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R
MOD 4
잠시 후, 호텔의 리셉션 프런트.
OBR이 반지 4개와 팸플릿을 프런트에 쾅 내리쳤다.
그러자 안내원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나운 기세의 고객들을 깔보는 눈빛으로 맞이했다.
퇴실하겠어요! 그리고 환불해 주세요!
물론 가능합니다만, 우선 결제부터 마쳐 주십시오.
우리가 이용한 서비스 전부 선불 요금에 포함됐잖아요, 뭘 또 결제해야 하는데요?
3인의 해수욕장 이용과 음료수, 바, 그리고 객실의 소모품...
선불하신 금액을 제외하면 66.6만 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 명세서를 확인해 주십시오. 결제는 현금으로 하시겠습니까, 카드로 하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해수욕장 1회 무료 이용권 있잖아요!
해수욕장 무료 이용권은 1인용입니다. 손님의 일행 3분의 이용 요금은 직접 부담하셔야 합니다.
그럼 이 음료는요! 그냥 맹물을 주고 우리의 마인드맵을 속였잖아요! 어떻게 이딴 걸로 돈을 받아요!?
손님들께서 마신 것은 물이 맞습니다만, 각종 고급 음료의 맛을 즐기신 것에 더불어 서빙해 드렸으니 당연히 유료입니다.
아, 아무튼 전액 환불 요구하겠어요! 여기 팸플릿에도 확실하게 적혀 있잖아요, 이것까지 딴소리하진 않겠죠?
안내원은 피식 웃더니 팸플릿을 뒤집어 텅 빈 공간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손님, 여기를 보시겠습니까?
"해당 조항의 최종 해석 권한은 업소측에 있으며, 언제든지 조항 변경이 이뤄질 수도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떡하니 적혀 있는데, 못 보셨나요?
그야 당연했다. 새하얀 배경에, RGB값을 눈곱만큼 바꾼 듯한 색으로 문구가 인쇄되어 있어, 인형인 OBR도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해서야 간신히 읽을 수 있었으니까.
이게 뭔...!?
OBR이 계속 따지려 했지만, 사나운 인상의 보안 요원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OBR 일행을 단단히 에워쌌다.
뭐, 뭐예요?!
히익...!
......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호텔은 요금을 결제하지 않는 고객을 자체적으로 제재할 권한이 있습니다.
손님의 미납 요금 66.6만은 어떻게 지불하시겠습니까? 현금, 아니면 카드?
......
당황하며 외투 주머니를 뒤적인 OBR의 손끝에 딱딱한 신용카드가 닿았다.
그럼 모두, 섬에서 잘 놀다 와! 돈 문제는 지휘관님한테 맡기면 돼!
히히, 걱정 말래도? 이 신용카드로 얼마든지 긁어도 돼... 지휘관님도 동의하셨는걸, 절대 너희를 안 나무라실 거야!
하지만 정말 괜찮을까? 지휘관님이 이 일을 아셨다간 엄청 실망하실 텐데...
안내원은 손가락으로 짜증스럽게 카운터를 툭툭 두들기고 있었다.
보안 요원들도 눈빛리 갈수록 험악해지며 조금씩 발을 내디뎌, 일행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선 돈을 낼 수밖에 없어...
우으으... 죄송해요 지휘관님! 이 돈은 꼭 갚을게요! 꼭이요!
마침내, OBR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휘관의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결제 완료.
그 경쾌한 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지자마자, 보안 요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만 OBR은 맥없이 고개를 떨군 채 신용카드를 도로 주머니로 넣을 뿐이었다.
돈 냈으니 이제 우리한테 따질 거 없지?
그럼 너네 전용 리무진 언제 와? 당장 공항 갈 거야!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호텔의 전용 리무진은 VVIP 고객만 이용 가능합니다.
네? 그럼 우릴 공항에서 여기로 데려다준 차는 뭔데요?
그건 저희 호텔을 처음 찾으시는 손님을 위한 1회 무료 체험 서비스입니다.
리무진 서비스가 제공되는 VVIP 멤버쉽은 저희 호텔에서 999.99만을 소비하셔야 합니다.
손님은 현재 66.6만을 소비하셨으니, 앞으로...
당신들한텐 더는 한 푼도 안 쓸 거니까 꿈도 꾸지 마요!
......
하, 하지만 우리 짐이 이렇게나 많은데요...?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지휘관한테 도와 달라 할까?
