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21
MOD 2
6번가에 위치한 MOB 헬스장.
내일 봐요 웨인, 오전에 한 스쿼트 정말 좋았어요!
애니도 수고했어! 오후에 했던 바벨 컬은 조금 더 노력해보자!
퇴근 시간이 되어 회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열정적으로 인사를 하던 CR-21의 귀에 누군가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똑똑똑.
응? 누가 또 장난치나...
치안이 좋지 않은 6번가에서 이런 장난은 흔한 일이었다.
때문에 혹시 모를 "말썽"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CR-21은 슬며시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런데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과는 다른, 작업복 차림에 다소 수줍게 웃는 소년이었다.
어라, 랄프?
안녕하세요 트레이너님! 잠깐 뵐 겸 들렸어요!
우와, 진짜 랄프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운동은 계속하고 있지?
아 맞다, 여기 두고 간 소포가 있었지? 그거 가지러 온 거야?
하하하, 여긴 하나도 안 변했네요.
두고 간 소포를 가지러 온 김에...
트레이너님께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요.
응...? 작별 인사?
네.
랄프가 근처에 정차한 화물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서야 CR-21는 저 차의 옆면과 랄프의 옷에 그려진 마크가 똑같은 "사랑 리사이클"임을 알아챘다.
오옷! 취직했구나!
"사랑 리사이클"이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곳이야?
네, 취직했어요. 하는 일은 뭐... 육체 노동이라고나 할까요.
그거 괜찮네! 열심히 운동한 보람이 있구나!
축하해 랄프!
뭐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요. 그래도 드디어 무직 백수에서 탈출해서... 기쁘네요.
이게 다 트레이너님 덕분이에요.
내... 덕분이라고?
네, 트레이너님이 트레이닝 지도해 주셨잖아요.
트레이너님 아니었으면 저는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기껏해야 부잣집 하인이라든가, 갱단의 말단 막내가 됐을지도?
어쩌면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르죠, 하하하.
랄프, 그건...
농담 아니에요, 트레이너님이 저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신 거예요.
그래서, 떠나기 전에 꼭 직접 만나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었어요.
랄프...
......
난 그저 인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그렇게 고마워할 것까진 아니라고 생각해.
네 취업은 네가 너의 힘으로 얻은 결과야. 네가 너 자신의 힘으로 변화를 이끌어낸 거지.
그래도, 네게 도움이 됐다니 기뻐.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트레이너님...
소포 가지러 왔댔지? 잠깐만 기다려!
......
자, 네 소포! 이제 취업도 했으니까 물건 자꾸 흘리고 다니면 안 돼요~
루틴도 일 바쁘다고 빼먹으면 안 된다?
네, 명심할게요.
그만 가봐야겠어요,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몸조심하세요, 트레이너님.
응! 너도!
랄프는 손을 흔들며 화물차에 탔다.
언젠가 또 만나자, 랄프.
우수 회원이었던 너를 절대 잊지 않을게.
출발한 화물차는 점점 멀어져 이윽고 작은 점이 되었다.
그 점마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CR-21은 기쁨의 눈물을 슥슥 닦았다.
저물어 가는 석양이 남긴 빛이 아직도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후우... 응? 이게 뭐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눈에 띄어, CR-21은 몸을 숙여 반짝이는 직사각형 카드를 주웠다.
사랑 리사이클 사원증, 랄프...
랄프의 사원증이잖아? 어휴 참, 또 물건 흘리고 갔네.
랄프 녀석,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이거 때문에 잘리기라도 한다면...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석양을 보면서, CR-21은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곧장 화물차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
헉... 헉... 후우, 장거리 달리기가 이렇게 또 도움이 되네...
...?
잠깐, 나 제대로 온 거 맞아?
CR-21이 사원증에 적힌 회사의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니, 이곳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주위로 보이는 광경은 "사랑 리사이클"이란 이름의 재활용 센터보다는... 범죄자의 소굴에 가까웠다.
뭔지 모를 기계가 가동하는 굉음.
