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MOD 2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대체 어떠한 사명을 짊어진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전부 짙은 안개 너머에 숨어, 도저히 볼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답이 무엇이든, 인형으로서의 삶은 변치 않는다.
그저 받은 명령을 수행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된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목적이 없으면, 질서도 없다.
질서가 없으면,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리폰 기지 인근의 버려진 오두막.
나는 수리가 끝난 작은 로봇의 전원을 켰다.
......
......
해체하지 마세요!!!
재기동하기가 무섭게, 작은 로봇은 몸을 둥글게 말고 그 짧은 팔로 몸을 감쌌다.
그럴 셈이었으면 네 전원을 켜지도 않았어.
......
그건 그렇네요.
작은 로봇은 다리를 뻗어 일어나, 나를 찬찬히 살펴봤다.
아하... 당신이 제 새 주인님이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설정 안 했는데?
하지만 제 사용자 인증 정보엔 당신의 얼굴이 있는데요?
어... 그런데 이름은 없네요.
K11 그 괴짜 녀석, 왜 로봇 수리에 안면 인증이 필요한가 했더니만...
저기요 주인님, 주인님의 성함을 가르쳐 주세요.
하아... 별수 없지. 내 이름은 마카로프, 그리폰의 전술인형이야.
작은 로봇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듯한 동작을 취하곤 팔을 쭉 뻗었다.
친애하는 마카로프 새 주인님, 저는 시내의 대형 백화점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고객의 점내 안내 및 간단한 청소, 정리 등의 업무를 맡았습니다.
지금까지 약 1만여 명의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업무 만족도 99.8%의 우수한 실적을 거뒀습니다!
주인님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낯간지러우니까 그냥 마카로프라 불러.
그런데, 백화점에서 일하던 로봇이 어쩌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거야?
백화점이 문을 닫아서요...
......
헤헤헤, 그래도 새 직장이 생겼으니까 괜찮아요! 이제 마카로프 님이 새 이름을 지어 주시면 돼요!
작은 로봇은 내 다리로 다가와 몸을 비볐다.
...하지 마.
이제 제 이름은 무엇인가요?
알리타.
알리타! 마음에 들어요! 뜻이 있나요?
몰라, 그냥 대충 검색했어.
에엑, 너무해요!
......
마카로프 님은 그리폰이란 데서 일한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저도――
아니.
아직 말도 다 안 했는데...
그리폰에 너 같은 꼬맹이한테 어울리는 보직은 없어.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어, 알리타는 아주 우수한 직원이에요!
인간들도 모두 절 좋아했다고요!
......
정 인정 못하겠으면 가서 테스트 받아보든가.
좋아요! 제 실력을 보여 주겠어요!
그리폰 입사 테스트 종료 후.
우으으... 말도 안 돼!
제가 불합격이라뇨!
그러게 말했잖아.
으아아아앙!
......
그래도 뭐, 도덕 점수는 만점이네.
마카로프 님이랑 함께 일하길 기대했는데... 우으으...
그럼 전 이제 어떡하죠? 무슨 일을 해야 해요?
바로 여기가 네 새 직장이야.
업무 내용은 네가 알아서 정하고.
제가 알아서 정하라고요...? 추가 설명 없어요?
없어,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너 스스로 정해.
네?
그런 명령 처음 들어봐요...
알리타는 어리둥절해하며 방을 맴돌았다.
알리타, 네가 스스로 선택하는 거야.
그날 밤.
자가 검진 실행.
알리타는 오늘로 가동된 지...
3831일째?!
품질 보증 기간도 한참 지났잖아...
그런데도 아직 움직일 수 있다니, 정말 기적이야!
알리타는 조심조심 창가에 올라, 하늘에 뜬 밝은 달을 바라봤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다음날, 버려진 오두막.
어제만 해도 먼지에 거미줄 천지였던 낡은 오두막은 눈에 띄게 깔끔해진 상태였다.
그런 오두막 안을 동그랗고 작은 형체가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
역시, 결국엔 본업을 계속하길 택했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카로프 님!
알리타가 무얼 도와드릴까요?
아니,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
방을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했어요! 엄청 깔끔해졌죠?
응, 아주 잘했어.
그럼 업무 평가를 해 주세요!
양손을 번쩍 들어 흔드는 알리타를 보며, 난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알리타, 다시 청소하는 일을 선택한 건 할 줄 아는 일이 그것뿐이어서야?
