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12
MOD 1
10년 전 어느 번화가.
창백한 햇살이 쏟아지는 대낮.
넓은 플라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방에 위협이 도사리는 밀림처럼, 광장에서 대치 중인 양측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인형 "헬렌"! 너는 이미 포위됐다!
마지막 경고다, 즉시 인질을 풀어 줘라!
노란 폴리스 라인 뒤로는, 언제라도 초연을 내뿜을 준비가 된 총구들이.
그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예리한 비수 뒤로는, 어린 남자아이의 연약한 목이 닿고 있었다.
트로이 도련님, 유언이라도 있으실까요?
모두 지켜보고 있답니다.
상냥한 듯하면서도 한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헬렌... 부탁이야, 엄마 아빠한테 돌려보내 줘...
아무도 널 해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할 테니까 제발...
나, 난 죽고 싶지 않아... 널 얌전히 보내 달라고 부탁할게... 약속할 테니까...
가여운 우리 도련님...
겁에 질린 호소에 돌아온 것은 경멸 어린 조소였다.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도련님을 사랑해드리고 보살펴드렸는데, 왜 도련님은 도련님을 제대로 봐 주지도 않던 매정한 인간들만 생각하시나요?
저번 달의 개학식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지난 주의 생일 파티도 벌써 잊으셨나요?
그... 그건 그냥 바빠서 그런――
으윽...!
트로이를 감싼 무섭도록 부드러운 팔뚝이 갑자기 몸을 조이자, 맑은 눈물 두 줄기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리도 선량하고 순진한 영혼이, 왜 더럽고 추한 세상에 물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지.
흑...
오늘... 엄마 아빠랑... 같이...
같이, 놀이동산에... 가기로 했단... 말야...
쉬잇... 그 매정한 사람들은 잊으세요.
도련님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그들은 버리고, 저와 함께 가요.
우리만의 낙원을 찾아, 평생 함께하면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내요.
도련님의 부모란 자들보다 제가 더 도련님을 잘 보살피고 사랑해드릴 테니까요...
예리한 칼끝은 천천히 트로이의 목에 가까워져 갔고, 이윽고 어렴풋이 붉은색이 스며나오는 듯한――
삑.
태블릿이 영상의 재생을 끝냈다.
이를 끝까지 다 본 VSK-94와 스테츠킨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고, 동시에 시선을 멀지 않은 곳에 편히 앉아 있는 인물에게 향했다.
바로 저 DP-12에게.
저 봐, 눈 크게 뜨고 봐!
저 눈빛! 평소의 말투! 그리고 이 현상수배령이랑 비교해 보라고!
틀림없어, 저 녀석이야!
......
......
오래된 민담설화집을 고운 손가락으로 넘기는 DP-12.
두 쌍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지고 있는데도, 그녀는 지금 판타지 세계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 내가 아는 한에서는, 비록 DP-12 씨가 좀 괴짜스런 면이 있긴 하지만 이런 중범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은 아닌데.
으이구 이 바보야! 사람의 본성이란 원래 알다가도 모르는 거라고!
지금 읽는 저 책이 "메데이아" 설화인 거 안 보여?
...그게 뭔데?
쓰읍... 모르면 알아서 찾아 봐.
아무튼, 겉보기에 무해하고 선량한 녀석일수록 본성은 극악무도한 살인마일 수도 있는 법이라구.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폰에서 수년간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아온 내 코가 냄새를 맡았어! 아주 솔솔 풍겨!
아아, 재벌가 루카스 그룹이 건 거액의 포상금! 아아, 앞으로 펼쳐질 반짝반짝 찬란한 내 인생!
스테츠킨은 황금빛 망상에 빠져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했다.
선배가 언제부터 현상금 사냥꾼이었어? 여기에 그런 보직이 있었나?
아 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아무튼 넌 여기 앉아서 자알 지켜보고 있으라구, 내가 어떻게 하는지 말이야!
......
벌떡.
스테츠킨은 폼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DP-12에게 다가갔다.
......크흠.
고귀하고 아름다운 신화 속 메데이아 공주는,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아손 왕자에게 한눈에 반해 모든 걸 버리고 따라갔지만...
왕자의 매정함에 그녀는 미쳐버리고 말아,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면서 복수하려 했다.
이런 뒤틀리고 어두운 이야기, 네 과거에 딱 어울리는 이야기네.
그치, "헬렌" 씨?
......?
그 이름을 들은 순간, DP-12의 얼굴에 한순간 경악이 스쳤다.
토끼눈을 끔뻑이며 스테츠킨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한 그녀는, 아리송한 미소로 답했다.
