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rod
MOD 3
......
닷새 후, 어느 정도 정리된 골목길.
다녀왔어!
어서 와라. 어땠지?
쓱싹이 오늘 시급 받았어! 여기 잔돈이랑 기름!
아, 기름은 나 줘. 벨보이 관절 수리해 줘야 해.
응! 잔돈은 쓱싹이 뱃속에 저장할래! 크레딧보다 든든해!
정말... 네 말대로 됐네.
모두가 노력한 결과에, 운도 좋았다.
첫 시도에 바로 성공할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어. 그게 아니었다면 다들 이렇게 빨리 의욕적이 되지 않았을 거다.
매일이 이렇게 잘 풀린다면――
아니, 아직 부족해.
쥐구멍에 겨우 볕이 들기 시작했을 뿐이다. 현상을 유지하는 걸로 만족해선, 언젠가 다시 사회에서 도태될 뿐이야.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가 인간처럼 양로원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나름 괜찮은 생각이군.
메시아, 이걸 봐라. 며칠간 조사한 결과, 이 근방은 사용되지 않는 땅이다.
어디... 아, 도시 바깥의 황무지네.
여긴 옐로우존에 가까워서 확실히 인적이 드물어.
그래, 옐로우존에서 멀지 않지. 하지만 정화탑이 가까이 있어 토질이 깨끗한 곳이다.
과일이나 야채를 비롯한 작물 상품은 가격이 꽤 높은 편이니, 이들이라면 재래식 농업도 가능성 있는 일이라 본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정화된 땅에서 재배한 작물을 내다 팔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옐로우존으로 도망치면 된다?
그래. 하지만 무단 점거하기보단 그곳의 사람과 교섭부터 해봐야겠지. 토양 개선을 명분으로 일자리를 구하기란 어렵지 않을 터다.
왠지 잘 안 풀릴 거 같은데... 뭐, 한번 해보자.
너랑 열쇠장이가 가 봐.
엉? 안 돼, 나 사람 얼굴 보고 하는 일은 못해!
다른 이들도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나 혼자 갈 생각은 없다.
메시아, 여기의 대표는 너잖나?
...알았어, 내가 가면 되잖아.
미리 말해 두겠는데, 무슨 일 생기면 난 아무 도움 안 되니까 네가 다 알아서 해결해야 해.
웰로드는 슬쩍 웃고, 메시아와 함께 교외로 향했다.
1시간 후.
두 인형은 그 지역의 관리를 담당하는 회사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면접 예약을 잡고 왔습니다만.
아아, 웰로드 씨시군요. 잘 오셨습니다. 그리고 옆에 계신 분은 성함이?
메시아라고 합니다.
메시아?
그 이름을 들은 경비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어... 우선 로비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담당자를 모셔 오겠습니다.
경비원이 자리를 떠났다.
저기, 웰로드...?
왜 그러지? 어째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은데.
걱정 마라, 미리 알아본 결과 이 회사는 인형도 적극 고용한다고 하니까. 인형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금방이면 돼!
뭐? 어딜 가려고? 메시아, 잠깐!
웰로드가 붙잡기도 전에, 메시아는 황급히 정문으로 나갔다.
뭐지? 갑자기 저렇게...
안녕하십니까, 웰로드 씨.
당신이 메시아 님의 동료시라고요?
그렇습니다만, 메시아 "님"...?
그렇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자리에 앉으시겠습니까? 메시아 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웰로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자기소개부터 하죠. 저는 인형의 구원 교단의 주교, 시그마입니다.
......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범죄 조직 같은 게 아니에요.
며칠 전 당신이 교단을 탈퇴한 델타를 호위하실 때, 저희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라도 했습니까?
역시. 그런데, 메시아를 높여 부르는 건 설마...
맞습니다. 메시아 님은 저희의 대주교시자 절대적 인도자이십니다.
그 방대한 연산력으로 혼란한 세상에서 저희를 인도하시어, 나아갈 길을 가리켜 주시는 "구세주"시죠.
말도 안 돼... 그 애가 대주교라고?!
...그리 뛰어난 인형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뭐어... 옛날 일이라서 말이죠.
2년 전부터 더는 저희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더니, 심지어는 일부러 잘못된 계시를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대주교께서 더러운 속세를 너무 오래 접하신 탓에 물들어 버리셨음이 분명했기에, 저희는 정화의 의식을 치르려 했죠.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속세의 말로, 메시아 님의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려 했단 뜻입니다.
"기계"에게 있어 시스템 업그레이드는 좋은 것이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메시아는 거절하고 도주했고, 그렇게 "믿던 신"을 잃은 델타 씨는 교단에서 탈퇴했습니다.
대체 어떤 업그레이드였길래?
더러운 것은 버리고, 평범한 것은 개조하여 더욱 완벽한 "구세주"로서 재탄생하시도록 하는 업그레이드입니다.
헌데 거부하시어 참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 한 겁니까.
