가 의식이 돌아와서 한 줄기 희망을 되찾은 듯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훔치고, 온힘을 다해 나를 잔해 속에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힘을 써도 나의 하반신이 꿈쩍하지 않았다.
치밀어오른 격통에 정신이 번쩍 뜨이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끊어진 대들보가 내 두 다리를 깔아뭉갰다.
...어서 가, 카린.
난 됐어. 여기서 못 움직여.
아뇨! 꺼내드릴 거예요! 제가! 제가!!
카리나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무거운 철근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통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데 힘 쓰지 말고.
잘 들어, 카린. 빨리 여기서 도망쳐. 최대한 멀리――
싫어요! 지휘관님 혼자 안 두고 가요! 절대로!
멍청한 짓 하지 마!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죽는다고!
이건 명령이야! 당장 가! 빨리!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분노, 두려움, 절망이 한꺼번에 뒤섞여서,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적어도 카리나만큼은 살리고 싶었다. 이런 데서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그녀가 목이 멘 소리로 대답했다.
싫다고요...
싫어요!
헛수고를 멈추고, 카리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이번엔 반박하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몸을 숙여,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없이 슬프면서도 한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내게 웃어 보였다.
이번엔... 명령, 안 들을 거예요.
......카린...
그 미소에 내 분노도, 호통도, 절박함도 전부 목에 걸려, 힘없는 탄식으로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카리나는 여기서 혼자 떠나지 않을 것이다.
슬픔과 무력함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따스한 난류가 내 심장을 천천히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간 고집불통이야.
그녀의 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 주려고, 어떻게든 손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힘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불바다가 우리를 에워쌌다. 마치 온 세상이 이 순간만을 위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지휘관님... 저랑, 같이... 그린존도, 옐로우존도, 어디라도 상관 없으니까...
...언제나, 지휘관님 곁에 있게 해 주실래요...?
......
입 안에 고인 피를 삼키니, 목구멍이 달궈진 바늘이 걸린 것처럼 아팠다.
응... 너에게, 평범한... 행복한 인생을 줄게...
그리폰의 지휘관과 보급관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함께하는... 평범한 두 사람으로...
눈물이 그녀의 눈동자를 흐렸지만, 입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바보... 진짜 바보...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하냐고요...
카리나는 몸을 숙여, 자신의 이마를 나의 이마에 맞댔다.
그래도... 고마워요...
지휘관님... 저 기뻐요...
저 위로부터 건물이 붕괴하는 소음이 내려오고, 더 많은 파편과 불똥이 우리 주변으로 떨어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미안해...
괜찮아요...
적어도... 이제, 당신은 제 거잖아요... 그쵸?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손에 더 힘을 주어, 내 손을 움켜쥐었다.
열 손가락을 교차해, 우리의 영혼을 하나로 엮으려는 것처럼.
주위의 불빛이 점점 더 밝아지고, 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더없이 따뜻했고, 웃는 얼굴도 더없이 선명했다.
주무세요...
이번엔... 다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쿠르릉——
대들보도 잃은 천장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맹렬한 화염과 자욱한 연기를 흩뿌리며 무너져 내렸다.
시야가 다시 어둠으로 뒤덮이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 보인 것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미소였다.
............
【BAD END 02】
이 가능성은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네요. 어쩔 수 없죠, 나비 효과가 불러올 결과는 원래 오래 지나야만 알 수 있으니까요.
만약 당신의 부관이 병으로 쓰러지지 않고, 함께 독일로 향했다면 어땠을까?
그 결과는 정말 놀라웠어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소녀가, 다른 이들에겐 불가능한 역할을 맡았으니까요
그녀가 있음으로써 안젤리아와의 신뢰 관계가 더욱 두터워지고, 더욱 긴밀한 협력이 가능해졌죠. 당신에게도, 안젤리아에게도, 서로에게 받는 도움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었어요.
한 순간은, 그 가여운 성녀를 정말로 그토록 바라던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모든 일엔 양면성이 있는 법.
당신은 친구를 구한 대신, 정치가들이 심연 속에 몰래 가꾼 시커먼 숲을 파헤칠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어요.
"판도라"가 독일의 심장을 찌르는 사명을 짊어지지도 못했죠.
그 영국인 신사도, 내부에서 이간질할 수단이 없어졌고요.
