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클립스」
그것은 당신이 가장 질색하는 패배.
호텔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예상보다 쉬웠다.
프랑크푸르트에 드리운 밤의 장막이야말로 최고의 엄호였고, 슈타지에게 지금 지휘관은 고립무원이라는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철통 보안"이라지만, 수많은 수라장을 헤치고 나온 지휘관의 눈에는 그냥 애들 장난 같았다.
그들의 전자 감시 설비에 대한 과한 의존도, 댄들라이가 마음껏 활약할 기회가 되었다.
교외의 비밀 합류 지점에서, 카리나와 리벨리온은 이미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길은 여전히 미지의 어둠이건만,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모두에게 한순간이나마 따스함을 가져다주었다.
카리나는 냅다 달려들어 지휘관의 품에 안겼다.
도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것까지, 그동안 걱정했던 마음과 지금의 기쁨을 나타냈다. 물론 지휘관의 무모함에 대한 원망도 조금 섞여 있었다.
지휘관님!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전부 목구멍에 막혀서 나오질 않았다.
지휘관의 무모함을 꾸짖고 싶었고, 자신이 얼마나 무섭고 걱정됐는지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지휘관이 피로감이 역력하긴 해도 저렇게 무사한 얼굴로 나타났을 때, 모든 감정이 코맹맹이 소리가 약간 섞인 씁쓸한 한마디로 녹아버렸다.
...무사하시면 됐어요.
지휘관도 카리나를 바라봤다. 이 며칠 동안 잘 쉬지도 못하고, 막대한 부담감에 시달리며 동분서주한 그녀는 초췌함에 더해 안색도 창백했다.
카리나가 억누른 격정과 두려움이, 지휘관도 느껴졌다.
...미안해, 카린.
계속 걱정시켜서.
예전처럼 카리나의 어깨를 토닥이려고 손을 뻗었다가, 그녀의 허약한 모습에 지휘관은 조금 더 상냥한 동작으로 바꿨다.
카리나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다소 어색한 동작이었지만, 자신의 지금 감정을 잘 표현해낸 것 같았다.
툭.
카리나는 지휘관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망치질했다. 찌푸렸던 미간도 서서히 풀어졌다.
어서 오세요, 지휘관님.
지휘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왔어, 카린.
그렇게 잠시 카리나와 시선을 나눈 후, 지휘관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고개를 향했다.
토카레프, C14, 다른 모두가, 다시 만난 지휘관을 기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휘관님... 저...
미안해, 모두.
네...?
카린한테서 들었어, 날 찾느라 너희가 엄청 고생했다고. 다 내가 독단으로 일을 벌인 탓이야.
아뇨! 저, 저희 모두 지휘관님을 믿고 있었어요!
지휘관님이 저희를 믿으셨던 것처럼, 저희도 지휘관님을 믿은 거예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지휘관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저희는 기쁜걸요.
토카레프는 수줍음 섞인 미소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폰 시절의 풋풋함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똑부러진 모습이 된 그녀를 보면서, 지휘관도 간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모두 도와줘서 고마워. 너희 덕분에, 내가 다시 여기서 모두와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니, 간결하게 할게.
댄들라이, 현재 상황과 이후의 계획을 모두에게 전달했지?
네.
...응? 이것이 댄들라이였나? 지휘관의 애완 디너게이트인 줄 알았다...
지휘관은 나를 디너게이트로 만들어 버리면서까지 나를 곁에 묶어 두고 싶으셨나 봐~
아잇, 손가락 치워.
슬그머니 다가온 M16A1이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자, 댄들라이는 앞발로 그녀의 손을 툭 쳐내곤 지휘관의 옷을 타고 머리 꼭대기로 올라갔다.
풋,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지휘관이 헛기침으로 이 잠깐의 촌극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전술 태블릿 한 대를 카리나에게 건넸다. 화면엔 패러데우스 공장의 위치와, 미리 계획한 그리폰 부대의 진격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작전 계획과 각종 대책을 공유하겠어.
갑자기 심각해진 지휘관의 표정에, 일동도 한껏 진지해졌다.
