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
MOD 1
그리폰 기지의 카페에서, 전선대기조가 처음으로 단체 회식을 가졌다.
60여 명이 넘는 인형들은 그다지 넓지 않은 카페 안을 복작거리며 돌아다니거나, 혹은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동료들과 말을 나눴다.
햐아~ 전선대기조가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졌다니.
우리는 신입 사원 상시 절찬 모집 중이래잖아. 갈수록 더 대단한 녀석들이 잔뜩 들어올걸?
우리의 시대는 이제 끝인 걸까나...
뭐야, 왜 그래? 전혀 너답지 않은 말이나 하고.
하핫, 빨리 타보르랑 네게브나 찾자.
네게브라면 저기 있어.
이번에 새로 온 예비 대원들이랑 얘기하나 본데?
우지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낯선 인형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네게브가 보였다.
주위가 시끄러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살짝 미소를 띠며 대화하는 네게브의 모습에 갈릴은 살짝 넋을 잃었다.
얼마 전, 전선대기조의 일과 훈련 시간.
후우... 네게브, 나 훈련 끝났어!
좋아, 성적 확인하자.
네게브가 갈릴에게 다가와, 그녀의 훈련 성적을 살펴봤다.
화력 B, 명중, B, 사속 B. 평가 등급은 여전히 B지만, 그래도 수치상으론 발전이 있네.
하하하, 아무래도 B를 돌파하는 게 내 인생의 목표가 되겠는걸?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지 마, 개조를 받는다면 더 발전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에이, 그냥 해본 소리――
네게브 씨, 제 성적을 봐주시겠어요?
응, 갈게.
갈릴은 다른 인형에게 불려가는 네게브를 지켜봤다.
어디 보자... 평가 등급 A. 신입치곤 꽤 잘했네.
하아... 아직 A인가요...
저어, 네게브 씨...? 제, 제 성적은 어때요?
평가 등급 S, 훌륭해.
와아! 헤헤, 고마워요 네게브 씨!
네게브―― 기껏해야 예비 부대인데 평가 기준 너무 빡센 거 아니야――?
......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갈릴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급 평가표를 다시 봤다.
평가표엔 이번에도 변함없이 커다란 B가 적혀있었다.
음, 이야기하느라 바쁜 모양이니 괜히 방해하지 말아야지.
아 참, 야 우지――
우지 씨, 저번에 말하셨던 문제 해결됐나요?
오, 호식이 왔구나! 그 문제라면 말끔하게 해결됐어!
네가 가르쳐 준 대로 해보니까 정말 하나도 안 삐걱거리더라!
호식이가 아니라 HS2000이라니까요...
아무튼, 해결됐다니 다행이에요.
갈릴이 사색에 빠진 사이, 마이크로 우지도 다른 전선대기조원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갈릴은 눈치껏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 주고, 홀로 시끌벅적한 인형들 사이를 걸었다.
하... 처음 보는 얼굴이 잔뜩이네... 하나같이 엄청 강해 보이고...
그나저나, 타보르는 어디 있지?
실례합니다, 지나갈게요.
얼레, 타보르가 웬일로 옷을 저렇게 입었대?
야아 타보르!
아, 어서 와요 갈릴.
한 잔 드릴까요?
아니 됐어. 그보다, 옷차림이 왜 그래?
카리나 씨의 부탁으로 모두에게 마실것을 나눠드리고 있답니다.
그렇구나... 아무튼, 엄청 잘 어울린다.
후훗, 고마워요.
요 며칠 내내 훈련장에 그림자도 안 보이길래 네게브한테 물어보니까, 카리나가 빌려갔다며? 잘 지냈어?
잘 지냈죠, 그동안 계속 카리나 씨를 도와 이번 모임을 준비했어요.
신경써야 하는 일이 많았지만,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채워 가는 성취감이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하하하, 어디 팔려나간 게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야.
에이, 아무리 카리나 씨라도 그럴 리가요. 앞으로도 전선대기조의 정기 모임 활동을 준비하는 걸 도와달라고 했는걸요.
저도, 많이 바빠질 것 같네요.
타보르! 타보르, 지금 어딨어?
카페에 있어요.
갈릴, 전 음료를 나눠 줘야 하니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
자, 그러지 말고 당신도 한잔하세요. 도수도 낮고, 당신이랑 잘 어울리는 주황색 칵테일이에요.
아... 고마워. 그럼 수고하고, 나중에 보자.
타보르는 가볍게 손을 흔들곤 인형들 사이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갈릴은 술잔을 들고서 카페 구석에 몸을 기댔다.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수십 명의 인형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모두, 어울리는 자리를 찾았구나.
갈릴은 고개를 숙여, TAR-21이 준 칵테일잔을 내려다봤다. 잔 속의 술에는 평범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억지로 미소를 짜내니, 잔 속의 얼굴도 똑같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어때...?
갈릴이 칵테일잔을 살짝 흔들자, 주황빛 술이 잔에서 넘칠들 말듯 요동쳤다.
네가 있을 자리를 찾았어...?
그때, 한 인형이 허둥대며 달리다 갈릴에게 부딪혀, 그만 그녀에게 술을 쏟고 말았다.
