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K
MOD 4
끼이이...
낡고 녹슨 문을 열자, 곰팡내와 먼지로 퀴퀴한 공기가 둘을 덮쳤다.
PPK는 점점 열이 심해지는 사나야를 방구석에 살며시 눕힌 뒤 가져온 휴대용 산소 호흡기와 구급키트를 꺼내려 했지만, 손의 차갑고 무거운 권총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어... 뭐야, 분명... 산소 호흡기를...
......
너,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내가 가서 사람을 불러 올게.
나... 괜찮으니까... 안 가면, 안 돼...?
넌 지금 1분 1초가 위급하다고. 안심해, 금방 돌아올게.
엄마 아빠도...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데... 둘 다 이제 못 돌아오잖아...
.....
약속해 줘... 꼭 돌아오겠다고... 응...?
나 까먹지 말고... 꼭 기억할 거라고...
...그래, 약속.
PPK는 사나야에게 간단한 침상을 마련해 준 후, 문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사나야가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 같았다.
에리카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문밖의 어둠이 그녀를 사로잡은 뒤였다.
입을 열기도 전에, 낡은 문짝은 눈앞에서 쾅 닫혔다.
무겁고 차가운 어둠이 PPK를 덮쳐 눈보라처럼 그녀의 살을 에고, 의식을 꺼뜨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남아있던 사나야의 온기까지 빼앗아 갔다.
마지막 한 줄기 의식과 온기마저 사라지기 직전, 그녀의 귓가에 들린 것은――
PPK!!!
야 임마 PPK! 이런 타이밍에 나사 빠지지 말라고!!!
앗...
눈을 번쩍 뜬 PPK는 지금, 그 작은 건물의 문 앞에서 문고리를 꽉 붙잡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난... 대체...
빨리 문을 열어! 천하의 네가 뭘 겁내는 거냐!
문 열고 들어가서 목표를 구조해!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돼!
알아...
...미안해.
따지는 건 다 끝난 다음이다! 어서 가!
한손으로 타는 듯이 뜨거운 가슴을 움켜쥐며, 문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다른 손이 아직도 쥐고 있는 문고리의 감촉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끼이이...
낡고 녹슨 문을 열자, 곰팡내와 먼지로 퀴퀴한 공기가 PPK를 덮쳤다.
그리고 어두운 건물 안의 구석에, 울고 있는 보모 인형과 그녀의 무릎을 벤 채 움직이지 않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
나, 왔어...
PPK는 타는 듯이 뜨거운 마인드맵 코어를 움켜쥔 채로 다가갔고, 마침내 그토록 궁금했던 그 낯짝이 명확하게 보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쓸모없어서...
조준하는 법도 몰라서...
탄창 하나를 비웠는데도 한 발도 못 맞혀서...
소체가 너덜너덜한 소녀 인형은 주저앉은 채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여자아이는, 그녀를 위로하듯 옅게 미소를 지었다.
엄청 아프지...?
펄펄 끓는 열 때문에 얼굴이 벌게진 아이는 파손돼 겉으로 드러난 인형의 부품을 어루만졌고, 작고 연약한 그 손을 통해 인형에게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안 아파요... 안 아프니까...
아가씨는요...? 지금 열이 엄청나잖아요...
이대로는 안 돼요, 제가 다시 나가서 해열제가 있는지 찾아볼게요...!
괜찮아...
저 아직 움직일 수 있어요, 지금 소체 꼴이 좀 끔찍하지만, 그래도——
에리카는 최선을 다했어... 열심히 일하는 착한 아이야...
......
그래도, 실망하셨잖아요... 분명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그치만 에리카, 총 쏴본 거 오늘이 처음이잖아...?
봤어... 에리카도 무서워서, 손이 벌벌 떨리던 거...
그래도 나 지키려고, 그 나쁜 놈들한테 총을 쐈잖아...
사나야는 여전히 떨리는 에리카의 손을 꼬옥 쥐었다.
있잖아... 만약에, 사나야가 이야기처럼 미녀 킬러가 되면...
아무도 안 다치게 지킬 수 있겠지...?
지킨다뇨... 아가씨를... 모두를 지켜야 하는 건 저라고요!
에리카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사나야를 와락 껴안았다. 끈적하고 뜨거운 그 열기를, 마인드맵 깊숙이 새기려는 듯이.
에리카... 아리따운 킬러 사나야 이야기, 다시 들려 줘...
...네. 네, 얼마든지요.
또 한 번 "아리따운 킬러 사나야"의 이야기를 들으며, PPK는 에리카와 사나야의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어, 똑같이 떨리는 손을 내밀어 만져지지 않는 에리카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설령... 설령......
에리카는 목이 메어 이야기를 잇지 못했고, 고개를 떨구어 뺨을 뜨겁게 달아오른 사나야의 뺨에 마주댔다.
사나야...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면 좋겠어요...?
에리카...
마무리는... 에리카가 정해...
네?
나 대신... 사나야의 이야기, 네가 마무리해...
제가요...?
전 이런 터프한 미녀 킬러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모르는데요...
성격부터가 저랑은 완전 딴판――
............아가씨?
