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416
MOD 2
어머나, 아무래도 정의의 사자가 곤란한 모양이네.
넌...!
앞장서 나타난 인형의 얼굴을 보고, HK416은 아연실색했다.
(저 녀석이 어째서...?!)
(...흥, 이게 바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건가? 참 웃기네.)
아, 오해하지 마. 널 도울 생각은 없었어.
그저 우리가 조사하려던 대상이... 우연히 너랑 있었을 뿐이니까.
45 언니! 얘 아직도 기능하고 있어! 근데 소체 파손이 좀 심각해서 그런지 표층 의식이 감지되질 않아.
얘가... 외부인 앞에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아차... 깜빡했다...
45... UMP45, 맞지?
오오?
그 말을 들은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 인형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HK416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또다시 심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하...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너였구나. 오랜만이야.
워낙에 지저분한 모습이어서 못 알아봤지 뭐니. 정말 미안해~
왜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나도 왜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해.
내가 듣기론, 너와 함께 임무에서 제명됐던 그리폰 인형들은 모두 파기 처분됐다던데 말이지. 넌 정말 운이 좋은 모양이구나.
너도 그리폰이 파견해서 여기 있는 건 아니지?
너랑 같이 있는 그 인형... 그리폰의 표준 모델이 아니야.
예리하네. 화기관제 코어랑 지나 프로토콜이 없는 것 빼고는 멀쩡한 모양이구나?
그냥 마인드맵 포맷하고 메이드나 되는 게 어울릴 텐데.
너...!
내 질문에나 대답해!
야, 말투가 너무 사나운 거 아니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좀 더 공손하게 굴어야지!
너한테 안 물어봤어.
괜찮아 9,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 없어.
얘는 지금 할 수 있는 게 분풀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거든.
화기관제 코어 없이도, 너 같은 약골 인형의 목은 맨손으로 부러뜨릴 수 있어.
와아... 그거 정말 무서운걸.
어디 보자... 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 전직 그리폰 엘리트 전술인형님이 현실을 깨닫게 만들 수 있을까?
UMP45는 배시시 웃으며 HK416을 도발했다.
여유만만한 UMP45의 태도에, HK416은 지금 눈앞의 이 인형이 자신이 기억하던 그 소심하던 인형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뭐야 이 녀석... 예전과는 느낌이 전혀 달라...)
...내가 떠난 뒤에 무슨 일이 있었어?
말하자면 꽤 길어지는데, 어디 카페라도 가서 천천히 들을래? 물론 네가 그러고 싶을 때의 이야기지만.
일단 지금 말해 줄 수 있는 건, 그때 임무에 참가했던 인형들은... 다 이 세상에 없어.
뭐라고...?!
임무는 실패했고, 모두 죽었어. 그게 다야.
그, 그럼 M16은!? 널 감싸 주려고 날 내쫓은 그 자식은 어떻게 됐는데?!
글쎄... 그때 내가 확실하게 해치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연구 기관이 회수했다고 들었어. 수복됐다면 아마 그날의 기억이 지워진 채 다시 부려 먹히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녀석 말대로, 네가 그 작전에서 빠져서 천만다행이야... 덕분에 지금 이렇게 팔팔한 모습으로 나한테 성질을 부리고 있잖아?
제길... 그 자식이...
아직 복수도 못 했는데, 멋대로 그 일을 잊어버렸단 말이야!? 절대 용납 못 해!
그거야 네 사정이지.
정말 용납할 수 없으면, 살아남아서 녀석을 찾아가 봐.
...잠깐만.
그렇다는 건, 넌 거기서 도망쳐 나왔단 뜻이지?
...맞아. 지금의 나도 너처럼 주인도, 고용주도 없는 불법 인형이야.
아, 마침 잘 됐다. 너도 내가 만든 불법 인형 클럽에 들어올래?
네 밑으로 들어가라고? 웃기지 마!
내가 지금 이런 꼴인 건 잠시뿐이야! 언젠가 반드시 그리폰으로 돌아가겠어!
풋... 화기관제 코어도 회수당하고 지나 프로토콜도 없는 불법 인형에겐 참 장대한 꿈이네.
난 불법 인형이 아니야! 난... 난 싸우기 위해서 태어났어!
IOP가 철저하게 그리폰의 표준 규격 전술인형으로서 특수 제작한 인형이라고!
코어를 회수할 때 무기도 반납하는 걸로 아는데, 왜 아직도 총이 있어? 도망칠 때 훔쳤니?
쯧쯧쯧, 정말 무서운 집념이구나... 하지만 지금 그 꼴로는 코끼리도 못 맞힐걸?
아, 물론 쏠 총알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으으...
네 제조 의도가 전술인형이었든 토스트기였든, 결국 만족스럽지 않았네.
