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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20 · 고치 속 나비

회상

비 내리는 밤의 대치 속, 대역과 배신의 이야기가 다른 시점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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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곳의 개인 요양원.

후두토

여기라면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 걱정은 없을 거예요. 이제 말해 주세요, 대체 어떤 소문이죠?

TAC50

우와아...

그곳은 단순한 방이 아닌,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소장품 전시실이었다.

천장엔 유화가 그려졌고, 두껍고 화려한 커튼이 문을 열 때 들어온 바람에 대리석 바닥 위에서 찰랑거렸다.

벽을 따라 한 줄로 늘어선 높다란 진열대들 안에는 주문제작된 피규어를 비롯한 파사두의 각종 굿즈들로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진열대 옆에는 정교하게 무늬가 새겨진 나무 옷장이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진 TAC-50는 홀린 듯 옷장에 다가가, 참지 못하고 그만 문을 활짝 열었다.

후두토

무슨 짓이에요!?

TAC50

이... 이거 다 파사두 씨의 무대 의상이죠...? 맞죠!? 이거 전부 다 사신 거예요?!

은은한 장미꽃 향기를 토해내며 활짝 열린 목제 옷장 안에는 파사두의 뮤지컬용 무대 의상들이 각각 투명한 비닐 커버에 담긴 채로 잔뜩 걸려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바탕에 치맛자락에 온갖 새들의 깃털이 장식된 드레스, 보석이 박힌 복고풍 궁중 롱스커트, 부드럽고 소박한 느낌의 시골 아가씨의 작업복...

후두토

그만! 아무리 전술인형이라도 집주인의 허락 없이 물건을 함부로 뒤지면 안 되죠!

후두토가 화를 내며 옷장의 문을 닫았고, TAC-50는 흥분과 환희, 원망 등 여러 감정이 한데 뒤섞인 표정을 하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TAC50

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례를... 이렇게 파사두 씨의 기운이 충만한 방을 봐서 너무 흥분했나 봐요. 역시 당신도 파사두 씨의 열렬한 팬이시군요!

후두토

제 인내심이 다하기 전에 질문에나 대답하세요.

TAC50

아, 네, 그 소문 말이죠?

솔직히 제가 보기에, 그건 아무래도 곧 데뷔하려는 신인 배우가 동종업계에서 파사두 씨의 명성이 눈에 거슬려서 루머로 여론 조작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후두토 씨도 아실 테죠? 이 업계에서,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잔인한지...

후두토

알다마다요, 정말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TAC50

파사두 씨가 그토록 훌륭하셨고 아직도 인기가 많으시니, 같은 타입의 배우가 명성을 얻으려고 안티를 모아 선동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해요.

설상가상으로 파사두 씨에 알라 씨까지 세상을 떠났으니, 저희 같은 몇몇 팬을 제외하면 직접 나서서 파사두 씨를 변호해 줄 사람도 없고요.

후두토

......

그래서, 대체 얼마나 추잡한 루머길래 그러나요?

TAC50

줄곧 파사두 씨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제인 도는 아주 치밀하게 행동했어요. 파사두 씨의 일기 외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니까요.

안티들은 그 점을 노려서, 사실 제인 도란 사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다 파사두 씨의 망상과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후두토

하하...

TAC50

게다가, 파사두 씨가 사실은 알려진 것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허영심 가득한 이기적인 여자라고까지 하지 뭐예요?

알라 씨와 결혼한 뒤엔 그를 못살게 굴었다고 하질 않나...

게다가 병에 걸려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견디지 못해, 모든 걸 부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전설을 남겨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다고...

후두토

하하하, 황당해서 웃음이 다 나오네요!

그런 억지투성이인 루머를 믿는 사람이 정말 있다고요?

TAC50

제 말이요! 파사두 씨가 어떻게 그런 사람일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제가 그 저질스런 루머를 해명하려 노력해도 확실한 증거도 없고, 사람들은 늘 황당하고 자극적인 소문을 더 좋아해서 문제라니까요!

후두토

......

TAC-50의 푸념을 듣는 후두토는 초조해하며 방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했다.

