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EMK1
MOD 2
......
205X년 X월 X일, 유럽 전선 어딘가에 위치한 찰드코스.
"검은 숲 작전" 직후.
한겨울의 눈보라가 메마른 나뭇가지들 사이로 휘몰아치는 가운데, 땅에 남기는 발자국도 금세 새하얀 눈으로 뒤덮어 지우는 칼바람을 맞으며 걷기란 매우 힘겨웠다.
헉... 헉...
실패했다.
윽.... 아, 아아...
상처투성이인 인형은 마찬가지로 엉망인 소총을 지팡이 삼아 끊어진 발목을 대신하며, 손상된 시각 시스템으로 길을 찾아 헤맸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되뇌이면서.
——!
털썩!
바닥을 짚던 개머리판이 쌓인 눈 아래 숨어있던 돌멩이에 미끄러져, 인형은 그대로 쓰러졌다.
......
체온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자가검진 시스템마저 망가졌음에도, 인형은 자신의 소체가 곧 이 혹한을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작동을 정지할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업보다.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다.
리...
맥없이 쓰러지면서도 무기를 손에서 놓치지 않은 인형은, 몸 안쪽에서부터 터지던 스파크 소리도 어느샌가 희미해졌음을 깨달으며 의식을 잃었다.
......
2051년 X월 X일,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의 한 프랑크 빌라.
이곳이다.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저 뜨거운 뙤약볕 때문에 끝없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구슬땀을 닦아냈다.
찾았다. "CSD-119A"는 바로 이곳에 있다.
후우...
나는 모자를 벗어 부채처럼 부치면서 눈앞에 펼쳐진 빌라의 정원을 주욱 훑어보았다. 세계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건만, 이곳은 마치 에덴 동산 같았다.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그대로 푹 빠져버릴 것처럼 매력적이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방문하겠다 미리 알리진 않았지만, 나는 다시 걸음을 떼어 장원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곳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바로 물어도 흔쾌히 승낙해 주겠거니 생각하면서.
아저씨 누구예요?
...?
그리고 한 걸음 내딛자마자 앳되지만 우렁찬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큼지막한 나무 위에서 한 소년이 폴짝 뛰어내렸다.
아저씨 우리 마을서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누구예요? 여긴 뭐하러 왔어요?
아아, 안녕하세요 꼬마 신사 씨. 저는 도시에서 온 기자입니다.
오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니, 난 내 명함을 건넸다.
하지만 건네받은 내 명함을 보는 소년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기자가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자, 나는 방문 목적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취재랄까... 조사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최근 여기에 "한 인형"이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
그 말에 소년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순간 내가 뙤약볕에 진이 빠져 헛것을 봤나 싶었다.
한순간이었지만, 이 꼬마의 눈에서 증오심이 보인 것 같았다.
...그거 자세히 들어봐야겠네요. 따라와요.
......
......
그날 오후, 찰리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 한가하게 다리를 흔들며 저멀리 빌라의 창문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그는 오늘도 말도 않고 멋대로 수업을 빠졌다.
...칫.
다만 예전과의 차이라면, 지금 그는 혼자였다.
그리고 2041년, 최초의 감정 모사 시스템이 탑재된 인형이 개발되었습니다. 이 모델명 CSD-03H는――
교실의 교단 위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리엔필드의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또박또박한지, 멀리 떨어진 장원의 나무 위에 있는 찰리에게도 다 정확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교실에선 언제나 찰리의 편이었던 친구들이 지금 흥미진진해 하는 얼굴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이러니 찰리가 혀를 차는 것도 당연했다.
의리 없는 녀석들...
찰리는 화풀이로 옆의 나뭇가지를 확 꺾었다.
이렇게까지 기분 나쁜 광경이 또 어디 있을까.
리엔필드...
얼굴도 옷차림도 단정한 교사.
일주일 전, 찰리의 아버지 루시우스가 새 가정교사로 데려온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2045년 4월 15일 결국 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직후 유명 정치가인――
중요한 부분이다! 선생님도 이때부터 활약한 거죠?
선생님은 적을 얼마나 해치웠어요? 100명이요? 아님 200명?
...조용, 수업에 집중하세요.
그녀는 인형이다.
전술인형.
...살인마.
반투명한 발코니창을 사이에 두고서, 찰리는 사나운 눈빛으로 중얼거리며 교실에서 당당하게 수업 중인 리엔필드를 노려봤다.
짜증났다.
저 모습, 저 얼굴만 봐도 짜증이 치솟았다.
그녀가 교사로서 얼마나 자질있는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냥 싫었다.
전술인형이라면 무조건 다 싫었다.
내가 속을 줄 알고?
수업에 푹 빠진 친구들에게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을 흘기며, 찰리는 폴짝 뛰어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술인형은 전부 사기꾼에 살인마라는 것을.
그렇기에 저 리엔필드의 "가면"도 기필코 벗겨내겠다고 다짐했다.
......
그리고 운 좋게도, 찰리는 이를 실현할 방법을 벌써 찾아냈다.
찰리는 손 안의 명함을 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었다.
"센트럴 막스 텔레그래프".
전속 기자 "조지 J 존슨".
......
리엔필드가 빌라에 가정교사로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님에도, 그녀는 자신의 매력으로 개구쟁이들을 휘어잡아 얌전히 수업을 듣도록 만들었다.
선생님, 빨리요!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복도에서 뛰지 마세요, 셀레나.
그리고 수업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군대에선 지각한 사람을 어떻게 혼내요?
우리 엄마는 군인이 지각하면 회초리로 맞는다던데!
아뇨... 그런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제대했어요?
전쟁이 곧 끝나니까 그런 거예요?
