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친구」
"이상이란 이런 양날의 검이랍니다."
......니드호그 프로토콜 발동 완료 시각까지 2시간 15분.
타타탕!
격렬한 총성이 메아리쳤다...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인형은 이미 얼마 안 남았다.
지휘관, 현재 브라메드와 스틱스의 사살을 확인.
리벨리온과 404는 헤베와 몰리도를 추격 중...
리벨리온이랑 404로는 부족할지도 몰라. AR-18이 인형 몇 명 이끌고 지원하도록 해. 한 놈도 놓치지 마.
AR팀은 나와 함께 계속 전진한다.
예!
...철컥.
지휘관은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경계하면서 수술실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술실로 나아가는 와중에 지휘관의 마음에 계속해서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루니샤는... 어떻게 된 거지...
수술이 아직 안 끝난 건가?
수술실에 근접한 뒤, 부대는 전진을 멈추고 문 양쪽에 나눠서 정렬했다.
RO는 지휘관을 바라보며 잠금장치를 가리켰다.
지휘관은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날카로운 눈빛을 번쩍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쿠웅!
문을 브리칭하고, AR팀이 신속하게 실내에 진입했다.
순식간에 실내는 AR팀에 의해 제압됐다.
뒤이어 들어온 지휘관은 그동안 쫓아다녔던 얼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노려보았다.
너——
타앙!
그 발악하던 자가 목소리를 낸 순간, 지휘관은 이미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마카로프의 총구에선 화약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윌리엄의 얼굴은 그가 입을 열던 순간에 완전히 고정되었다.
할 말도, 망설임도 없었다.
해명도, 궤변도, 아니면 참회나 반성도 필요 없다.
따질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다.
그저 겨냥한 후 방아쇠를 당길 뿐.
단지 그것뿐이었다.
......
한 번의 총성이 흩어지고, 지휘관은 수신호로 인형들에게 실내 수색을 지시하고 경계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윌리엄의 시체 앞에 섰다.
심장을 겨냥하고, 한 발.
복부를 겨냥하고, 두 발.
머리를 겨냥하고——
네 번 연속으로 울린 총성.
8발 들이 마카로프 권총 탄창은 텅 비어, 노리쇠가 고정됐다.
하지만 지휘관의 검지는 방아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의미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미세하게 딸깍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마치 지휘관은 여전히 눈앞에 있는 윌리엄을 처형하려는 것 같았다.
윌리엄을 천 번, 만 번, 천만 번 죽여도 부족한 것처럼...
지, 지휘관...
RO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지휘관님... 괜찮으신가요?
RO는 걱정하면서 지휘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휘관은 곧바로 권총을 쥔 손을 떨구고 문밖으로 걸어갔다.
놈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어, 너무나도 많은 피가 놈 때문에 흘렀어.
놈이 지은 죄,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이번 작전은 어떤 차질도 용납할 수 없었어...
이렇게 해야만 죽은 이들이 눈을 감을 수 있고,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할 수 있어.
RO, 드디어, 복수한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지휘관은 모자를 벗어 던져버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비친 지휘관의 눈빛은 RO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어느 사무실.
보고드립니다.
...발라드 폰 오버슈타인 훈작사의 사망을 확인했다는 소식입니다.
일단... 범인의 신병을 확보하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
훈작사는 뒷짐을 지고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프랑크푸르트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훈작사의 안중엔 이런 건 전혀 들어오지 않는 듯 그저 차가운 눈빛만 던질 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한참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노련한 슈타지 요원은 훈작사를 기다렸다.
이때, 창밖의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바람이 불어왔다.
편서풍이 강한 중위도에 자리 잡은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는 늘 불어오는 서풍이 하늘을 지배했다. 그 바람은 해마다 풍족한 비를 몰고 왔다.
평화로운 시대에 그 바람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비를 머금은 따뜻한 기류가 도시를 감싸고,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길러냈다.
하지만 정세가 혼란한 시기에는 그 바람이 재앙으로 변하여, 먹구름을 몰고 와 하늘을 짓누르고, 매서운 기세로 땅을 후려치는 폭풍우가 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순하던 서풍은 순식간에 변했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비바람이 울부짖었다.
폭풍우에 휩싸인 프랑크푸르트를 바라보던 훈작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결국 지휘관은 고슴도치도, 여우도 아니었나.
그저 선을 넘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군.
창밖의 빗물이 창문을 두드리며 토독토독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사무실 안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법대로 처리하게.
...예!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의 어느 감옥.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어둠 속에서 끈적끈적하게 굳어가는 기름처럼 거의 흐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태양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것이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몇 줌씩이고 빠졌고, 후각은 몸에서 나는 냄새에 마비됐고, 잇몸에 박힌 이는 흔들렸고, 이명은 끊이지 않고 윙윙거렸다.
반응이 나날이 무뎌져 가고 있었다...
안구가 나날이 퇴화하고 있었다...
"이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나?" 같은 의문은 이미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답은 이미 진작에 정해져 있는 문제였으니까.
가치가 있어야만 한다. 그건 절대 흔들릴 수도, 번복할 수도 없는 결론이다.
비록 이런 처지가 되었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프랑크푸르트를 구한 것이 누구인지, 금성 훈장에 어울리는 영웅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지금 이런 처지가 된 것은 누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루련 고위층의 해코지를 받은 것이다.
역사가 항상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건 여명 전의 깊은 밤일 뿐이다.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일은 값진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이 모든 것을 짊어질 이유를 잃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적어도, 윌리엄은 이미 죽었다. 패러데우스의 야망은 무너졌고, 더는 반인륜적인 실험의 희생자는 없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쾅!
고개를 들었다. 간수가 곤봉으로 철문을 때리는 소리였다.
10796호, 사료 받아라.
간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배고픔이 몰려왔다.
여태까지 식사 시간은 간수의 기분에 따라 정해졌다. 그러니 공복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알아서 식욕을 제어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당장 튀어나와!
......
이미 걷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척추와 사지는 기나긴 어둠 속에서 퇴화했기에 기어서... 그것도 꿈틀거리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굴욕감을 느낄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간수는 밥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웬일로 바로 떠나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비웃고 싶은 것이든, 괴롭히고 싶은 것이든...
그런 건 이미 익숙해져서 아무 느낌도 없다.
밥그릇 앞까지 와서 보니, 여전히 음식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걸쭉한 그런 물질이 담겨있었다.
지휘관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게걸스럽게 삼킬 뿐이었다. 입안에선 썩은 비린내가 잔뜩 맴돌았다.
또 설사하겠다는 그런 감상만 들었다.
......
......?
절반쯤 먹었을 때까지도 간수는 가만히 있었다.
문득 든 궁금증에 고개를 들자, 간수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는!
끄억...!
눈앞의 인물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지휘관은 혀와 입술이 얼얼해짐과 동시에 입 주변이 마치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땡그랑!
손가락이 마비되고 힘이 풀리면서 밥그릇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지휘관은 몸부림치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손바닥이 미끄러지면서 계속 엎어질 뿐이었다...
——!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저리고, 침조차 삼킬 수가 없었다.
점점 호흡이 곤란해지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죽음의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간수는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모자를 벗어 던지고 깔끔한 얼굴을 보여줬다.
그 익숙한 얼굴, 가느다란 체형을 보고서 지휘관은 그것이 놈이 아닌 "그녀"인 것을 깨달았다...
끄으윽——!
지휘관은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뒹굴었지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유일하게 말을 듣는 건 두 눈뿐인지라, 지휘관은 눈이 찢어지라 부릅떴다.
지휘관은 마침내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반갑군, 지휘관.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지...
지휘관은 바닥에 쓰러진 채 끊어질 듯한 숨을 겨우 뱉으며, 눈물을 쏟았다.
잠깐 스친 한순간의 시선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꿈처럼 흐려졌다. 마치 덧없이 흘러가 허무하게 끝나려 하는 자신의 인생처럼.