당연히 아니죠! 알리타는 청소 말고도 할 줄 아는 거 많아요! 안내, 말 상대, 또――
그럼 왜 청소를 했어?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서요!
정말 네가 좋아해서야?
무슨 뜻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할일이 있으니 이만 돌아갈게.
네, 마카로프 님도 힘내세요!
방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다시 알리타를 보았다.
작은 걸상 위에 올라서서 훨씬 큰 탁상을 닦고 있는 그 모습은 정말 즐거운 듯했다.
...사흘째.
멀리 보이는 오두막의 문 앞에서, 작은 형체가 부지런히 눈을 치우는 것이 보였다.
문 옆으로는 작은 눈사람들이 일렬로 나란히 줄을 서 있었다.
알리타, 왜 또 밖으로 나왔어?
네 상태로 바깥은 위험하다고 했잖아.
하지만 안에선 더는 할일이 없는걸요!
......
걱정 마세요, 고물 장수한텐 안 들켜요!
아니, 이 근방은 안전하니까 그런 걱정은 없는데...
사실 너한텐 선택지가 꽤 많아.
굳이 예전 일을 반복할 것 없이――
정말 관찰자로서 아무런 간섭도 안 할 거라고 맹세할 수 있어?
하마터면 또 녀석의 판단에 간섭할 뻔했다.
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요.
...됐어, 별거 아니야.
그냥 너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
...나흘째.
오두막 앞은 이제 앞에 깨끗이 닦인 길이 보이게 됐고, 올 일 없는 방문객을 위한 바닥의 화살표와 목적지 표시도 생겼다.
작은 형체는 한창 바닥에 어질러진 목재를 줍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활동 영역이 더 넓어졌네.
헤헤,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엔 여기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일했다고요!
...아, 지금 말실수한 건가요?
지겹지는 않아?
아뇨! 매일매일이 새로워요!
부지런한 알리타의 뒷모습을 보며, 난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켰다.
...닷새째.
기지를 나온지 얼마 안 되어, 소복이 쌓인 눈 사이로 정리된 오솔길이 보였다.
......
녀석 참...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그 부지런한 작은 형체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알리타?
알리타, 안에 있어?
하지만 한층 더 깔끔해진 오두막 안에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뜬 먼지만 보일 뿐이었다.
설마 이런 타이밍에 고장난 건 아니겠지?
알리타!
알리타! 알리타, 어딨어? 대답해!
알리타의 행동 패턴을 떠올리면서,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땅바닥에 남은 흔적을 살폈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쌓인 눈을 못 이기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돌이 가볍게 딱딱 부딪히는 소리...
딱, 딱, 딱.
타악—— 타악—— 타악——
딱, 딱, 딱.
··· --- ···
...이 소리는!
알리타!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강가 옆의 바위 뒤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알리타를 찾았다.
마카로프 님...
...고장났어?
눈에 미끄러졌는데, 하필이면 바위에 부딪혔어요.
그래서 다리의 부품이 빠져서...
난 그 부품을 줍고, 알리타를 안아 들고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빠진 다리 부품을 다시 끼워 주었다.
감사합니다 마카로프 님!
네가 모스 부호를 알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못 찾을 뻔했어.
에헤헤...
이젠 함부로 밖에 돌아다지니 마, 너 혼자선 너무 위험해.
하지만 이게 제 일인걸요.
마카로프 님도 저한테 스스로 뭘 할지 정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선택한 게 네 명줄이 얼마나 질긴지 시험해 보는 일이었어?
아뇨! 앞으로 찾아올 손님을 더 잘 접대할 수 있도록 주위를 정리하는 일이에요!
......
그건 네 기존 설정을 따른 것에 불과해. 네가 직접 선택했다 볼 수 없어.
네 AI 프로그램의 설정 때문에 청소를 좋아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거지.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야.
그게 나쁜 일인가요?
......
저는 만족해요.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스스로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AI 설정도 저의 일부 아닌가요?
그럼 AI 프로그램의 선택도 제 선택 아닌가요?
의아해하는 알리타의 되물음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제 말이 틀렸나요?
물론 제가 마카로프 님만큼 똑똑하진 않지만요...
...아니, 꽤 참신한 대답이었어.
헤헤, 그럼 틀린 게 아니니 다행이네요.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알리타는 왠지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