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12
MOD 4
며칠 후, 그리폰 정비실.
뭐, 뭐야 이게?!
내 의뢰비... 내 출장비... 뭐야, 다 어디 갔어?!!
스테츠킨이 막 출력된 수복 비용을 보고 경악했다.
미안해 스테츠킨, 그치만 마인드맵 다운처럼 까다로운 고장은 원래부터 비용이 많이 든단 말이야...
그리고, 온전히 네 탓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웃기지 마, 이건 산재라고 산재!!
그런데 어떻게 수복비를 내 수당에서 떼어 가냐고!
함께 갔던 DP-12랑 VSK-94는 아무 문제 없었잖아.
그리고 임무 보고서에도 무력 충돌 같은 거 전혀 없다 했고...
그러니까 이건 산재로 못 쳐 줘, 사비로 처리할 수밖에.
이런 게 어딨어어어어엉!!!
......
스테츠킨과 카리나가 옥신각신하는 와중, 우아한 그림자가 정비실의 문을 뒤로했다.
둘의 대화를 잠시 살핀 DP-12가, 옅은 미소를 띠고서 조용히 떠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눈치채지 못한 한구석.
예리한 한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
번화가의 어느 술집.
문가의 방울 소리가 손님을 맞이했다.
......
DP-12 양, 사람을 불러 놓고 정작 자신이 지각하는 것은 상대에게 매우 실례되는 일인데.
후훗...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DP-12는 사뿐사뿐 다가가, 가녀린 손으로 트로이에게 술을 따라 주곤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새로운 소체로 바꾼 DP-12는 아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여,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예전"의 분위기마저 지워졌다.
다만, 이제 우리의 연극도 막을 내려야겠네요... 안 그래요, 트로이 도련님?
흥, 네가 먼저 제안했으면서.
직장 동료에게 "장난"이라... 네 속내는 여전히 예측불가로군, 헬렌.
장난이라뇨~ 그냥 사소한 농담일 뿐인걸요.
이번 고비를 넘기도록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트로이는 상대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질렸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 직장 동료가 먼저 들이대지 않았다면 평생 그리폰에 숨어있을 셈이었나?
10년만에 다시 연락한 이유가 어쩔 수 없어서였다고는 하지 말아 줘.
미소는 여전한 DP-12는 마치 새로운 소체로는 어떤 느낌인지 시험해보기라도 하는 듯, 차갑고 단단한 술잔을 가볍게 쥐었다.
폼잡고 "아니오"라 대답해드리고 싶지만...
이번엔 확실히 그 애들에게 몰린 상황이었어요.
연기에 어울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도련님.
그리고, 이렇게 다시 뵙게 돼서 정말 기뻐요.
가볍게 부딪히는 술잔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기억 속 묵은 때를 말끔히 지웠다.
차가운 액체는 비단처럼 목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나도 네가 다시 보러 와 줘서 정말 기뻐.
옛날 일에 대해선...
...정말 미안해.
어머나...
진심으로 사과하시는 건가요, 아님 단순한 겉치레인가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복잡한 눈길을 피해, DP-12는 고개를 숙이고 무의식적으로 손끝으로 테이블의 나뭇결을 훑었다.
꾸불꾸불한 과거의 기억들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었다.
10년 전, 루카스 저택의 정원.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몰아치는 찬바람에 정원의 관목들이 울부짖는 한밤중.
......
얇은 옷 한 벌만 입은 트로이는 추위에 이를 떨면서도 고집스럽게 울타리를 붙잡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도련님, 그만 돌아가요. 이러다 감기 걸리시겠어요.
지금... 지금 몇 시야...?
오늘 같이 생일 파티 해 준다고 약속했단 말야...
꼭... 꼭 온댔는데...
...23시 59분입니다.
아직 1분 남았어... 1분...
허나 그 1분도 1초처럼 순식간에 흘렀다.
휘이잉!
더 거센 바람이 들판으로부터 불어와, 헬렌의 치맛자락을 어지럽히고 트로이의 머리카락을 나부꼈다.
그때, 자동차 전조등의 밝은 빛이 저 언덕 끝자락에서 나타났다.
이에 트로이는 흥분하며 울타리에 매달려, 그 빛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와, 왔다! 케이크 준비됐어?! 촛불은!?
자동차의 엔진음이 점점 가까워지자, 트로이는 다급하게 헬렌의 옷을 잡아당겼다.
네, 다 준비됐습니다.
아버님 어머님만 오시면 돼요, 소원은 함께 빌어야죠.
깜깜하던 정원이 불똥 튀기는 생일 케이크의 촛불로 환해졌다.