윌리엄 님께서 너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너의 이상은 애처로운 거짓말에 불과했다.
끝이다, 그 하찮은 이상을 안고... 익사해라.
크억....!!!
그러는 편이... 너에겐 더 행복하겠지.
뚜벅뚜벅...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지휘관의 의식은 점점 흩어졌다.
천장을 바라봤다. 어두운 등불은 사신의 서슬 퍼런 낫처럼 보였고, 귓가의 울림은 사신의 속삭임 같았다.
의식이 완전히 바스러지기 전, 죽음이 닥쳐온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평생을 다해 좇았던 이상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 얼마나 비굴하고 무력한 삶인가...
죽기 직전 남은 건 분통함뿐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어느 길거리의 접선 지점.
11월의 프랑크푸르트는 어느 때든 기분 편한 곳이 아니었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지고, 태양은 일찍 지고, 절망감이 느껴지는 기나긴 밤이 이어진다.
낮에도 햇빛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하늘이 온통 답답할 정도로 희끄무레했다.
프랑크푸르트의 하늘을 드리운 것은 눈에 보이는 먹구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치적 암류도 잔뜩 깔려 있었다.
오는 길에 비밀경찰이 잔뜩 있더라.
대체 언제부터 프랑크푸르트가 이렇게 된 거람...
지휘관이 행방불명이 된 이후로 J 요원은 예전 같이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지 못했다.
평소엔 늘 껄렁거리던 그는 진지하고 과묵해진 지 오래였다.
원인은... 당연히 프랑크푸르트가 은연중에 확 바뀌어 버린 탓이 컸다.
가장 직관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밀경찰이었다.
케빈, 너 미행당하고 있어.
5시 방향이랑 7시 방향 주의해. 두 명 있어.
저 거머리 같은 것들!
J 요원은 조용히 침을 뱉은 뒤, 모자를 눌러쓰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저 프랑크푸르트 지리에 빠삭한 것에 의존하여 길모퉁이를 꺾고 또 꺾었지만, 쫓아오는 이들을 따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전방 골목길에 샛길이 있어, 그 근처 하수도에서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거야!
알았어!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갈림길에서 왼쪽! 20m 더 가서 바로 오른쪽으로!
알았어!
J는 아예 위장까지 풀고 하수도 안을 질주했다.
미행자도 위장을 포기하고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모퉁이를 꺾은 J는 거의 절망했다.
앞에는 직선 통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자신의 속도로는 뒤에 쫓아오는 "마라톤 선수" 둘을 뿌리칠 가능성은 전무했다. 지금까진 45의 안내를 받으며 복잡하게 얽힌 하수도 안을 요리조리 꺾으면서 달리느라 겨우 따라잡히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길은 빠져나갈 갈림길도, 모습을 숨길 곳도 없었다.
이대로는 붙잡힐 것이 뻔했다.
인마!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는 거야?!
너희 비정규무력관리국 녀석들은 일처리 좀 제대로 못 하냐!?
$@^%...!
야! 대답해!
썅! 하필 이럴 때 신호가 끊기냐고!
어쩔 수 없다. 스스로 어떻게 할 수밖에 없다.
J는 살짝 뒤돌아봤다. 뒤의 두 형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깊은 곳.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J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제길, 숨이 안 쉬어져...
여기서 붙잡히는 거냐고?! 젠장!
J가 이판사판으로 권총을 뽑으려던 순간, 머리 위에서 매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위에서도 쫓아온 건가?
날 잡으려고 얼마나 안달 난 거야!?
다만,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건 아무래도 발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묵직한 소리였다.
콰앙!!
뭐야!?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닥친 충격파. 그 천지를 뒤흔드는 폭풍에 J는 떠밀려 넘어졌다.
콜록콜록... 대체 무슨 위력이야?
벙커 버스터라도 쏜 거야?
굉음이 울리고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J가 고개를 들자, 자신 약간 앞의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리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어렴풋이 인형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거대한 체격의 인형은 마치 요새처럼 우람했다.
AK-15?!
먼지가 서서히 흩어지면서 J는 상대를 알아봤다.
뭐야 뭐야? 또 성대하게 저질러 버린 거야?
천천히 다가온 것은 훨씬 날씬한 체형의 인형이었다.
먼지를 털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J에게 다가왔다.
45한테서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좀 서둘러서 달리다가, 방폭문을 한 주먹에 때려 부시질 않나, 결국엔 아예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하수도 파이프를 박살 내고 뛰어내리기까지 하고...
어휴, 정말...
정말이지 폭주 기관차가 따로 없네요.
AK-15가 파이프에 뚫은 구멍에서 두 인형이 뛰어내려 J의 옆에 사뿐히 내려왔다.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씩 등장하자, J의 표정도 그제야 약간 풀어졌다.
그는 스스로 일어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45가 한 마디 전해 달랬어.
"우리는 '그리폰'의 사람들이야. 헷갈리지 말라고."
...그렇긴 하지. 우리 모두 여기 공무로 모인 게 아니니까.
참, 공무라고 하니까... 저것들 전부 슈타지 아닌가요?
예전 직장 동료가 저렇게 죽일 기세로 쫓아오다니, 혹시 돈이라도 빌리고 안 갚았나요?
내 예전 직장 동료 중에 니토는 없었거든.
니토요?
J의 시선을 따라 일행은 흙먼지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AK-15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들고 와 바닥에 버렸다.
바닥에 버려진 건 몸 반쪽이 사라진 니토였고,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왜 니토가 슈타지처럼 다니고 있죠?
1년 전부터, 프랑크푸르트에 돌아다니는 비밀경찰의 수가 5배나 늘었어. 거의 2가구마다 슈타지 요원 셋이 감시가 붙을 정도야.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인구 손실은 회복되기는커녕 계속 역성장 중이잖아?
그 비결이 도대체 뭘까? 바로 슈타지에 니토가 잔뜩 생긴 거야.
그럴 리가 있어요? 니토는 생긴 게 다 똑같은데, 인간 요원이 그걸 계속 눈치 못 챘다고요?
그리고 패러데우스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모인 거잖아.
어느 사이에 UMP45와 UMP9까지 자리에 모였다.
조사 신청을 제출해 봤지만, 전부 다 반려당했어.
결국 몰래 조사하는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 모인 애들은 지금 어디에서 일하든 상관없어.
우린 모두 "그리폰"의 일원으로서 온 거야. 이해했지?
뭐? 거기 나도 포함이야?
명예 회원으로 넣어줄게!
방금 소란을 너무 키웠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잡담은 나중에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꾸물거릴수록 지휘관이 위험해질 것이다.
아니, 여기가 바로 목적지야.
응?
정확하게는 여기 발밑이지.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심층부.
방금 나를 쫓아온 니토들은 실험실을 지키던 놈들인 거지?
일행은 소대를 꾸리고 AK-15를 앞장세워 신중하게 전진했다.
도중에 니토를 종종 마주쳤지만, 은닉한 AK-12와 AN-94에 의해 소리 없이 처리됐다.
그건 모르겠네, 그냥 산책하던 녀석들인 것 같아.
내가 방금 해치운 녀석이 처음에 널 쫓았으면 넌 순식간에 죽었을걸?
이놈들 성능이 모두 높은 편이야. 내가 공격하기 전에 내 기척을 눈치채는 녀석도 몇 놈 있었어.
게다가 깊이 들어갈수록 강력한 니토가 지키고 있다.
외부의 놈들은 그나마 감당할 수 있었지만, 방금 마주친 몇 놈은 이미 성가신 수준이었다. 기습을 걸려고 해도 발각되기 쉽고...
혹시 이 안으로도 더욱 강해지는 게 아닐지...
......
그래서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슬슬 설명 좀 해줄래요?
