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R
MOD 3
5배액마안?!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그 옷에 짐가방을 봐선 절대 그만한 금액이 안 나와!
혹시 식성이 까다로운 거야? 아니면 부동산 대출이라도 받았어?
아아뇨, 딱히 뭐 사는 것도 없고 음식도 가리지 않아요. 그저 빚을 계속 갚느라...
...어쩌다 빚이 늘어났는진 저도 모르겠지만요...
혹시 다단계나 사채업자한테 사기당한 건 아니에요?
아닐...걸요?
네 금전 감각을 어떻게 다듬을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우선, 우리 여행 계획 어떻게 짰어?
그러고 보니 호텔의 마중 차량이 늦네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죠?
그렇네, 어떤 호텔을 예약했는지도 아직 안 물어봤어!
혹시 수영장 없는 데야? 나 진짜 오랜만에 마음껏 수영할 수 있을까 기대했단 말이야...
미리 말해 두는데, 난 최소 3성급 아니면 안 들어가.
아니에요, 이것만은 절 믿어 주세요!
틀림없는 최고급 호텔을 예약했으니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정말로요? 얼마나 고급인데요?
여기에 간략한 소개문이 있거든요... 여기요, 보세요! 성급!
류 소총이 OBR이 전송한 전자 팸플릿을 받아,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 보았다.
별이 하나 둘 셋 넷...
...80성?
무슨 평점 바겐 세일이래? 너무 오버 아니야?
가격까지 오버인 건 아니겠지?
아뇨, 그렇지 않아요! 우리 4명 다 합쳐도 다섯 자리를 안 넘어요!
그럴 리가?!
다섯 자리도 안 된다니, 그 호텔의 품질이 더더욱 의심스러워지는데...
으음... 역시 그럼 좀...
뭐야 저거... 어, 저게 우리 차 아니야?
ADS의 시선을 따라간 그 끝에, 새하얀 리무진이 공항의 출구 문앞에 있었다.
OBR 님과 친구분들, 초고급 해변뷰 별장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길다란 리무진 위에 달린 황금색 홀로그램 전광판에 띄워진 문구였다.
게다가 그 홀로그램 전광판 밑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LED와 활짝 핀 붉은 장미들까지 장식되어 있었다.
일행은 한 줄로 서서 떡 벌어진 입으로 호텔 차량과 OBR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티끌 없이 새하얀 리무진은 너머의 황금빛 백사장과 대비되어 더욱 눈부셨다.
세 인형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고, 의심의 눈초리도 저 터무니없이 고급스러운 리무진 앞에서 사라졌다.
OBR은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느닷없이, 일행을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저, 저한테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이전까진 멍청하게 돈을 낭비했지만, 이번 여행은 예약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지출을 철저하게 관리하기로 다짐했어요! 지휘관님의 근심도 덜어드리고, 여러분의 기대에도 꼭 부응할게요...
부, 부디 절 믿어 주세요!
......크흠.
이 정도의 성의라면야 좀 참아 줄——
자 자 잔소린 됐으니까 어서 가자!
아앗 같이 가요!
류 소총은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서 일행을 바쁘게 따라갔다.
......
"해변뷰 별장" 호텔.
갈매기 한 마리가 늘씬한 날개를 뽐내며 바다와 백사장이 맞닿는 경계선을 따라 활공했다.
이 황금빝 모래사장에 감싸인 섬의 고지 중앙에 우뚝 선 새하얀 대리석 호텔은, 마치 동화속 작은 성처럼 깨끗하고 고요했다.
호텔의 벨보이는 친절히 트렁크의 짐가방을 꺼내 고급진 짐수레 위에 실었다.
그리고 인형들은 안내원 아가씨를 따라, 말끔한 레드카펫을 밟으며 으리으리한 호텔의 로비에 입성했다.
우와아... 여기, 정말...
...예상밖이네.
음, 나쁘지 않아.
와아, 여기 꽃 좀 보세요. 향도 엄청 좋다아...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OBR은 리셉션 프런트에서 투숙 정보를 확인하면서 귀를 쫑긋 세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설마 자신이 그 어질어질한 호텔 광고들 사이에서 이런 보물을 캐내고,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이 정도의 고급 서비스를 받게 되다니.
OBR은 마인드맵 업그레이드를 받고 나니 판단력도 엄청 상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휘관님, 이제 안심하세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손님 여러분, 어서 오십시오. 한 분씩 이 반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희 호텔은 투숙 기간 중엔 항상 착용하고 계셔야 합니다.