하벨 씨에게 붙잡힌 그날부터, 댄들라이에게 그들의 시스템으로 침투하도록 시켰어.
댄들라이만 침투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긴 금방이니까.
정말 막무가내셨다니까요. 정부 시스템은 대부분이 각자 분리되어 있어서 까다로운 건 둘째치고, 찾으라는 것도 전혀 두서가 없었어요. 저 말고 또 누가 이런 황당한 임무를 해냈을런지.
...물론, 일부 내부자들에게 도움도 받았지. 아무튼 그 결과 좌표 하나를 찾아내서, 댄들라이와 리벨리온을 통해 너희에게 전달한 거야.
좌표... 그 공장 말이군요?
고치를 풀어서 찾아낸 실마리지.
그리고, 내가... 주의를 끄는 동안, 너희가 그곳에 침입했지?
댄들라이는 다시 거기서부터 더듬어 올라가, 나무의 줄기를 찾아냈어.
확인 결과, 그곳은 프랑크푸르트 소재인 오버슈타인의 옛 연구소야.
지금은 윌리엄이 재가동해서 자신의 기지로 삼았고.
거기가 바로,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이야.
처음에 시키신 일에 비하면야 식은 죽 먹기였죠.
지휘관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솔직히, 이건 엄청 엉성한 계획이야. 더 다듬을 시간이 없었어.
하지만, 잠깐만이라도 눈을 돌리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기회니, 이번에 놓치면 다신 없을 거야.
댄들라이가 나뭇가지를 하나 더듬어서 "줄기"인 기지를 찾아냈지만, 다른 "가지"인 공장은 아마... 아니, 분명 거기 한 곳만이 아니야.
우리는 번개처럼 움직여야 해. 윌리엄... 그리고 훈작사에게, 반응할 틈을 주어선 안 돼.
그러니,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인다.
습격 팀은 윌리엄의 기지로 돌입해, 댄들라이가 기지의 시스템을 해킹하는 동안 주의를 끈다.
파괴 팀은 댄들라이가 찾아내는 나머지 "가지"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잘라낸다.
그리고, 습격 팀은 기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동시에... 참수 작전을 실행한다.
이건 아마... 다신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야.
리벨리온, M16은 나와 함께 기지를 습격한다.
......
AN-94이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토카레프 소대는 카린과 함께 움직여. 작전 목표에 대해서는 카린에게 이미 전달해 뒀으니, 가면서 설명해 줄 거야.
네!
카린, 이후의 소탕 작전은 전부 너에게 맡길게.
지휘관은 카리나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몸을 돌려,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휘관과 리벨리온이 탄 차량은 고요한 도로 위를 그림자처럼 달렸다.
M16에게서 연락. 외부 통신 교란 배치 끝났대.
기지는 이제 완전히 고립됐어.
AK-12가 능숙하게 운전하면서 가벼운 말투로 보고했다.
집주인이 우리의 기습 방문을 어떻게 생각하려나?
...기지 내 보안 시스템에 반응 있어?
아니, 현재 모두 정상이다.
AN-94가 감시 설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답했다.
어떠한 경계 경보도 없다.
너무 조용하군.
지휘관은 좌석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잠시 고민했다.
...놈의 오만함이 최고의 돌파구야.
놈은 지금 함정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사냥감이 제발로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어.
자기가 펼친 함정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뚫고 들어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겠지.
차는 은밀하게 가려진 환풍구 앞에서 멈췄다.
지휘관, 바로 이 앞이 연구실이야.
그리고 404에게서 연락. 공장 습격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대.
응.
지휘관은 마카로프 권총을 꺼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안전 장치를 풀고 장전했다.
지휘관의 신호를 받고, AK-15가 연구실의 두꺼운 금속 문짝을 발로 차 여는 동시에 방 가장 깊숙이를 조준했다.
그런데,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잠도 못자고 곱씹던 숙적이 아니었다. 패러데우스는 한 명도 없었다.
썰렁한 연구실에는 단 2명뿐이었다.
