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MOD 1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자연의 산물이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움직이게 된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우리"에게 미래로의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 대한 이 세상의 시선은 어떠할까? 인간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이긴 한 걸까? 아니면, 그저 언젠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할까?
마카로프, 일어나요.
임무를 마치고 그리폰 기지로 복귀하는 도중.
정말 푹 잠들었었군요? 거의 다 왔어요, 기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휴게 지점이에요.
...응. 모두, 내려서 정비해.
으에에... 또 여기야...?
언제 봐도 으스스해...
AAT-52는 투덜대며 차에서 내렸고, 스텐도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유지만 말이다.
아니 진짜 왜 또 우리 휴식 구역에다 쌓아 둔 거야?!
이해가 안 가네 정말... 왜 우리 휴게 지점에다가 이런 걸 세운 건지...
나는 바닥에 잔뜩 널브러진 부품 더미를 주워 치우려 하는 92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냅둬, 어차피 치워 봤자 말짱 도루묵인데.
이곳은 기계의 공동묘지. 망가진 기계를 버리는 쓰레기장이다.
본디 인근 도시의 시내에 위치했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재활용 쓰레기"를 감당하지 못해 이런 변두리로 옮겨졌다.
물론, 여기에 잠든 것들은 가정용 같은 저렴한 게 대부분이다. 좀 더 고급인 기계나 인형은 버려지기도 전에 재활용된다.
좀 불쌍하네요...
이 녀석들은 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서 여기에 온 거야, 불쌍해하지 마.
어... 그럼 우리도 언젠가는 여기에 눕게 되는 건가요?
......
에엑, 전 싫어요!
쓸데없는 걱정은. 어차피 토마토는 재활용 안 되는 쓰레기라 매립지로 가야 해.
땅에 묻어서 좋은 토마토가 안 자라면 그땐 또 좀 맞아야지.
그럴 바에야 그냥 여기 누울래요!
...아! 누구보고 토마토라는 거예요!?
92식, 차량 점검해. 스텐이랑 AAT는 물자 보충하고.
마지막 휴게소라도 기지까진 아직 멀었어.
네.
알겠습니다!
가자 가자~
그렇게 다 보내고 나니, 나 혼자 남았다.
산처럼 쌓인 기계 더미를 밟고 위로 올라 보니, 저 멀리서 돈이 될 만한 부품 따위를 찾는 인간들 몇 명이 보였다.
폐품 더미를 헤집는 그들은 이따금씩 아직 그럭저럭 괜찮은 기계를 찾아내 능숙하게 분해했다.
......
항상 이래. 전혀 생기가 없어.
인간들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 발밑을 살펴봤다.
그리고 그제서야, 무언가가 또 다른 기계 더미 뒤에서 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음...? 넌...
......!
설마 이 무덤에 아직 움직이면서 인간에게 걸리지 않은 기계가 있었다니.
더 자세히 보고자 했지만, 무심코 내디딘 발이 상대를 겁먹게 만들었다.
다, 다가오지 마!
진정해, 나쁜 짓 안 해.
하지만 잔뜩 경계하던 녀석은 바닥에서 납작한 철판을 방패 삼아 집어 들곤 뒷걸음질쳤다.
......
그대로 걸음을 멈추는 것이 옳았겠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이 내 등을 떠밀었다.
녀석은 백화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내 및 청소용 로봇 같았다.
너, 백화점에서 왔어?
......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물러나, 천천히 고철 더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녀석을 뒤쫓으려 했지만, 발을 더 내딛는 그 순간 바닥이 꺼지는 느낌과 함께 얇은 나무판자로 가려진 구멍에 발이 쑥 빠지고 말았다.
간신히 발을 빼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 녀석은 이미 광활하게 펼쳐진 고철들 속으로 녹아든 뒤였다.
......
가정용 로봇이 만든 함정에 걸리다니...
마카로프, 지금 어딨어요?
출발 준비 다 끝났어요.
어디서 뭐하고 있어요! 여기 오래 있기 싫다고요, 빨랑 돌아와요!
...응, 금방 갈게.
조금 분한 마음으로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봤지만 녀석의 종적을 찾을 순 없었고, 난 하는 수 없이 휴식 구역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귀신에라도 씌였는지, 나는 다시 이 기계의 무덤으로 돌아왔다.
