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416
MOD 1
......
나랑 9은 다른 방에서 업그레이드할 테니까, 먼저 끝나면 거실에서 기다려.
알았어. 그나저나 데레, 왜 네 집에 올 땐 매번 이렇게 좀도둑처럼 슬금슬금 들어와야 하는 거야?
어... 나한테도 복잡한 사정이란 게 있거든. 이쪽으로 와, 지하실에 들어가면 어색하게 있지 않아도 돼.
네 비밀 기지에선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여기가 뭐 어때서?! 반경 100km 내에서 여기보다 뛰어난 인형 정비 시설 있으면 나와 보라 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하아... 왜 45의 지인들은 왜 다 하나같이 이상한 녀석들뿐인지... G11, 일어나. 빨리 안 일어나면 데레가 널 해체해서 세탁기로 만들어 버린단다.
으아아――! ...아? 뭐야, 데레의 인형 기지잖아... 호오... 한동안 안 본 사이에 못 보던 물건이 많아졌네?
헤헷, 인형 정비사로서 3개월 이상 신형 설비를 들이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고.
와, 이 이어폰도 처음 본다. 디자인이 멋진 게 마음에 들어. 써 봐도 돼?
야, 함부로 건들지 마. 망가뜨리면 어쩌려고 그래.
마음에 들면 가져도 돼.
하지만 그전에, 416의 말대로 먼저 용무부터 처리하자고.
모처럼 내 비밀 기지에 들렸으니, 언제나처럼 신체검사를 받아야겠지?
으엑... 생각해 보니까, 무방비인 내 몸을 인형 마니아한테 보여 주는 건 좀 기분 나빠...
걱정 마, 내가 끝까지 지켜볼 테니까. 데레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면 그 자리에서 머리에 구멍을 뚫어 버릴게.
너무하네 진짜! 나, 난 인형의 겉모습보단 내면에 더 관심 있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더 징그러워.
걱정 마, 방금 한 말 모조리 녹음했으니까. 이따가 제레한테 보내서 저 고장 난 두뇌를 수리하라고 할 거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나한테 업그레이드해 달라 조른 게 누군데!? 자꾸 놀리면 바가지 씌운다?!
준비 다 됐으니까 누워, G11.
불친절한 단골 손님과 티격태격하며, 데레는 G11을 정비대에 눕혔다.
후우... 적어도 데레의 작업실에선 마음 놓고 잘 수 있어서 좋아.
그치만, 이렇게 설비 잔뜩 들여놓을 돈 있으면 좀 더 편한 침대도 장만했으면 좋겠어. 이 베개 여전히 딱딱해.
이건 정비대지 자라고 눕는 침대가 아니야...
...물론 눕기 편한 모델도 있지만, 그건 너네 두목이 외상 다 갚은 다음에나 부탁해.
자, 그럼 이제 휴면 모드로 전환할게. 잘 자.
응... 잘... 자......
데레가 명령어를 입력하자, G11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동시에 정비대와 연결된 모니터의 프로그레스 바도 차오르기 시작했다.
G11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 HK416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데레에게 물었다.
얘 상태는 어때?
3층이나 되는 플랫폼의 정밀 검사는 그렇게 빨리 안 끝나니까 좀 기다려 봐.
그리고, 그건 오히려 내가 너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왜 나한테 물어?
평소에 얘랑 같이 다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얘가 요즘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지난 몇 달 동안 증상 재발한 적 있어? 자꾸 깜빡깜빡한다던가, 뜬금없는 말을 한다던가.
그건... 전에 한 번 붕괴했던 뒤로는 1년 넘게 별 이상 없었어.
그때 너무 최신형인 화기관제 코어를 장착해서 무리 아니었나 싶었지만... 이렇게 상태를 보니, 역시 내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흠잡을 데가 없다니까!
그런가...
안심해.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있잖아.
G11도 충분한 작전능력이 있으니까 너희와 함께 모험할 수 있는 거잖아?
그래도 녀석한테 너무 무리가 아닐까 싶어서...
G11이 스스로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 맞다, 45가 너도 전자전 모듈 업그레이드할 거라면서?
레벨 3 플랫폼까지 건드리는 수정이라면 너도 G11처럼 정밀 검사로 메모리에 여유가 있는지 확인해야 해.
지금 같이하는 게 어때? 시간 절약도 할 겸.
난... 전자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아. 출고될 때부터 그런 건 별로 만져본 적도 없고.
그런 모듈을 단다고 정말 강해질 수 있어?
솔직히 나도 45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다 생각이 있어서 부탁한 거겠지.
그리고 전자전 모듈을 업데이트하고도 여유가 있으면 전투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도 설치해 줄게.