일행이 프론트 앞에 모여 그 반지를 받았다.
붉은 벨벳 안감의 케이스 안에 가지런히 놓인 은빛의 금속 반지는 그 매끈한 표면에 천장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비쳐 반짝였다.
반지를 케이스에서 들어 손가락에 끼우는 그녀들은 마치 왕궁의 무도회에 초대된 공주님이 된 것마냥 황홀경에 빠졌다.
그래서, 아무도 순간적으로 마인드맵에 흐른 미약한 노이즈를 눈치채지 못했다.
특별한 반지인가요?
저희 호텔은 특수 주문 제작한 이 반지로 키카드를 대신하며, 레스토랑과 헬스장, 전용 해수욕장 등의 호텔 시설에서 전속 서비스를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편리하네요! 그러고 보니 제가 예약한 코스에 무료 해수욕장 이용권도 있어요, 어서 가요!
해수욕장?! 기대된다~!
저도요! OBR 씨 정말 꼼꼼하게 계획하셨군요!
흐응... 객실이 어떤진 아직 모르니까 다 세세하게 따질 거야.
......
그날 저녁,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
잔잔한 음악이 빈티지 축음기를 통해 레스토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세련된 바 카운터에서는 옆의 분홍색 원형 양초가 조용히 타오르며, 흔들리는 노란 불빛으로 와인잔을 비췄다.
PPD-40은 잔을 들어 코끝으로 와인의 향을 음미한 뒤 천천히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윽한 향의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며, 포근한 기운이 소체의 구석구석에 퍼지는 듯했다.
정말 최고야 OBR!
그럭저럭 하네.
에헤헤... 제가 한 것도 아닌데요오...
그렇게 겸손할 거 없어요 OBR 씨! 당신이 이런 곳을 예약한 덕분에 방금 같은 경치를 즐길 수 있었잖아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황금빛 석양이 푸르른 수평선 너머로 녹아드는 걸 지켜보면서, 달콤한 과일주를 마신다... 극락이 따로 없네요!
그치~ 해수욕장 물이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깨끗했어!
근데 아까 우리가 마신 거 샴페인 아니었나?
그랬나요? 제가 잘못 기억했나 보네요...
네? 무료 제공된 오렌지 주스였을 텐데요?
응? 나 지금 와인 마시고 있는데?
OBR 일행이 눈빛을 교환하다, 모두 카운터 옆의 방금 뚜껑을 딴 유리병 속 액체에 시선을 집중했다.
보세요, 이거 우리가 아까 해수욕장에서 마신 오렌지 주스잖아요. 저기 저것도요.
눈에 바닷물 들어갔니? 와인 처음 봐?
OBR이 흠칫 눈을 찌푸리며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하는 ADS와 류 소총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너희는 이게 와인으로 보이니 오렌지 주스로 보이니? 진지하니까 농담 말아.
무슨 소리야... 샴페인이잖아.
제, 제 눈엔 과일주인데요...?
엑...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잘 보세요, 이 라벨에도 분명히——
문제 있으십니까?
건장한 체격의 보안요원이 소리 없이 튀어나와 OBR의 말을 잘랐다. 그 새까만 선글라스 뒤에 가려진 두 눈에서, 형용키 어려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 아, 아무 일도 없어요! 제 친구가... 친구가... 이, 음료수 엄청 맛있대서 저희한테 추천하는 중이었어요!
이 음료는 저희 호텔의 시그니처 드링크입니다. 레시피는 사업 기밀이므로 공공장소에서의 언급은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습니다, 주의할게요! 그그그러고 보니 슬슬 방에 돌아가서 짐 정리하고 저녁 식사를 해야죠?! 모두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가요!
OBR이 재빨리 일행에게 눈치를 줘, 함께 바에서 빠져나와 방으로 도망쳤다.
후우... 위험했다...!
방 문을 닫는 순간, OBR은 긴장이 풀려 문에 기댄 채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괜찮아? 왜 그렇게 당황했어?
잘은 모르겠지만... 방금 그 아저씨, 왠지 예전에 빚을 독촉하던 건달이랑 비슷한 분위기였어요...
갑자기 안 좋은 느낌이 드는데, 어쩌죠...?
그냥 PTSD 아니야? 전술인형은 그런 인간 같은 심리학적 약점 따위 없는 줄 알았는데.