앗! 죄, 죄송해요!
괜찮아.
갈릴은 미소를 지으며 옷에 쏟아진 술을 닦아냈다. 그녀의 혼잣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하... 현실에 어서 돌아와.
잠시 후.
야, 너 왜 혼자 구석에서 홀짝대고 있어?
한참을 찾았잖아.
왜긴, 그냥 여기 있는 게 편해서지.
뭐어? 우리 네게브 아가씨의 오른팔님이 구석에서 쭈그리고 있는 게 편하다고?
킥, 나 같은 것도 오른팔이면 네게브는 아예 천수관음이겠다.
난... 인사조정 명단에 이미 반쯤 이름이 적힌 인형이라고.
그딴 헛소리 마.
두 인형은 말없이 술을 한모금 홀짝였다.
...야, 우지.
응?
넌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들어?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나쁘지도 않지?
가끔가다 까다로운 일이 생기긴 해도, 전체적으론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요즘 뭐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어?
음... 이걸 뭐라 해야 할까...
난 이제 다른 기회를 찾아야 하지 않나 싶어.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대충... 중년에 접어들어 쟁쟁한 후배들을 보고, 다시 자기계발이 신경쓰이기 시작한 인간 같은 느낌이랄까?
종족 자체가 다르지만, 나도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야.
어어... 이해가 안 가.
으이구, 너도 알아듣게 다시 말하자면——
여기선 경쟁력부터 밀리니까, 딴 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다는 소리야.
아하...
네게브한테도 말했어?
아니, 아직. 괜시리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항상 악역만 맡는데, 가끔은 쉬게 해 줘야지.
......
둘이 거기 구석에 숨어서 뭐해요?
갈릴이 신세 한탄하는 거 듣고 있었어!
아, 야! 타보르, 우지가 헛소리하는 거니까 신경쓰지 마.
칵테일 고마워, 엄청 맛있더라.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아 참, 카리나 씨가 당신을 찾으셨어요.
엥, 나를? 왜?
글쎄요, 엄청 중요한 일 같던데... 회식 끝나면 바로 연구개발실로 와 달래요.
연구개발실...
오오, 좋은 일일수도 있겠는걸~?
...글쎄다.
단체 회식이 끝나고, 갈릴은 우지와 함께 연구개발실로 향했다.
카리나, 나 찾았다며?
아, 왔구나! 너한테 엄청 좋은 소식이 있어!
어... 평소에 가구 홍보할 때랑 같은 표정인데...
어머나 얘가 무슨 소릴! 정말 좋은 소식이라니까!
축하해 갈릴, 이번 개조 명단에 네 이름이 올랐어!
내가...?
그런데 네 소체 모델이 너무 낡은 거라서, 개조하려면 아예 새걸로 교체해야 되거든?
그래서 받기 전에 새 소체를 한번 보라고 이렇게 부른 거야.
카리나가 소체 수납용 캡슐의 덮개를 열자, 그 안에는 주황색 머리의 새로운 소체가 잠들어 있었다.
......
개조를 받으면, 나도 전선대기조의 신참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거야?
으음... 솔직히, 수치만 따지면 여전히 차이가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모든 면에서 성능이 상승하니까 작전 수행 능력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야!
지금보다 체중이 쬐끔 더 나가겠지만...
끄응... 그럼 아주 획기적으로 강해지진 않겠――응?
잠깐만, 방금 엄청난 단어가 들렸는데?!
아, 아니야! 아주 쬐~끔 더 무거워질 뿐이니까!
엄청 중요하니까 얼버무리려하지 마! 얼마나? 얼마나 더 무거워지는데!?
어... 끼, 끽해야 10kg 정도...?
10킬로!!!
그, 그럼 난 또 할 일이 있으니까 이만 가보도록 해!
자세한 일정은 메일로 보낼 테니까, 꼭 읽어♪
카리나는 갈릴을 등을 토닥이면서 억지로 연구개발실 밖으로 밀어냈다.
......
푸하핫, 다 들었어!
축하해 갈릴~ 하지만 다이어트 계획은 이제 물건너갔네?
10킬로나!!!
아하하하하하!!
웃지 마! 개조의 대가가 뭐 이리 참혹해!
그리고 개조를 받아도 보직 바꾸면 그 기능을 다 활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엑, 설마 개조 안 받게?
지금 진지하게 고민 중이야.
개조해봤자... 어차피 신입 녀석들을 따라잡을 순 없을 거 아니야.
갈릴은 짐짓 우울한 척하며, 평소처럼 우지가 자신에게 딴지 걸기를 기다렸다.
...그래?
뭐, 선택은 네가 하는 거지.
엉?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응원할 테니까!
으에, 닭살 돋아...
히히.
난 방금 임시 편성된 임무가 들어와서 가야 하니까, 너 먼저 숙소로 돌아가.
그래, 나중에 보자.
그렇게 갈릴은 홀로 숙소로 돌아왔다.
불을 켜지 않은 갈릴의 방에서 모니터만이 환하게 빛을 발했고, 그 화면에는 개조 관련 세부 사항이 나타났다.
그리고 갈릴의 손가락은 "동의" 버튼 위에서 한참을 머물렀지만... 끝내 누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