그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간 건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전에 프랑크푸르트 전투가 끝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말이야. 45가 날 찾아와서 지휘관한테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때 나는 이미 슈타지에서 기수열외된 신세라 어떻게 알아볼 방도가 없었지.
확실한 정보도 없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고 계속 수면 밑에서 조사했어.
정말 한참을 조사해서 얻은 건 많이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어. 패러데우스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규모가 커졌다는 것.
분명 지휘관이 윌리엄을 죽였으니, 패러데우스가 더 이상 존재할 리가 없을 텐데.
어째서...
패러데우스가 다시 활개치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이 지휘관이 행방불명된 시기랑 비슷해.
이 둘의 관계가 전혀 없을 리가 없겠지.
......
그 인간이 그렇기 쉽게 죽었다곤 안 믿을 거예요. 분명 무슨 말썽이 생긴 거겠죠.
그래서 제가 여기 온 거구요.
지휘관은 분명 무사할 거야... 응...
분명 누가 어디에 붙잡아 가두고 있거나...
이 부근은 보안 수준이 높아. 곧 근접하니까 모두 준비 단단히 해.
케빈, 너는 여기서 유일한 인간이잖아.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수 있으니까, 안전한 위치에서 지휘를 부탁할게. 충분히 할 수 있지?
어, 맡겨줘.
여기에 있는 모두 지휘관의 단서를 조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거잖아.
나는 그 사람처럼 사기를 북돋우는 말 같은 건 할 줄 모르지만, 일단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살아있다면 찾아내고, 죽었다면...
J는 머뭇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죽었다"라는 가정은 너무나도 무거워 목이 막힐 정도였다.
죽었다면, 복수할 뿐.
모두의 가슴에 무거운 바위가 짓눌렀다. 모두가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결의를 다졌다. 이제 남은 것은 진실을 파헤치는 것뿐.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심층부, 극비 실험실.
이번 싸움은 틀림없이 이 자리에 인형들이 지금까지 겪어본 것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힘든 것이 분명했다.
고작 평범한 니토 다섯에게 소대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건 이미 니토라고 부를 수준이 아니었다.
AK-15! 3시 방향!
94, 엄호해!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J는 전장 상황을 보며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상대의 화력과 기동력은 모두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다.
니토가 고작 다섯이었다. 소대가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간신히 셋을 해치울 수 있었다.
모두의 엄호를 받던 J마저 유탄에 오른쪽 어깨가 찢어져 흉측한 꼴로 비틀렸다.
남은 두 니토는 아직 행동이 가능한 AK-12에게 정신이 팔려, 전장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에서 토끼와 거북이처럼 추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일행 중 부상이 가장 심각한 것은 스티븐스 520이었다.
그녀의 몸 반쪽은 안구부터 골반까지 완전히 망가져 버려, 지금 벽에 기대어 한 손으로 간신히 총을 들어 접근하려 드는 니토를 주춤하게 했다.
막대한 대가를 치른 끝에, 일행이 마침내 방폭문 앞까지 돌파했다.
AK15가 브리칭!
나머지는 전력으로 엄호해!
라저!
콰앙!
AK-15가 방폭문에 힘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 방폭문의 견고함은 문을 넘어 매우 두꺼운 철벽같았다.
그 AK-15마저 빠르게 이 문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모두가 엄호해야 할 시간이 길어짐을 의미했다.
하지만, 상대도 물론 일행에게 자비를 베풀 기색이 없었다.
쿵! 쿵! 쿵! ......
쯧, 겨우 세 놈 해치웠나 했더니, 소대 하나가 증원됐네?
저것들 대체 뭔가요? 합금 덩어리처럼 단단하면서도 무진장 날렵하기까지 하고.
......
아무도 그녀의 말을 받아주지 않고 분위기만 점점 얼어붙었다.
이대로는 어떻게 될지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될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스 520은 그 예감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바닥을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행보는 저예산 영화에나 나올 장면 같지만...
그래도 결국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겠죠.
스티븐스... 뭐 할 생각이야?
너 지금 우리 중에서 가장 심하게 다친 상태잖아.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훗...
거기, 폭주 기관차 씨. 그 문짝 얼마나 더 걸려야 뚫을 수 있죠?
......
3분, 하지만 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좋아요.
당신들, 필요한 탄약과 폭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 제게 넘겨주세요.
여기 엄폐물 구조가 곧 무너질 것 같으니까, 조금 더 폭파하면 어느 정도 두꺼운 벽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저 두 괴물을 정면으로 이기는 건 무리겠지만, 가둬버릴 수는 있을 거예요. 단지 행동이 변화무쌍한 놈들 상대로 타이밍을 잴 사람이 필요하죠.
그게 누구냐... 바로 저예요.
스티븐스는 고개를 들어 시선으로 모두를 훑었다.
여러분은 아직 싸울 힘을 남겨 두셔야 해요. 저는 이미 도움이 안 되는 상태죠.
그러니까 나머지는 여러분께 맡길게요.
그리고... 혹시 그 인간을 본다면 대신 한마디 전해줄래요?
무슨 일이 생기든 그냥 건강하게 살라고요.
군인 같은 건 그만두고, 위험한 일에 머리 들이밀지 말고,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잘 살라고요.
......
안 돼! 스티븐스!
시간을 버는 일이라면 내가 할게! 나 아직 움직일 수 있어!
9...
9은 스티븐스를 말리고 싶었지만, 45가 제지했다.
거기 애꾸눈 언니 씨! 당신네 울보 동생 데리고 얼른 가세요.
당신들에겐 따로 할 일이 있잖아요?
네 메시지, 기억했어.
지휘관을 만나면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줄게.
으흐흑...
9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울음이 긴장된 분위기에 슬픈 기운을 물들였다.
결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가 그녀에게 눈빛으로 존중을 표했다.
콰앙!!
약속의 때가 왔다. AK-15가 방폭문을 폭파하는 순간, 두 니토의 주의가 바로 쏠렸다.
타앙!
스티븐스 520은 얼마 남지 않은 화력을 전부 퍼부었다. 제대로 맞는 총알은 얼마 없었지만, 놈들을 주춤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너희 상대는 나거든!
콰앙!
콰아앙!!
니토가 공중에서 총알을 회피했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그들의 움직임을 읽고 45가 미리 설치한 폭탄을 터뜨렸다.
이것으로 놈들의 주의를 한 몸에 끌었다. 저기 뚫린 방폭문을 지나가려면 눈앞에 있는 반쪽 인형을 해치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흥, 니토가 날고 기어도 니토인 건 안 변하지.
흄의 아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전광석화의 순간, 스티븐스가 마지막 스위치를 눌렀다.
콰아아아앙!!!
철근 콘크리트 구조가 완전히 무너져 무수한 돌덩이와 철근이 떨어져 넘어가기 힘든 산을 이루었다.
스티븐스도 화염 폭풍에 자신에게 덤벼든 니토와 함께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시간은 무척 길고도 몹시 짧았다. 스티븐스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삶이 마치 별똥별처럼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엘마와 입씨름하던 날들, 지휘관과 함께 싸우던 날들... 모두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언제 떠올려봐도 마치 수정 구슬처럼 무척 예쁘고 반짝였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실험실 내부.
쉬익!
문이 열리는 순간, 시커먼 실내에서 번뜩이는 빛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인간인 J는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적습이다! 야시 모듈을 켜!
언니...
어둠 속에서 9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J가 고개를 돌려 보자, 9이 넋이 나간 상태였다.
바로 9에게 달려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자마자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굴러와 그의 발끝에 부딪혔다.
그것은 45의 머리였다. 그녀의 얼굴은 문을 지나는 순간에 멈춰 있었다.
목 아래의 깔끔한 절단면은 마치 달군 나이프에 썰린 두부 같았다.
하지만 그 칼날은 45의 목을 베고서도 멈추지 않고,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한번 무언가를 베어 버렸다.