포기해, 아까부터 계속 섬 밖으로 통신 걸어봤는데 자꾸 중간에 두절돼. 패턴으로 봐선 누가 인위적으로 잘라먹는 건데, 뻔하지 뭐.
쓰읍... 그럼 택시는? 아무리 그래도 택시는 있을 거 아니야.
인근의 차량을 검색... 아, 있다! 여러분 이것 좀 보세요!
일행이 OBR의 단말기를 확인하니, 화면에 희망찬 푸른색의 신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음?
"이 차량은 초고급 해변뷰 별장 호텔 그룹 산하의 택시입니다. 호텔 VVIP 멤버쉽 가입 고객만 이용 가능하시며, 그외에는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보귀하신 VVIP 고객님의 호출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상 고객 사절!"
어... 이건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호텔에서 대충 1000만을 써서 VVIP가 되어야만 이 택시를 부를 수 있단 소리야.
이딴 게 어딨어요?!
그럼 어쩌면 좋죠...?
띵띵~
종업원이 느닷없이 벨을 울렸다.
거기 손님들, 체류 시간에 주의해 주십시오. 손님들은 저희 호텔에서 투숙을 중단하셨기에 이제 외부인으로 간주됩니다.
본 호텔 규정으로 외부인은 호텔 내에서 15분 이상 체류 시 분당 요금을 받습니다. 현재까지 14분 체류하셨으니――
"요금"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OBR의 신경이 활시위처럼 팽팽해져...
뒤도 안 돌아보고 짐가방을 전부 들쳐메고서 호텔 로비를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
호텔의 현관문은 일행의 뒤로 쿵 닫혔다.
그나마 저녁의 바닷바람이 불어와, 기운 빠진 인형들의 피곤한 얼굴을 포근함으로 어루만졌다.
헥... 헥... 짐 챙기느라 너무 힘들었어요오...
아무튼간에 저 사기 업소에서 탈출이다! OBR, 이제 어떡할 거야?
어...... 일단 공항으로 가요.
호텔 차량도 없고 택시도 없는데 무슨 수로?
걸어서요.
"걸어서."
일행은 한층 더 맥이 빠졌다.
시, 심사숙고한 결과예요! 교통수단은 없지만 우리에겐 튼튼한 두 다리가 있잖아요!
게다가, 우린 전술인형이잖아요!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우리의 튼튼한 다리로 알뜰하게! ......안 되나요?
으... 그치만 짐가방이...
에휴, 귀찮지만 여기 죽치고 있는 것보단 낫지. 저 망할 사기 업소는 꼴도 보기 싫어!
찬성.
류 씨 짐가방은 제가 들어드릴게요!
여러분 의견이 그러시다면야...
그럼 꾸물거리지 말고, 출발!
인형들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심호흡하며 사방을 둘러봤다.
잔잔하게 철썩이는 파도와, 저 멀리서 빛을 발하는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예민해졌던 인형들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휴가를 망쳐서 짜증나지만... 그래도, 역시 바다는 보고만 있어도 좋다.
네에, 바닷가를 따라 걷는 것도 좋네요.
그런데 슬슬 너무 어두워지네요. 야시장비를 어디다 뒀더라...
그 말에 일행들도 뭔가 떠오른 듯, 각자 고개를 숙여 짐가방을 뒤졌다. PPD-40만 빼고.
그녀는 콧방귀를 뀌곤, 핸드백에서 야시경을 꺼내 보였다.
흥, 이렇게 중요한 장비는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둬야지. 다음엔 안 기다려 줄 거니까 알아서 해.
야시경을 쓴 PPD-40은 양손을 허리에 짚고 느긋하게 먼 곳을 바라봤다.
수평선 너머로 물결치는 해수면에 맑고 깨끗한 달빛이 쏟아져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저건...?
얘들아, 저것 좀 봐봐!
모두가 야시경을 통해 PPD-40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시선이 닿는 곳이 전부 물바다였다.
바닷물이 수평선 끝에서부터 높다란 호텔의 플랫폼 아래까지 차오른 것이었다. 차도, 인도, 길가의 풀밭까지 전부 바닷물 아래에 잠겨버렸다.
바닷바람을 맞는 한 줄의 야자수들이 섬 중앙의 고지와 바닷가의 경계선을 간신히 보여 줄 뿐이었다.
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올 땐 안 이랬잖아요!
...밀물이지 뭐.
큰일이다... 나야 바다에 들어가도 별 문제 없지만, 너희는...
