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12
MOD 2
10년 전, 루카스 저택의 정원.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하지만 결국은 차가운 기계. 고독한 마음을 따스하게 달래 줄 수도 없으니, 친절할수록 오히려 더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야, 왜 네 이름이 "헬렌"인지 알아?
......
트로이는 저 공손한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헬렌"이란 여자는 "트로이"성의 멸망을 초래했어.
그러니까, 넌 날 불행하게 할 거야.
재수없다고.
......
도련님을 모시는 저의 충성심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남자아이는 대꾸도 않고, 그저 "헬렌"을 노려보았다.
............
......후우.
또 이 꿈인가.
트로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코니창 너머로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은, 그의 발끝에서 먼지처럼 흐드러지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가문의 영지를 내려다보며, 그는 방을 가득 채운 썰렁함을 느끼면서 독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삑.
그리고 그 정적을 통신음이 깼다.
무슨 일이지?
트로이는 귀찮아하면서도 수신 버튼을 누르고 답하면서, 무심코 정교한 관절 인형들이 무수히 놓인 진열장을 훑어봤다.
루카스 님,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의 전술인형 "스테츠킨" 씨가 통화를 원합니다.
그분이... "헬렌" 씨를 찾았다고 합니다.
쨍그랑!
유리잔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루카스 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당장 연결해 줘.
아, 알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백색 소음은 마치 바다 저 아래서 요동치는 해류의 소리 같았다.
트로이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어두운 눈빛으로 진열장 가장 위에 따로 올려 둔 관절 인형, "헬렌"을 노려봤다.
10년만에...
드디어... 찾아내는 건가?
......
......
다음 날, 그리폰 자료실.
좋은 아침이에요, 카리나 양.
...음?
작전보고서가 산처럼 쌓인 사무용 테이블 앞에, 카리나만이 아니라 두 인형이 먼저 와 DP-12를 기다리고 있었다.
......
히히히... 아침 일찍부터 우연이네, DP-12!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지만, 분해 죽겠다는 눈빛이던 어제와는 달리 수상하게 해맑은 스테츠킨을 보니 안 좋은 예감이 엄습했다.
좋아, 이제 사람이 다 모였네!
저어... 이게 무슨 일인가요?
헤헤, 아주 좋은 소식이야!
오늘 아침에 저 유명한 루카스 가의 당주 트로이 루카스한테서 긴급 의뢰를 받았거든!
오늘 오후에 특별한 연회가 있으니 우리 그리폰에 보안을 맡기고 싶대!
트로이... 트로이 루카스요...?
DP-12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응응, 엄청 통 큰 부자라더라고! 나 의뢰 선금으로 그렇게 많이 제시하는 거 처음 봤어!
하지만 DP-12에겐 의뢰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바로 옆의 스테츠킨이 따가운 시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관찰 중인 것이 느껴졌으니까.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입꼬리를 씰룩이고 무시했다.
정말 중요한 임무겠네요, 선발해 주셔서 참 기쁘지만... 전 이미 오늘 오후에 다른 임무가 있어서 말이죠...
나도 알지만 제발 부탁이야!
요즘 우리 기지가 유지보수로 지출이 너무 커서 말이지, 이렇게 굴러 들어온 호박을 놓칠 수는 없다고!
그리고 루카스 씨가 직접 너희 셋을 지명해서 의뢰한 거니까, 제발 힘을 보태 줘!
네? 잠시만요...
트로이 루카스 씨가 직접 저를 지명했다고요?
응.
하기인, 확실히 이상하긴 해...
마치 우리에 대해서 사전 조사라도 한 것처럼, 콕 집어서 너희 셋을 파견해 달라 했으니...
에이 그게 뭐 어떻다고!
당장은 일확천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잖아?
설마 DP-12도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DP-12 씨, 이렇게 말하기엔 좀 실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우리와 함께 가서 무고함을 증명해 줬으면 해.
응...?
뭐야, 너희끼리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
카리나는 심술궃은 미소의 스테츠킨과, 늘 그렇듯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의 DP-12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렴 어때, 일만 잘 처리하면 되지!
연회장 지키는 일이야 너희한텐 껌이잖아, 그치그치?
