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21
MOD 4
심야, 오두막의 침실.
한바탕 바쁘게 움직였던 AK-47 일행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CR-21은 혼자 젖은 수건으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사냥꾼"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가볍게 닦아 주었다.
콜록, 콜록 콜록...
다행이다, 정신이 들어?
이름이 뭐야?
..."잭"이요.
안심해 잭, 우린G&K 안전계약사의 전술인형이야. 우리가 도와줄게.
어디 불편한 곳 있어?
아뇨...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저기, 그런데...
혹시 사슴 보셨나요?
...사슴?
네, 절 데려온 그 사슴이요.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의 눈빛은 평온해서 진짜 의도를 파악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뒤에 있는 엽총을 의식하며, CR-21은 줄곧 떨칠 수 없었던 말을 간신히 입밖으로 꺼냈다.
그게... 미안한데, 혹시 말이야...
그 순간, 사슴이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직 다리의 상처가 다 낫지는 않아 절뚝이면서도, 사슴은 한 걸음씩 똑바로 잭을 향해 걸어갔다.
CR-21은 숨을 죽이고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잭의 곁으로 다가온 사슴은 그에게 살며시 코를 들이대 문지르며 친밀감을 표했다.
이에 CR-21은 물론 잭도 다소 놀란 눈치였다.
무사했구나!
아니, 그러니까... 음,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야.
잭은 엽총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사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CR-21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서는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당신이 여기서 동물들을 보호하고 있는 건가요?
어? 어, 어... 그런데, 너는...?
아, 절 밀렵꾼으로 오해하셨나 보네요?
이 엽총은 해명할 수 있어요.
이거 모형이에요, 그냥 호신용 가짜죠.
뭣... 사냥꾼이 아니었어?
그럼 그 상처는...?
함정에 걸린 얘를 구하려다 저도 다른 함정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결국 둘 다 크게 다쳤네요, 아하하...
그랬...구나...
오해해서 미안해, 네가 사냥꾼일까 봐 한참을 망설였거든...
죽게 내버려둘까 생각하기까지 했어... 그럼 안 됐는데...
그래도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왜 사과를 해요?
......
정확히는 당신과 당신이 보호한 이 녀석이 저를 구한 거긴 하지만요.
정말 착한 분이신 것 같네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난――
......
...응.
다시 떠오르려던 기억 속의 악몽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이 아늑하고 고요한 밤하늘 아래서, 인간과 동물이 교감하는 광경이 대신했다.
바로 그 순간.
CR-21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틀 후.
후아아암...
어이쿠 또 눈 감고 걷네, 잠이 얼마나 많은 거야?
별 수 있나 뭐, 우리 셰프님 미식회로 밤 새우고 바로 또 밤새 죽을 뻔한 사람 간호까지 했잖아.
그리고 이틀 내내 아침 일찍부터 그 숲속의 동물들 밥까지 챙겨 주다니! 나도 수면 부족이라구!
CR-21이 자리를 비웠는데 별 수 있냐, 우리가 도와줘야지.
CR-21 씨, 괜찮으실까요...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게 좀 수상하긴 해... 흐음, 설마 지휘관이 독방에다 가둬버린 건 아니겠지?
도, 독방?!
어머나아 FN-49, 설마 우리 그리폰에 징벌방 있는 거 몰랐니~?
혹시 알아? CR-21이 지금 어두컴컴한 그 방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지~ 나무처럼 딱딱한 식빵밖에 못 먹으면서, 벌로 윗몸일으키키 500번!
에, 에이 설마요오... CR-21 씨는 잘못한 거 없잖아요! 지휘관님도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딱딱한 식빵에 윗몸일으키기는 퍽이나... FN-49는 뭐 저런 괴담 같은 장난까지 믿는대?
크흠! 오늘도 보호소 들렀다 아침 훈련 가야 하니까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CR-21이 준 지도 어딨어? 줘 봐.
......
다들 왜 말이 없어? 지도는?
그, 그건 FN-49한테!\nP7 씨한테 있어요!
야아, P7... 작작하자?
이씨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뭐야 AK-47, 너도 FN-49 편애하는 거야?
헛소리 말고 지도나 내놔!
그런다고 내가 순순히 잡힐 거라 생각하우와악!
놔! 이거 놓으라고!
제성함미다 AK-47 씨 지도를 잃어버렸슴다...
아하핫, 이걸 찾는 거야?
귀를 두드리는 명랑한 목소리에 AK-47 일행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P7이 잃어버린 지도를 들고 있는 CR-21이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다들 씨름 훈련에 재미 들였나 보네?
CR-21! 돌아왔구나!
어, 어서 오세요!
CR-21은 곁에 그녀가 돌보던 동물들도 함께였다.
동물들은 그녀의 새로워진 모습을 축하하듯 신나게 울며 빙긍빙글 뛰어다녔다.
어라? CR-21 씨, 뭔가 많이 달라지신 거 같네요...?
역시 업그레이드였구만!
어쩐지~ 그렇지 않음 며칠씩이나 안 보일 리가 없지~
멋져 멋져! 어서 돌아와 CR-21!
...네가 그렇게 CR-21을 보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다?
그치만 궁금하자나~
동물 보호 계획 제안도 했지? 지휘관이 뭐래?
궁금해 궁금해, 뭐랬어? 지휘관이 뭐래?
어... 지휘관이, 그러니까...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 "응원할게",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같은 말을 해 줬어.
와아, P7 씨가 예상했던 그대로네요.
당연하지~! 내가 지휘관을 얼마나 잘 아는데.
나, 지휘관과 얘기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인간과 동물 사이를 잇는 소통의 다리가 되는 거였어.
동물을 지키고 이해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한테 동물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어.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
지휘관이 선물도 준 거 있지!
오우, 쫌 하는데? 선물로 뭐 받았어?
아 척 보면 착 아니야? 당연히 마인드맵 업그레이드지!
헤헤, 이 소체 그냥 더 좋은 것만이 아니야.
내구성과 달리기 효율의 증강에 중점을 둔, 야외 생존과 운동에 최적화된 소체지!
앞으로는 헬스장 회원들이랑 동물들을 모두 데리고 함께 조깅할 수 있어!
CR-21이 환히 웃자 곁의 동물들도 함께 기뻐하듯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AK-47과 P7, FN-49는 시선을 교환했다.
회원?
부, 불길한 예감이...
이거 설마...?
참, 회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희도 등록하기로 했지?
어때, 잘 생각해봤어? 회원권 다시 설명해 줄까?
올 것이 왔구나!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튀어!!!
여기 헬스장 포스터――
CR-21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세 인형들은 냅다 도망쳤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그들을 보며, CR-21은 그냥 웃기만 했다.
곁의 동물들을 쓰다듬는 그녀의 눈빛에선 온화함, 그리고 여유로움이 보였다.
아무래도 아침 조깅 파트너가 늘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그러니 그 전까지는...
같이 어울려 줘야겠어,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