TAC50

어... 후두토 씨? 너무 그렇게 화내실 필요는 없어요.

비록 파사두 씨는 떠났고 그분을 믿는 건 저희뿐일지라도, 분명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후두토

...그 루머, 어디서 들었나요? 알려 주세요.

TAC50

네, 잠깐만요.

TAC-50이 자신의 통신기를 꺼내, 자주 방문하는 게시판 사이트를 열었다.

TAC50

그런데... 정말 보시려고요?

무지 심한 글이 많은데...

후두토

줘 봐요.

후두토는 망설이는 TAC-50의 손에서 통신기를 낚아채, 진지하게 그 게시판 사이트를 살펴봤다.

게시판

"충격! 1년 전 극장 화재 사건의 반전?!"

"천사인가 악마인가, 파사두의 심리를.araboja"

"딴 여자가 끼어들었다고 극장을 불태운 파사두, 실은 정신분열증이었다?"

"냉혹한 여자의 내면 세계 feat. Passado"

후두토는 게시판의 글들을 확인하면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점점 이마에 솟는 핏줄이 그녀의 심정을 대신했다.

TAC50

지난 며칠 내내 여러 곳에 파사두 씨에 관한 자료를 잔뜩 첨부한 글을 올려서, 파사두 씨가 어떤 분이셨는지 해명하려 했지만...

제인 도가 언급되기만 하면 도무지 어쩔 수가 없어서...

후두토

......

TAC50

게다가 오늘은 파사두 씨 서거 1주기잖아요, 그래서 저희 쪽의 팬클럽에서 추모 활동을 조직하려 했는데...

이 루머 때문에 회원들이 잔뜩 탈퇴하는 바람에, 활동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어요.

후두토

그렇게 쉽게 등돌리는 사람은 팬이라 할 자격도 없어요.

TAC50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루머는 진정한 팬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이에요!

그것 때문에 저희 팬클럽이 큰 피해를 입었고, 파사두 씨를 위해 여론 앞에 나서 줄 사람도 적어졌지만...

만약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다면, 분명 이 부정적인 여론을 뒤집을 수 있을 거예요!

TAC-50이 열정적인 눈빛으로 후두토에게 말을 계속했다.

TAC50

후두토 씨, 당신께는 분명 엄청난 인맥과 소식통이 있으시죠? 일반인이라면 꿈도 못 꿀 물건을 이렇게나 많이 갖고 계시잖아요.

파사두 씨의 명예를 위해서, 저를 도와 주실 순 없을까요?

후두토

............

후두토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찡그렸다.

TAC-50은 그녀가 치열한 내적갈등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후두토

......죄송해요. 전 그저 수집가일 뿐이지,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어요. 대신 연극계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원하신다면――

TAC50

소용없어요.

이미 해볼 만한 방법은 다 시도해봤거든요.

후두토

......

그럼 이쪽도 똑같이 사람을 매수해서——

갑자기 TAC-50이 옷장을 다시 활짝 열었다.

TAC50

며칠 전, 그 신인 배우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어요.

TAC-50이 옷장의 하얀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TAC50

파사두 씨와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파사두 씨의 창법을 따라했어요.

무대 아래 관객들은 파사두 씨는 벌써 다 잊었다는 듯이, 그녀의 노래에 푹 빠졌어요.

후두토

......

TAC50

오직 저만이 파사두 씨를 그리워하며 그 짝퉁 연기에 분노했어요...

이대로 계속 내버려둔다면, 모두가 파사두 씨를 잊어버리게 될 거예요.

이 아름다운 의상들처럼, 옷장 속에 묻혀 조용히 사라질 거예요.

매일같이 방부제를 갈아 넣더라도, 결국엔 안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썩은내를 가릴 수 없게 돼요.

후두토

......

후두토는 터질 것만 같은 분노를 애써 억누르는 듯, 옷자락을 꽈악 움켜쥐었다.

TAC50

그래도 상관없으시다면, 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세요.

이해해요, 누구나 죽은 사람을 위해 끝까지 싸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죽은 이는 떠나보내고, 현실을 살아 가는 게 이치죠.