달빛을 빌어, 지휘관은 그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봤다.
굳은 표정의 훈작사, 그리고 착잡한 표정의 하벨이었다.
......!
실내 전등이 켜지자, 루련 제식 군복 차림인 병사들 수십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꺼먼 총구들은 일제히 문 앞에서 얼어붙은 지휘관 일행을 겨냥했다.
함정이었다. 다만, 윌리엄의 함정은 아니었다.
무기를 버리게, 지휘관.
훈작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아주 약간 피곤함이 섞여 있었다.
여기까질세.
...윌리엄은 어딨습니까.
지휘관은 목구멍이 바짝 마른 기분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는 여기 없네.
훈작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약 30분 전, 그가 루련에게 긴급 통신을 보내 왔네.
그리폰 지휘관의 "돌발 행동 중"을 "고발"했지. 자네가 이 "전 슈타지 소유"인 중요 시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려 한다고.
...윌리엄이, 전부 포기했단 말입니까?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낮게 깔리고, 움켜쥔 두 주먹에서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래. 그는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이 시설의 소유권을 포기했네. 그의 연구 성과와 사설 무력 집단까지 포함해서 말일세. 자네를 심판할 권리도, 루련 정부에게 완전히 이양했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윌리엄은 처음부터 자신과 결판을 낼 생각이 없었다고? 세상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윌리엄이... 그 자식이, 루니샤까지 포기했단 말입니까?
훈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사적인 연구 자료 몇 가지를 가져가긴 했네. 허나, 그의 개인 취향까지 루련이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이, 이 빌어먹을...!
충동적으로 훈작사에게 따지려 달려들었지만, 주위의 병사들에게 제지당했다.
지휘관은 완전히 깨달았다. 윌리엄은 이 기발한 정치 공작으로, 지휘관의 건곤일척의 복수극을 손쉽게 해결한 것이다.
이 연극에서, 윌리엄은 "개국공신"이자 "피해자" 역할을 맡아, 지휘관을 "대국도 아랑곳 않고 루련의 평화를 위협하는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유유히 퇴장하여, 장막 너머 더 깊숙이로 숨어,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중요한 것, 루니샤를 가져갔다.
훈작사... 저는...!
훈작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려, 더는 지휘관을 바라보지 않았다.
윌리엄이 승리했다.
그를 직접 심판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지휘관이 여기까지 오도록 버티게 해 준 복수의 불꽃은, 찬물 같은 현실에 꺼져 버렸다.
천천히, 지휘관은 손에서 총을 내려놓았다.
그런 지휘관의 모습을 보는 리벨리온 대원들도 눈빛이 분통함에 이글거렸지만, 결국 명령에 따랐다.
철컥.
차가운 수갑이 지휘관의 손에 채워졌다. 모든 분노, 원한, 분함과 함께.
정말 미안하게 됐네. 자넨 이제 프랑크푸르트 밖으로 연행될걸세. 조사 절차도, 많이 길어질 게야...
......
지휘관은 패배하고 말았다.
전장에서가 아니라, 저항하고자 한 이 세상의 규칙에게.
자신이 혐오하던 정치적 거래에 패배했다.
윌리엄이라는 유령은 여생이라는 새장 위에서 영원히 맴돌았고, 지휘관은 다시 윌리엄의 털끝조차 건드릴 기회를 얻지 못했다.
【END】
이 가능성은 아주, 아주, 아주~ 희박해요.
하지만 0은 아니죠.
우리가 공장을 습격했을 때, 훈작사는 아직 상황 파악도 못했을지 몰라도, 윌리엄은 분명히 당신의 의중을 읽었을 거예요.
수억분의 1에 가까운 가능성으로, 그는 당신과의 결투에서 도망쳐, 초등학생 같은 필살기 "일러바치기"를 쓸지도 모르는 일이죠. 솔직히 말해서, 그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신에겐 손쓸 방도가 전혀 없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정말 그렇게 사고방식이 말짱한 인간이었다면,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예 다르게 흘러갔겠죠?