물론 추가 요금 받을 거지만! 어때, 솔깃하지?
나야 좋지. 어차피 내 돈 내는 것도 아닌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어? 다 45 앞으로 달아놔.
헤헤헤... 그럼 비싼 거 되는 대로 다 설치해야지.
자, 너도 이쪽 정비대에 누워.
HK416은 다른 정비대에 누웠다. 데레는 싱글벙글하며 컴퓨터를 켜고 마인드맵 검사 프로그램을 실행하려던 와중, HK416의 묘한 표정인 것을 눈치챘다.
...응? 왜 그래? 긴장했어?
무, 무슨 소리야... 긴장하긴 누가...
설마, 마인드맵 정밀 검사는 처음 받아 봐?
되도록 마음을 편하게 먹도록 해. 감정 변동이 심하면 프로그램이 오류로 중지될 수도 있어.
예전에 해본 적 있어. 괜한 충고야... 그리고 지금 그런 거 따질 기분 아니니까 어서 시작이나 해.
분부대로 하죠. 그럼, 좋은 꿈 꿔.
HK416은 눈을 감았다. 데레는 한숨을 쉬고, 정밀 검사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
(마지막으로 정밀 검사를 받은 건... 그때였지...)
화기관제 코어를 반납하고 전출이라니...? 어째서?! 이번 작전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단련했는데!
M16, 지금 농담하는 거지? 이유라도 알려 줄 수 없어!? 내가 쓸모없어진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뭐라고 대답해 봐!
...........
...........
왜...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이딴 굴욕... 이딴 결과...! 난 절대 인정 못해!
왜 또 예전의 일이 떠오르는 거야...
이 검사 프로그램, 진짜 엉망이네.
......
버려진 창고에서 일어나, HK416은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지도를 꺼내, 표기한 장소들을 훑어보았다.
(C, D 구역은 어제랑 그저께 가봤어. 너무 딱 붙은 구역이니... 오늘은 F 구역에 가보자.)
전술인형으로서 그리폰에서 생활하던 때엔 IOP의 수복 및 충전 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도망자 신세가 된 HK416에겐 그런 사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전지든 길가의 고장 난 차량의 배터리든, 구차하고 더러워도 연명하기 위해선 싫어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도망 중인 만큼, 밖을 돌아다니는 행동 자체가 상당한 모험이었다.
HK416은 벽의 구멍에 숨겼던 몽당연필을 꺼내, 지도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표기했다.
(프로토콜 버전이 만료돼서 지도 검색 같은 기본적인 기능도 쓸 수 없다니... 제기랄...)
지도를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이렇게 연명할 바에야, 차라리 임무 중에 파괴되는 편이 훨씬 낫겠지... 어차피 도망치면 처분되는 건 마찬가지니...)
(...안 돼,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난 폐품이 아니야, 엘리트 전술인형이라고!)
(그래... 그래서 수송 차량에서 도망쳤지. 화기관제 코어는 빼앗겼지만, 그래도 총 하나를 빼돌렸어...)
(반드시 그리폰으로 돌아가서, 엘리트 인형으로서 마땅한 모습을 되찾고 말겠어!)
HK416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밖으로 나서 거리로 향했다.
(반드시 살아남겠어... 내 분노를 너에게 쏟는 그날까지.)
......
HK416은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몇몇 민간용 인형들을 보았다.
다들 깔끔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인형은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중이었고, 또 어떤 인형은 제복을 입고서 상가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모두 HK416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저들의 삶도, 지금의 나보단 훨씬 나아...)
(나를 이렇게 처참한 꼴을 만든 건... M16...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HK416은 큰 길거리를 피해, 골목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어느 상가의 뒷문에 도착했다.
발길이 뜸한 골목에는 대형 쓰레기통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바닥에는 폐기된 음식들과 기계 부품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선객이 있었다. 키가 작은 백발 소녀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앗...
조그만 소녀는 인기척에 하던 것을 멈추고, 갑자기 나타난 HK416을 바라보더니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고아인가? 아니... 몸에 파손된 부위가 있어... 저 녀석도 인형이구나.
이 구역은 왠지 버려진 인형들이 꽤 많이 보이네... 경찰의 관리 소홀 탓인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HK416과는 달리,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백발 소녀는 416의 손에 쥐어진 무기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에 HK416은 괜스레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나도 너처럼 여기서 물건을 몇 개 주워 가려고 왔어. 그러니까 긴장 풀어. 이 총에는 총알도 없으니까.
히익...! 오, 오지 마아...!
하지만 소녀는 HK416의 말을 듣지도 않은 듯했다.