그런 너에게 희소식이야. 내가 마침 화기관제 코어에 총기랑 탄약까지 조달할 방법을 알고 있거든? 당연히 공짜는 아니지만.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어? 네가 우리의 동료가 되어서 내 명령에 복종한다면, 네가 원하는 걸 줄게.
헛소리 마... 누가 너 따위랑 그런 거래를 해!?
그럼 저 아인 어떡할래? 구하려던 거 아니었어? 쟤의 수복도 거래 조건에 넣어 줄게.
내가 싫다고 하면... 저 녀석을 버리고 갈 거야?
물론이지.
너 이 자식...!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은 정말 치가 떨린다!
너처럼 무능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인형이 대체 어떻게 그 부대에 남을 수 있었던 거지? 지금은 또 무슨 권리로 타인의 생사를 멋대로 결정해?!
저기 있잖아, 아직도 네가 무슨 처지인지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내가 말은 되도록 좋게좋게 하지만, 그렇다고 화를 안 내는 건 아니야.
두들겨 맞고 바닥에 쓰러진 저 애를 방금 구한 게 누구지? 나야. 넌 그냥 근거 없는 자신감만으로 튀어나온 거잖아.
방금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넌 저 애랑 함께 내일 아침 인형 암시장에 내다 팔릴 신세였어.
구해 준 은혜도 모르고 불평불만이나 잔뜩 늘어놓기나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유치하구나.
너 같은 녀석은 그냥 사라지는 게 나아.
UMP45는 손에 쥔 무기를 들어, HK416의 머리를 겨눴다.
어? 언니, 쏘려고!? 아깐 인형을 최대한 많이 구한다고――
조용히 해, 9.
아, 응...
...........
HK416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고, UMP45의 눈은 경멸로 차가웠다.
한참을 대치한 끝에, UMP45가 먼저 천천히 총을 내렸다.
하아... 오늘은 봐줄 테니까, 거기 쓰러져 있는 그 애나 얼른 데리고 가. 어차피 나랑 상관없으니까.
HK416은 대꾸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백발 인형에게 달려갔다. 심하게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함몰된 처참한 모습에,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UMP45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이만 떠나려 했다.
UMP9이 초조한 얼굴로 뭐라 속삭였지만, UMP45는 그저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들이 골목을 나서려는 그때, HK416이 외쳤다.
UMP45! 넌 뭘 위해서 그렇게 연명하는 거야!?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동료를 저버리고, 이런 무법의 회색지대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잖아!
내가 유치하다고? 그럼 네 꼴은 대체 뭔데!?
UMP45는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난 도망치지 않았어. 추하게 연명할 생각도 없어.
그럼 뭘 어쩌려고?
난... 모두를 사지로 몰아넣은 범인을 찾아낼 거야. 세상에서 제일 소중했던 내 동료를 죽게 만든 범인을.
그러기 위해서 쓸 만한 무기를, 더 좋은 모듈을, 같이 싸울 동료를 얻었지. 너처럼 입만 산 게 아니라!
그러는 넌 뭘 하면서 지내니? 휴대폰처럼 매일 쓰레기통을 뒤지며 전지나 찾으면서 살아?
나,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너, 신용 계좌는 있어? 소체를 정비해 줄 사람은?
네 기본 프로토콜을 수정해서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어? 무기와 탄약을 보급해서 계속 싸울 수 있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지금의 넌 아무것도 못 해!
방법이야... 찾으면 돼...!
아니, 못 해. 그저 너 자신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지!
M16을 찾아내겠다고? 저 조그만 불법 인형 하나조차도 지켜내지 못했으면서 무슨 수로?
현실을 직시해. 생각만으로 뭘 해낼 수 있겠어?
HK416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UMP45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를 살려 줄 수 있다면...
뭐?
이 인형을 살려 줄 수 있다면, 네 명령에 복종하겠어.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야!
네가 하는 짓이 납득가지 않으면 그 즉시 빠지겠어! 이게 내 조건이야!
그 말에, UMP45는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짓에, UMP9은 고개를 끄덕이곤 HK416에게 가 의식을 잃은 인형을 대신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UMP45는 뒤로 돌아 416을 보며 씨익 웃었다.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미소였다.
히히히... 그럼 수락한 셈 치고, 당장 거래를 시작해 볼까~?
...며칠 후, 도시의 어느 버려진 창고.
자, 여기. 요구한 물건이 이거 맞지?
아...! 그래, 이거야...!
HK416은 상자를 열어, 더없이 숙련된 손놀림으로 돌격소총을 조립했다.
쓰기 전에 영점사격으로 조정해야겠지만... 이렇게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구나...
난 자세한 규격에 대해선 모르지만, 우리 조력자가 네 상태에 맞춰서 그 총을 조절해놨어. 구경에 맞는 탄약도 마련했고.