그 결과, 그들은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죠.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당신과 그녀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어요.
비록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그곳에 있었던 두 분에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정말로 유일무이한 존재였답니다.
전체 대사 보기 (163줄)
마흐리안의 존재 덕분에, 안젤리아 씨는 우리와 거의 항상 함께 행동했다.
마흐리안의 기억 속에서 엿본 음모에 수백만 베를린 시민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안젤리아 씨도 그걸 알면서 무시할 리 없었다.
다만, 안젤리아 씨도 따로 조사하는 단서가 있었다. 함께 베를린 곳곳에 숨겨진 폭탄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닥터 그레이"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보가 그녀임을 감안해도 너무 과격했다. 나도 차마 두고볼 수가 없어서, 조급한 마음으로 움직이다간 큰일날 것이라고 충고했다. 마흐리안 덕분에 패러데우스의 꼬리를 우리 손에 쥐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놈들이 먼저 튀어나올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일은 우리의 예상대로 진행되어, 마침내 그 익숙한 양옥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도 보았다.
댄들라이가 그걸 보며 한탄을 늘어놓고 있을 때, 닥터 그레이... 아니, 패러데우스의 니토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와 양옥을 포위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힘을 합쳐 무사히 이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베를린 시가지, 통일절 기념 연회가 열리는 호텔의 바깥.
후으읍...
숨을 크게 들이마셔 봐도 여전히 긴장감이 가라앉질 않았다.
양복 넥타이가 너무 꽉 조여서 숨쉬기도 어려운 탓도 있었다.
덜컹.
내가 이 어색한 옷차림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트럭의 화물칸이 열리면서 익숙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여긴 제가 지켜보면 되는데, 같이 안 들어가십니까?
...내가 변장해도 웨이트리스 같아 보이겠냐.
이런 일은 젊은 녀석들한테 맡겨야지.
아니, 댁도 아직 젊거든요? 무슨 할망구도 아니고...
이게 뒤질라고――
선배님들, 싸우시면 안 돼요.
......저기, 카린은?
티격대는 저들 사이에서 나와 함께 잠입할 파트너가 보이지 않자, 조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후훗, 부끄러울 것 없어요.
자아, 어서 지휘관님께 보여드려요.
잠깐만요, 마음의 준비가... 꺄아악 잡아당기지 말라니까요!
아, 알아서 걸을게요! 그만!
화물칸 더 안쪽에서 가벼운 웃음소리와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흐리안이 차에서 내렸다.
그 뒤로 쭈뼛거리는 사람을 데리고 나오면서.
보세요,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으으... 마흐리안 씨이이...
부끄럽다고 했는데에...
마흐리안이 살짝 손을 당기자, 얼굴이 홍당무인 소녀가 그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몸매에 딱 맞춰 재단된 흑백 메이드복을 입고, 상징적인 주황빛 장발에 포인트를 주는 프릴이 붙은 깜찍한 헤어밴드를 쓴 그녀.
항상 씩씩하다 못해 활력이 넘치던 소녀가, 지금은 꼼지락꼼지락 치맛자락을 주무르고,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간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뇌가 정지한 것 같았다.
항상 곁에서 바쁘게 일하는 카린이, 이런 옷차림을 하니... 이렇게나 달라 보일 줄이야.
지... 지휘관니임...
웃지 마세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도 마세요!
아... 아니, 안 웃었어.
그냥...
예쁘다.
간신히 어설픈 몇 마디 쥐어짜낸 것만으로도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잘 어울려.
......네?
카리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허리를 쭉 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구겨진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시간 없어 이것들아, 파티에 놀러 왔냐? 우린 잠입 조사하러 온 거라고.
준비 다 됐으면 빨랑 들어가.
안젤리아가 눈치도 없이 이 묘한 분위기를 깨뜨려 버렸다. 그리곤 우리에겐 퉁명스런 눈초리를, 라이트에겐 손에 쥔 단말기를 툭 던졌다.
뭘 해야 하는진 안 까먹었지?
...물론이죠.
루돌프 폰 오버슈타인에게 접근해 조사하고, 특히 그와 패러데우스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다.
그 양옥은 그놈 소유야, 가문 대대로 내려온 집이지. 놈들 사이에 관계가 없을 리가 없어.
