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635
MOD 2
RO635의 마인드맵 공간.
창피한 일이라고?
내가... 내가 억지를 부린 탓에...
SOP2가 심하게 다쳤어...
그리폰은 지금 안 그래도 심각한 물자 부족인데, 내가 SOP2를 다치게 만들었어!
무슨 억지를 부렸길래?
그건...
그리폰 임시 기지의 창고.
페르시카와의 통신을 종료한 RO635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SOP2가 바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RO, RO!
어라? 왜 아직도 그 모습이야?
그, 그게... 페르시카 씨랑 상담해 봤는데...
역시 그리폰의 상황이 안정된 후에 업그레이드하기로...
...그렇구나! 그럼 새 임무 하러 가자! 빨리 빨리!
SOP2가 부랴부랴 달려 나갔다.
뭐야, 물자 검수 벌써 끝났어?
SOP2가 의욕이 넘친 덕분에 말이지.
방금 지휘관이 작전 중 연락이 두절된 인형들을 수색해 달라고 했어. 임무 내용은 지금 공유했고.
...알았어, 어서 출발하자.
RO.
응?
너, 거짓말 엄청 못 한다고 들은 적 있어?
......
역시...
대체 무슨 고민인진 안 물어보겠지만, 나랑 SOP2는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널 믿고 따른다는 것만은 알아 둬.
AR-15는 RO의 어깨를 토닥이고 SOP2를 뒤쫓아갔다.
......
...고마워.
팔디스키 잠수함 기지의 폐허.
AR팀은 발견한 그리폰 인형의 잔해들을 받은 목록과 대조했다.
그리폰에 인형 직원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다들 폐허 여기저기로 흩어졌으니, 찾기도 상당히 힘들겠는걸.
모두의 마인드맵 코어가 멀쩡했으면 좋겠는데...
범위가 이렇게 넓으니, 흩어져서 찾는 편이 좋겠어.
그럼 난 A 구역을 맡을게.
난 B 구역!
그래, 그럼 난 C 구역으로 갈게.
AR-15는 바로 A 구역으로 향했지만, SOP2는 어째선지 제자리서 RO를 빤히 바라봤다.
SOP2, 무슨 일 있어?
RO, 너 고민 있지?
응?! 아, 아니, 없는데...?
이런 말 하긴 좀 뭣하지만...
RO 거짓말 진~짜 못 한다!
윽...!
페르시카 씨나 AR-15한테 듣는 건 상관 없지만...
어떻게 너까지 그러냐고...!
오오, 다들 눈치챘구나.
RO, 기분 안 좋은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줘.
내가 해결 방법을 찾을 순 없을지 몰라도, 네 기분이 나아지게 할 수는 있다구!
후우... 알았어...
그럼 B 구역으로 갈게, 이따 봐!
SOP2은 폴짝폴짝 뛰며 B 구역으로 향했다.
AR-15와 SOP2의 뒷모습을 보던 RO635는 문득, 첫 모의훈련 때 임무를 위해 M4A1을 희생시킨 자신을 냉랭하게 바라보던 그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
어쩌면... 기반 설정이 마냥 기분 나쁘기만 한 건 아닐지도.
내 본래의 의지가 아니더라라도,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잔뜩 생겼으니까.
우리의 감정이 전부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패턴에 불과할지라도... 방금 SOP2의 웃는 얼굴은 진짜잖아.
M4 씨와 M16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내 마음도 진짜고...
RO는 고개를 숙이고 그리폰 인형들의 잔해를 수색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M4A1과 M16A1이 흔적을 남기진 않았을까 내심 기대했다.
좋았어, 임무에 집중! 구조를 기다리는 인형들이 아직도 잔뜩이라고!
M4 씨와 M16도 분명 찾을 수 있어, 아직은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집중하자!
......
음? 저건...?
잠수함 기지는 폭격으로 약해진 일부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바닷물에 잠겼던 지하의 폐허도 외부로 드러난 상태였다.
RO635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저 아래의 수면 밖으로 삐져 철근 몇 가닥이었다.
그중 하나 끝에 걸린 매우 익숙한 검은 상자가, 물살에 따라 첨벙거렸다.
M16이 M4 씨에게 준 무기 상자...!
저게 왜 저런 곳에?!
RO635는 무기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까스로 시선을 돌렸다.
안 돼, 안 돼, 폐허 밑은 너무 위험해. 건물이며 지반이며, 폭격 때문에 너무 약해졌어.
그리고 지금은 더 중요한 임무가 있잖아!
이렇다 할 안전 장비도 없이 혼자 저걸 회수하러 가면, 분명 임무 수행에 지장이 생기고 다른 애들한테도 부담만 안겨 줄 게 뻔해...
RO635는 어금니를 꽉 물면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M4 씨와 M16이 남긴 유일한 물건인데...
......
정신 차려 RO, 임무가 우선이야.
RO635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구덩이를 돌아본 후, 마음을 굳게 먹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10분 후, 구덩이 끝자락엔 강하용 로프가 단단하게 걸렸다.
침수된 폐허 속에서, RO635는 세찬 급류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그 무기 상자를 끌어안은 채 철근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제기랄! 혼자선 위험하단 거 뻔히 알면서! 바이러스 걸린 것도 아니고 왜 내려왔어 진짜!
으으, 아직 아무한테도 안 들킨 이 틈에 얼른 올라가자...
AR-15랑 SOP2도 맡은 구역 수색을 끝내고 슬슬 돌아올 때니...
한 손으론 무기 상자를 끌어안고서, 다른 한 손만으론 철근을 놓고 로프를 타고 올라가려 했지만, 물살이 세차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젠장, 중심 잡기는 또 왜 이리 어려워...