미세한 폭발음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45의 코어가 그 은밀하며 치명적인 참격에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4, 45!!!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얼마 없는 불빛 속에서 기겁한 J는 다가온 것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본 순간 잠깐 멍해졌다.
하지만 눈을 깜빡하자 상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케빈! 정신 차려!
정신을 차리자 AN-94가 자신 앞을 가로막고 전광석화와 같은 상대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틀림없어! 틸이야!!
그런데 녀석이 어떻게...
으아아아아아아!!!
45 언니를! 45 언니를 죽였어어어!!!
넌 내가 꼭 죽여버릴 거야아아아!!!
겨우 정신을 차린 UMP9은 바로 총을 꺼내 틸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틸은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욱 강력했다. 은빛의 섬광 같은 그녀의 움직임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궤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AN-94와 UMP9이 힘을 합쳐도 계속 밀리기만 할 뿐이었다.
9! 감정에 휘둘리지 마!
뭘 멍하니 있나!
호오?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있나 봐?
거기 "최강의 인형", 대답해 봐. 너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
퍼엉!
갑자기 소닉붐이 닥쳤다. J의 고막이 터질 듯이 웅웅거렸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음이 이어지면서 실험실 천장은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 두 번의 굉음 말고 J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J가 뒤돌아보자, 균열이 잔뜩 생긴 벽 위에 갈대처럼 가늘고 길쭉한 모습이 서 있었다.
그런 몸집의 인형이 지금 코 푸는 듯이 한 손으로 AK-15의 목을 움켜쥐고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 인형은 자신이 목을 움켜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지, 히죽거리며 J에게 시선을 돌렸다.
J는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순식간에 AK-15는 번쩍 지나간 그림자에 벽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소닉붐도 저 가느다란 인형이 움직이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폭발음은 그녀가 AK-15를 벽에 처박는 순간에 난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요원 양반.
내가 누군지 기억해?
아, 아마리스...
아니, 넌 아마리스가 아니야. 대체 누구야?
아마리스가 맞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그녀요.
낯설어 보이는 것도 정상이고요. "달"은 저의 최고 걸작이니까요.
지금의 그녀야말로 손색없는 "최강의 인형"이죠.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발소리와 함께 실내의 전등이 하나씩 켜졌다.
그 등불에 J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앗... 아...
J는 말을 잃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이해 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케빈.
그동안 잘 지냈나요?
그녀의 표정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독수리 같았다. 그러나 독수리와 다른 점은...
그 미소였다, 그것은 J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실험실의 전등이 계속 켜지면서 J의 눈에 실내의 광경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순간 그는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떴다.
발라드가 지배하던 패러데우스가 저지른 인체 실험만 해도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것을 뛰어넘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한눈에 들어온 광경만 해도, 산전수전을 겪은 요원의 위장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지...?
이거 전부 네가 한 짓이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야! 넬레!!!
무슨 짓이냐고요?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세상을 개선하고, 규칙을 수정하고, 질서를 바로잡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이게 제가 하고 있는 일이에요.
아니, 그런 핑계는 필요없어...
그런 이유로 인체 실험을 할 순 없다고.
패러데우스는 이미 몰락했는데, 대체 왜 그걸 이어받은 거야?
놈들을 재건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는데!
그래서 당신은, 우리 지휘관이 발라드를 개처럼 쏴 죽인 것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여러분이 바라는 태평성대가 찾아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지휘관과 발라드마저 이루지 못한 위업을 해낸 것뿐이에요.
아버님, 이 인간을 처리합니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J가 고개를 돌리자, 얼음장 같은 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토막 난 두 인형을 들고 걸어왔다. 남은 옷조각으로나마 AN-94와 UMP9인 것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틸은 둘의 잔해를 마치 쓰레기 버리듯이 J의 앞에 던졌다.
9...
94...
아아...
그럴 필요 없지 않아? 우리 가엾은 케빈은 지금 홀몸이잖아.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아, 문밖에서 폴짝거리고 은신하는 벼룩 같은 녀석도 같이 잡아 왔어.
투웅!
이번에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인형의 잔해 두 구가 또 버려졌다.
리벨리온, 404...
모두 전멸했다.
임무는... 실패했다.
J는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이 모든 사실이 소화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낯선 모습이 되어버린 넬레를 노려보았다.
저 틸... 그리고 밖에 있던 엄청나게 강해진 니토들... 전부 다 네가 만든 거야?
아, 전부 사소한 일이었죠.
이 빌어먹을 년아!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지휘관도 네가 죽인 거야!?
넬레는 버럭버럭 울부짖는 J에게 곧바로 대답하진 않고, 한숨을 쉬고서 가까이 다가갔다.
실험실 바닥 전등의 빛에 넬레가 걸친 하얀 가운은 마치 사신의 망토 같았다.
발라드가 죽은 뒤, 훈작사가 저를 찾아와서 유적에 관한 일들을 들려줬어요.
제가 그동안 몰랐던 면을 알게 되면서 제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었는지 깨달았죠.
유적의 힘이야말로 신세계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예요.
유적, 유적, 유적... 너도 유적에 미쳐버린 망할 자식이었어!
너한테 할 말은 더 없어. 그저 연구하다 발작 나서 그 빌어먹을 신세계와 함께 개똥이나 처먹으라 빌어주지!
그럼, 저도 할 이야기가 없네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걸 생각해서 당신은 내버려두고 싶었는데.
이렇게 크게 소란을 일으켜 버렸으니, 훈작사한테 한 소리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처리할 수밖에 없어요...
넬레는 싱긋 웃고선 "달"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탁해요. 달.
일 처리 깔끔하게 해요.
알았어.
넬레의 모습은 점점 멀어졌고, 틸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아마리스"만 J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마, 케빈.
그냥 머리통 박살 나는 것뿐이니까 전혀 안 아플 거야.
J는 눈앞의 인형을 저주하듯 노려봤다. 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히죽거리며 중지를 구부리고 엄지로 눌렀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뇌수와 혈액이 함께 뒤섞여 벽에 붉은 꽃 모양을 활짝 피워냈다.
그중 한 살점은 아주 멀리 날아가, 저 멀리 폭발이 있었던 콘크리트 무덤까지 다다랐다.
끝내, 살점은 중력의 힘으로 서서히 땅에 떨어져, 결국 분홍색 프릴 조각 위에 철퍽 떨어졌다.
【BAD END 03】
사실 이 가능성은 수많은 방향과 분기점이 존재해요.
그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구역질 나는 하나를 특별히 골라서 보여준 거지만요.
만약 그때 "그녀"가 당신을 제지하지 않고, 당신이 분노를 쏟아내는 걸 내버려두었다면, 그 끝에 이어지는 결말이 바로 이래요.
물론 이 가능성에서도 당신은 염원하는 복수를 이룰 수 있어요. 하지만 많은 문제는 총알 한 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가식적인 남자와 대항할 수 있는 힘의 보호를 얻기 전에 도마 위에 올라서는 건 명백히 어리석은 일이죠.
정말 이런 방식으로 숙원을 이룰 수 있다면, 존경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빠진 당신은 "그래도 만족한다" 같은 헛소리나 하겠죠.
아쉽지만, "그녀"가 이런 결말을 용납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가장 근본적으로 이래봤자 아무 문제도 해결 안 돼요.
올바른 인도 없이는, 순수한 꿈나무일수록 차마 형용 못 할 흉물로 변이하기에 십상이죠.
이상이란 이런 양날의 검이랍니다.
말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먼저... 말판에서 벗어나야 해요.
사자에 맞서기 위해서는 곰의 힘을 빌려야 하죠.
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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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드호그 프로토콜 발동 완료 시각까지 2시간 15분.
타타탕!
격렬한 총성이 메아리쳤다...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인형은 이미 얼마 안 남았다.
