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31
MOD 4
오염지대 끝자락에 정차된 그리폰의 수송 차량.
머릿속이 번뇌로 가득해진 수오미는 조수석에서 무기를 점검하다 말고 차량의 좌우 지형을 확인하기를 반복해, 온몸으로 초조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 머저리 곰탱이... 벌써 10분이 넘게 감감무소식이잖아...
대체 어디서 빈둥거리길래...
짜증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다만, 지금 이 짜증의 이유는 조금 달랐다.
파파샤와 헤어진 뒤, 머리를 식힌 수오미는 재차 "그 문제"를 의식했다.
그렇게 성질부릴 생각은 없었는데...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이번에도 마인드맵에 새겨진 "설정" 탓이 분명했다.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더 나은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고, 전투 도중 실수하더라도 동료를 나무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파파샤에게는 그리 했다.
숱한 인형들을 만져봤을 디자이너의 짓인데, 내가 뭘 어쩔 수가 있겠어...
지휘관님도 그걸 모르실 리가 없는데 억지로 우릴 붙여 놓으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수오미는 운전석을 바라봤다. 파파샤가 앉아 여기까지 운전해 오는 내내, 그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었다.
......
그때, 수오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 이 수첩, 꽤 새것 같은데 왜 이렇게 꾸깃꾸깃하지?
소련 곰탱이는 하여간 물건 아낄 줄도 모른다니까...
타인의 비밀을 옳거니 하고 보는 타입은 아니지만, 짜증날 대로 짜증난 상태여서인지 수오미의 손이 저절로 움직여 수첩을 펼쳤다.
......
그리폰 숙소에서.
......
슥슥슥...
어휴 참, 지휘관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걔랑 단둘이서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저절로 사이가 좋아질 줄 아시나?
슥슥...
그쪽에서 나한테 시비를 걸어 오는 게 문제인데...
그냥 억지로 붙여 놓는다고 무슨 소용이냐고!
파파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곤, 의미 없이 종이를 긁적이던 펜 끝을 멈췄다.
하지만 지휘관님이 정하신 거니... 뭐라도 해야지.
근데 진짜 이상하네, 걘 왜 자꾸 나한테만 그럴까? 어휴 진짜...
슥슥슥...
좋아, 플랜 A... 내일 임무의 리더는 나니까, 리더의 권한으로 녀석이 찍소리 못하고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있어.
그래서, 녀석한테 내가 얼마나 리더로서의 자질이 있는지를 보여 주면, 어느 정도는 나를 다시보겠지?
직직, 직직...
......끄응... 암만 생각해 봐도 또 뒤엉켜 싸우는 꼴밖에 상상이 안 가네...
아니 잠깐만, 이러면 내가 걔한테 잘 보이려고 재롱부리는 꼴이잖아?
안 되겠다, 플랜 B. 녀석을 위기에 빠뜨린 다음, 내가 멋지게 나타나 구해 준다!
그럼 아무리 녀석이라도 할 말이 없겠――
찍찍 찍찍...
제정신이냐 나! 동지를 위기에 빠뜨린다니 무슨 생각이야!
기본부터 망각하면 그냥 바보 인증이지...
쓱쓱...
......
쓱쓱...
수오미와 사이좋게...
...가능할까.
파파샤가 중얼거리는 사이, 멈춘 펜의 잉크가 점점 종이에 번져 갔다.
......
......
수오미는 말없이 그 수첩을 읽었다.
새로 산 것이 분명한 그 수첩은 벌써 안이 글자로 빽빽했고, 찍찍 줄을 그은 내용은 하나같이 "수오미와 관계를 개선할 방법"임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커다란 점 다음에 적힌 크기가 유난히 커다란 글자에는 작성자가 동그라미도 쳐서 강조해 놓았다.
"그 바보 자식이 진심으로 감동하게 만들어 주겠어!"
...미련한 곰탱이 같으니라고.
수첩을 휙 던지면서, 수오미는 차 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
옐로우존 어딘가, ELID 무리에게 습격당한 마을.
이거 야단났네...
파파샤는 건물이 드리운 그늘의 구석에서 웅크려, 찢겨져나간 종아리를 살펴봤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 미안해 인형 언니...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괜찮아요, 울음 뚝! 유니는 용감한 아이니까 울면 안 돼요!
언니가 꼭 유니를 데리고 나가 줄게요!
응...!
파파샤는 가까스로 구출한 아이를 다독이면서, 아직도 쿵쾅대는 가슴으로 눈물을 참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편, ELID가 어떻게 여기까지 무리를 지어 몰려왔는지에 대한 파파샤의 의문이 해결됐다.