사나야 아가씨?
사나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아가씨!
안 돼요 사나야, 제발...! 제발 절 두고가지 말아요!
망가진 인형은 점차 식어 가는 아이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PPK도 양팔을 뻗어, 이 만져지지 않는 두 형체를 안았다.
안 돼... 사나야의 이야기를, 저 혼자 대체 어떻게 끝내요...
아직은 모르겠지. 하지만 나중에 알게 돼.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에리카의 형체는 점점 흩어져 갔고, 애초부터 실체 없는 "기억"이었지만, 그럼에도 PPK는 에리카를 계속 껴안았다.
저 혼자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하냐고요...
......
내 말을 잘 들어.
구해 주세요... 누가 좀 구해 주세요...
이것 말고도 넌 앞으로 잔뜩 겪을 거야.
누구 없나요...
에리카... 여기 에리카예요...
오늘이 네가 가장 절망하는 날은 아니야.
부탁이에요... 이 아이를 구해 주세요...
하지만 너는 다 견뎌낼 거야. 돈도 충분히 모을 거고... 아, 뭘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몰라도 돼.
아무튼, 너는 결국 네가 해내고자 했던 일을 달성하게 될 거야.
사나야...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구해 주세요...
너는 사나야의 꿈을 이어받아서, 이야기 속의 사나야처럼 아리따운 킬러가 될 거야.
이 아이가 하지 못했던 일을, 전부 네가 대신 해낼 거야.
그 대가로, 그렇게 노력한 이유까지 전부 잊게 되겠지만 말이지.
괴로운 기억을 너무 많이 짊어진 채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거든.
흑... 끄흑...
하지만 걱정 마. 넌 다시 너의 소중한 것을 되찾을 테니까.
그게 사나야 아가씨와의 약속이니까.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어. 아가씨는 그날 영원히 잠들었지만, 단 한 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사나야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한, 아가씨는 영원히 살아갈 거야. 네 곁에서, 내 곁에서, 우리 곁에서.
우리 가는 곳 어디든, 사나야도 함께야.
PPK의 다정한 품속에서, 에리카의 형체는 이윽고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PPK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멈춘 시간 속의 조각상처럼, 에리카를 다독여 주었다.
잠시 후, 그리폰 공방의 마인드맵 업그레이드실에서 눈을 뜬 PPK는 수복 캡슐에서 일어나 앉았다.
제일 먼저 조금 불안해하며 눈치를 살피는 지휘관과 카리나가 눈에 들어왔다.
옆을 힐끗 보니 자신의 마인드맵과 연결된 상태로 표층 의식이 없는 파이슨과 MP443이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안색이 영 초조한 것으로 보아, 아직도 마인드맵 공간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
.........어......
셋은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에 빠졌다.
마인드맵 데이터 동기화 완료. 보아하니, 소체를 교체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나 봐?
아, 응, 엄청 까다로운 문제였어. 페르시카 씨한테 부탁한 뒤에야 겨우 파악했다니까...
...그랬구나.
그럼 나머진 지휘관님이랑 마저 얘기할래?
난 작전 보고서 쓰느라 바빠서 이만!
카리나는 지휘관에게 무어라 잔뜩 눈치를 준 다음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어... 그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파이슨과 그라치를 내 안에 보내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설정해서...
내가 삭제했던 기억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어 마인드맵의 오류를 수복하고 데이터를 복구하는 걸 도왔다는 거지?
그 말대로야. 네 프라이버시를 침해해서 기분 나쁘다면... 미안하다, 너를 고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었어.
우후훗♪
괜찮아, 가끔 하는 진실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
...PPK?
한참을 망설이던 지휘관이 겨우 말을 이었다.
네 그 기억, 다시 지우겠다 하더라도 난 네 선택을 존중해.
으응~? 나 벌써 결정했는데?
아하, 그럼 지금 넌 누구지?
나는 에리카, 아리따운 킬러 사나야인 동시에, 전술인형 PPK지.
PPK는 생긋 웃으면서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물론 지휘관이 원한다면야, 다른 캐릭터도 얼마든지 연기해 줄 수 있어♪
아... 어어......
아 참, 그라치와 파이슨을 깨워 주겠니? 아직도 네 마인드맵 공간 속에서 ELID랑 혈투를 벌이고 있어.
흐으음... 지휘관? 내 개조 기념 선물로 말이야아... 얘네, 내가 잠시 "돌봐 줘도" 되지?
............
지휘관은 파이슨과 MP443에게 미리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러렴.
후후훗, 고마워 지휘관♪
어... 그럼 나도, 이제 간다? 나중에 보자!
지휘관이 헐레벌떡 공방 밖으로 뛰쳐나가다 문이 닫히기 직전 힐끗 보인 PPK는, 흔치 않은 부드러운 미소로 자기 자신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부둥켜안은 팔에 살며시 기댄 얼굴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를 온기를 찾는 듯, 혹은 언젠가의 자신을 안아 주는 듯했다.
넓다란 공방 한가운데에 홀로 선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가녀려 보였지만, 지휘관은 그녀가 결코 외롭지 않음을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