지휘관, 현재 브라메드와 스틱스의 사살을 확인.
리벨리온과 404는 헤베와 몰리도를 추격 중...
리벨리온이랑 404로는 부족할지도 몰라. AR-18이 인형 몇 명 이끌고 지원하도록 해. 한 놈도 놓치지 마.
AR팀은 나와 함께 계속 전진한다.
예!
...철컥.
지휘관은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경계하면서 수술실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술실로 나아가는 와중에 지휘관의 마음에 계속해서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color=#A9A9A9>루니샤는... 어떻게 된 거지...</color>
<color=#A9A9A9>수술이 아직 안 끝난 건가?</color>
수술실에 근접한 뒤, 부대는 전진을 멈추고 문 양쪽에 나눠서 정렬했다.
RO는 지휘관을 바라보며 잠금장치를 가리켰다.
지휘관은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날카로운 눈빛을 번쩍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쿠웅!
문을 브리칭하고, AR팀이 신속하게 실내에 진입했다.
순식간에 실내는 AR팀에 의해 제압됐다.
뒤이어 들어온 지휘관은 그동안 쫓아다녔던 얼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노려보았다.
너——
타앙!
그 발악하던 자가 목소리를 낸 순간, 지휘관은 이미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마카로프의 총구에선 화약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윌리엄의 얼굴은 그가 입을 열던 순간에 완전히 고정되었다.
할 말도, 망설임도 없었다.
해명도, 궤변도, 아니면 참회나 반성도 필요 없다.
따질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다.
그저 겨냥한 후 방아쇠를 당길 뿐.
단지 그것뿐이었다.
......
한 번의 총성이 흩어지고, 지휘관은 수신호로 인형들에게 실내 수색을 지시하고 경계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윌리엄의 시체 앞에 섰다.
심장을 겨냥하고, 한 발.
복부를 겨냥하고, 두 발.
머리를 겨냥하고——
네 번 연속으로 울린 총성.
8발 들이 마카로프 권총 탄창은 텅 비어, 노리쇠가 고정됐다.
하지만 지휘관의 검지는 방아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의미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미세하게 딸깍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마치 지휘관은 여전히 눈앞에 있는 윌리엄을 처형하려는 것 같았다.
윌리엄을 천 번, 만 번, 천만 번 죽여도 부족한 것처럼...
지, 지휘관...
RO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지휘관님... 괜찮으신가요?
RO는 걱정하면서 지휘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휘관은 곧바로 권총을 쥔 손을 떨구고 문밖으로 걸어갔다.
놈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어, 너무나도 많은 피가 놈 때문에 흘렀어.
놈이 지은 죄,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이번 작전은 어떤 차질도 용납할 수 없었어...
이렇게 해야만 죽은 이들이 눈을 감을 수 있고,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할 수 있어.
RO, 드디어, 복수한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지휘관은 모자를 벗어 던져버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비친 지휘관의 눈빛은 RO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어느 사무실.
보고드립니다.
...발라드 폰 오버슈타인 훈작사의 사망을 확인했다는 소식입니다.
일단... 범인의 신병을 확보하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
훈작사는 뒷짐을 지고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프랑크푸르트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훈작사의 안중엔 이런 건 전혀 들어오지 않는 듯 그저 차가운 눈빛만 던질 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한참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노련한 슈타지 요원은 훈작사를 기다렸다.
이때, 창밖의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바람이 불어왔다.
편서풍이 강한 중위도에 자리 잡은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는 늘 불어오는 서풍이 하늘을 지배했다. 그 바람은 해마다 풍족한 비를 몰고 왔다.
평화로운 시대에 그 바람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비를 머금은 따뜻한 기류가 도시를 감싸고,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길러냈다.
하지만 정세가 혼란한 시기에는 그 바람이 재앙으로 변하여, 먹구름을 몰고 와 하늘을 짓누르고, 매서운 기세로 땅을 후려치는 폭풍우가 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순하던 서풍은 순식간에 변했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비바람이 울부짖었다.
폭풍우에 휩싸인 프랑크푸르트를 바라보던 훈작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결국 지휘관은 고슴도치도, 여우도 아니었나.
그저 선을 넘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군.
창밖의 빗물이 창문을 두드리며 토독토독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사무실 안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법대로 처리하게.
...예!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의 어느 감옥.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어둠 속에서 끈적끈적하게 굳어가는 기름처럼 거의 흐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태양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것이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몇 줌씩이고 빠졌고, 후각은 몸에서 나는 냄새에 마비됐고, 잇몸에 박힌 이는 흔들렸고, 이명은 끊이지 않고 윙윙거렸다.
반응이 나날이 무뎌져 가고 있었다...
안구가 나날이 퇴화하고 있었다...
"이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나?" 같은 의문은 이미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답은 이미 진작에 정해져 있는 문제였으니까.
가치가 있어야만 한다. 그건 절대 흔들릴 수도, 번복할 수도 없는 결론이다.
비록 이런 처지가 되었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프랑크푸르트를 구한 것이 누구인지, 금성 훈장에 어울리는 영웅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지금 이런 처지가 된 것은 누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루련 고위층의 해코지를 받은 것이다.
역사가 항상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건 여명 전의 깊은 밤일 뿐이다.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일은 값진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이 모든 것을 짊어질 이유를 잃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적어도, 윌리엄은 이미 죽었다. 패러데우스의 야망은 무너졌고, 더는 반인륜적인 실험의 희생자는 없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쾅!
고개를 들었다. 간수가 곤봉으로 철문을 때리는 소리였다.
10796호, 사료 받아라.
간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배고픔이 몰려왔다.
여태까지 식사 시간은 간수의 기분에 따라 정해졌다. 그러니 공복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알아서 식욕을 제어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당장 튀어나와!
......
이미 걷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척추와 사지는 기나긴 어둠 속에서 퇴화했기에 기어서... 그것도 꿈틀거리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굴욕감을 느낄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간수는 밥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웬일로 바로 떠나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비웃고 싶은 것이든, 괴롭히고 싶은 것이든...
그런 건 이미 익숙해져서 아무 느낌도 없다.
밥그릇 앞까지 와서 보니, 여전히 음식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걸쭉한 그런 물질이 담겨있었다.
지휘관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게걸스럽게 삼킬 뿐이었다. 입안에선 썩은 비린내가 잔뜩 맴돌았다.
또 설사하겠다는 그런 감상만 들었다.
......
......?
절반쯤 먹었을 때까지도 간수는 가만히 있었다.
문득 든 궁금증에 고개를 들자, 간수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는!
끄억...!
눈앞의 인물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지휘관은 혀와 입술이 얼얼해짐과 동시에 입 주변이 마치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땡그랑!
손가락이 마비되고 힘이 풀리면서 밥그릇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지휘관은 몸부림치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손바닥이 미끄러지면서 계속 엎어질 뿐이었다...
——!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저리고, 침조차 삼킬 수가 없었다.
점점 호흡이 곤란해지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죽음의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간수는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모자를 벗어 던지고 깔끔한 얼굴을 보여줬다.
그 익숙한 얼굴, 가느다란 체형을 보고서 지휘관은 그것이 놈이 아닌 "그녀"인 것을 깨달았다...
끄으윽——!
지휘관은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뒹굴었지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유일하게 말을 듣는 건 두 눈뿐인지라, 지휘관은 눈이 찢어지라 부릅떴다.
지휘관은 마침내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반갑군, 지휘관.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지...
지휘관은 바닥에 쓰러진 채 끊어질 듯한 숨을 겨우 뱉으며, 눈물을 쏟았다.
잠깐 스친 한순간의 시선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꿈처럼 흐려졌다. 마치 덧없이 흘러가 허무하게 끝나려 하는 자신의 인생처럼.
윌리엄 님께서 너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너의 이상은 애처로운 거짓말에 불과했다.