그르르...
무리에게 우두머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파샤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철수를 돕기로 했던 주민들은 이미 모두 ELID의 마수에 희생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지하실에 숨어있던 마지막 생존자, 유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만, 유니를 구출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짐승 ELID에게 기습당해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이렇게 기동력이 저하된 상태로는 어린이 한 명을 데리고 저 ELID 무리를 돌파하기란 무리였다.
생각해... 파파샤, 빨리 방법을 생각해 봐...
뚜벅 뚜벅...
...!
결국 놈들에게 들킨 걸까? 돌연 발소리가 들려왔다.
파파샤는 곧장 총을 들었고, 옆의 유니도 겁먹고 입을 틀어막았다.
끼이익...
역시 여기 있었군요.
수오미?!
진짜 바보예요? 상황이 이런데 왜 지원 요청을 안 보내요?
제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쉬잇! 소리 좀 줄여요!
저기 대왕 좀비 있는 거 못 봤어요!?
......
수오미는 파파샤의 망가진 다리를 살펴봤다.
이건...
이 애를 데리고 탈출해야 해요.
파파샤가 곁의 아이를 끌어안으며 단호하게 수오미의 말을 끊었다.
...바깥은 벌써 정찰했어요.
ELID가 사방에 깔린 건 둘째 치고, 그 대왕 좀비는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은 다리 한 짝까지 잃었으니, 저 혼자서 2명을 엄호하며 철수하는 건 불가능해요.
......이 애, 유니만 데리고 간다면요?
또 무슨 꿍꿍이에요?
전 됐으니까 얘를 업고 얼른 가세요.
저를 아주 나쁜 X으로 만들려는군요?
당신 눈엔 어차피 제가 나쁜 사람이잖아요,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저 ELID 무리에게서 이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낼 자신이 없어요.
여기서 철수 지점까진 거리가 한참이란 말이에요.
......
파파샤는 침묵에 빠졌다.
이런 결과는 예상했지만, 지기 싫어하는 수오미가 직접 저리 말하는 걸 들으니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 인형 언니한테 방해 돼?
...아뇨.
당신을 구하려고 우리가 온 건데요.
이름이 유니랬죠? 유니 친구가 우리의 임무 목표예요.
저는 저한테 무리인 일에까지 허세를 부리진 않아요.
대신 약속해요. 이 한 몸 바쳐서라도 유니 친구를 지켜 줄게요.
수오미.
그러니까, 유니 친구도 함께 힘내도록 해요.
수오미, 좋은 수가 떠올랐어요.
뭔데요?
제 부품이요.
제 부품을 쓰세요.
...마인드맵 망가졌어요?
지금 이게 농담하는 거 같아요?
당신의 전술 소양은 제게 뒤지지 않아요. 직감은 오히려 더 뛰어나고요.
지금 당신에게 부족한 건 소체의 성능뿐이에요.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게 지금 제 소체에 있어요.
파파샤는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 낡아 빠진 부품을 제 소체의 것으로 교체하세요.
적어도 소체의 성능 상승은 확실할 테니 유니를 무사히 탈출시킬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 이미 꼼짝 못하게 된 제가 부담될 일도 없어지죠.
겸사겸사 제 코어도 회수하면, 당신이 나쁜 X이 될 일도 없잖아요, 그쵸?
고작 코어 하나쯤인데, 무겁다고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예요.
......
당신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면서요.
이 방법이 가장 승산이 높아요, 당신도 이미 이해하고 있다시피.
알아요... 하지만...!
강렬한 혐오감이 수오미의 마인드맵을 뒤흔들었다.
아무리 임시방편이라지만, 소련 곰탱이의 부품으로 자신의 소체를 개조하라니.
......싫어요.
아니 왜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그럼 더 좋은 방법 있어요? 어디 한번 말해봐요!
시, 싫은 건 싫다고요... 당신의 부품을 쓸 바엔 차라리 자폭하겠어요.
진심이 아니었다.
수오미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소체가 조금만 더 섬세했더라면,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을 것이다.
파파샤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아주 잘 이해했다.
하지만 파파샤의 부품을 자신의 몸에 넣는다는 걸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 그녀의 마인드맵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혐오감과 거부감이 솟아났다.
틀림 없어... 내 "설정" 때문이야...
하아... 당신이 저 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런데 자꾸 그럴 거예요?
아, 아뇨, 이건 그러니까...!
지금 당신 투정 받아 줄 시간 없어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요 수오미 동지!
나도 아니까 좀 닥쳐 봐요!!