그 녀석, 붙잡혀서 해체당하진 않았으려나...
어제 녀석을 봤던 곳으로 가 보니, 그곳은 한층 더 엉망진창에 인간이 밟고 지나간 흔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역시나, 인간 몇 명이 쓰레기 더미를 닥치는대로 들쑤시는 중이었다.
...엉? 뭐여, 뭘 꼬나봐!
확 해체해 버린다!?
야, 저거 전술인형이야. 건들면 안 돼...
쯧, 재수없게스리... 일 없으면 꺼져!
......
죄송합니다.
적당히 대답하면서 주변을 곁눈질하던 차에, 녀석을 찾아냈다.
한 인간이 딛고 선 쓰레기 언덕 저 아래에서 꼼짝도 않는 것이, 아무래도 굴러떨어져 기절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인간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만, 저들은 경험이 많으니 여길 계속 들쑤신다면 결국 발견될 테지.
아무리 재빠른 가젤도 노쇠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자의 먹잇감이 되는 것처럼...
이것도 이 시대의 자연의 섭리다.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목인사를 하고 기계 무덤을 떠났다.
그리폰 기지 인근의 버려진 오두막.
뭐어!?
K11이 대뜸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전등을 내게 들이댔다.
지금 뭐?! 다시 말해봐!
윽... 뭐를?
그 자연의 어쩌고!
이것도 이 시대의 자연의 섭리니까...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래! 바로 그거!
K11은 양손으로 탁상을 쾅 내려치면서, 그 탁상 위의 놓인 작은 로봇을 가리켰다.
근데 이게 왜 여기 있어?!
작전 중엔 항상 변수가 발생하는 법이야. 실험실에 얼마나 처박혀 있었길래 그런 것도 다 까먹었어?
그딴 헛소리로 잘도 얼버무리려 하네!
똑바로 대답이나 해, 이거 어떡할 셈이야?
애완 로봇으로라도 키우려고? 아님 뭐, "주인"의 입장을 체험해보고 싶기라도 한 거야?
일단 수리부터 해 줘. 근데 너도 제대로 고칠 수 있을지 보장 못한다며.
사태 파악이 안 됐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이건 그냥 쓸 만한 부품 하나 구해 와서 몸에 끼우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일이라고.
이 일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너야, 마카로프. 네가 말한 그 "자연의 섭리"에 끼어든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됐어?
K11은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부릅떴다.
이 녀석의 운명을 네가 바꿨으니, 네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잠시 후.
그거 정말 고칠 수 있어?
지금 전문가를 의심하는 거야?
그럼 왜 휴대장약처럼 생긴 걸 꺼내는데?
얕은 지식으로 전문가의 행위를 억측하지 좀 마!
이 녀석 몸뚱이는 한계에 달한지 오래라 부품이란 부품은 모조리 마모됐어. 이건 되도록 많이 교체했어.
하지만 제일 중요한 메인보드가 타 버리기 직전이야. 이거 날리면 저장된 데이터가 홀랑 날아가 버리는 건 물론 전원도 다시 못 키게 된다고.
게다가 이 녀석, 소비자 정보 보호 기능 때문에 메모리 백업이 불가능한 모델이야.
오래 못 산다는 말처럼 들리는걸.
으휴... 일단 돌아가서 이거 제조사에 문의 넣어봐야겠다, 어쩌면 교체할 메인보드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래도, 언제 시스템이 다운돼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게 돼도 이상할 거 없으니까 각오는 해 두도록 해.
알았어. 고마워, K11.
닭살 돋으니까 그러지 마. 나도 선심 쓴 거 아니니까 그것도 각오하셔.
......
근데 진짜 궁금하네, 너 대체 이 녀석을 어떡할 셈이야?
아무것도 안 해. 그냥 관찰하기만 할 거야.
자유를 얻은 작은 로봇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미래로 향할지, 지켜보기만 할 거야.
정말 관찰자로서 아무런 간섭도 안 할 거라고 맹세할 수 있어?
물론이지.
하, 어디 두고보자고.
K11은 콧방귀를 뀌곤 오두막을 나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누워 재가동되기를 기다리는 작은 로봇을 바라봤다.
과거와 작별하고 새 삶과 자유를 얻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계속 설정된 대로 행동할까? 아니면...
또 다른 가능성을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