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K
MOD 2
공방의 마인드맵 업그레이드실.
카리나는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며, 다소 속상한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안 돼요, 지휘관님...
나도 보고 있어.
어떡하죠? 유사 사례에 쓰인 방법 전부 다 해봤는데...
효과가 조금이라도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
지휘관이 미간을 좁힌 채 침묵하니, 환기구의 틈새를 드나드는 공기마저 정체된 듯했다.
역시... 이럴 땐 그분께 도움을 청해야겠지.
PPK는 무너진 잔해의 차가운 벽에 나른하게 기대어 남은 탄창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방금 전의 전투로 난 소음에 주변의 감염자 무리가 또 몰려왔었다.
상정하지 않았던 전투에 억지로 임해야 했기에, PPK에겐 이제 총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 끝내주는 싸움이었어! 오늘도 사나야의 활약이 세상을 더 깨끗하게 만들었다!
......
너 몇 살이니? 어린이가 이상한 거 보면 못써요~?
PPK가 비아냥댔지만 사나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활약"할 기회가 있을 때만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PPK, 나다. 지휘관이 아직 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못 찾았다는군.
어휴... 이거, 꽤나 흔치 않은 말썽인가 봐?
그라치가 수색 임무를 마쳐서 지금 네 위치로 이동 중이다.
아하, 그라치만...
...날 이대로 묻어버릴 셈이구나?
다 들리거든요~?
기다리고 있어, 대충 15분 뒤면 도착해.
그런고로, 먼저 그라치와 합류해라. 그리고 얼른 임무 완수하고 돌아가서 정비를 받던가 해.
네에 네에.
통신 종료.
PPK는 다시 무장을 점검한 뒤, MP443이 합류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지금까지의 임무 진도를 보고서에 기록했다.
임무 유형, 수행 위치, 소요 시간...
물 흐르듯 보고서를 작성해 내려가던 PPK는 상세 상황 입력란에 도달했을 때, 불현듯 깨달았다.
......어? 임무 목표인 보모 인형의 모델명과 이름이 뭐였더라?
구조해야 하는 애의 이름도... 뭐였지?
당혹감을 억누르며 파이슨이 보냈던 임무 브리핑 파일을 확인했지만, 새하얀 배경의 새까만 글씨가 보임에도 어째선지 그 내용을 전혀 인식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냐고...
칙——치직——
시끄러운 소음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또렷하게 보였던 정보에, 시꺼먼 모자이크가 씌워져 그녀의 마인드맵 안을 맴돌았다.
또 뭐야...
누구 없나요... 빨리... 빨리 구해 주세요...
...에리카니? 빨리 좌표 보내, 어서.
아이가... 아이가 더는 못 버텨요...
여자 아이 말이야? 걔——
제발 구해 주세요...
돌연 밀려온 뜨겁고 끈적한 열기가 그녀의 살갗에 들러붙어, 목이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무거운 어둠에 머리를 짓눌리며, PPK의 의식은 또다시 추락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떨어졌다.
이윽고, PPK는 그 정체불명의 공간에 돌아온 자신을 발견했다.
아아 차암, 또야?
문득 생각나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 음영이 드리운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넓고 컴컴한 공간의 바닥에, 깨진 기억 파편의 조각들이 서글픈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에리카?
히히!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물결을 일으키듯, 돌연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PPK도 주위를 둘러봤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 목소리... 그래, 내 마인드맵 안에서 말하던 그 목소리야.
사나야지? 당장 나와!
PPK는 반사적으로 총을 뽑으려 손을 뻗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권총은 온데간데 없었다.
떼쓰면 안 돼요 아가씨, 이제 쿨쿨 잘 시간이에요.
그 말과 함께 흐릿한 반투명 유리 같은 벽이 홀연히 나타났고, 그 유리벽 너머로는 한 소녀의 그림자가 비쳤다.
PPK는 성큼성큼 다가가 있는 힘껏 유리벽에 몸을 부딪쳤지만 끄떡하지도 않았고, 어째선지 막혀 있지 않은 벽 뒤로 가 보니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대체... 또 에리카의 기억인가?
안 졸린걸! 안 잘 거야!
정 날 재우고 싶다면 저번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 주거라~!
웃음소리의 주인도 유리벽 너머의 그림자로 나타났다. PPK는 두 그림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상대의 윤곽을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그려보려 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이야기 들려드려도 성에 안 차시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처음부터 다시 들려줘!
어휴, 그러죠 뭐.
소녀의 그림자는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곤 왼편으로 자리를 옮겼고, 꼬마의 그림자는 오른편에 반듯하게 앉았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아리따운 미녀인 킬러가 살았답니다. 그녀의 이름은——
사나야! 킬러의 이름은 사나야야!
네에 네에.
맙소사... 그 미녀 킬러 이야기, 애 달래려고 지어낸 이야기였어?
그런 시시한 걸로 날 곤란하게 만들어!?
PPK가 홧김에 유리벽을 내리쳤지만, 벽 너머의 그림자들에겐 당연히 그 충격이 닿지 않았다.
야! 거기 너! 이야기 지어내는 솜씨가 엉망이어도 너무 엉망이잖아!
