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R
MOD 1
어느 날, 그리폰 지휘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지휘관님! 이번 마인드맵 업그레이드 최신 대상자 명단이에요, 확인해 주세요.
응, 고마워.
히히히...
마인드맵 업그레이드 신청 받기 시작한 후로, 신청 수리를 기다리는 인형들이 사무실에서 위병소까지 줄을 설 정도로 인기 만점인 거 있죠!
주어지는 TO가 항상 쥐꼬리만해서 원성이 자자하긴 하지만요...
어쩔 수 없잖아, 실험실의 자원이 한정적인데. 인내심 가지고 기다리라 할 수밖에.
저번에 크루거 씨한테 설비 좀 증설해 달라 했더니 그날부터 저를 피하시더라고요...
에헤헤~ 지휘관니~임? 지휘관님도 제법 저축하지 않으셨나요~? 이번 기회에 그리폰의 미래를 위해 수복 캡슐 몇 대 구입하는 건 어떠세요~?
카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금전에 홀린 이들 특유의 금빛으로 반짝이자, 지휘관은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의 지갑을 단단히 움켜쥐면서 화제를 돌렸다.
이번 업그레이드 명단 좀 볼까!
지휘관은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인형들의 사원 번호를 확인하면서 카리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피했다.
그러던 중, 이름 하나가 지휘관의 눈길을 끌었다.
...OBR?
이상하다, 얘 지난번에 업그레이드 받지 않았어? 왜 또 명단에 올라와 있지?
네? 그럴 리가요, 이번에 처음으로 명단에――
...어라?
정말로 저번 기수 명단에 있네요? 어어, 저저번 것에도... 저저저번 것에도?!
뭐야 이거, 알박기인가?!
OBR한테 연락은 해봤니?
어... 아뇨, 보통은 통보받으면 인형들이 알아서 업그레이드를 받거든요.
그런데 얘처럼 이렇게 질질 끄는 건 심각한 케이스네요.
당장 조사하겠습니다!
30분 후, 지휘 콘솔의 모니터에 카리나의 통신 요청이 다급하게 반짝였다.
지휘관님 큰일이에요! OBR이 실종됐어요!
뭐? 그럴 리가.
진짜예요!
실험실 담당자가 하늘에 맹세코 OBR이 연락해온 적도 없고 OBR을 본 적도 없대요!
다른 인형들한테도 전부 물어봤는데 아무도 걔를 못 봤대요!
지금도 OBR한테 통신을 보내고 있는데 전혀 대답이 없어요!
으으... 어떡하죠? 설마 임무 나갔다 인형매매범한테 납치당한 거 아닐까요?!
진정하고 내 권한으로 데이터베이스랑 기지 감시 기록 확인해 봐. OBR이 밖으로 나갔다면 분명 출입 기록이 남았을 거야.
넵!
OBR아 제발 놀래키지 말아 줘...
10분 후, 카리나가 요란하게 지휘실로 들이닥쳤다.
지휘관님! 단서 찾았어요!
그저께 원정 임무로 외출한 기록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평소에도 항상 일찍 나갔다 늦게 돌아와서 대부분의 인형들이랑도 못 마주친 거였어요. 어쩐지 왜 아무도 못 봤을까 했더니만...
휴우...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정말 실종된 거였으면 제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했을지...!
아무튼 실종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런데, 혼자 쏘다니는 건 그렇다 쳐도 그게 개조를 안 받을 이유는 아닌데... 이번엔 꼭 받으라 연락을 해야겠다.
하지만 자꾸 남들 몰래 돌아다니는데, 연락을 안 받으려 하면 어떡하죠?
OBR의 다음 원정 임무는 언제야? 그때를 노려보자.
유감스럽게도, 원정 임무는 고정된 일정이 없어요.
표준 절차상 인형이 직접 신청해서 일을 받는 형식――!
카리나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눈을 번쩍였다.
그리곤 그 푸른 눈동자가 몇 차례 이리저리 구르더니,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카리나?
히히히... 지휘관님, OBR을 붙잡을 방법이 떠올랐어요!
2분 후.
지휘관은 턱을 괸 채 어이없는 표정으로 화면에 흐르는 그리폰 통신 채널을 바라봤다.
본디 차분한 색조였던 인터페이스가, 눈이 아플 정도로 형형색색인 광고 메시지로 도배된 그 광경을.