끝이다, 그 하찮은 이상을 안고... 익사해라.
<size=50><color=#FF0000>크억....!!!</color></size>
그러는 편이... 너에겐 더 행복하겠지.
뚜벅뚜벅...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지휘관의 의식은 점점 흩어졌다.
천장을 바라봤다. 어두운 등불은 사신의 서슬 퍼런 낫처럼 보였고, 귓가의 울림은 사신의 속삭임 같았다.
의식이 완전히 바스러지기 전, 죽음이 닥쳐온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평생을 다해 좇았던 이상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 얼마나 비굴하고 무력한 삶인가...
죽기 직전 남은 건 분통함뿐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어느 길거리의 접선 지점.
11월의 프랑크푸르트는 어느 때든 기분 편한 곳이 아니었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지고, 태양은 일찍 지고, 절망감이 느껴지는 기나긴 밤이 이어진다.
낮에도 햇빛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하늘이 온통 답답할 정도로 희끄무레했다.
프랑크푸르트의 하늘을 드리운 것은 눈에 보이는 먹구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치적 암류도 잔뜩 깔려 있었다.
오는 길에 비밀경찰이 잔뜩 있더라.
대체 언제부터 프랑크푸르트가 이렇게 된 거람...
지휘관이 행방불명이 된 이후로 J 요원은 예전 같이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지 못했다.
평소엔 늘 껄렁거리던 그는 진지하고 과묵해진 지 오래였다.
원인은... 당연히 프랑크푸르트가 은연중에 확 바뀌어 버린 탓이 컸다.
가장 직관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밀경찰이었다.
<color=#00CCFF>케빈, 너 미행당하고 있어.</color>
<color=#00CCFF>5시 방향이랑 7시 방향 주의해. 두 명 있어.</color>
저 거머리 같은 것들!
J 요원은 조용히 침을 뱉은 뒤, 모자를 눌러쓰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저 프랑크푸르트 지리에 빠삭한 것에 의존하여 길모퉁이를 꺾고 또 꺾었지만, 쫓아오는 이들을 따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전방 골목길에 샛길이 있어, 그 근처 하수도에서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거야!
알았어!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color=#00CCFF>갈림길에서 왼쪽! 20m 더 가서 바로 오른쪽으로!</color>
알았어!
J는 아예 위장까지 풀고 하수도 안을 질주했다.
미행자도 위장을 포기하고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모퉁이를 꺾은 J는 거의 절망했다.
앞에는 직선 통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자신의 속도로는 뒤에 쫓아오는 "마라톤 선수" 둘을 뿌리칠 가능성은 전무했다. 지금까진 45의 안내를 받으며 복잡하게 얽힌 하수도 안을 요리조리 꺾으면서 달리느라 겨우 따라잡히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길은 빠져나갈 갈림길도, 모습을 숨길 곳도 없었다.
이대로는 붙잡힐 것이 뻔했다.
인마!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는 거야?!
너희 비정규무력관리국 녀석들은 일처리 좀 제대로 못 하냐!?
<color=#00CCFF>$@^%...!</color>
야! 대답해!
썅! 하필 이럴 때 신호가 끊기냐고!
어쩔 수 없다. 스스로 어떻게 할 수밖에 없다.
J는 살짝 뒤돌아봤다. 뒤의 두 형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깊은 곳.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J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color=#A9A9A9>제길, 숨이 안 쉬어져...</color>
<color=#A9A9A9>여기서 붙잡히는 거냐고?! 젠장!</color>
J가 이판사판으로 권총을 뽑으려던 순간, 머리 위에서 매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위에서도 쫓아온 건가?
날 잡으려고 얼마나 안달 난 거야!?
다만,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건 아무래도 발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묵직한 소리였다.
콰앙!!
뭐야!?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닥친 충격파. 그 천지를 뒤흔드는 폭풍에 J는 떠밀려 넘어졌다.
콜록콜록... 대체 무슨 위력이야?
벙커 버스터라도 쏜 거야?
굉음이 울리고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J가 고개를 들자, 자신 약간 앞의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리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어렴풋이 인형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거대한 체격의 인형은 마치 요새처럼 우람했다.
AK-15?!
먼지가 서서히 흩어지면서 J는 상대를 알아봤다.
뭐야 뭐야? 또 성대하게 저질러 버린 거야?
천천히 다가온 것은 훨씬 날씬한 체형의 인형이었다.
먼지를 털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J에게 다가왔다.
45한테서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좀 서둘러서 달리다가, 방폭문을 한 주먹에 때려 부시질 않나, 결국엔 아예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하수도 파이프를 박살 내고 뛰어내리기까지 하고...
어휴, 정말...
정말이지 폭주 기관차가 따로 없네요.
AK-15가 파이프에 뚫은 구멍에서 두 인형이 뛰어내려 J의 옆에 사뿐히 내려왔다.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씩 등장하자, J의 표정도 그제야 약간 풀어졌다.
그는 스스로 일어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45가 한 마디 전해 달랬어.
"우리는 '그리폰'의 사람들이야. 헷갈리지 말라고."
...그렇긴 하지. 우리 모두 여기 공무로 모인 게 아니니까.
참, 공무라고 하니까... 저것들 전부 슈타지 아닌가요?
예전 직장 동료가 저렇게 죽일 기세로 쫓아오다니, 혹시 돈이라도 빌리고 안 갚았나요?
내 예전 직장 동료 중에 니토는 없었거든.
니토요?
J의 시선을 따라 일행은 흙먼지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AK-15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들고 와 바닥에 버렸다.
바닥에 버려진 건 몸 반쪽이 사라진 니토였고,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왜 니토가 슈타지처럼 다니고 있죠?
1년 전부터, 프랑크푸르트에 돌아다니는 비밀경찰의 수가 5배나 늘었어. 거의 2가구마다 슈타지 요원 셋이 감시가 붙을 정도야.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인구 손실은 회복되기는커녕 계속 역성장 중이잖아?
그 비결이 도대체 뭘까? 바로 슈타지에 니토가 잔뜩 생긴 거야.
그럴 리가 있어요? 니토는 생긴 게 다 똑같은데, 인간 요원이 그걸 계속 눈치 못 챘다고요?
그리고 패러데우스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모인 거잖아.
어느 사이에 UMP45와 UMP9까지 자리에 모였다.
조사 신청을 제출해 봤지만, 전부 다 반려당했어.
결국 몰래 조사하는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 모인 애들은 지금 어디에서 일하든 상관없어.
우린 모두 "그리폰"의 일원으로서 온 거야. 이해했지?
뭐? 거기 나도 포함이야?
명예 회원으로 넣어줄게!
방금 소란을 너무 키웠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잡담은 나중에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꾸물거릴수록 지휘관이 위험해질 것이다.
아니, 여기가 바로 목적지야.
응?
정확하게는 여기 발밑이지.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심층부.
방금 나를 쫓아온 니토들은 실험실을 지키던 놈들인 거지?
일행은 소대를 꾸리고 AK-15를 앞장세워 신중하게 전진했다.
도중에 니토를 종종 마주쳤지만, 은닉한 AK-12와 AN-94에 의해 소리 없이 처리됐다.
그건 모르겠네, 그냥 산책하던 녀석들인 것 같아.
내가 방금 해치운 녀석이 처음에 널 쫓았으면 넌 순식간에 죽었을걸?
이놈들 성능이 모두 높은 편이야. 내가 공격하기 전에 내 기척을 눈치채는 녀석도 몇 놈 있었어.
게다가 깊이 들어갈수록 강력한 니토가 지키고 있다.
외부의 놈들은 그나마 감당할 수 있었지만, 방금 마주친 몇 놈은 이미 성가신 수준이었다. 기습을 걸려고 해도 발각되기 쉽고...
혹시 이 안으로도 더욱 강해지는 게 아닐지...
......
그래서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슬슬 설명 좀 해줄래요?