하지만, 저는 인형으로서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설정이 붙은 채로 태어났어요.

그러니 전 끝까지 그분을 수호할 거예요, 제가 기능이 정지될 때까지.

의연한 TAC-50의 태도에, 후두토는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후두토

......잠시만요.

후두토는 힘겹게 서랍 밑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지니고 있던 열쇠로 상자의 자물쇠를 열었다.

TAC50

그건...?

후두토

파사두의 개인 사진이에요. 아주 큰 돈을 들여 얻은 물건이죠.

TAC-50는 그 사진을 조심스레 건네받았다.

사진 속에는 서로에게 기대고서 활짝 웃는 파사두와 알라가 있었다.

그리고 파사두 곁에는 낯선 여성이 서 있었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TAC-50은 그 여성의 얼굴을, 뭐라 말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두토

그 여자가 바로 "제인 도"예요.

TAC50

네...?! 소문에 따르면 제인 도는 파사두 씨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얼굴을 성형했다고 하던데...

그럼, 이 사진 속의 얼굴이 바로 제인 도의 본래 얼굴인가요?

후두토

맞아요.

TAC50

하지만, 이 여자가 제인 도라고 어떻게 증명하죠?

후두토

......

TAC50

......아뇨, 질문을 바꿀게요. 후두토 씨는 어떻게 이 여성이 제인 도인지 아시죠?

여태까지 경찰의 조사한 바로도, 파사두 씨의 일기를 제외하면 그 어떤 곳에서도 제인 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후두토

간단해요, 제가 바로 제인 도니까요.

TAC50

......

제인 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인형 아가씨.

파사두 씨를 죽이려 한 적은 하늘에 맹세코 없어요. 그저...

그녀가 너무나도 부러워서, 그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전 실패했어요. 파사두 씨의 죽음으로, 철저하게 실패했어요.

TAC50

......

제인 도?

당신이 제 얼굴을 계속 뚫어져라 살펴본 이유도 알아요, 성형 수술의 흔적을 발견해서죠?

흉터가 얼마나 미세한들, 역시 당신들 인형의 눈을 속일 수는 없네요.

애초부터 당신을 안으로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의심했나요?

파사두 씨와 아주 닮은 얼굴로, 이렇게 외딴 시골에 은거하면서, 파사두의 물건까지 이렇게나 많이 소장했으니까!

티가 나도 너무 났죠!?

TAC50

그런데 왜 갑자기...

제인 도?

당신 말대로예요.

그 어리석은 사람들이 파사두의 명예를 짓밟는 걸, 저도 더는 두고볼 수 없어요. 제 정체를 세상에 밝히는 한이 있더라도.

전 몇 년의 시간을 들여 파사두가 되려 했어요. 파사두는 이미, 제게 있어 또 하나의 나예요.

TAC50

그, 그럼 알라 씨는요? 당신이 파사두 씨가 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나요?

제인 도?

......

그저, 세상 모든 여자가 저지르는 잘못을 저질렀을 뿐이에요. 사랑해선 안 될 남자를 사랑한 거죠.

하지만 파사두에게 흑심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파사두를 위해서라면, 전 직접 나서서 제 존재를 입증할 수 있어요.

TAC50

그 대신 조건은 뭐죠?

제인 도?

거주지 등의 신상 정보는 비밀로 해 주세요.

전 이미 죄를 저지른 대가를 치르고 모든 걸 잃었어요. 지금은 단지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TAC50

......

제인 도?

어때요, 이 정도라면 괜찮은 거래 조건 아닌가요?

TAC50

멋진 말솜씨에, 감정 연출까지 세심하군요...

과연이라 할지, 역할에 몰입하셔서 캐릭터의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내시네요.

제인 도?

그게 무슨 소리죠?

TAC-50가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TAC50

여기에 들어와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 당신이 누군지 알았어요. 당신은 후두토도, 제인 도도 아니에요.

당신이 바로, 파사두 씨예요.

번쩍!

창백한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과, TAC-50의 눈가의 그늘을 밝게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