그때, 무언가 무너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동시에 RO635의 머리로 먼지와 돌조각들이 떨어졌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떨어지는 돌조각들이 퐁당퐁당 물속으로 떨어졌다.
이런――
와르르르!!!
구덩이 주위를 아슬아슬하게 떠받치던 폐허가, 결국 무너져 내렸다.
......
RO!!
RO, 눈 좀 떠 봐!!
RO!!!
RO635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을 차린 그녀의 곁에는 AR-15와 SOP2가, 그리고 신기해하는 눈빛의 인형 몇 명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RO!! 다행이다아아...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
C 구역에서 낙반이 일어났는데 너랑 연락이 안 되길래 바로 달려와 봤지.
네가 M4의 무기 상자를 부둥켜안은 채로 저 반쯤 바닷물에 잠긴 돌더미 밑에 깔려 있었다고.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떠내려갔을 거야.
......
SOP2가 뛰어내려서 널 건져냈어.
안절부절 못하고 네 코어를 또 뽑으려 들길래 겨우 말리던 참이야.
...나 안 그랬어!
하지만 그 말은 RO635에게 들리지 않았다. SOP2의 팔을 비롯해 소체 여기저기에 큰 손상을 입은 것을 본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SOP2...! 미안해, 나 때문에...
헤헤, 미안하긴 뭘~ 나였어도 저 밑에 M4의 무기 상자가 있는 걸 보면 바로 뛰어내렸을걸?
......
자책할 것 없어, 예상치 못한 일이잖아.
응...
난 괜찮으니까, 임무를 속행하자.
RO635는 무기 상자를 등에 메고, 다시 기지의 폐허로 걸어 들어갔다.
왜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그 상자를 건지러 돌아갔어?
그런 것쯤,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잖아.
그건 그냥 무기 상자가 아니야!
M16이 항상 가지고 다녔고...
M4 씨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니까...
M4와 M16에 대한 감정이, 그 평범한 무기 상자에 큰 의미를 부여한 거네?
응. 인간도 물건을 보면서 사람을 떠올리곤 하잖아.
하지만 넌 줄곧 M4와 AR팀에 대한 네 감정이 인위적인 것이 아닌지 고민했잖아.
그런데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걸 회수하려 했고, 네 실수로 SOP2가 다친 걸 자책했어?
......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작전 계획을 짜는 것처럼, 내 감정을 결정할 수가 없다고...
기반 알고리즘은... 내가 건드릴 수 없으니까.
흐음... 즉, 네 기반 알고리즘과 수행 중인 임무의 내용이 충돌을 일으켜, 네가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됐다고 생각하는구나?
맞아. 그게 너무 무서워...
내 감정이 기반 알고리즘의 핵심 명령을 우선시했고, 수행 중이던 임무에 위반되는 행위를 저질렀어.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어쩌면 이게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단 거야...
이전에도 감정에 휘둘려 동료를 다치게 한 적이 있었어?
응...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페르시카 씨가 날 경찰청에 파견해, 법무집행 업무를 수행하던 때였어...
......
RO635가 어느 법무기관에서의 복무 중 담당한 마지막 사건.
오전 11시 30분경, 어느 성당에서.
역시 여기 있었구나! 꼼짝——
쉬잇!
조용히 좀 해 주세요, 경관님!
뭐야, 절도도 모자라 공무집행방해까지 하려고?
경관님, 맹세코 얌전히 체포되겠습니다.
대신 한 시간 정도만 좀 기다려 주실 순 없을까요?
당연히 안 되지.
RO635는 차가운 수갑을 꺼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자, 잠깐만요! 저기 보이세요? 저기 저 애가 제 딸입니다.
딸이 있었어?
네... 제가 지난 지난 지난번에 수감됐을 때 보호소로 보내졌다가, 얼마 후 어느 부잣집에 입양됐어요.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좋은 아빠가 아니란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 딸이 결혼하는 날입니다... 딸아이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켜보고 싶어요.
믿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잖아요, 네?
......
요 며칠 동안의 절도 행각, 축의금 모으려고 저지른 거였어?
네! 누가 뭐래도 생물학적 아버지인데, 몇 푼이라도 줘야지 않겠어요?
물론, 딸아이는 절 진작에 잊어버렸겠지만요...
......
......하아.
정확하게 한 시간이야, 한 시간 되면 바로 연행하겠어.
맹세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경관님!
근데 그 빌어먹을 결혼식, 5시간이나 걸렸어!
내가 그놈을 겨우 경찰서로 데려갔을 땐 내 동료들이 도시를 아주 뒤집어엎기 직전이었고!
인간 동료 몇 명은 아예 더위 먹어서 쓰러졌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창피해...
내가 어떻게... 전과도 화려한 범죄자를 동정해서, 옆에서 난생 모르는 딸의 결혼식을 끝까지 지켜볼 수가 있어!?
나 때문에 동료들이 대낮에 도시를 이 잡듯 들쑤시느라...
망신이야! 정말 대망신이야!
푸하하하하! 그래도, 참 멋진 이야기인걸.
비참한 신세의 범죄자를 동정한 인형 경관 아가씨가, 함께 딸의 결혼식을 끝까지 지켜봤다니 말이야.
하나도 안 웃기거든?!
내 임무는 용의자를 발견하는즉시 체포해서 경찰서로 연행하는 거였다고!
그래서, 용의자를 바로 연행해 가지 않은 것도 기반 알고리즘이 임무를 무시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인간에게 우호적일 것... 대충 "로봇 3원칙" 비슷한 게 있잖아.
어휴, 제발... 그게 대체 언제적 개념인데.
그러는 너야말로 시작부터 나한테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했으면서!
크흠...
어...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결혼식이 끝난 뒤엔 어떻게 됐어? 바로 용의자를 연행했어?
......아니.
왜?
또 갑작스런 일이 일어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