신경도 안 쓰시겠지만, 제가 보기엔 좀 더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는데 말이죠... 댁들이 그 양옥을 헤집고 나온 뒤로, 슈타지 쪽에서 지원이 완전 뚝 끊어졌다고요.
이 감시 차량도 창고에 처박혀서 아주 낡을 대로 낡은 건데, 설마 이걸 다시 몰고 나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패러데우스의 실체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다신 없을 기회야.
어쩌면 놈들의 심장을 찌를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절대 놓쳐선 안 돼.
맞아요, 훈작사가 더는 개입할 필요 없다고 그토록 신신당부했는데도 이러고 있잖아요.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으니, 이렇게 된 거 수확이라도 확실하게 거둬야죠.
그 양반 이야긴 꺼내지도 마. 분명히 다른 꿍꿍이속이 있어.
그런데, 용케도 지휘관님과 카리나 씨를 연회 스태프로 끼워넣으셨네요.
다 내가 시스템을 해킹해서 데이터를 수정한 덕분이야. 슈타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
통일절 기념식이 매우 중요한 행사긴 해도, 슈타지의 권한으로 연회 스태프 두 명을 추가하는 것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상하리만치 저항이 거셌어요.
누가 훼방을 놓은 거겠죠. 저도 하마터면 해킹을 들킬 뻔했다니까요.
전자전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 상대는 처음이에요. 어쩌면 저 바로 다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재밌는 것이... 마치, 제가 침투할 줄 미리 알고서 대기하고 있던 것 같았어요.
......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기나 해.
항상 통신 상태 주의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공유해. 우리도 언제든지 지원할 테니까.
예.
로빈.
응?
돌아오시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가고 싶은 곳이라니, 어딘데?
...저에게, 무척 중요한――
미안해요 마흐리안 씨, 저희 이만 출발해야 해요!
빨리요 지휘관님, 연회 곧 시작해요!
앗, 잠깐만!
카리나가 등을 떠미는 통에, 나는 미안한 얼굴로 마흐리안에게 웃어 보이곤 함께 호텔로 돌입했다.
<size=25>...지휘관님 바보.</size>
잠시 후, 호텔 연회장.
하아...
연회가 한창인 가운데, 카리나는 구석에서 지금 이곳에 흔하디 흔한 메이드처럼 가만히 서서 저 건배를 나누는 거물 인사들을 훑어봤다.
불쌍한 마흐리안 씨를 질투하다니... 나도 참 유치하다 진짜.
...아니야, 이게 다 지휘관님 탓이야!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시면 안 당황하고 배겨!?
그리고... 나 예쁘다고 띄워 주시다 말고, 마흐리안 씨한테...
조금 전 지휘관의 그 표정을 다시 떠올리자 마음이 또 들뜨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면서, 치맛자락을 집고 나지막이 흥얼거리며 제자리에서 조금씩 스텝도 밟을 정도로.
...지금 이게 뭐하는 거람.
바보 같이 들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임무에 집중하자, 집중...
이어폰을 톡톡 두드려 잡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카리나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연회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휘황찬란한 연회장. 부드러운 금색 빛이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로부터 은은히 흘러내려, 단정한 옷차림인 내빈들의 미소를 환히 비추었다.
공기 중엔 샴페인과 온갖 진미의 향이 어우러져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완벽하고도 조화로운 풍경을 자아냈다.
이 완벽한 그림 속에서, 우리는 관람자의 눈에 가장 띄지 않을 반점이었다.
카리나가 은빛 쟁반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사뿐사뿐 지나는 모습은, 발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더해져서 정말 우아했다.
얼굴에 흠 잡을 데 없는 미소를 걸고서, 마주치는 손님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동작도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반대편 구역을 맡았다. 팔꿈치에 하얀 냅킨을 걸친 채, 손님들에게 와인을 따라 주거나 비워진 접시를 치웠다.
이따금씩 시선이 테이블 위로 카리나와 교차했지만, 누가 눈치채기도 전에 아무 일도 아닌 듯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빈들의 얼굴을 모조리 확인해 보았지만, 가장 중요한 그 인물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다소 한적한 기둥 뒤에서, 쟁반을 교체하러 온 카리나와 잠시 합류했다.
그쪽은 어때?