에리카로 보이는 그림자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리따운 킬러 사나야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매끄럽게 찰랑이는 장발과 별하늘처럼 반짝이는 그윽한 눈동자 때문에, 어딜 가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답니다.
게다가, 킬러면서 부귀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스릴 넘치는 모험을 추구하는 터프걸이었어요.
응 응! 난 그런 시원시원한 이야기가 좋아!
벌써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에, PPK는 짜증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사나야는 인기 만점이야! 누구라도 한눈에 반해 버려!
악덕 재벌이지만 멋쟁이인 쿨가이도 반하고, 나쁜 범죄자도 사나야한테 엄청 매력을 느낄 정도로!
네에 네에.
악덕 재벌이 무릎 꿇고 청혼해도 차갑게 비웃으며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하면 되죠?
맞아 맞아!!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눈앞에서 칼을 휘둘러도... 어...
도망치는 뒷모습마저 카리스마 넘친다?
아니야!
사나야는 절대 싸움에서 도망치지 않는다구!
......
어어... 그럼, 콧방귀를 뀌는 그 사이에 상대의 목을 베어버린다던가?
그거야 그거! 사나야는 용감무쌍하고,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건 누구든지 쓱싹하고 해치워!
설령 붙잡혀서 가혹한 고문을 받더라도, 사나야는 그저 웃으면서——
더 해 봐! 좀 더 아프게 해 보라니까!
두 그림자가 웃으면서 "킬러 사나야"의 이야기를 짓는 동안, PPK는 안간힘을 쓰며 유리벽을 깨부수려 했다.
끈질긴 맹공 끝에, 유리벽에 드디어 아주 작은 금이 갔다. PPK가 이를 놓치지 않고 혼신의 일격을 가하자――
그 순간, 만화경처럼 온갖 알록달록한 화면들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어지러움이 가신 뒤, PPK는 마침내 유리벽 너머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유리벽 너머의 두 그림자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지만, 그들의 외모는 어째선지 흐릿하게 먹칠이 되어 있어 정확히 누군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용감한 사나야는, 아무리 험난한 길이어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설령...
저기...
앗, 손님이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손님. 에리카가 모시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에리카! 내 간식 꺼내 와! 오늘은 그러니까——
순간 모든 움직임이 멎더니, 넓은 공간 전체가 풍화되듯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PPK는 떨리는 마음으로 깨어져 가는 바닥 위를 건너며, 흩어지는 형상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돌연 밀려온 뜨겁고 끈적한 열기가 그녀의 살갗에 들러붙어, 목이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콰앙! 굉음과 함께 PPK는 또다시 어둠 속에 빠져, 돌풍에 날아가듯 꺼지는 땅속으로 추락했다.
에리카...
완전히 어둠이 빠지기 직전, PPK의 귓가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리카! 일어나!
에리카...
에리카!!!
PPK가 눈을 번쩍 떠 보니, 옆에는 조금 전만 해도 없었던 것이 늘어나 있었다.
이제야 일어났구나!
인간 여자아이가 곁에서 그 조그마한 손으로 PPK를 붙잡아 흔들고 있었다.
비록 지금 머릿속이 실뭉치처럼 엉망임에도, PPK는 이런 위험한 곳에 보통의 인간 어린이가 있을 리 없단 것쯤은 바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임무 목표임이 확실했다.
이 목소리... 사나야? 네가――
에리카, 잠 덜 깼어?
...왜 날 에리카라 부르니? 설마, 이거 아직도 에리카의 기억 속인가?
난 멀쩡해! 아픈 곳 전혀 없어!
쯧... 대화가 안 이어지는 걸 보니 기억 속 맞구나.
그런데, 여기는... 역시 내가 찾아낸 그곳과 가까워 보이네.
히히, 잠 다 깼으면 같이 놀자!
누가 먼저 저어~기 바위까지 가나 시합이야!
여자아이는 발랄하게 웃으며 멀리 있는 바위를 가리키더니, 말도 다 안 끝내고 냅다 달려갔다.
기다려!
PPK는 곧장 그 아이를 따라나섰지만, 몸에 힘도 들어가질 않는 데다 익숙하디 익숙할 자신의 권총마저 무겁게만 느껴졌다.
에리카 느려! 빨리 오라구!
지금의 나는 에리카의 시점인가 보네... 아무리 보모 인형이라지만, 이 소체 성능 너무 약하게 설정된 거 아니야?
나 거의 다 왔~다아~!
......
바람만 살짝 불어도 넘어질 것만 같은 연약한 몸을 이끌며, PPK는 주변에 ELID의 기척은 없나 경계하며 필사적으로 여자아이를 따라잡으려 했다.
좀 뛰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꺄하하핫! 도~착!!
PPK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여자아이 앞까지 도달해,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 나쁜 놈들... 아직도 쫓아와?
...걱정 마, 내가 널 데리고 여기서 벗어날 테니까.
응!
여자아이는 고개를 들어, 순진하고 해맑은 미소를――
콰아앙!!
굉음이 먼저였을까, 열풍이 먼저였을까. 여자아이를 꼬옥 껴안은 PPK의 뒤에서 갑작스레 폭발이 일어나, 그 충격파로 그녀는 다시 어둠 속으로 떠밀려졌다.
에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