【그리폰】☎카리나의 특급 정보!☎ 전례 없는 대★박 ☞원정 임무☜ 긴 급 모 집 !
【그리폰】$초고수당&보너스$ 각종★서프라이즈★ 즉 시 지 급 ! ★
【그리폰】☎카리나의 특급 정보!☎ 전례 없는――
허위 정보 유포는 규정 위반 아니니?
아이잉~ 지금 지휘관님을 도와 OBR을 낚으려는 거잖아요오~
이딴 미끼에 잘도 물고기가 낚이겠다.
그건 두고봐야 알죠! 지금 바로 카운트다운!
???
3——
......
2——
......
——삐삐삐삐삐!
통신음이 울린 순간 지휘관은 깜짝 놀라 의자째로 뒤집어질 뻔했다.
화면에 OBR의 프로필 아이콘이 격하게 반짝이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씨익 웃으며 혀를 내밀곤, 입을 싹 닦고 통신을 연결했다.
카리나 씨 카리나 씨 카리나 씨 지금 계시죠!?
안녕 OBR~ 무슨 일이니?
방금 게시된 원정 임무 마감됐나요?! 그, 그거 저 하고 싶어요!
응, 아직 열렸어~ 게다가 OBR이 제일 먼저 연락한 사람이야!
아싸아~! 드디어 안 뺏겼다!
임무 세부 내용 보내 주세요!
이 원정 임무는 좀 복잡해서 전용 도구를 지참해야 하거든?
지금 지휘실에 받으러 와 줄래?
어, 지금 당장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좀 바빠서...
그래? 그렇구나아... 급한 의뢰라 그럼 다른 인형한테 맡길――
아아아안 돼요! 저 그 보너스――가 아니라 원정 임무 의뢰 꼭 받을 거예요!
저어... 내일 새벽 3시에 수령하러 가면 안 될까요?
제발 부탁할게요 카리나 씨이~~~
새벽 3시?
시간을 가늠한 지휘관과 카리나는 아연실색했다.
다만, OBR을 붙잡기엔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휘관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리나도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새벽 3시에 지휘실로 와. 1초라도 지각하면 국물도 없어!
......
다음날 새벽. 또 바쁜 하루를 보낸 그리폰 기지는 잔잔한 밤하늘에 감싸여 잠에 들었다.
다만 어두컴컴한 지휘실 안에는 가여운 두 인간이 한 인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각 말라 했건만, 시간은 어느덧 오전 3시 32분. 문 뒤에 숨어 있던 카리나는 아주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보다 못한 지휘관이 커피 한 잔을 권했지만, 카리나는 손을 저으며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지휘관님... 살려 주세요... 얘 왤케 안 와... 간만에 일찍 잘 수 있었는데... 저 빨리 자고 싶어요...
기운내 카리나... 오늘 OBR 붙잡으면 내일 내가 말해서 야근 수당 3배로 늘려 줄게.
야근 수당이... 3배?! 그거 엄청 나올 텐데요!?
우와아... 저 지금 행복해서 기절할 거 같아요!
지휘관님! 뭐든 말씀만 하세요! 졸음이 싹 달아나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요!
덜그럭... 덜그럭...
그때, 복도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인형이 걸어오는 소리임은 분명한데, 무척 느린 데다 발도 질질 끄는 것 같고 관절축의 비정상적인 마찰음과 부품끼리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그 발소리가 지휘실의 문 앞에서 멈췄다.
카리나 씨, 계신가요?
방문자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지휘관과 카리나는 눈빛을 교환하며 숨을 죽였다.
OBR이에요!
그리고, 지휘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카리나!
상대가 채 반응하기 전에, 카리나가 껑충 뛰어올라 툭 치면 팔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은 인형을 끌어안아 붙잡곤 문을 쾅 닫았다.
팟!
조명이 껌껌했던 방을 밝혔고, 바닥에 넘어진 OBR은 놀란 토끼 눈으로 고개를 들어 무시무시한 표정인 두 사람을 바라봤다.
잡았다 요녀석!
나랑 지휘관님이 널 얼마나 찾은 줄 알아!?
그래! 하루 종일 찾았어!
말해! 왜 아직도 마인드맵 업그레이드 안 받았어!