이건 단지 참고 자료일 뿐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다시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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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예상보다 쉬웠다.
프랑크푸르트에 드리운 밤의 장막이야말로 최고의 엄호였고, 슈타지에게 지금 지휘관은 고립무원이라는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철통 보안"이라지만, 수많은 수라장을 헤치고 나온 지휘관의 눈에는 그냥 애들 장난 같았다.
그들의 전자 감시 설비에 대한 과한 의존도, 댄들라이가 마음껏 활약할 기회가 되었다.
교외의 비밀 합류 지점에서, 카리나와 리벨리온은 이미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길은 여전히 미지의 어둠이건만,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모두에게 한순간이나마 따스함을 가져다주었다.
카리나는 냅다 달려들어 지휘관의 품에 안겼다.
도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것까지, 그동안 걱정했던 마음과 지금의 기쁨을 나타냈다. 물론 지휘관의 무모함에 대한 원망도 조금 섞여 있었다.
지휘관님!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전부 목구멍에 막혀서 나오질 않았다.
지휘관의 무모함을 꾸짖고 싶었고, 자신이 얼마나 무섭고 걱정됐는지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지휘관이 피로감이 역력하긴 해도 저렇게 무사한 얼굴로 나타났을 때, 모든 감정이 코맹맹이 소리가 약간 섞인 씁쓸한 한마디로 녹아버렸다.
...무사하시면 됐어요.
지휘관도 카리나를 바라봤다. 이 며칠 동안 잘 쉬지도 못하고, 막대한 부담감에 시달리며 동분서주한 그녀는 초췌함에 더해 안색도 창백했다.
카리나가 억누른 격정과 두려움이, 지휘관도 느껴졌다.
...미안해, 카린.
계속 걱정시켜서.
예전처럼 카리나의 어깨를 토닥이려고 손을 뻗었다가, 그녀의 허약한 모습에 지휘관은 조금 더 상냥한 동작으로 바꿨다.
카리나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다소 어색한 동작이었지만, 자신의 지금 감정을 잘 표현해낸 것 같았다.
툭.
카리나는 지휘관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망치질했다. 찌푸렸던 미간도 서서히 풀어졌다.
어서 오세요, 지휘관님.
지휘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왔어, 카린.
그렇게 잠시 카리나와 시선을 나눈 후, 지휘관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고개를 향했다.
토카레프, C14, 다른 모두가, 다시 만난 지휘관을 기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휘관님... 저...
미안해, 모두.
네...?
카린한테서 들었어, 날 찾느라 너희가 엄청 고생했다고. 다 내가 독단으로 일을 벌인 탓이야.
아뇨! 저, 저희 모두 지휘관님을 믿고 있었어요!
지휘관님이 저희를 믿으셨던 것처럼, 저희도 지휘관님을 믿은 거예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지휘관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저희는 기쁜걸요.
토카레프는 수줍음 섞인 미소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폰 시절의 풋풋함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똑부러진 모습이 된 그녀를 보면서, 지휘관도 간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모두 도와줘서 고마워. 너희 덕분에, 내가 다시 여기서 모두와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니, 간결하게 할게.
댄들라이, 현재 상황과 이후의 계획을 모두에게 전달했지?
네.
...응? 이것이 댄들라이였나? 지휘관의 애완 디너게이트인 줄 알았다...
지휘관은 나를 디너게이트로 만들어 버리면서까지 나를 곁에 묶어 두고 싶으셨나 봐~
아잇, 손가락 치워.
슬그머니 다가온 M16A1이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자, 댄들라이는 앞발로 그녀의 손을 툭 쳐내곤 지휘관의 옷을 타고 머리 꼭대기로 올라갔다.
풋,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지휘관이 헛기침으로 이 잠깐의 촌극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전술 태블릿 한 대를 카리나에게 건넸다. 화면엔 패러데우스 공장의 위치와, 미리 계획한 그리폰 부대의 진격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작전 계획과 각종 대책을 공유하겠어.
갑자기 심각해진 지휘관의 표정에, 일동도 한껏 진지해졌다.