결국 백발 소녀는 HK416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딛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쳤다.
허둥대며 도망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HK416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러면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오늘은 뭘 챙겨도 기분이 찝찝하겠네...
그런데, HK416이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악!
저게... 무슨 소리지?
저쪽인가!?
HK416은 막 찾아낸 축전지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경계 태세로 주위를 확인한 다음,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곧장 달렸다.
......
으아아아아악!!
이 망할 년이 감히 날 물어? 쓰레기 주제에 건방지게!
(빈민가의 건달인가? 저 녀석도 운이 나쁘네...)
살살 좀 해. 적당히 얌전하게만 만들면 되는데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래? 팔기 전에 수리하는 것도 다 돈이라고.
(판다고...? 아무래도 평범한 건달이 아닌 것 같네.)
남자는 욕을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진 백발 소녀에게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쓰러진 소녀는 목이 찢어지라 비명을 질렀지만, 결국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저, 저러다간 정말 망가질 거야! 어떻게든 해야 해...!)
(하지만... 난 지금 절전 모드로밖에 못 움직이는데, 1대 2는 전혀 승산이 없어... 저 녀석을 데리고 도망치는 건 더더욱 무리고...)
(그래, 나 총이 있잖아! 하지만 총알이 없으니...)
어휴, 이제야 좀 얌전해졌네.
남자는 백발 소녀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집어 올렸다.
껍데기가 좀 깨졌지만 뭐,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간만에 멀쩡한 걸 찾아내다니 오늘은 운이 좋네. 얼른 가서 납품하자.
(젠장... 더는 망설일 시간도 없어!)
HK416은 총을 들고 구석에서 뛰쳐나왔다.
꼼짝 마! 하던 짓 당장 멈춰!
두 건달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총까지 들고 있는 걸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는 잡고 있던 백발 소녀의 머리를 놓치기까지 했다.
뭐, 뭐야!?
전술인형이잖아?! 설마 짭새가 고용한 건가!?
수상한데... 짭새라면 혼자 왔을 리가 없어.
여자 건달은 품에서 단말기를 꺼내 들어, 렌즈를 HK416에게 향했다. 단말기를 주시하던 그녀는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낄낄낄... 월척이 제 발로 찾아왔네? 저 녀석 지금 아무런 프로토콜 연결도 감지되지 않아. 100% 불법 인형이야.
뭐? 저렇게 잘빠진 게 불법 인형이라고? 푸하하핫! 오늘 진짜 대박이구만!
야! 거기 너!
남자는 방망이를 툭 내던지더니, 코트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총이라면 나도 있다고. 흐흐흐... 그리고 너 따위 인형은 인간 손가락 하나 못 꺾는데 어디서 허세 부리고 난리야?!
내가... 못 할 줄 알아?
어이가 없다는 듯, 남자 건달은 폭소를 터뜨리며 총을 장전했다.
야... 이쪽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 중에서도 인형의 행동 로직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거든? 너처럼 어디서 굴러먹던 년인지도 모를 불법 인형이 인간님을 쏠 수 있겠냐?
하지만 난 인간이라서 말이지 그런 제약따위 없지... 해볼 테면 해봐.
야 야, 구멍 나면 가격 엄청 깎이니까 조심해!
흥... 난 완벽한 엘리트 전술인형이야.
네깟 건달들이 내 반응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겠어?
물론 허세였다. HK416의 마인드맵은 진작에 모든 가능성을 계산해 봤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놈들과의 거리는 약 10m... 위협할 게 아니라 바로 기습해야 했어...)
(총을 뺏을 수는 있을까? 하지만 뺏는다 해도, 놈들을 공격하려 하면 자동 제어 시스템 때문에 강제로 저지될 가능성이 높아...)
(제기랄, 살짝 겁주면 바로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이야, 배짱 한번 두둑한 전술인형이시구만. 그럼 네 머리에 플러그 꽂을 구멍부터 뚫어――으억!?
뭐, 뭐야?! 으악!
HK416이 상황 파악을 하는 데 수 초가 걸렸다. 두 사람 모두 머리에 어디선가 날아온 주먹 반쯤만 한 돌에 맞아 기절한 것이었다.
웬 돌이...? 누가 던졌지?
어때 언니? 나 새총 연습 엄청 많이 했어!
갈수록 능숙해지는구나... 어머나, 아무래도 정의의 사자가 곤란한 모양이네.
눈가에 흉터가 있는 두 인형이, 그늘진 곳에서 걸어 나왔다.
도움을 받았음에도 HK416은 오히려 더욱 긴장했다. 앞장서 나타난 인형이... HK416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미소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