말해!
네!? 네?! 원정 임무에 필요한 도구 주신다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
꿈 깨셔! 업그레이드 마치기 전엔 아무 임무도 받을 생각 마!
그래! 내일 당장 실험실 가서 개조 다 받고 와!
OBR은 한참을 어리둥절해하며 지휘관과 카리나를 번갈아 보다, 마침내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곤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갑자기 급속도로 창백해지더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지휘관님!
OBR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사과했다.
그 큰 움직임에, 그녀의 소체에서 금속 부품이 엉키고 부딪혀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이에 지휘관과 카리나는 모두 놀라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죄송해요, 하지만 업그레이드는 받을 수 없어요!
왜?
마, 말 못해요!
무슨 어려운 사정이라도 있니? 내가――
지휘관님! 말하실 필요 없어요! 저랑 벌써 상의했잖아요, 이번에도 OBR이 업그레이드를 안 받겠다 하면 특별 조치를 취하겠다고!
응? 내가 언――
카리나가 눈을 부릅 뜨며 눈치를 줬다.
트, 특별 조치라뇨!?
지휘관은 그 의중을 읽고, 안면 근육에 잔뜩 힘을 주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전긍긍하는 OBR에게 고개를 돌렸다.
――음, 카리나 말대로다.
OBR, 네 소체는 노화가 너무 심각해서 작전은 물론 일상 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어. 이대로 계속 마인드맵 업그레이드를 받지 않겠다면, 널 퇴역시킬 수밖에 없다.
막노동판에다 던져버릴 거야!
OBR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나친 충격에 마인드맵까지 잠깐 과부하된 모양이었다.
네엣...?! 그, 그럼 그냥 폐기한다는 말이잖아요! 저, 저저저... 어떻게... 안 돼요... 저...
지, 지휘관님! 버리, 버리지 말아 주세요오! 으아앙――
OBR은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지휘관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여우 같은 카리나는 지휘관에게 엄지를 척 세우며, 작전 성공을 선언했다.
OBR, 일단 울음 뚝. 사정이 있다면 천천히 말을 해보렴. 도울 수 있다면 도와줄게.
흐으응... 죄송해요 지휘관님... 실은요... 저... 계속 빚 갚으라고 독촉당해서, 피하느라아...
어째선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빚이 자꾸 늘어나요...
갚으려고 다른 애들한테 돈을 빌리기까지 했는데도 전혀 빚이 줄어들질 않아서... 그들과 마주치면 빌린 돈 갚으라고 따질까 봐 무서워서... 매일 기지 밖에서 있었어요...
이미 빚이 산더미인데 개조받으면 소체 정비 비용도 오를 텐데... 이젠 돈 빌릴 사람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어서...
흐으응... 어떡해요 지휘관님...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저 혼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OBR의 눈물젖은 호소에 카리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흑... OBR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었다니...!
마인드맵 업그레이드로 소체도 신형으로 바꾸면 정비 비용이 제법 오르긴 하죠. 다른 애들한텐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OBR에겐 그야말로 재난이었구나...!
카리나 씨이이... 저 도저히 감당 못해요오...
하아... 그리폰의 충직한 사원이 빚으로 이런 안습한 처지라니...
지휘관님, 이를 어떻――
으엑?!
카리나가 고개를 돌려 본 지휘관의 눈가엔 이미 눈물이 잔뜩이었다.
지, 지휘관님...?
지휘관님... 우, 울지 마세요...
미안하다, OBR... 크흑... 내가 일에만 열중하느라 너희를 챙기지 못한 탓이야!
이건 내 과실이기도 하니, 내가 도와주겠어! 날 믿으렴 OBR, 너를 반드시 채무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게!
지휘관님...
카리나!
넵!
해 뜨는 즉시 OBR을 실험실로 데리고 가서 업그레이드시켜 줘. 개발 센터에다 OBR의 개조 비용과 이후의 모든 정비 비용도 내가 지불하겠다 하고.
그리고 다른 인형들에게 빌린 돈과 아직 갚지 못한 빚까지 내가 전부 해결해 주마!
엑... 지휘관님? 그거 진심이세요...?
당연히 진심이지! 내 소중한 부하가 처참한 꼴인데 어떻게 가만 있어?!
OBR, 앞으로도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렴!
흐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휘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