생일의 주인공은 행여 부모님이 오기 전에 촛불이 꺼질까 봐, 손으로 촛불을 감쌌다.
어린 손바닥은 뜨거운 촛불로 따스하게 밝아졌다.
멀리서 다가오는 자동차는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1초라도 더 빨리, 트로이에게 다가오려는 것처럼.
5초... 4초...
새하얀 자동차는 멈추지 않았다.
바람처럼 정원의 철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동차가 지나치면서 일으킨 돌풍에 촛불이 꺼졌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저 끝없는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멀리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루의 종말을 선고했다.
......
날짜, 지났네.
............
트로이는 무심한 척 울타리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조용한 헬렌의 눈길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저택으로 발을 옮겼다.
......
어릴 적 나는, 네가 내 삶을 망쳤다 여겼어.
너만 없어지면 원만한 생활이 돌아오리라고, 순진해 빠진 착각에 눈이 멀었지.
......
굳게 닫힌 방.
안에서는 어린 아이가 훌쩍이는 소리가 멤돌았다.
...도련님, 제가 도와드릴 일 있을까요?
저리 꺼져!
......
제가 무얼 잘못해서 화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고개를 든 트로이는 억지로 웃는 얼굴로, 헬렌에게 그의 평생 가장 증오와 독기로 가득 찬 눈빛을 쏘았다.
그 눈빛은 송곳처럼 헬렌의 가슴을 찔러, 깊은 구멍을 남겼다.
............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로봇 때문에 엄마 아빠가 날 버린 거야...
............
그의 눈동자는 실의와 억울함이 모인 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모든 걸 집어삼키는 폭풍이 파도를 일으켜, 그의 마지막 양심까지 갉아먹고 말았다.
그러니까... 속죄하는 셈 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트로이의 웃는 얼굴은 울분과 증오로 뒤틀렸다.
명령이야, 헬렌.
날 납치해.
나를 납치해.
......
...그들이 널 죽이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지.
어린애의 심술궃은 장난은 벌써 잊은 지 오랜걸요.
DP-12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지었다.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신 뒤엔... 잘 지내셨나요?
아무렴, 납치 사건 후론 한동안은 천국 같았지.
하지만 결국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어.
그들은 또 나를 로봇에게 맡기고 가버렸지... 인간을 해친다는 생각은 죽어도 못할 깡통들한테.
그래서 구속받지 않는 "헬렌"이 그리우신가요?
그리 말한다면...
그리폰에서 나와 내 곁에 와 줄 건가?
뜨거운 눈빛에, DP-12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죄송해요,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걸로 할게요.
......
도련님은 "헬렌"이 위험하고 독단적인 인형이라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 위에 눌러앉도록 둘 리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요, 트로이 도련님...
길들일 수 없는 영혼이 영원히 떠돌기만 하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충성을 바칠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인 거죠.
물론 도련님 곁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인형들은 꿈도 꾸지 못할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당신과 지휘관님은 결국 다른 사람이에요.
......
꽤나 상처받는 말이군.
트로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유리잔을 잔잔히 흔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하기를 몇 번.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맑고 끈적한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때 가문에 함께 고용될 뻔했던 인형... 이름이 "드셰브니"였던가. 너와 사이가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함께인가? 어떻게 지내지?
위험한 탈옥수가 된 저는 그동안 세간의 이목을 피하느라 인간관계를 여럿 끊어야만 했어요.
당신이 말씀하신 "그 아이"도 포함해서요.
도련님이라면 이해하시겠죠?
......하아.
트로이가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더는 "헬렌"의 현상수배는 없을 거다.
마음 바뀌면 언제라도 연락해.
......
낡은 문이 쿵 닫히며 울리는 맑은 방울소리가 술집을 나서는 손님을 배웅했다.
......
거기, 계속 숨어서 지켜보던 경관 아가씨.
여전히 저를 고발할 셈이신가요?
그 말에 VSK-94가 으슥한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내, 등불이 비추는 곳으로 나왔다.
그녀가 주시하는 DP-12의 맑은 회색 눈동자는 다정하고, 얼굴의 미소는 평온했다.
...아니.
수사는 끝났어.
어머? 그럼 결론을 들어봐도 될까요?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의 전술인형 DP-12...
당신은 트로이 루카스를 납치해 지명수배된 인형 "헬렌"이 아니야.
아주 오래 전부터 아니었어.
대답을 들은 DP-12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VSK-94를 살며시 껴안았다.
네, 저는 DP-12예요...
...가요.
집에 돌아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