아아, 스테츠킨 씨.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확실히 충격적인 이야기죠.
그런데, 지금 저를 뭐라 부르셨어요? 잘못 들은 것 같아서.
스테츠킨은 콧방귀를 뀌곤 친근한 척하며 DP-12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치미 떼지 마셔, "헬렌".
10년 전, 재벌가의 하녀 인형이었던 넌 그 집 도련님 트로이 루카스를 독차지하려고 잔인한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잖아.
결국엔 그 애를 납치해서는 부유층 단지의 플라자에서 경찰과 대치까지 하는 소동까지 일으켰고.
DP-12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어... 당신이 창작한 이야기인가요? 흥미롭네요.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요?
그야 "헬렌"은 체포되고 인질도 무사히 구출됐지만...
얼마 안 가 탈옥하고 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졌지, 무려 10년이나!
그런데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DP-12 씨는 그 소체가 마침 딱 10년 전에 교체한 거지?
......
또 마침 내가 네 입사 프로필도 확인해 봤거든... 예전에 부유층의 거주구에서 종사한 경력은 있는데, 상세 내용이 완전히 공백이더라?
......
완벽하던 위장이 드디어 파훼된 걸까?
스테츠킨의 예리한 시선을 마주하는 DP-12의 눈빛이 풀어지고, 처지는 시선에 암운이 드리우는 듯했다.
승패의 천칭이 자신에게 기우는 것을 느낀 스테츠킨은 흥분돼서 얼굴이 후끈거렸고...
그렇기에 돌연 목덜미에서 느껴진 서늘한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
눈 깜짝할 사이에 DP-12가 스테츠킨의 뒤에 나타나, 그녀의 어깨에 부드러운 팔을 두른 것이었다.
그 차가운 손끝으로, 스테츠킨의 급소를 어루만지면서.
무, 무슨 짓이야?! 엑 내 목소리가...!
그 납치...
이런 식인가요?
파직... 파직...
비명을 질러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발성 모듈이 해킹당해 모기만한 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카페 안을 오가며 담소를 나누는 인형들.
그중 아무도 한구석에서 친근하게 달라붙어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이, 사실은 위험천만한 대치극을 벌이는 중임을 의심도 하지 않았다.
역... 역시 너였...구나...!
뭐야... 입...막음할... 셈이야...?!
쉬이잇...
무섭도록 부드러운 팔뚝이 스테츠킨의 몸을 조였다.
꼼짝달싹도 못하는 스테츠킨은 그저, DP-12의 손가락이 한 마리의 뱀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타고 머리 위로 오르는 것을 느끼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헬렌...! 네가 바로... 헬렌...이었어...!
끄윽...!
가벼운 코웃음이 부드러운 입김과 함께 "인질"의 귓가를 간질였다.
우리 귀여운 스테츠킨 양, 상상력이 참 풍부하시네요...
그런데, 당신의 주장에 확실한 증거가 있나요?
......
가볍고 부드러운 입김이 또 귓등을 간질였다.
안심하세요, 이건 전부 사소한 장난일 뿐이에요.
저는 당신에게 아무 짓도 안 해요.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증거 하나 찾지 못할 테니까.
부드러운 구속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풀렸다.
스테츠킨이 이를 알아챘을 때 DP-12는 이미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그리고 우아한 만큼 그 의중을 읽을 수 없는 발소리는, 더할 나위 없는 리듬으로 카페 밖으로 사라졌다.
......
스테츠킨 선배...?
VSK-94가 커피잔을 든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고작 몇 걸음이건만, 스테츠킨에겐 그 시간이 5분의 1배속처럼 길게 느껴졌다.
잘 보고 있으라더니 뭐하다 DP-12 씨한테 껴안기기까지 했어?
역시 현상수배범 아니었지?
야... 이 멍텅구리야!!
정신을 어따 뒀길래 그걸 눈치 못 채!?
정신을 번쩍 차린 스테츠킨은 VSK-94의 손에서 커피를 덥석 낚아채 꿀꺽꿀꺽 마셨다.
푸하아! 허억... 허억...
젠장... 당했다...!
이 산전수전 다 겪어본 현상금 사냥꾼 스테츠킨이 설마 헬렌에게 당하다니!
헬렌...?
그래, 쟤 현상수배범 헬렌 맞아!
DP-12가 바로 헬렌이라고!!!
그럼 아깐 왜――?!
스테츠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VSK-94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눈으로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며,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
교활한 범죄자 같으니, 어디 두고봐!
나 스테츠킨! 그리폰 최고의 현상금 사냥꾼이!
내 명예를 걸고 네 죄를 밝혀내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