그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간 건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전에 프랑크푸르트 전투가 끝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말이야. 45가 날 찾아와서 지휘관한테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때 나는 이미 슈타지에서 기수열외된 신세라 어떻게 알아볼 방도가 없었지.
확실한 정보도 없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고 계속 수면 밑에서 조사했어.
정말 한참을 조사해서 얻은 건 많이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어. 패러데우스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규모가 커졌다는 것.
분명 지휘관이 윌리엄을 죽였으니, 패러데우스가 더 이상 존재할 리가 없을 텐데.
어째서...
패러데우스가 다시 활개치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이 지휘관이 행방불명된 시기랑 비슷해.
이 둘의 관계가 전혀 없을 리가 없겠지.
......
그 인간이 그렇기 쉽게 죽었다곤 안 믿을 거예요. 분명 무슨 말썽이 생긴 거겠죠.
그래서 제가 여기 온 거구요.
지휘관은 분명 무사할 거야... 응...
분명 누가 어디에 붙잡아 가두고 있거나...
이 부근은 보안 수준이 높아. 곧 근접하니까 모두 준비 단단히 해.
케빈, 너는 여기서 유일한 인간이잖아.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수 있으니까, 안전한 위치에서 지휘를 부탁할게. 충분히 할 수 있지?
어, 맡겨줘.
여기에 있는 모두 지휘관의 단서를 조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거잖아.
나는 그 사람처럼 사기를 북돋우는 말 같은 건 할 줄 모르지만, 일단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살아있다면 찾아내고, 죽었다면...
J는 머뭇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죽었다"라는 가정은 너무나도 무거워 목이 막힐 정도였다.
죽었다면, 복수할 뿐.
모두의 가슴에 무거운 바위가 짓눌렀다. 모두가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결의를 다졌다. 이제 남은 것은 진실을 파헤치는 것뿐.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하수도 심층부, 극비 실험실.
이번 싸움은 틀림없이 이 자리에 인형들이 지금까지 겪어본 것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힘든 것이 분명했다.
고작 평범한 니토 다섯에게 소대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건 이미 니토라고 부를 수준이 아니었다.
AK-15! 3시 방향!
94, 엄호해!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J는 전장 상황을 보며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상대의 화력과 기동력은 모두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다.
니토가 고작 다섯이었다. 소대가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간신히 셋을 해치울 수 있었다.
모두의 엄호를 받던 J마저 유탄에 오른쪽 어깨가 찢어져 흉측한 꼴로 비틀렸다.
남은 두 니토는 아직 행동이 가능한 AK-12에게 정신이 팔려, 전장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에서 토끼와 거북이처럼 추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일행 중 부상이 가장 심각한 것은 스티븐스 520이었다.
그녀의 몸 반쪽은 안구부터 골반까지 완전히 망가져 버려, 지금 벽에 기대어 한 손으로 간신히 총을 들어 접근하려 드는 니토를 주춤하게 했다.
막대한 대가를 치른 끝에, 일행이 마침내 방폭문 앞까지 돌파했다.
AK15가 브리칭!
나머지는 전력으로 엄호해!
라저!
콰앙!
AK-15가 방폭문에 힘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 방폭문의 견고함은 문을 넘어 매우 두꺼운 철벽같았다.
그 AK-15마저 빠르게 이 문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모두가 엄호해야 할 시간이 길어짐을 의미했다.
하지만, 상대도 물론 일행에게 자비를 베풀 기색이 없었다.
쿵! 쿵! 쿵! ......
쯧, 겨우 세 놈 해치웠나 했더니, 소대 하나가 증원됐네?
저것들 대체 뭔가요? 합금 덩어리처럼 단단하면서도 무진장 날렵하기까지 하고.
......
아무도 그녀의 말을 받아주지 않고 분위기만 점점 얼어붙었다.
이대로는 어떻게 될지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될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스 520은 그 예감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바닥을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행보는 저예산 영화에나 나올 장면 같지만...
그래도 결국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겠죠.
스티븐스... 뭐 할 생각이야?
너 지금 우리 중에서 가장 심하게 다친 상태잖아.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훗...
거기, 폭주 기관차 씨. 그 문짝 얼마나 더 걸려야 뚫을 수 있죠?
......
3분, 하지만 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좋아요.
당신들, 필요한 탄약과 폭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 제게 넘겨주세요.
여기 엄폐물 구조가 곧 무너질 것 같으니까, 조금 더 폭파하면 어느 정도 두꺼운 벽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저 두 괴물을 정면으로 이기는 건 무리겠지만, 가둬버릴 수는 있을 거예요. 단지 행동이 변화무쌍한 놈들 상대로 타이밍을 잴 사람이 필요하죠.
그게 누구냐... 바로 저예요.
스티븐스는 고개를 들어 시선으로 모두를 훑었다.
여러분은 아직 싸울 힘을 남겨 두셔야 해요. 저는 이미 도움이 안 되는 상태죠.
그러니까 나머지는 여러분께 맡길게요.
그리고... 혹시 그 인간을 본다면 대신 한마디 전해줄래요?
무슨 일이 생기든 그냥 건강하게 살라고요.
군인 같은 건 그만두고, 위험한 일에 머리 들이밀지 말고,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잘 살라고요.
......
안 돼! 스티븐스!
시간을 버는 일이라면 내가 할게! 나 아직 움직일 수 있어!
9...
9은 스티븐스를 말리고 싶었지만, 45가 제지했다.
거기 애꾸눈 언니 씨! 당신네 울보 동생 데리고 얼른 가세요.
당신들에겐 따로 할 일이 있잖아요?
네 메시지, 기억했어.
지휘관을 만나면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줄게.
으흐흑...
9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울음이 긴장된 분위기에 슬픈 기운을 물들였다.
결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가 그녀에게 눈빛으로 존중을 표했다.
콰앙!!
약속의 때가 왔다. AK-15가 방폭문을 폭파하는 순간, 두 니토의 주의가 바로 쏠렸다.
타앙!
스티븐스 520은 얼마 남지 않은 화력을 전부 퍼부었다. 제대로 맞는 총알은 얼마 없었지만, 놈들을 주춤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너희 상대는 나거든!
콰앙!
콰아앙!!
니토가 공중에서 총알을 회피했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그들의 움직임을 읽고 45가 미리 설치한 폭탄을 터뜨렸다.
이것으로 놈들의 주의를 한 몸에 끌었다. 저기 뚫린 방폭문을 지나가려면 눈앞에 있는 반쪽 인형을 해치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흥, 니토가 날고 기어도 니토인 건 안 변하지.
흄의 아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전광석화의 순간, 스티븐스가 마지막 스위치를 눌렀다.
콰아아아앙!!!
철근 콘크리트 구조가 완전히 무너져 무수한 돌덩이와 철근이 떨어져 넘어가기 힘든 산을 이루었다.
스티븐스도 화염 폭풍에 자신에게 덤벼든 니토와 함께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시간은 무척 길고도 몹시 짧았다. 스티븐스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삶이 마치 별똥별처럼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엘마와 입씨름하던 날들, 지휘관과 함께 싸우던 날들... 모두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언제 떠올려봐도 마치 수정 구슬처럼 무척 예쁘고 반짝였다.
프랑크푸르트 화이트존, 실험실 내부.
쉬익!
문이 열리는 순간, 시커먼 실내에서 번뜩이는 빛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인간인 J는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size=50>적습이다! 야시 모듈을 켜!</size>
언니...
어둠 속에서 9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J가 고개를 돌려 보자, 9이 넋이 나간 상태였다.
바로 9에게 달려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자마자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굴러와 그의 발끝에 부딪혔다.
그것은 45의 머리였다. 그녀의 얼굴은 문을 지나는 순간에 멈춰 있었다.
목 아래의 깔끔한 절단면은 마치 달군 나이프에 썰린 두부 같았다.