하벨 씨에게 붙잡힌 그날부터, 댄들라이에게 그들의 시스템으로 침투하도록 시켰어.
댄들라이만 침투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긴 금방이니까.
정말 막무가내셨다니까요. 정부 시스템은 대부분이 각자 분리되어 있어서 까다로운 건 둘째치고, 찾으라는 것도 전혀 두서가 없었어요. 저 말고 또 누가 이런 황당한 임무를 해냈을런지.
...물론, 일부 내부자들에게 도움도 받았지. 아무튼 그 결과 좌표 하나를 찾아내서, 댄들라이와 리벨리온을 통해 너희에게 전달한 거야.
좌표... 그 공장 말이군요?
고치를 풀어서 찾아낸 실마리지.
그리고, 내가... 주의를 끄는 동안, 너희가 그곳에 침입했지?
댄들라이는 다시 거기서부터 더듬어 올라가, 나무의 줄기를 찾아냈어.
확인 결과, 그곳은 프랑크푸르트 소재인 오버슈타인의 옛 연구소야.
지금은 윌리엄이 재가동해서 자신의 기지로 삼았고.
거기가 바로,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이야.
처음에 시키신 일에 비하면야 식은 죽 먹기였죠.
지휘관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솔직히, 이건 엄청 엉성한 계획이야. 더 다듬을 시간이 없었어.
하지만, 잠깐만이라도 눈을 돌리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기회니, 이번에 놓치면 다신 없을 거야.
댄들라이가 나뭇가지를 하나 더듬어서 "줄기"인 기지를 찾아냈지만, 다른 "가지"인 공장은 아마... 아니, 분명 거기 한 곳만이 아니야.
우리는 번개처럼 움직여야 해. 윌리엄... 그리고 훈작사에게, 반응할 틈을 주어선 안 돼.
그러니,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인다.
습격 팀은 윌리엄의 기지로 돌입해, 댄들라이가 기지의 시스템을 해킹하는 동안 주의를 끈다.
파괴 팀은 댄들라이가 찾아내는 나머지 "가지"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잘라낸다.
그리고, 습격 팀은 기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동시에... 참수 작전을 실행한다.
이건 아마... 다신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야.
리벨리온, M16은 나와 함께 기지를 습격한다.
......
AN-94이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토카레프 소대는 카린과 함께 움직여. 작전 목표에 대해서는 카린에게 이미 전달해 뒀으니, 가면서 설명해 줄 거야.
네!
카린, 이후의 소탕 작전은 전부 너에게 맡길게.
지휘관은 카리나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몸을 돌려,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휘관과 리벨리온이 탄 차량은 고요한 도로 위를 그림자처럼 달렸다.
M16에게서 연락. 외부 통신 교란 배치 끝났대.
기지는 이제 완전히 고립됐어.
AK-12가 능숙하게 운전하면서 가벼운 말투로 보고했다.
집주인이 우리의 기습 방문을 어떻게 생각하려나?
...기지 내 보안 시스템에 반응 있어?
아니, 현재 모두 정상이다.
AN-94가 감시 설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답했다.
어떠한 경계 경보도 없다.
너무 조용하군.
지휘관은 좌석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잠시 고민했다.
...놈의 오만함이 최고의 돌파구야.
놈은 지금 함정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사냥감이 제발로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어.
자기가 펼친 함정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뚫고 들어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겠지.
차는 은밀하게 가려진 환풍구 앞에서 멈췄다.
지휘관, 바로 이 앞이 연구실이야.
그리고 404에게서 연락. 공장 습격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대.
응.
지휘관은 마카로프 권총을 꺼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안전 장치를 풀고 장전했다.
지휘관의 신호를 받고, AK-15가 연구실의 두꺼운 금속 문짝을 발로 차 여는 동시에 방 가장 깊숙이를 조준했다.
그런데,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잠도 못자고 곱씹던 숙적이 아니었다. 패러데우스는 한 명도 없었다.
썰렁한 연구실에는 단 2명뿐이었다.
