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S12
MOD 2
방금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마찰음임을 확인한 AR-57이 손에서 기계 부품을 내려놓았다.
응, 여기가 확실해.
기계 베어링이 개조실의 선반을 긁는 소리였다고?
공구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는 걸 봐선 확실히 누가 여길 뒤졌네. 내가 아는 한, 우리 그리폰의 개조실 이용 수칙은 이런 추태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고.
대체 누가 한밤중에 이런 데서 장난을 쳐? 찾으면 가만 안 둬!
개조실은 불이 켜져 있지만 아무도 없었고, 한쪽 선반의 도구들이 누가 만진 듯 흐트러져 있었다.
...있잖아, 이 "유령 소동"이 언제부터 시작됐지?
어... 한 2주 전?
2주 전이라면... 너희가 앤을 여기로 데려왔던 때인데.
뭐? 지금 앤을 의심하는 거야?
인간 꼬맹이가 이런 짓을 하다니...
잠깐잠깐, 아직 확실한 증거도 없잖아. 그냥 우연일지도 몰라.
우연이라니? 한밤중에 엉망이 된 개조실, 어느날 데리고 온 인형 정비사... 딱 들어맞잖아, 앤이 유력한 용의자야!
앤을 구출한 뒤에 배경 조사를 해봤어.
본디 고아원 출신인데, 3살 때 괜찮은 부자 상인한테 입양돼서, 학교도 다니다 몇 년만에 인형 소체 공학에 소질이 보여서 그쪽으로 진로를 잡았다고 해.
그런데 그 양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고아가 됐고, 결국 우리가 발견한 그 불법 가게에서 부려먹히게 된 거야.
이력으로 봤을 때 그다지 의심스러운 점은 없어.
맞아, 앤이 수상했다면 지휘관도 여기로 데려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걸?
싸울 힘도 없는 어린 소녀가 한밤중에 혼자 이런 개조실을 드나드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하듯, 갑자기 개조실의 문이 열리더니 긴 머리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앤?
SPAS-12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지난 2주 동안 앤을 돌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이젠 저 아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처한 이 상황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뭐야 너, 한밤중에 안 자고 몰래 뭐해?
저, 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있을 줄은 예상 못했는지, 앤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움츠러든 소녀의 모습에, SPAS-12는 일을 원만히 해결하고자 먼저 앞으로 나섰다.
길을 잃었을 수도 있지~ 한밤중에 배고파서 주방 찾고 있었던 거지? 나랑 같이 가자.
그때, Saiga 308은 보았다. 앤이 휴대용 전동 드라이버를 든 오른손을 슬쩍 뒤로 숨기는 것을.
...SPAS-12가 주방 위치도 안 알려 줬어? 그럼 어서 데려가.
...?
AR-57은 Saiga 308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잠시 말문을 잃었다.
어휴, 인간은 정말 번거롭다니까, 배가 고파지면 먹을 걸 찾아야 하고.
그리고 P30도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틈을 타, SPAS-12는 앤을 데리고 냉큼 문 밖으로 향했다.
자아 어서 가자, 내가 파스타 끓여 줄게!
지금 뭐야?
두 사람이 개조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 AR-57이 의문을 제기했다.
저 애가 한밤중에 개조실의 문을 열고 나타난 건 똑똑히 보았지만, 지금은 정말로 뭘 하려 했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어. 드라이버를 가져갔다고 해도 말이지. 그러니, 우선은 얌전히 돌려보낼 수밖에.
엥? 드라이버?
P30은 낌새를 채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함정 수사야?
맞아. 저 녀석 내일 잘 감시해, 무슨 꿍꿍이인지 확실하게 알아내자고!
또 하루 낭비하겠단 소리로밖에 안 들리네... 난 빠질래.
안 돼! 저 녀석 낮에는 계속 SPAS-12랑 같이 다니잖아, 걔도 모르게 해야 해.
안 그럼 그 덜렁이가 분명히 우리의 계획을 불어버리고 말 거야, 안 그래도 일손 부족한데 3명에서 더 줄면 어떡해!
AR-57은 저 녀석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아?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야.
덥진 않아?
대부분의 인형들이 온도에 민감하지 않다 보니, 에너지 절약을 위해 밤에는 공용 에어컨이 꺼지기에 종일 햇빛을 받은 복도는 아직도 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빨리 주방 가서 내가 에어컨도 켜 줄게.
죄송해요, 폐를 끼쳤어요... 혼자 개조실에 가면 안 됐는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던 사이, 뜻밖에도 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긴 왜 간 거야?
...밤에 거기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져요, 거기 있는 기기들이 익숙해서요.