전술인형이신 웰로드 씨도 모르실 리 없겠죠. 이 세상엔 하기 싫다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간도 인형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 나아가야만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인간이 어릴 적부터 가족의 소망을 짊어지는 것처럼, 인형은 의도된 설계대로 태어나죠.
당신도, 메시아 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웰로드 씨, 당신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셨습니까?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서다.
그렇군요. 저희의 정의는 메시아 님께서 저희를 계속 이끌어 주시도록 그분을 되찾는 것입니다.
저희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웰로드 씨?
저는...
웰로드 씨가 메시아 님을 설득해 주십시오.
보세요, 저희의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으시잖습니까.
시그마의 시선을 따라 로비의 문으로 고개를 돌린 웰로드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메시아와 골목길의 다른 인형들이, 꽁꽁 묶인 채로 끌려 온 것이었다.
이렇게 무례를 범해 정말 죄송합니다, 메시아 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셔 주십시오.
시그마는 메시아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곤 로비에서 나갔다.
그와 동시에, 푸른 형광빛의 홀로그램 커튼이 로비 전체에 둘러졌다.
거기 서라!
위험하니 물러서십시오, 웰로드 씨.
이건 대 인형용 트래픽 방벽입니다. 건드렸다간 당신의 CPU가 과부하되어 회로째로 타 버릴 겁니다.
그리폰의 인형을 해쳐 그쪽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싶진 않으니, 가만히 계셔 주세요.
쳇...!
우으으, 웰로드... 알바하던 중에 갑자기 잡혀 왔어...
메시아, 저 사람 말이 진짜야!?
네가 저 사람들 두목이었어?!
......
메시아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박된 인형들은 웰로드가 곧바로 풀어 주었지만,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밤이 되었다.
메시아는 여전히 전혀 대화하려 들지 않았기에, 웰로드도 그저 눈을 감고 캐시 메모리를 정리했다.
하지만 몇 분 안 지나, 부스럭 소리에 눈이 떠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메시아가, 그 푸른 커튼을 노려보고 있었다.
웰로드가 말을 걸기도 전에, 메시아는 곧장 방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웰로드도 전력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가 메시아가 방벽에 닿기 전에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이거 놔!
메시아...? 웰로드!? 꺄아아아!
미쳤어?!
너는 저들의 "신"이라며!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냐!
아니야, 난 신도 대주교도 아니야! 메시아고 뭐고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고집부리지 말고 진정해라! 네 신자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함께――
저들이 내 말을 들을 거 같아!? 애초에 난 메시아가 아닌데 어떻게 내 말을 듣게 해!
뭐...? 그게 무슨 뜻이지?
난... 난 저놈들이 사라진 신을 대신하게 하려고 끌고 온 대체품이야... 난 그냥 요가 강사 인형이었단 말이야...
그게 정말이야...?
웰로드, 넌 그리폰의 전술인형이니까 나보다 훨씬 강하고 당당하겠지...
넌 내가 어떤 처지인지 이해 못할 거야.
그런데 네가 뭐라고 그렇게 멋진 척해? 네가 뭘 안다고 우릴 도와주겠다고 해?!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말한 이상 널 이해한다 해도 소용없겠군.
그래, 네 말대로다. 난 처음부터 강했고, 훌륭한 상관도 두고 있어.
그 순간, 웰로드는 다짐했다.
널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정의란 시그마의 말도 일리는 있다 생각한다.
너 XX 지금 뭐라――
실컷 욕해도 되니 우선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그의 말은 옳다, 그게 그의 정의야. 그리고 널 경찰에 인계하는 건 나의 정의지. 하지만 너의 정의는 아니야.
그가, 내가 아무리 당당히 주장한들, 너에겐 정당하지 않아.
어휴 씨, 듣다 잠들겠네. 뭘 할 셈인지나 얼른 말해.
너의 정의를 관철하겠다.
너희를 여기에서 탈출시키고, 무사히 그 정화탑에 가까운 땅까지 데려가겠어.
내가 말했던 것처럼, 거기서 살아가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고 있네!
진짜 메시아가 여기 있었어도 절대 못 빠져나갈 텐데, 하물며 싸울 줄밖에 모르는 전술인형이 무슨 수로!
다 방법이야 있지. 내 말을 들어 줘.
.....
메시아, 들어보자. 웰로드는 똑똑하잖아.
......말해 봐.
이 트래픽 방벽을 생성하는 것도 기계다. 우리를 과부하시킬 수 있는 것 자신도 과부하될 수 있어.
너희의 모든 기억을 내게 복사해 준다면, 그걸 합해 이 방벽과 비슷한 트래픽을 만들어내어 장치를 정지시키겠어. 그 틈에 도망치는 거다.
듣기엔 무리 같은데...
이것 말곤 달리 방도가 없다.
저걸 뚫지 못한다면 우린 이대로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너는 결국 그들의 손에 바라지 않는 모습이 되겠지.
하지만 성공하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난...
모두가 일자리를 찾는 법을 배웠고, 몇몇은 화초 재배법도 알지.
