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rod
MOD 2
......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달빛이 부서진 콘크리트 벽과 어색하게 마주보는 인형들이라는 이 해괴한 광경을 비췄다.
그리고 웰로드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분홍 머리 인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냅다 웰로드의 손을 잡고 내달렸다.
윽?! 잠깐, 이게 무슨 짓이냐!
소리가 너무 컸어! 공사장 사람들도 분명 들었을 거라고!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까, 합...
응, 나도 알아! 그러니까 서두르는 거야!
저걸 알아들어...?
감으로 대충!
거리를 지나고, 차도를 넘어...
인형들은 빈민가의 어느 골목길에 숨어들었다.
후우... 그럼 이제,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실까.
뭐야, 너 왜 아직도 있어?
네가 끌고 왔으니까!
...그리고, 너희 모두 상태가 안 좋아보이니 사정을 듣고 싶다.
어... 그건 말하기 좀 어려운데...
크큭.
아무튼... 내 이름은 "메시아"고, 여기 눈 하나 없는 애는 "열쇠장이", 이쪽의 팔 없는 애는 "셰프"야.
얘네 둘 말고도 같이 사는 애들이 더 있고... 뭐, 사실상 여기가 우리 집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그게... 며칠 전에 그 공사장의 시멘트가 괜찮아 보여서 좀 가져다 벽에 난 구멍을 막으려 했는데, 실수로 그만 거기에 갇혀버렸지 뭐야.
실수? 시멘트를 훔치려다 들킬 거 같아 벽 뒤에 숨었다 시멘트가 부어져서 갇힌 거겠지.
그건 범죄 행위다, 메시아. 당장 자수하도록.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경찰이라도 돼?
오직 경찰만이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사회가 엉망이란 뜻이지.
하, 우리 형편은 진작부터 엉망이었는데 뭐... 아무튼, 자수는 절대 안 해.
그렇다면,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이대로 놔줄 수 없다!
웰로드가 메시아를 연행하려던 그때,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소리쳤다.
메시아! 도망가!
그리고 무언가가 웰로드의 발꿈치에 부딪혔다.
동시에, "열쇠장이"와 "셰프"도 양쪽에서 웰로드의 팔을 붙들었다.
쓱싹아?!
얼른, 메시아! 우리가 붙잡고 있을 테니까 너만이라도 살아남아!
청소로봇? 이게 무슨...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지금 날 밀어내려는 건가?
끄응...!
......
짧은 소동이 진정된 후 웰로드는 인형들의 본거지에 앉았고, 저마다 어딘가 망가진 인형들 열몇 명이 모였다.
메시아를 필두로 한 그들은 웰로드에게 자신들의 사연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너희는 버려진 인형이고, 이렇게 숨어있지 않으면 잡혀가 폐기된다고?
맞아.
보다시피, 쓱싹이나 나처럼 멀쩡한 인형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어.
다들 그저 세월을 보내기만 하고 있긴 해도, 이대로 폐기될 생각은 없어.
네가 시멘트를 훔치려 한 것도 이 바람구멍을 막기 위해서였고?
그 말을 들은 작은 로봇청소기가 펄펄 뛰며 거들었다.
비 내리면 물이 줄줄 새기까지 해!
...그래도, 이건 범죄다.
하지만 너도 인형이니 알 거 아니야.
내가 없으면 쓱싹이 혼자선 모두가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지 못해.
그건 도둑질이지.
일부는 쓰레기 속에서 건진 거거든? 훔친 거 아니야.
아무튼, 난 이대로 너한테 잡혀 갈 수 없어.
적대심으로 번뜩이는 인형들의 눈빛을 본 웰로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들에게 무기는 없어. 여차하면 나 혼자서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겠지.
하지만 나도 인형이니, 폐기당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지.
이런 경우엔... 어떡하면 좋지?
그러니까 너만 눈감아 준다면――
그럴 순 없다.
웰로드의 즉답에 메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위의 인형들도 웅성이면서 여차하면 웰로드에게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너희를 도와줄 수는 있지.
너희가 자력갱생하도록 돕겠어. 대신, 다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겠다 약속해라.
우릴 돕겠다니, 어떻게?
물자 지원? 아님 일자리라도 구해 주려고? 우린 모두 서너 세대는 지난 구형 모델이야. 우릴 고용하려는 데가 있기나 하겠어?
으음... 우선, 내게 저축해 둔 돈이 어느 정도 있다. 그걸로 수복용 부품을 사 오지.
너희가 원활한 활동이 가능해지면, 돈을 벌 방법을 구상해 보자. 가령 저수입층에게 가정 서비스를 제공한다던가 말이야.
...생판 남인데도 도와주겠다니 정말 고마워.
하지만 우리의 처지는 네가 일하는 환경과 전혀 달라. 네 생각을 당연하단 듯이 우리한테 적용하지 말아 줘.
우리가 처한 환경은 항상 생각한 대로 풀리지도, 노력한 만큼 꼭 보답을 받을 수 있지도 않아.
하지만 그저 물자만 조금 주고 가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잖나.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라"라는 말도 있지.
악행을 근절하기 위해선 그 원인부터 해결해야 한다.
말이야 누군들 못 해.
난 그리폰의 전술인형이다. 한 말을 반드시 지켜.
모두가 자력갱생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나도 여기서 머물겠다.
다음날 아침.
어... 이 모델의 안구 교환은 어떻게 하는 거지? 그냥 끼워넣으면 되나?
아... 악!
으아아 너무 힘주지 마! 그냥 걔한테 줘,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자, 여기 거울!
스스로 고칠 수 있다고?
정비사 인형이거든.
얘가 눈이랑 성대 고치면 나머지 애들도 얘한테 맡기면 돼.
알았다, 그럼 모두의 수복은 열쇠장이에게 맡기지.
그나저나 방금 눈치챘다만, 너희는 전력이 모자라지 않는 모양이군. 어째서지?
버려진 태양광 발전기가 있어. 번갈아가면서 충전하면 일상생활에 지장 없는 정도는 돼.
웰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첩에 빼곡히 적힌 항목 중 하나를 지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열쇠장이 주위에 모인 인형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수리받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표정은 평생 햇빛을 못 볼 것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다 나아질 거야.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고개를 돌려 이 암울한 골목길을 향해, 웰로드는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