허연 연기를 토해내는 거대한 굴뚝.
쇠인지 피인지 모를 비린내가 강렬한 악취.
게다가 거무튀튀한 벽은 짐승의 발톱 자국으로 가득하고, 그 위로 삐뚤빼뚤한 시뻘건 낙서가 그어져 있었다.
힘차게 달려온 CR-21은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기, 계세요?
아무도 없나요?
공장 안을 돌아다니며 연신 랄프를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웅웅대는 기계의 소리뿐이었다.
랄프... 설마 사기당한 건 아니겠지?
빨리 찾아야 돼...
계세요? 아무도 없나요!
......
그쪽으로 간다! 잡아!
...응?
놓치지 마!
랄프의 목소리... 저쪽이다!
CR-21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인 닫힌 창가로 재빨리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애타게 찾던 전 회원이 "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후웃! 하앗! 흐압!
――?!
그래, 거기가 급소야! 거길 쳐!
창문 너머로 보인 랄프는 지금 죽어가는 늑대에게 쇠파이프를 힘껏 휘두르고 있었다.
랄프?! 이게 뭐하는...!
잘했어! 짐승 다루는 법이 뭐 따로 있나, 이렇게 하면 꼼짝도 못하는데.
이번 거 납품하면 기념으로 첫 탕 기념 겸 수강료인 셈 치고 한 턱 쏴.
보너스로 내가 좋은 가격에 파는 법도 알려 줄 테니까.
하하하, 좋죠! 수강료 쯤이야 아무 문제 없죠.
어휴 XX, 그 헬스장에서 대체 얼마를 삥뜯긴 건지...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퉷!
헬스장? 뭔데, 거기 무허가였어?
무허가는 둘째치고 그냥 사기꾼이었어요!
핫한 누님 트레이너가 있대서 속는 셈 치고 가봤더니만 다짜고짜 연간 회원권을 끊게 하고, 또 알고 보니까 그냥 헬스장이 고용한 인형었다니까요.
아니, 그게 맞아요? 그렇게 인형이 무슨 일이든 다 해버리니까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는 거 아니겠냐고요!
내가 왜 인형한테 돈을 내야 해!?
랄프는 화를 내며 늑대의 머리를 한 대 더 내리쳤다.
창문 너머의 넓은 방에 살려 달라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CR-21은 억지로라도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핫한 누님 트레이너"라니... 설마, 나...?
아, 아니야... 이건 잘못됐어... 이유야 어쨌든 동물을 학대해선 안 되는데...
내가... 내가 막아야...
그 맘 아주 잘 이해한다 막내야~
나도 인형한테 밀려나서 지금 요 모양 요 꼴이거든.
......
더 웃긴 얘기 해 줄까?
인형들이 왜 이런 일을 하냐고 여기까지 따지러 온다.
그래서 매번 "XX 너희 같은 인형들 때문에 멀쩡한 일자리가 없어서 이런 일이라도 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다, 어쩔래!"고 받아쳐 주고 있지.
말 잘했네요! 우리가 다 먹고살자고 이러는 건데 뭐 동물 몇 마리가 대수야!?
동물을 소중히는 XX, 대가리가 맛이 갔나? 그럼 인간은?
인형이면 인류에게 봉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
간신히 움직이려던 발이 멈췄다. 헬스장의 우수 회원이었던 그가 뱉어낸 원망이, 남아있던 그녀의 마지막 자신감까지 모조리 앗아갔다.
이를 알 리 없는 랄프는 한숨을 푹 쉬며 쇠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어휴 됐어 그만해요, 인형 얘긴 해봐야 속만 뒤집히지.
얼른 끝내고 퇴근하자고요.
그럼 마지막으로 첫 퇴근빵 시~원하게 후리시고~!
아... 안 돼...
CR-21은 저 쇠파이프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들어올려진 쇠파이프는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아래로 휘둘러져...
퍼억!
둔탁한 소리와 늑대의 단말마는 아주 잠깐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광경은 그녀의 마인드맵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