그치그치~ 이렇게 간단한 일쯤이야 아무 문제도 없지~
안 그래, 헬... DP-12?
......
DP-12는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들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녀의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는 심해처럼 바닥을 알 수 없는 사색이 일렁였다.
............
그날 오후, 번화가.
넓은 플라자엔 창백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주위로 높이 치솟은 빌딩들의 유리벽은 빛을 받아 회색빛으로 반짝였다.
DP-12 씨, 여기 많이 익숙하지 않아~?
글쎄요, 여긴 처음 와보는데요.
주위를 스윽 둘러보니,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플라자는 중앙에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뻔한 함정.
허나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사람 속이는 재주가 참 훌륭해, 헬렌 씨...
하지만 뭐라 둘러댄들 이젠 아무 소용 없어!
여기가 어디냐! 그날 네가 어린 트로이 루카스를 붙잡아 인질극을 벌였던 바로 그곳이지!
네 탈옥수 경력은 오늘 여기서 끝난다!
짝, 짝!
손뼉 소리가 메아리쳤다.
......
그런 거였군요.
눈 깜짝할 사이에 시꺼먼 파도가 몰아쳤다.
벽 모퉁이 뒤에서, 나무 기둥 뒤에서... 사방에서 정장에 완전무장한 경호원들이 몰려나와, DP-12를 빈틈없이 포위했다.
전부 계획대로 진행 중.
용의자는 도망칠 수 없다, 최고 경계 태세 유지.
잘했어 VSK!
이제 어마무시한 포상금은 우리 거라구!
굶주린 늑대 무리 같은 시선들에 꼼짝없이 포위된 DP-12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테츠킨 씨, 겨우 그 포상금이나 받자고 이런 일을 벌이신 거였어요?
스테츠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코가 하늘을 찌를 듯 우쭐대는 표정으로 DP-12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으이구 헬레엔~ 어제 그냥 순순히 인정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안 했지이.
근데 하필이면 최악의 태도로 받아쳤잖아~?
덕분에 나도 승부욕에 불이 붙어버렸다구.
그러니까, "겨우" 포상금 때문이 아니라 내 존엄성과 지혜를 걸고 이렇게 한 거다~ 이 말씀!
자아, 이제 순순히 심판이나 받으셔!
처처척!
스테츠킨의 우렁찬 선언과 함께, 삼엄하던 포위벽 사이로 길이 하나 열렸다.
DP-12의 발밑으로부터 저 앞으로, 멀리 이어진 그 길 끝에는...
하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아주 잠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던 플라자에 선명한 구두굽 소리가 천천히 다가와...
DP-12의 앞에 멈췄다.
......
헬렌...?
......
아하하핫! 들었어 VSK!? 지금 뭐라 했는지 똑똑히 들었지?!
이겼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아~!
......
돌연 분 사나운 바람이 하늘에 서서히 먹구름을 몰고 왔다.
이윽고 마지막 한 줄기 햇빛마저 잿빛 그늘에 가려져, 이젠 벗어날 곳이 없었다.
트로이 루카스는 저 익숙해 보이는 눈동자를 주시했다.
마법의 주문처럼, 칼날 같은 시선으로 기억의 껍질을 조심스레 깨뜨렸다.
그러자 마치 주마등처럼, 그는 기억과 시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약간의 어지러움까지 느껴졌다.
"네가 새로 온 로봇이라고? 이름이 뭔데?"
과거의 어느 날, 화창한 오후. 그녀는 처음으로 정원에 서서, 화사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애하는 도련님, 제겐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 제게 이름을 지어 주시겠어요?"
"내가 왜?"
그 물음에,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다소곳이 허리를 살짝 숙여 머리를 조아렸다.
.......
"그야, 저는 도련님을 모시기 위한 인형이니까죠."
"도련님이 지어 주시는 이름은 저와 도련님의 영원히 변치 않을 신뢰의 상징이 될 거예요."
그 평온한 미소에 소년은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럼... 헬렌. 이제부터 네 이름은 헬렌이야."
"헬렌..."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
......
...아니야.
눈빛이 달라.
아마 잘못 보신 거겠죠, 지금의 제 이름은 DP-12랍니다.
......
헬렌인가, DP-12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