달빛을 빌어, 지휘관은 그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봤다.
굳은 표정의 훈작사, 그리고 착잡한 표정의 하벨이었다.
......!
실내 전등이 켜지자, 루련 제식 군복 차림인 병사들 수십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꺼먼 총구들은 일제히 문 앞에서 얼어붙은 지휘관 일행을 겨냥했다.
함정이었다. 다만, 윌리엄의 함정은 아니었다.
무기를 버리게, 지휘관.
훈작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아주 약간 피곤함이 섞여 있었다.
여기까질세.
...윌리엄은 어딨습니까.
지휘관은 목구멍이 바짝 마른 기분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는 여기 없네.
훈작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약 30분 전, 그가 루련에게 긴급 통신을 보내 왔네.
그리폰 지휘관의 "돌발 행동 중"을 "고발"했지. 자네가 이 "전 슈타지 소유"인 중요 시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려 한다고.
...윌리엄이, 전부 포기했단 말입니까?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낮게 깔리고, 움켜쥔 두 주먹에서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래. 그는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이 시설의 소유권을 포기했네. 그의 연구 성과와 사설 무력 집단까지 포함해서 말일세. 자네를 심판할 권리도, 루련 정부에게 완전히 이양했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윌리엄은 처음부터 자신과 결판을 낼 생각이 없었다고? 세상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윌리엄이... 그 자식이, 루니샤까지 포기했단 말입니까?
훈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사적인 연구 자료 몇 가지를 가져가긴 했네. 허나, 그의 개인 취향까지 루련이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이, 이 빌어먹을...!
충동적으로 훈작사에게 따지려 달려들었지만, 주위의 병사들에게 제지당했다.
지휘관은 완전히 깨달았다. 윌리엄은 이 기발한 정치 공작으로, 지휘관의 건곤일척의 복수극을 손쉽게 해결한 것이다.
이 연극에서, 윌리엄은 "개국공신"이자 "피해자" 역할을 맡아, 지휘관을 "대국도 아랑곳 않고 루련의 평화를 위협하는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유유히 퇴장하여, 장막 너머 더 깊숙이로 숨어,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중요한 것, 루니샤를 가져갔다.
훈작사... 저는...!
훈작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려, 더는 지휘관을 바라보지 않았다.
윌리엄이 승리했다.
그를 직접 심판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지휘관이 여기까지 오도록 버티게 해 준 복수의 불꽃은, 찬물 같은 현실에 꺼져 버렸다.
천천히, 지휘관은 손에서 총을 내려놓았다.
그런 지휘관의 모습을 보는 리벨리온 대원들도 눈빛이 분통함에 이글거렸지만, 결국 명령에 따랐다.
철컥.
차가운 수갑이 지휘관의 손에 채워졌다. 모든 분노, 원한, 분함과 함께.
정말 미안하게 됐네. 자넨 이제 프랑크푸르트 밖으로 연행될걸세. 조사 절차도, 많이 길어질 게야...
......
지휘관은 패배하고 말았다.
전장에서가 아니라, 저항하고자 한 이 세상의 규칙에게.
자신이 혐오하던 정치적 거래에 패배했다.
윌리엄이라는 유령은 여생이라는 새장 위에서 영원히 맴돌았고, 지휘관은 다시 윌리엄의 털끝조차 건드릴 기회를 얻지 못했다.
【END】
이 가능성은 아주, 아주, 아주~ 희박해요.
하지만 0은 아니죠.
우리가 공장을 습격했을 때, 훈작사는 아직 상황 파악도 못했을지 몰라도, 윌리엄은 분명히 당신의 의중을 읽었을 거예요.
수억분의 1에 가까운 가능성으로, 그는 당신과의 결투에서 도망쳐, 초등학생 같은 필살기 "일러바치기"를 쓸지도 모르는 일이죠. 솔직히 말해서, 그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신에겐 손쓸 방도가 전혀 없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정말 그렇게 사고방식이 말짱한 인간이었다면,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예 다르게 흘러갔겠죠?
이건 단지 참고 자료일 뿐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다시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