2주 전, 사건이 종료되고 앤은 잠시 그리폰 임시 기지에서 보호받게 되었다.
전기충격기는 수술로 무사히 제거했지만, 적어도 며칠은 안정을 취하도록 해.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
소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름때 묻은 옷 대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고개를 숙이는 버릇은 여전해서 얼굴 표정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긴장할 것 없어요~ 흐음... 넌 딸기 맛이 좋아, 바나나맛이 좋아?
SPAS-12가 냉장고를 열어 안에 놓인 우유 두 병을 보며 물었다.
말 안 하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앗, 혹시 초콜릿 맛 좋아해? 어쩌지, 내가 어제 다 마셨는데...
민망해하며, SPAS-12는 유리컵 두 잔을 꺼내 각각의 우유를 따르고 앤에게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소녀가 손을 내밀지 않자, SPAS-12는 빙긋 웃으며 딸기 우유를 가져갔다.
후훗, 괜찮아.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 이따 여기저기 구경시켜 줄게.
앤이 우물쭈물 마침내 바나나 맛 우유를 가져가니, SPAS-12도 표정이 한 층 더 밝아졌다.
나 며칠 동안은 임무 없으니까, 익숙해지도록 매일 같이 있어 줄게.
...카페의 지하도, 영업 중이 아닐 때도 이렇게 밝았는데.
겨우 열 몇 살인데 오랫동안 구금되어 착취를 당해 왔으니, 낯선 환경에서는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누구나 낯선 곳에서는 긴장되는 법이야. 여태까지 그 공방에만 있었어서, 그나마 익숙한 개조실이 편했겠지... 아.
무언가 생각난 SPAS-12가 말을 잠깐 멈췄다.
그럼 지금까지 계속 개조실에 갔었어?
아... 으... 네에, 여기 왔을 때부터...
앤은 SPAS-12의 옆구리에 달린 붉은 리본을 힐끗 보며 답했다.
그랬구나! 내가 오해했네, 아하하...
예상밖이지만 솔직한 답변을 받으니 SPAS-12도 안심이 되었는지 말이 조금 빨라졌다.
개조실의 장비들은 전부 암호화되어 있어서 관계자가 아니면 못 써, 그러니까 사실은 거기에 있어도 상관은 없거든? 뭘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네가 그 정도로 힘이 세진 않겠구나.
아참참, 우리 주방 가는 중이었지? 피곤하면 그냥 네 방에 데려다줄까?
괘, 괜찮아요, 혼자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그리고,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너무 무서워 마. 익숙해지면 알게 될 거야, 우리 그리폰은 모두가 모두를 도와주거든!
나도 도움받았고 말이지.
1년 전.
여기가 그리폰이에요, 앞으로 당신의 집이죠.
집?
네! 우리 지휘관님이 얼마나 믿음직하신데요! 함께 지내다 보면 금방 알게 될 거예요.
지휘관?
새로 온 인형이 궁금한지 졸졸 따라온 VP9가 SPAS-12의 발성 모듈을 떡하니 바라봤다.
얘 원래는 앵무새 인형인가 했어?
무슨 헛소리래. 이리 와서 제가 만든 케이크 좀 먹어볼래요? 장담하는데 밖에서 파는 것들의 99%는 이길걸요~
옆에서 답답해하는 VP9을 무시하며, M110이 케이크가 잔뜩인 쟁반을 SPAS-12에게 내밀었다.
가지런히 놓인 12개의 케이크는 하늘색 종이컵에 부드러운 우윳빛 크림이, 그리고 크림 위에는 연보라색 종이학이나 은색 눈꽃, 똑같은 크림 눈사람 등 다양한 장식품이 얹어져 있었다.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워, 직접 먹어보지 않아도 혀끝을 머무는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짜잔~ 컵케이크 랜덤박스! 전부 다른 맛이랍니다.
SPAS-12는 눈앞의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호두나무 쟁반이 낡은 걸로 봤을 때, 분명 여러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데 쓰였겠네.
하늘색 종이컵엔 "그리폰" 글자가 새겨져 있네. 이런 컵을 주문 제작할 정도로 이곳을 좋아하는구나.
크림은 아무래도 동물성. 따뜻한 차 옆에 놓인 건 살짝 내려앉았어.
난 이 눈사람으로 할래!
어딜, 새로 온 친구한테 먼저 고르게 해 줘야죠! 신참 환영 원타임 찬스니까 마음껏 골라 보세요.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은 케이크에서 눈을 떼고, SPAS-12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나 먼저 골라도 돼?
물론이죠~!
용기를 얻은 듯, SPAS-12는 조심스레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다음 기회에는 저 눈사람을 골라야지.
난 "사브리나"야, 앞으로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