두 인형이 목청을 높이자, 옆에서 지켜보던 유니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네, 저에 대한 혐오감을 참으라는 건 어려운 일이겠죠.
하지만 여기, 유니를 보세요. 얘는 인간이에요.
연약하고, 단 한 번뿐인 목숨이에요. 갓 지핀 불씨처럼 반짝이지만, 미약하다고요.
지금 이 이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얘가 죽도록 놔둘 거예요?!
고집 좀 그만 부려요!
닥치라고 했잖아요......
수오미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파파샤의 계획을 인정할수록, 납득할수록, 이 영문 모를 반감이 점점 더 심해졌다.
마인드맵이 격하게 동요하며, 속에서 전혀 다른 두 힘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다.
그녀는... 수오미는...
......
파파샤.
또 뭐요?
전 당신이 진짜 싫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그리폰에 왔던 첫날, 카리나 씨가 저와 당신을 헷갈렸어요.
그때부터 당신이 정말 싫었어요. 게다가 당신은 툭하면 제 음악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진짜 짜증나 죽겠어요!
푸슈우우...
아니 지금 옛날 일 따질 때예요?
게다가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잖아요!
당신은 아무래도 좋을지 몰라도 저한텐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수오미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게 다... 전부 다! 저와 당신이 관계가 있다는 근거라고요!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을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툭툭 시비를 걸던 게 아니라고요...!
푸슈우우우...
그게 대체 무슨――
제 생각은! 제 의지는! 저 스스로 정할 거예요!
어, 수오미...? 지, 지금 머리에서 연기 나는데요?! 왜 그래요!?
스톱 스톱! 진짜 무리면 됐어요! 당신까지 고장나면 우리 모두 끝장이에요!
닥쳐요... 닥치라고요...
수오미는 보호장구를 전부 벗어 던지고, 공구함에서 스패너와 드라이버를 꺼내 들었다.
쓸 만한 거... 전부... 전부 뜯어갈 거예요...
이제와서 후회해 봤자예요....
......딸꾹.
인상을 잔뜩 구기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수오미의 두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인형 언니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유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둘을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파파샤도 수오미가 내뱉은 말에서 그녀의 결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딘가가 변하는 소리도.
......
그리폰 기지, 수복실.
아, 깼구나 파파샤!
...카리나 씨?
소체 말끔하게 수복했어!
코어가 멀쩡해서 다행이야.
...임무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닌걸.
아무도 예상 못한 사태였고, 너도 최선을 다했잖니.
참, 너 보러 온 사람이 있어.
예?
카리나가 가리킨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
히익?! 뭐, 뭐예요!?
수복하는 걸 마중나오다니, 뭐 잘못 먹었어요?! 무무무무슨 속셈이에요!
당신 진짜 바보예요?
부대원이 임무를 맡았던 대장한테 점수 따려고 뒷수습하러 오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래요?
웃기지 말아요, 저 놀리러 왔죠?
어... 그 소체는 또 뭐예요? 저보다 최신형이네요?!
흥... 당신 부품, 꽤 쓸 만하더라고요. 이젠 제 거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임시로 개조한 건데도 부품 적합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더라.
그래서 내친 김에 내가 튜닝을 좀 해 줬지! 이제 성능으로도 파파샤한텐 안 질걸?
들었죠? 이제 우리 사이에 소체의 성능차는 없어요.
당신이 제2라운드를 붙고 싶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겠어요.
제 부품을 가져다 쓴 주제에 잘도 그런 건방진 소릴! 좋아요, 훈련장으로 따라와요! 결판을 내자고요!
그런다고 누가 쫄 거 같아요?
진 사람이 칼라쿠코 쏘기예요.
콜! 통장 거덜날 준비나 하라고요!
당신이야말로요.
......
티격태격하며 수복실을 나서는 두 인형들을 배웅한 뒤, 카리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말씀대로네요, 지휘관님.
......
손에는 보고서를,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걸린 지휘관이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페르시카 씨의 말대로, 디자이너가 인형에게 부여한 "암시"는 불가항력이 아니야.
그걸 자각하고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극복할 때, 인형의 마인드맵이 비로소 성장한다는 이론이지.
이 과정을 금방 달성하는 인형도 있는 반면, 수오미처럼 오랫동안 영향받는 애들도 꽤 있다더라.
그치만 가면서 계속 싸우던데요.
정말 극복하고 성장한 걸까요?
응.
지휘관은 여전히 웃으며 보고서를 탁상에 툭 던졌다.
다투는 건 여전하지만 느낌은 벌써 다르잖니.
이젠 안심하고 둘을 한 팀으로 편성할 수 있겠어.
분명 좋은 콤비가 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