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12
MOD 3
......
그래서, 넌 누구지?
말은 그랬지만, 트로이의 예리한 시선은 여전히 앞의 푸른 인형을 주시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 소속, 전술인형 DP-12입니다. 의뢰주인 당신께 주도면밀한 경호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미소.
정말로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트로이는 싸늘한 실의감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크리스탈을 실수로 놓쳐 깨뜨린 것처럼.
트로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미안하게 됐군.
네 친구가 착각한 모양이야.
넌 헬렌이 아니다.
에엥!?
청천벽력 같은 대답에 절로 비명을 내지른 스테츠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루카스 씨, 확실하십니까?
어제 이 인형은 영상 기록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스테츠킨 선배를 위협했습니다만.
아아, 그건 말이죠...
DP-12는 고개를 살짝 숙이곤 다정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스테츠킨 씨의 얘기를 듣고 적당히 "헬렌"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살짝 장난을 친 거였는데...
아무래도 스테츠킨 씨한텐 장난이 아니었나 보네요.
장...난...?
현상수배범과 닮아서 다른 곤란함이 없었길 바라지.
자기소개부터 다시 할까, 내가 의뢰를 맡긴 트로이 루카스다.
DP-12는 잠깐 트로이를 바라보다, 예를 차려 상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에요, 루카스 씨.
다만, 이 의뢰는... 아무래도 경호 인력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군요.
......
난감해하는 투였지만, DP-12는 이내 눈을 깜빡이며 언제나의 미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따로 저희에게 분부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
그럼, 우선 주변 산책에 어울려 주실까.
그리폰의 전술인형이 내 한심한 인간 보디가드들보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리도 칭찬이 자자한지 알고 싶군.
참 독특한 탐구심의 소유자시로군요.
예, 기꺼이.
트로이는 손짓으로 경호원들을 해산시킨 뒤, 플라자의 잔디밭으로 발을 내디뎠다.
DP-12는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차분히 그의 뒤를 따랐다.
선배, 스테츠킨 선배!
정신 차려, 따라가야지!
흐엥... 쟤 헬렌 마따고오... 내 포상그미...
이런 게 어디써... 납뜩 모태애앵...
VSK-94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고, 인사불성인 스테츠킨을 질질 끌면서 두 사람을 쫓아갔다.
......DP-12 양.
이 연회장을 어떻게 보나?
제법 돈을 들인 티가 나네요.
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보여요.
호오?
귀빈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방음벽과 신호 차단기, 통행로, 회선 배치 전부 문제 없지만...
이 방의 스프링클러가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고 가려진 듯하네요, 경보기도 한눈에 식별하기 어려운 곳에 배치됐고.
정말 만약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수습하기 어려운 사태로 번질 수도 있어요.
그렇군...
그것이 보안 인형의 눈에 보이는 세계인가?
반드시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죠, 단순히 제 직업병일 수도요.
물론, 저도 미학적 관점만으로 이 연회장의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을 평가할 수 있지만... 그런 천편일률적인 아첨은 질리도록 들으셨겠죠?
훗, 재미있군.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우리 루카스 재단으로 이직할 마음은 없나?
한낱 전술인형으로 네 재능을 썩히기엔 아까운걸.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만...
전장이 저를 필요로 하고, 저희 지휘관님께서도 저를 필요로 하셔서요.
그 제의는 정중히 사양할 수밖에 없군요.
......
네 소체, 여러 번 수복한 흔적이 보이는군. 얼마나 썼지?
가장 오래된 부품은 한 1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런가...
트로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태연하게 연회장 밖으로 발을 옮겼다.
......
이 둘...
내 착각이 아니라면, 설마...
......
그들은 이어서 똑같이 사치스럽게 단장된 시설 몇 곳을 더 지났다.
가는 곳마다 트로이는 DP-12에게 견해를 물었고,
DP-12는 몇 번이고 정중하고 절제된 어조로 답했다.
그렇게 둘러보는 사이에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었다.
DP-12 일행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트로이는 무척 편안한 자태였다.
네 재능 덕분에 식견이 넓어졌군... 이런 기회로 그리폰 안전계약사와 만나게 되어서 참 즐거웠어.
약속한 보수는 1시간 내로 그리폰의 계좌로 입금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서비스에 만족스러우셨다니 대단히 기쁘네요.
보... 보수우... 헉! 보수! 내 보수!
헬렌 잡는 포상그으음... 다 내 거야, 다 내 거라구우...!
VSK-94의 기대 축 늘어져 있던 스테츠킨이 "마법의 단어"에 자극되어 아주 조금 정신을 차리고 횡설수설했다.
......
그리고 약속한 의뢰비에 추가로 사례를 하고 싶다. 내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니 DP-12 양이 부디 사양하지 않기를 바라네만.
트로이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기가 무섭게 비서가 공손히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와, "입금 확인 명세서"를 양손으로 DP-12에게 들어 보였다.
여기에 귀하의 개인 계좌를 적어 주십시오.
이건...?
DP-12 양처럼 프로페셔널한 전술인형에겐 보다 더 좋은 소체가 마땅하겠지.
VSK-94가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 명세서를 보곤 속으로 경탄했다.
루카스 재단의 재력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눈에 셀 수 없는 자릿수의 금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적으로" 내다니.
어머나...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받죠?
입으론 그리 말하면서도 서명하는 손은 망설임 없었다.
간단한 확인 절차를 마친 비서는 그대로 조용히 퇴장했다.
저기,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루카스 씨, 정말 DP-12가 지명수배 인형 "헬렌"이 아니라 확신하십니까?
VSK가 툭 던진 질문에, 약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
트로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살짝 오므린 채, 창가로 다가가 약간 따사로운 빛을 눈동자로 받았다.
루카스 씨, 저희 그리폰은 전과가 있는 인형에게 적법한 조치를 취할 권한이 있습니다. 이 점 명심해 주십시오.
질문자는 단호한 태도로 양보하지 않았다.
......헬렌은,
훌륭한 가정부 인형이자 둘도 없는 내 친구였다.
트로이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다듬었다.
그런데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편집적으로 변하더니, 자기주장까지 내세우게 됐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
인형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위험하고 독단적인 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 위에 눌러앉게 두지 않지. 자존심을 굽히고 병사가 되어, 남이 자신을 장기말처럼 다루게 하는 일은 더더욱 없고.
그리고 DP-12 양은, 내가 아는 헬렌과 외모는 비슷할지언정 인상은 동떨어져 있다.
그녀는 헬렌이 아니야.
DP-12는 얼굴에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띤 채, 얌전히 트로이의 선언을 들었다.
다만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치는 트로이의 모습은, 어째선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