하지만 그 칼날은 45의 목을 베고서도 멈추지 않고,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한번 무언가를 베어 버렸다.
미세한 폭발음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45의 코어가 그 은밀하며 치명적인 참격에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size=50>4, 45!!!</size>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얼마 없는 불빛 속에서 기겁한 J는 다가온 것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본 순간 잠깐 멍해졌다.
하지만 눈을 깜빡하자 상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케빈! 정신 차려!
정신을 차리자 AN-94가 자신 앞을 가로막고 전광석화와 같은 상대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틀림없어! 틸이야!!
그런데 녀석이 어떻게...
<size=50>으아아아아아아!!!</size>
<size=50>45 언니를! 45 언니를 죽였어어어!!!</size>
<size=50>넌 내가 꼭 죽여버릴 거야아아아!!!</size>
겨우 정신을 차린 UMP9은 바로 총을 꺼내 틸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틸은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욱 강력했다. 은빛의 섬광 같은 그녀의 움직임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궤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AN-94와 UMP9이 힘을 합쳐도 계속 밀리기만 할 뿐이었다.
9! 감정에 휘둘리지 마!
뭘 멍하니 있나!
호오?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있나 봐?
거기 "최강의 인형", 대답해 봐. 너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
퍼엉!
갑자기 소닉붐이 닥쳤다. J의 고막이 터질 듯이 웅웅거렸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음이 이어지면서 실험실 천장은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 두 번의 굉음 말고 J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J가 뒤돌아보자, 균열이 잔뜩 생긴 벽 위에 갈대처럼 가늘고 길쭉한 모습이 서 있었다.
그런 몸집의 인형이 지금 코 푸는 듯이 한 손으로 AK-15의 목을 움켜쥐고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 인형은 자신이 목을 움켜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지, 히죽거리며 J에게 시선을 돌렸다.
J는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순식간에 AK-15는 번쩍 지나간 그림자에 벽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소닉붐도 저 가느다란 인형이 움직이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폭발음은 그녀가 AK-15를 벽에 처박는 순간에 난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요원 양반.
내가 누군지 기억해?
아, 아마리스...
아니, 넌 아마리스가 아니야. 대체 누구야?
아마리스가 맞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그녀요.
낯설어 보이는 것도 정상이고요. "달"은 저의 최고 걸작이니까요.
지금의 그녀야말로 손색없는 "최강의 인형"이죠.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발소리와 함께 실내의 전등이 하나씩 켜졌다.
그 등불에 J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앗... 아...
J는 말을 잃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이해 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케빈.
그동안 잘 지냈나요?
그녀의 표정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독수리 같았다. 그러나 독수리와 다른 점은...
그 미소였다, 그것은 J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실험실의 전등이 계속 켜지면서 J의 눈에 실내의 광경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순간 그는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떴다.
발라드가 지배하던 패러데우스가 저지른 인체 실험만 해도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것을 뛰어넘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한눈에 들어온 광경만 해도, 산전수전을 겪은 요원의 위장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지...?
이거 전부 네가 한 짓이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야! 넬레!!!
무슨 짓이냐고요?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세상을 개선하고, 규칙을 수정하고, 질서를 바로잡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이게 제가 하고 있는 일이에요.
아니, 그런 핑계는 필요없어...
그런 이유로 인체 실험을 할 순 없다고.
패러데우스는 이미 몰락했는데, 대체 왜 그걸 이어받은 거야?
놈들을 재건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는데!
그래서 당신은, 우리 지휘관이 발라드를 개처럼 쏴 죽인 것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여러분이 바라는 태평성대가 찾아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지휘관과 발라드마저 이루지 못한 위업을 해낸 것뿐이에요.
아버님, 이 인간을 처리합니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J가 고개를 돌리자, 얼음장 같은 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토막 난 두 인형을 들고 걸어왔다. 남은 옷조각으로나마 AN-94와 UMP9인 것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틸은 둘의 잔해를 마치 쓰레기 버리듯이 J의 앞에 던졌다.
9...
94...
아아...
그럴 필요 없지 않아? 우리 가엾은 케빈은 지금 홀몸이잖아.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아, 문밖에서 폴짝거리고 은신하는 벼룩 같은 녀석도 같이 잡아 왔어.
투웅!
이번에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인형의 잔해 두 구가 또 버려졌다.
리벨리온, 404...
모두 전멸했다.
임무는... 실패했다.
J는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이 모든 사실이 소화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낯선 모습이 되어버린 넬레를 노려보았다.
저 틸... 그리고 밖에 있던 엄청나게 강해진 니토들... 전부 다 네가 만든 거야?
아, 전부 사소한 일이었죠.
이 빌어먹을 년아!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지휘관도 네가 죽인 거야!?
넬레는 버럭버럭 울부짖는 J에게 곧바로 대답하진 않고, 한숨을 쉬고서 가까이 다가갔다.
실험실 바닥 전등의 빛에 넬레가 걸친 하얀 가운은 마치 사신의 망토 같았다.
발라드가 죽은 뒤, 훈작사가 저를 찾아와서 유적에 관한 일들을 들려줬어요.
제가 그동안 몰랐던 면을 알게 되면서 제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었는지 깨달았죠.
유적의 힘이야말로 신세계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예요.
유적, 유적, 유적... 너도 유적에 미쳐버린 망할 자식이었어!
너한테 할 말은 더 없어. 그저 연구하다 발작 나서 그 빌어먹을 신세계와 함께 개똥이나 처먹으라 빌어주지!
그럼, 저도 할 이야기가 없네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걸 생각해서 당신은 내버려두고 싶었는데.
이렇게 크게 소란을 일으켜 버렸으니, 훈작사한테 한 소리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처리할 수밖에 없어요...
넬레는 싱긋 웃고선 "달"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탁해요. 달.
일 처리 깔끔하게 해요.
알았어.
넬레의 모습은 점점 멀어졌고, 틸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아마리스"만 J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마, 케빈.
그냥 머리통 박살 나는 것뿐이니까 전혀 안 아플 거야.
J는 눈앞의 인형을 저주하듯 노려봤다. 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히죽거리며 중지를 구부리고 엄지로 눌렀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뇌수와 혈액이 함께 뒤섞여 벽에 붉은 꽃 모양을 활짝 피워냈다.
그중 한 살점은 아주 멀리 날아가, 저 멀리 폭발이 있었던 콘크리트 무덤까지 다다랐다.
끝내, 살점은 중력의 힘으로 서서히 땅에 떨어져, 결국 분홍색 프릴 조각 위에 철퍽 떨어졌다.
【BAD END 03】
사실 이 가능성은 수많은 방향과 분기점이 존재해요.
그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구역질 나는 하나를 특별히 골라서 보여준 거지만요.
만약 그때 "그녀"가 당신을 제지하지 않고, 당신이 분노를 쏟아내는 걸 내버려두었다면, 그 끝에 이어지는 결말이 바로 이래요.
물론 이 가능성에서도 당신은 염원하는 복수를 이룰 수 있어요. 하지만 많은 문제는 총알 한 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가식적인 남자와 대항할 수 있는 힘의 보호를 얻기 전에 도마 위에 올라서는 건 명백히 어리석은 일이죠.
정말 이런 방식으로 숙원을 이룰 수 있다면, 존경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빠진 당신은 "그래도 만족한다" 같은 헛소리나 하겠죠.
아쉽지만, "그녀"가 이런 결말을 용납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가장 근본적으로 이래봤자 아무 문제도 해결 안 돼요.
올바른 인도 없이는, 순수한 꿈나무일수록 차마 형용 못 할 흉물로 변이하기에 십상이죠.
이상이란 이런 양날의 검이랍니다.
말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먼저... 말판에서 벗어나야 해요.
사자에 맞서기 위해서는 곰의 힘을 빌려야 하죠.
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