없어요... 주연회장, 사이드 홀, 2층의 휴게실 몇 군데까지 서빙하면서 다 살펴봤는데...
오버슈타인이 전혀 보이질 않아요. 그 사람 정말 여기 오는 거 맞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봐 슈타지, 정보 확실한 거 맞아?
<color=#00CCFF>...이럴 리가 없어. 오늘 밤의 주역은 그 인간이야, 곧 연설할 차례라고.</color>
<color=#00CCFF>왜 아직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color>
혹시 빠뜨린 곳이 있는 건 아닐까요?
...이거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우리 모두 딜레마에 빠져, 이제 어떡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저기... 안녕하세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양복 차림의 한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긴장한 자세에, 도움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의 가슴팍에 좀 특이하면서도 눈에 익은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리폰?
꼬마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길을 잃었어요.
나와 잠깐 시선을 교환한 카리나가 나서서 능숙하게 대처했다.
괜찮아요, 누나가 안내해 줄게요~
상냥하게 웃으며, 카리나는 소년의 손을 잡고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모퉁이 뒤로 사라지는 그들을 지켜본 뒤, 나는 다시 임무에 집중했다.
안젤리아 씨, 들리십니까?
목표가 아직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변수가 발생한 모양인데, 어떡할까요?
<color=#00CCFF>...일단 대기해.</color>
<color=#00CCFF>오버슈타인은 신중한 놈이야. 우리가 움직인 걸 눈치챘을 수도 있어.</color>
<color=#00CCFF>이런 때일수록 흔들려선 안 돼. 너흰――?</color>
갑자기 통신 너머의 목소리가 멈추더니, 대신 손이 황급히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이 심상찮음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안젤리아 씨?
<color=#00CCFF>젠장...!</color>
<color=#00CCFF><size=50>야! 임무는 됐으니까 당장 거기서 나와! 빨리! </size></color>
안젤리아 씨의 목소리가 돌연 몹시 날카롭고 다급해졌다.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그녀의 패닉에 빠진 목소리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죠?!
<color=#00CCFF>방금 베를린 대공망에 경보가 울렸어! 엄청난 수의 미확인 비행체가 도시로 고속 접근 중이야! 목표는——</color>
뚜우우우우우우우————————
안젤리아 씨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다급한 외침은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삼켜졌다.
몸에 흐르는 혈액이 모조리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척추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오한이 치솟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내가 취한 유일한 반응은...
<size=50>카린!</size>
나는 곧장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바닥을 박차고 나아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 메이드복을 입은 뒷모습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부리나케 내지른 첫 걸음조차 바닥에 닿지 못했다.
콰아아앙!!!!!
새하얀 섬광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지면이 요동치고,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그 무엇도 막지 못할 충격파가 연회장의 발코니로부터 들이닥쳤다. 유리, 테이블, 패닉에 빠진 사람들, "물체"라면 가릴 것 없이 전부 종이쪼가리마냥 흩날리고, 찢어졌다.
내 몸뚱이도 허공에 내동댕이쳐져서, 눈앞의 천지가 몇 번이고 뒤집히는 찰나에 어둠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어둠.
끝없고, 차가움 어둠.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동시에 심해로 빠진 것처럼 아무런 무게감도 들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죽은 걸까?
......관님... ...휘관님...!
누굴까?
멀리 흐릿하게 들리지만, 왠지 익숙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오는 울먹임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려 하면서, 의식의 파편이 하나둘씩 다시 모여 맞춰졌다.
이윽고, 어둠이 흔들리는 주황빛으로 바뀌었다.
지휘관님! 정신이 들어요?! 다행이다...! 다행이다아...
몽롱한 시야가 점차 아리따운 얼굴로 선명해졌다.
카린이 울고 있었다.
카린...
입을 열었더니 나온 목소리가 나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날뛰며, 모든 것을 종말의 색으로 물둘이는 저 불길은...
정신 차리셨죠!? 얼른 탈출해요, 제가 꺼내드릴게요!
카리나는 내가 의식이 돌아와서 한 줄기 희망을 되찾은 듯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훔치고, 온힘을 다해 나를 잔해 속에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힘을 써도 나의 하반신이 꿈쩍하지 않았다.