......
전쟁이 언제 끝날진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모두가 당장 내일에라도 끝나기를 바라겠죠.
쉴 새 없이 질문 공세를 퍼붓는 아이들을 이끌고, 리엔필드는 교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덜컥.
......!
교실의 문을 연 리엔필드는 드물게 눈까지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
그녀보다 먼저 교실에 와 자리에 앉아 있는 찰리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교실에서 마지막으로 찰리를 본 것이 언제였는지, 리엔필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 왔던 그날이었지 않나 싶었다.
...훗.
......
찰리가 묘한 웃음을 짓자, 리엔필드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수업 시간에 맞춰 교실로 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 리엔필드는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찰리다!
아이들마저 찰리를 보곤 놀라 소리쳤다.
아마 그제서야 저 골목대장과 같이 안 어울린 지 꽤 되었다는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수업 시작합니다.
네~!
리엔필드의 말에 아이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리엔필드가 교단에 올라서자, 이 어색함을 깨려는 듯 덩치 큰 조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네, 조니.
우리 야외 수업 언제 해요?
저 총 쏘는 법 배우고 싶어요!
...사격술을 배우고 싶다고요?
아, 저도요! 저도 배울래요!
저... 저도요!
어차피 나중에 다 군대 가야 하잖아요!
그냥 일찍 배워서 나쁠 거 없잖아요?
아직 전쟁도 안 끝났는데!
......
리엔필드는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호신술을 가르치는 것도 제 업무 중 하나니까요.
와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여러분의 마음가짐이 올바른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마, 마음가짐이요...?
리엔필드가 항상 소지하는 총을 강의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셀레나가 대답해보세요.
"총"이란 무엇을 위한 도구입니까?
어어...... 사냥이요?
우리 아빠가 선생님이랑 비슷한 총을 써서, 자주 들짐승을 잡아서 가져왔어요.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나쁜놈 죽일 때 쓰는 거지! 전장에서!
적들을 빵빵 쏴서 해치우는 거잖아요, 선생님처럼! 원 샷 원 킬!
어떤 부대에선 총보다 엄~청 크고 센 무기를 쓴다고 들었어요. 탱크도 한 방에 박살낸다는 거요.
진짜라면 꼭 한 번 보고 싶어요!
...웃기는 소리들 하고 있네.
뜻밖에도, 리엔필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찰리 잔뜩 싫증난 얼굴로 친구들의 말을 끊었다.
찰리의 말대로입니다.
여러분은 총의 대한 이해...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엑, 올바르지 않다뇨?
여러분에게 이미 가르쳐 줬을 터입니다. 아무리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라도, 사람은 의로운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요.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히는 전쟁 속에서도 절대 인간의 존엄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도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놀이가 아닙니다. 하물며 전쟁은 더더욱.
방아쇠를 당긴다는 행위를 신중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총을 들 자격이 없습니다.
......
그 말에 찰리가 고개를 들어 다시 리엔필드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기색은커녕 오히려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에 리엔필드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말은 잘해.
리엔필드는 고개만이 아니라 몸도 돌렸다.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다 생각합니까, 찰리 도련님?
묘한 자신감 넘치는 기세에 당황하지 않고, 찰리의 도발에 정면으로 맞섰다.
찰리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책상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친구들을,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리엔필드까지 내려다보며 외쳤다.
야 너희들, 이 자식이 어떤 놈인지 알고서 이러는 거야?
뭐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홀쭉한 조던은 예상을 한참은 벗어난 찰리의 행동에 얼빠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이 인형은 살인마야, 전쟁광이라고!
전쟁에 미친 사기꾼!
찰리...?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저는――
착한 척 그만하라고!
찰리가 차갑게 말을 가로챘다.
인간을 죽이려고 만들어진 전술인형 따위가 여기서 폼 잡으면서 무슨 소릴 해대는 건데?
우리가 너 같은 놈한테 세뇌당할 거 같아!?
......
아무래도 "전술인형"에 대해 큰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러한 편협한 관점은 부당합니다.
오해는 무슨, 이 살인마가.
더 쉽게 말해 줄까? 난 전쟁이 싫어, 전쟁하려고 만들어진 넌 더 싫어!
차, 찰리...?
여느때와 다른 찰리의 모습에 그의 친구들도 불안해 했다.
어머니가 너 같은 놈들 손에 죽었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인데 전쟁에 휘말려서 죽었다고!
이건 안 부당해? 이건 공평해?!
............
리엔필드는 뭐라도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입만 뻐끔거릴 뿐 말문이 막혀 소리도 내지 못했다.
너랑은 관계 없는 일이라고 하고 싶겠지.
하지만 실제론 어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진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찰리가 코웃음을 치며 책상 옆에 걸어둔 책가방을 집더니,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그대로 천장을 향해 힘껏 던졌다.
서류 뭉치는 함박눈처럼 교실에 흩뿌려졌다.
배신자에 폐급 인형 주제에.
내가 한 말 하나도 틀린 거 없어, 너 같은 전술인형은 사람을 해치는 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니, 심지어 넌 살인도 똑바로 못했지!
그러면서 우리 선생 노릇을 하겠다고? 웃기지 마!
웬 종이...?
흩뿌려진 종이에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것을 본 조던이 궁금한 마음에 한 장을 집어 읽었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이 점점 더 휘둥그레졌다.
......
리엔필드의 불길한 예감은 뒤틀린 형태로 적중했다.
리엔필드... 아니, "CSD-119A".
너는 탈영병이야.
네 동료들을 몽땅 죽게 만들고 혼자 도망쳤어.
할 말 더 있음 해봐, 이 겁쟁이 탈영병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