이제 화기관제 코어도 장착하고 대인 공격 제약도 삭제됐으니, 내가 약속한 건 다 제공한 거지?
그 인형의 수복도 잊지 마.
어휴, 무슨 요구 사항이 이리 많담? 난 아직 너한테서 한 푼도 못 받았다고. 안 그래도 엄청 적자인데...
별수 없지 뭐. 네 실력이 허풍이 아니란 걸 증명하길 바라야지.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우리 돈줄... 네가 봤던 그 꼬마 정비사가, 도시에 인형 밀매로 장사하는 패거리가 있으니 나한테 조사해 달라고 의뢰했어.
아, 그때 내가 새총으로 기절시켰던 그 건달들?
맞아, 9이 정말 잘 해줬다니까. 총을 쓰면 생포하기가 힘들거든.
기절만 한 덕분에, 놈들의 몸에 추적기를 붙여서 그 조직의 아지트 위치를 찾아냈어.
평소에는 남들의 빈틈을 노리면서, 정작 자신들은 되려 방범 의식이 없다니 웃겨서 정말.
...그럼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될 일 아니야?
맙소사... 너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애였구나?
뭐, 우리 의뢰인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경찰은 언제나 허탕만 쳤어. 그 조직은 항상 타이밍 좋게 거점을 옮기고 활동을 재개하기를 반복했으니까.
추측해 보자면... 놈들이 경찰을 매수했던지, 아니면 경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던지 하겠지.
놈들이 이번엔 어디에 눌러앉았는지 드디어 알아냈는데, 섣불리 건드렸다간 한참을 고생한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그래서 그 애송이가 그 조직을 부수려고 우릴 고용했다고? 너한테 돈까지 주면서?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얻는 이득이 뭔데?
난들 알아? 부자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이랑 전혀 다른걸. 돈이 썩어 넘쳐서 달리 쓸 데가 없나 보지.
겉모습만 봐선 별로 부자인 것 같지도 않던데...
외모만 봐선 안 되지. 작업실에 있는 설비들도 하나같이 최고급, 최신식이야. 그 나이에 혼자서 그 정도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거기다 암시장에서 화기관제 코어랑 무기, 탄약까지 조달하는 게 과연 일반인이 가능한 일일까?
좋아, 일단은 믿을 만한 의뢰인이라 생각하지... 그럼 너는?
나?
넌 왜 이런 일에 가담하는 거야?
그냥 거래야, 나의 다음 계획을 위해서 자원을 조달하는 거지.
아무리 전술인형이라도 그런 위법 행위를 일삼는 무장 집단을 상대하는 건 너무 위험해.
우린 예전과는 달리 그리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실패는 곧 죽음이야... 너라면 이런 일 말고도 돈을 벌 방법이 많을 텐데.
네가 단지 "물자 조달"을 위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어.
......
그 말에, UMP45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야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건 우리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됐을 때 말해 줄게.
됐어, 그런 날이 잘도 오겠다.
무슨 만화처럼 남들 몰래 나쁜 놈들을 처단하는 히어로라도 될 셈이야?
그런 유치한 생각이라면 나도 너랑은 오래 못 해 먹어.
에이, 생판 처음 보는 인형을 구하려고 총알도 없는 총을 들고 나선 히어로가 누구시더라?
...넌 입 다물어.
자아 자, 우리 신입 알바생이 눈 돌아가기 전에 빨리 의뢰나 해결하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내가 하수도의 전력 공급 시스템을 해킹해서 인형 밀매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면, 너희가 돌입해서 모조리 해치우는 거야.
추적기로 도청해낸 정보에 따르면, 이 조직은 핵심 멤버 몇 명이 조직을 통솔하고 있고, 졸개 수십 명이 그들의 의뢰를 받아 버려지거나 혼자 외출한 자율인형을 납치해서 암시장에 되팔고 있어.
이 인간들은 가벼운 무장에 인형을 상대하기 위한 전자전 장비를 지니고 있을 테니, 우리 같은 인형들이 놈들과 정면으로 맞붙었다간 승산이 없어. 그러니까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해. 알았지?
단순명료한 작전이네~
머리를 써야 하는 부분은 내가 다 해결했으니까.
해치우라니... 적을 섬멸하라는 거야, 아님 무력화시키라는 거야?
글쎄, 그건 나도 몰라. 의뢰인이 말한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야. 아무튼 상대가 반격할 틈을 줘서는 안 돼.
어차피 작전 종료 후 철수할 때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
HK416은 눈을 감았다. 그 건달이 야구 방망이로 백발 소녀를 구타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음을 굳혔다.
...알았어. 언제 움직이지?
몰라서 물어? 지금 당장이지.
(저 눈빛... 진짜 기분 나빠. 웃는 듯 아닌 듯하면서 계속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어.)
(하지만... 나도 다른 수가 없지.)
그럼 출발하자.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