PTSD고 뭐고, 그 음료에 대해선 다들 어떻게 생각해?
저, 바텐더가 안 보는 사이에 하나 슬쩍해 왔어요!
!!!
류 소총이 국방색 코트에서 꺼낸 유리병에 모두가 몰려들었다.
병을 살짝 흔드니, 아직 반 병 정도 담긴 액체가 병의 안쪽을 따라 회전하며 찰랑였다.
이를 OBR을 비롯한 모두가 뚫어져라 관찰했다.
...뭔지 알 것 같아?
이상하네요... 너무 묽어요. 주스라면 점성이 있어서 이 정도로 찰랑이진 않는데...
냄새와 맛은 확실했는데, 잔에 달라붙는 모양새가 와인 같지 않아서 좀 이상하긴 했어.
그렇다는 건... 똑같은 액체인데 우리 모두한텐 맛과 색이 제각각이었단 소리네.
...뭐야 이거? 뭘 의미하는 거야?
서, 설마 마법일까요? 아니면 우리 감각이 잘못됐다거나...
그래, 물건이 잘못되진 않았을 테니 우리 감각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누가 우리의 감각 시스템을 해킹했다고...?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우리 마인드맵이 그리 쉽게 해킹당할 리가 없잖아, 대체 어떻게...
...반지.
???
OBR이 고개를 숙여,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은색 반지를 쳐다봤다.
안내원이 투숙 기간 동안 이 반지를 꼭 끼고 있으라 했잖아요. 제 생각에, 어쩌면...
벗어보면 금방 알겠다.
OBR이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를 조심조심 벗었다.
그리고 반지가 손끝을 벗어난 그 순간, 마인드맵 표층을 간섭하던 그 미세한 노이즈가 사라졌다.
허억! 마, 맙소사...!
감당 못할 진실을 목도한 것처럼, OBR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당혹스런 눈빛으로 주위를 마구 두리번댔다.
저, 저도 벗을——허어억!
인형들이 차례대로 반지를 벗자, 화려한 인테리어가 순식간에 뒤틀리며 색이 바래더니...
새하얗고 폭신폭신한 카펫은 걸레 같은 넝마로 변했고, 반짝이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누르스름한 백열 전구가 되었다.
벽지, 천장, 침대, 커튼 , 소파... 전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져 음영이 드리웠다.
그들은 지금 예약한 "최고급 호텔 침실"이 아니라, 퀭하고 누추한, 쓰레기장에 견줄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이었다.
유리병에 든 액체도 누리끼리한 불빛을 받으며 그 정체를 드러냈으니, 그냥 맹물이었다.
막 도착했을 때와는 많이 다른 의미로, OBR 일행은 아연실색했다.
이게 뭐야아...! OBR! 너 대체 어디서 이런 사기 업소를 찾은 거야?
"업소"는 무슨... 이거 완전 원시인 동굴이잖아!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그, 그불게에서 본 호텔 광고인데...
보세요, 이 팸플릿에도 적혀 있잖아요... 여기 침실 미리보기 사진도 멀쩡하고...
"지존급 해변뷰 별장 호텔 - 특가 체험, 단돈 999.99!"
그, 그냥 신장개업한 호텔이 할인 이벤트하는 줄 알고...
999 가지곤 바닷가의 호텔은커녕 그리폰 기지 일일 견학 코스비로도 못 내! 이 방 꼬라지 좀 봐, 이 빌어먹을 반지 때문에...
세상에, 아까 그 해수욕장도 사실 흙탕물이었던 거 아니야?!
히이이익!! 말하지마 PPD! 나 토 나올 거 같아!
그, 그냥 빨리 나갈까요!? 여기 계속 있다간 정말로 큰일날 것 같아요...!
패닉에 빠진 일행을 보며, OBR은 고뇌했다. 이제야 어째서 자신이 계속 빚더미에 짓눌렸는지 알 것 같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OBR은 주먹을 꽉 쥐고 울먹이며 동료들에게 연거푸 허리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아직 절망하기엔 일렀다.
OBR은 팸플릿에 적힌 "불만족 시 전액 환불"이란 문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호텔을 잘못 고른 탓이에요... 그래도 아직 합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요!
제가 가서 그 사람들한테 따질게요! 급할 거 없으니까, 잘 준비해서 프런트에 가요... 반드시, 반드시 여러분을 더 실망하게 만들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