ADS가 걱정스런 눈으로 동료들을 바라봤다.
제 소체도 기본적인 방수 기능은 있지만, 해수는 부식성 때문에 무리예요...
이대로 공항까지 가면 소체가 망가질 텐데...
그렇다고 저 "호텔"로 돌아가자곤 하지 않겠지?
으에엑!?
......
그, 그냥 돈 좀 더 들여서 홀에서 하룻밤 기다렸다 물 빠지자마자 출발하는 편이 짐가방 들고 바닷물에 잠기는 것보단 낫잖아요...!
OBR, 네 생각은 어때?
OBR은 주먹을 꾹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잘 배우고 나면, 너 혼자서도 다시는 빚 걱정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저... 정말로 가능할까요?
물론이지!
다정한 지휘관의 얼굴이, OBR의 마인드맵에 아직도 선명했다.
큰 기대를 품은 눈빛에, 상냥한 미소.
지휘관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또 다시 함정에 빠져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어떡하면 좋을까? 지금 모두가 OBR에게 기대고 있고, 지휘관도 OBR에게 기대하고 있다. 결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터였다.
바다...
물... 등대...?
배!
OBR이 흥분해서 눈을 반짝였다.
여러분,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요!
저 멀리 흔들리는 그림자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었다.
정말 공항까지 헤엄쳐 가자고는 하지 말아 줘.
아뇨,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저거요!
OBR이 의지를 불태우며 저쪽의 야자수들을 가리켰다.
저 야자수로 뗏목을 만들어서, 물길을 따라 공항까지 가면 돼요!
일행은 당연히 경악했다.
어... OBR 너 마인드맵 과열된 건 아니지?
재미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네.
모두가 비관적임에도, OBR은 자신있게 가슴팍을 툭툭 쳤다.
걱정 마세요, 뗏목 만들기라면 제가 일가견 있으니까요!
예전에 채권자를 피하다 바닷가에 몰렸을 때 간이 뗏목을 만들어서 도망친 적도 있거든요!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는 거라고요!
......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저 사기꾼들한텐 절대 돌아가선 안 돼요. 카드를 긁을수록 지휘관님의 생활이 고달파진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제가 이번 여행을 책임졌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모두가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하겠어요. 저를 믿어 주세요!
자 자, 어서 가서 야자수를 베자고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금방 될 거예요!
......
3일 후, 그리폰 기지.
지휘관이 지휘실 문을 여는 순간——
펄럭펄럭펄럭펄럭...
프린터에서 영수증이 그 순간에도 인쇄되어 나와 지휘실의 바닥을 덮고 있었다.
카리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 종이 카펫 위에서, 막 정리한 영수증 뭉치를 들고 굳어버린 지휘관에게 밝게 인사했다.
이게 다 뭐어야아아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지휘관님! 다 뭐긴요, OBR의 재테크 연수의 대금 청구서와 명세서죠~
수가 좀 많아서 아직 일부밖에 정리 못했지만요!
직접 보지 않아도 "억" 소리 날 종이 뭉치들을 보면서, 지휘관은 절망감에 딸꾹질까지 했다.
아 참, 방금 수복실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그 애들 소체가 장시간 바닷물에 노출된 탓에 부식이 심해서 전부 새걸로 교체해야 한대요.
사고 발생 당시의 영상은 아직 재구성이 안 끝났는데, 추측하길 바다에서 직접 만든 뗏목을 타다 사고로 뗏목이 풀어지는 바람에 모두 바다에 빠졌다는 것 같아요.
그 때문에 마인드맵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아서, 회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네요오...
어쩜 이리 불행한 일이~
지휘관님이 여행을 보낸 직속상관이시니까 사비를 들여서라도 그 애들을 케어해 주셔야겠죠, 그쵸?
아니 잠깐만요, 카리나 씨? 이럼 나 진짜 빈털터리 되거든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대금... 이거 내가 여기서 뼈빠지게 일해도 갚을 수는 있어!?
히히히, 아마 평생 일하셔도 부족할걸요?
지휘관은 절망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지휘관을 엄습했다.
설마... 카리나 너...!
네? 왜 그러세요, 지휘관님?
너... 너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서...!
OBR한테 그 녀석들을 붙인 것도 다 계산해서...!
헤헤헤... 에이, 설마요오~
천진난만하게 웃는 카리나의 푸른 눈동자는, 금빛으로 반짝였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사랑하는 우리 지휘관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