치밀어오른 격통에 정신이 번쩍 뜨이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끊어진 대들보가 내 두 다리를 깔아뭉갰다.
...어서 가, 카린.
난 됐어. 여기서 못 움직여.
<size=50>아뇨! 꺼내드릴 거예요! 제가! 제가!!</size>
카리나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무거운 철근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통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데 힘 쓰지 말고.
잘 들어, 카린. 빨리 여기서 도망쳐. 최대한 멀리――
<size=50>싫어요! 지휘관님 혼자 안 두고 가요! 절대로!</size>
멍청한 짓 하지 마!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죽는다고!
이건 명령이야! 당장 가! 빨리!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분노, 두려움, 절망이 한꺼번에 뒤섞여서,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적어도 카리나만큼은 살리고 싶었다. 이런 데서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size=25>...싫어요.</size>
그녀가 목이 멘 소리로 대답했다.
싫다고요...
<size=50>싫어요!</size>
헛수고를 멈추고, 카리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이번엔 반박하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몸을 숙여,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없이 슬프면서도 한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내게 웃어 보였다.
이번엔... 명령, 안 들을 거예요.
......카린...
그 미소에 내 분노도, 호통도, 절박함도 전부 목에 걸려, 힘없는 탄식으로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카리나는 여기서 혼자 떠나지 않을 것이다.
슬픔과 무력함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따스한 난류가 내 심장을 천천히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간 고집불통이야.
그녀의 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 주려고, 어떻게든 손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힘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불바다가 우리를 에워쌌다. 마치 온 세상이 이 순간만을 위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지휘관님... 저랑, 같이... 그린존도, 옐로우존도, 어디라도 상관 없으니까...
...언제나, 지휘관님 곁에 있게 해 주실래요...?
......
입 안에 고인 피를 삼키니, 목구멍이 달궈진 바늘이 걸린 것처럼 아팠다.
응... 너에게, 평범한... 행복한 인생을 줄게...
그리폰의 지휘관과 보급관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함께하는... 평범한 두 사람으로...
눈물이 그녀의 눈동자를 흐렸지만, 입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바보... 진짜 바보...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하냐고요...
카리나는 몸을 숙여, 자신의 이마를 나의 이마에 맞댔다.
그래도... 고마워요...
지휘관님... 저 기뻐요...
저 위로부터 건물이 붕괴하는 소음이 내려오고, 더 많은 파편과 불똥이 우리 주변으로 떨어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미안해...
괜찮아요...
적어도... 이제, 당신은 제 거잖아요... 그쵸?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손에 더 힘을 주어, 내 손을 움켜쥐었다.
열 손가락을 교차해, 우리의 영혼을 하나로 엮으려는 것처럼.
주위의 불빛이 점점 더 밝아지고, 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더없이 따뜻했고, 웃는 얼굴도 더없이 선명했다.
주무세요...
이번엔... 다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쿠르릉——
대들보도 잃은 천장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맹렬한 화염과 자욱한 연기를 흩뿌리며 무너져 내렸다.
시야가 다시 어둠으로 뒤덮이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 보인 것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미소였다.
............
【BAD END 02】
이 가능성은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네요. 어쩔 수 없죠, 나비 효과가 불러올 결과는 원래 오래 지나야만 알 수 있으니까요.
만약 당신의 부관이 병으로 쓰러지지 않고, 함께 독일로 향했다면 어땠을까?
그 결과는 정말 놀라웠어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소녀가, 다른 이들에겐 불가능한 역할을 맡았으니까요
그녀가 있음으로써 안젤리아와의 신뢰 관계가 더욱 두터워지고, 더욱 긴밀한 협력이 가능해졌죠. 당신에게도, 안젤리아에게도, 서로에게 받는 도움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었어요.
한 순간은, 그 가여운 성녀를 정말로 그토록 바라던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모든 일엔 양면성이 있는 법.
당신은 친구를 구한 대신, 정치가들이 심연 속에 몰래 가꾼 시커먼 숲을 파헤칠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어요.
"판도라"가 독일의 심장을 찌르는 사명을 짊어지지도 못했죠.
그 영국인 신사도, 내부에서 이간질할 수단이 없어졌고요.
그 결과, 그들은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죠.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당신과 그녀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어요.
비록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그곳에 있었던 두 분에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정말로 유일무이한 존재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