그래도 여전히 두렵다면, 나와 함께 그리폰으로 가자. 내가 입사 추천서를 써 주겠어.
우리의 지휘관은 인형도 "사람"으로서 평등하게 대해 주는 선량한 분이시다.
거기선 널 신으로 떠받들 사람은 없어. 모두 함께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럼 너는...? 그런 트래픽이라면 회로가 무사하지 못할 텐데.
나는 그리폰의 웰로드 Mk II,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태어난 인형이다.
아 진짜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아니야, 난 괜찮을 테니 안심해라.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혹시 네게 남는 메모리 있나?
이때까지의 기억을 네게 백업해 두고 싶은데.
잠시 고민한 끝에, 메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웰로드는 그녀와 데이터를 교환한 뒤, 다른 인형들과도 차례대로 연결해 그들의 기억을 전송받았다.
그런 다음, 웰로드는 눈을 감았다.
......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그녀의 마인드맵을 차지하고, 메모리를 가득 채웠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기능을 모조리 삭제하고서, 웰로드는 천천히 손을 들어 푸른 커튼을 만졌다.
트래픽끼리 충돌해, 방벽은 끓는 물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지금 그녀는 "쓱싹이", 평범한 청소 로봇이다.
동시에, 그녀는 "열쇠장이"다. 동족을 수리해 주며 살아가다, 세월에 뒤처져 버려진 인형.
"셰프"... "벨보이"... "메시아"... "웰로드". 살아남고, 살아가길 염원하는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었다.
한 점으로 모인 트래픽이 방벽을 부쉈고, 반투명한 푸른 우리는 별빛처럼 흩어졌다.
웰로드! 너 괜찮아!?
...괜찮아. 어서 가자.
......
그들은 함께 걸었다.
모두 함께, 약속한 그곳으로 향했다.
우으으... 나 더는 못 움직여...
조금만 더 참아, 쓱싹아.
조금만 더 가면 돼.
거기, 정말 안전하고 좋은 곳이야?
응, 아주 안전하고 자유로운 곳이지.
거기서 셰프를 도와 발전기를 돌리고, 인간의 음식을 만들 수 있어.
와아, 정말? 그럼 쓱싹이 더 힘낼게...
그들은 함께 나아갔다.
함께 희망을 향해 나아갔다.
이거 전력이 좀 아슬아슬한데...
웰로드, 얼마나 더 가야 해?
얼마 안 남았어, 여기서 멈추면 말짱 헛수고니까 조금만 더 힘 내.
전력이 부족할 거 같으면 내가 부축해 줄게.
허이구, 무슨 소릴!
내가 낡긴 했어도 혼자 걷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걷고, 또 걷다... 마침내, 웰로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좁은 어깨 너머로, 인형들은 드디어 그 약속했던 장소를 보았다.
드디어...! 웰로드! 우리가――
......웰로드?
......
웰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인형들은 그녀 주위에 모여 눈앞에서 손도 흔들어 봤지만, 웰로드는 그저 제자리에서 공허한 눈빛으로 종착지를 주시할 뿐이었다.
어어? 웰로드 몸에서 타는 냄새가...
......
거짓말이었구나 이 바보...
생기를 잃은 웰로드의 눈을 보고, 메시아는 깨달았다.
아무리 엘리트 전술인형이라도 서버를 태워 버릴 정도의 트래픽을 멀쩡하게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웰로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음에도 그렇게 했다.
그 어떤 불의도 용납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있는 어려움이라면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해결한다.
웰로드는 자신의 정의를 따라 행동했고, 회로가 완전히 타버려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나서야 멈췄다.
흑... 웨, 웰로드...
우리의 새 터전이 바로 저기야, 여기서 멈춰선 안 돼! 얼른 웰로드를 데리고 가자!
맞아, 어떻게든 수리할 수 있겠지!
쓱싹아, 아직 움직일 수 있지?
응, 아직 배터리 좀 남았어.
좋았어, 웰로드가 가져다준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 웰로드를 고칠 방법도 찾고!
어, 메시아? 너 어디 가?
우리한테 그건 무리야.
뭐어?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어?!
웰로드는 우리와는 달라, 돌아갈 곳이 있어.
우리도 이제 생기긴 했지만, 그런 만큼 웰로드를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할 순 없어.
너 설마... 제정신이야?! 지금 그 인간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널 찾고 있을 거라고! 너무 위험해!
웰로드는 내게 기억을 백업했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웰로드는 우리에게 새 삶의 터전을, 희망을 가져다 줬어. 이젠 우리가 그녀에게 뭔가를 해 줄 차례야.
그래도 나 혼자면 되니까, 너희는 마저 가도록 해.
메시아...
걱정 마, 더는 예전처럼 쉽게 자포자기하지 않을 거야. 적어도, 나도 내 힘으로 뭔가를 해내야지.
구름을 꿰뚫는 서광을 발하며,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떠올랐다.
밝은 세상을 등지고서, 메시아는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