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MOD 3
며칠 후, 마카로프의 숙소.
대박 대박 대박! 그불게 봤어? 얼른 봐봐!
무슨 일인데 그래?
어디... 역시, MDR이 또 방송 중이네.
안뇽 안뇽~! 정말 오랜만인데, 이렇게 다시 볼 줄은 몰랐지?
아무튼, 최근에 기지에 나타난다는 수수께끼의 그림자에 대해서는 다들 들어봤으리라 믿어!
깊은 밤중에 나타나,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기상천외한 행각을 벌인다는...!
내가 마침 제보자 몇 명을 인터뷰하면서 재밌는 썰을 들었걸랑!
자 자, 채널 고정! 그 수수께끼의 그림자와 조우했던 제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구!
그, 그게 그러니까...
어젯밤에 식자재 재고 확인하고서 다음날 발주할 목록 작성하려 했는데, 엄청 피곤해서 말이야...
그래서 잠깐 충전하던 차에 살짝 졸았는데...
만능이, 이따가 사무실로 오세요.
헉, G36 씨?! 아니에요! 농땡이 부린 거 아니에요!
옆길로 새지 말고! 그래서?
그, 그래서 졸다 깨서 보니까, 창고가 깔끔하게 정리에 청소까지 됐더라!
더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발주 목록도 작성됐는데, 양식도 내가 쓰는 거랑 완전 똑같았어!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바닥에 물기가 덜 말랐었으니 범인이 금방 왔다 갔다는 뜻인데...
하지만 창고엔 누가 있기는커녕 발소리도 안 들렸단 말이야!
며칠 전에 내 룸메랑 배달 음식 시켰는데, 다 먹고 분리수거하기 영 귀찮더라고.
그래서 깜깜할 때 몰래 대충 버리려고...
쓰레기 싸 들고 숙소를 나와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길로 갔거든?
그런데 어디다 버려야 안 들킬까 생각하던 와중에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 있지...
"그거 무슨 쓰레기야?"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는데, 복도엔 아무도 없었어! 진짜 맹세코 텅 비어있었어!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손의 쓰레기 봉투 신경쓸 겨를도 없이 바로 도망쳤어!
저기 근데... G36 씨?
나 진짜 반성하고 있으니까 벌 그만 서면 안 될까...?
그날은 수복 캡슐에서 막 나왔더니 온몸이 쑤시길래, 스프링필드한테 마사지 좀 해 달라 하려고 카페에 갔어.
그런데 카페 문은 열렸는데 불은 꺼졌더라. 그래서 주방에서 정리하고 있나 보다 하고 그냥 소파에 엎드려 눕고 와서 마사지해 달라 했지.
그랬더니 잠시 후에 누가 등을 꾹꾹 눌러 주더라고. 솜씨가 좋길래 잘한다고 칭찬했더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대답하는 거야!
"헤헤, 천만에요! 손님이 좋아하신다니 영광이에요!"
나 진짜 코어 터지는 줄 알았어! 바로 벌떡 일어나서 너 누구냐고, 당장 나오라고 했더니...
그 녀석이 뭐랬는 줄 알아?
"손님 뒤에 있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뒤를 봐도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야! 그 자식, 날 완전 갖고 놀았어!
"그만 돌아요, 멀미 나려 해요..." 라면서!
으으으... 다시 생각해도 소름 끼쳐...
어휴 진짜, 내 얘기 좀 들어봐. 그때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나도 진작에 그 수수께끼의 그림자 소문은 들었거든? 그날 밤은 마침 내가 야간 순찰 당번이라 신경을 아주 바짝 곤두세웠어.
그런데 강가를 지나던 차에, 찰싹찰싹 누가 손빨래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래서 이 늦은 밤에 웬놈인가 싶어서 총 들고 가봤어.
근데 그게 뭔지 보기도 전에, 누가 내 등을 뻥 차서 강에 빠뜨렸어!
그 스피드! 틀림없는 전술인형이야!
물이 깊진 않아서 다행이긴 했는데, 돌아봤을 땐 이미 아무것도 없더라.
나는 벌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MDR의 영상을 닫고, 얌전히 작업대 위에 누운 알리타를 째려봤다.
하아... 미안해 CF05, 나중에 내가 훠궈 쏠게...
푸하하하핫! 세상에, 이 녀석 재주도 좋아!
며칠 만에 그리폰 기지 전체로 영역을 넓히다니, 서비스 정신이 정말 장난 아닌데?
전 고객님을 도와드리려 했을 뿐인데, 왜 다들 무서워하죠?
너 말이야... 여태까지 몸의 부품이란 부품이 다 한 번씩은 망가졌으면서 왜 발성 모듈은 그렇게 멀쩡해?
칭찬인가요? 헤헤, 알리타의 발성 모듈은 튼튼해요!
......
그나저나 마카로프, 너 되게 피곤해 보인다?
좀처럼 가만 있지 못하고 싸돌아다니는 고물 로봇 관찰하는 게 임무보다 힘든 일인 줄 누가 알았겠어.
며칠 내내 이 녀석 쫓아다니면서 누구한테 들키진 않을까, 총 맞진 않을까 얼마나 가슴 졸였다고.
킥킥킥, 그러게 내가 뭐랬어.
......
아무튼 빨리 어떻게든 좀 해봐, 알리타가 고장나는 빈도가 점점 더 잦아지고 있어.
이젠 제자리뛰기도 몇 초 딜레이가 생긴단 말이야. 완전 로봇 버전 AAT야.
제자리뛰기가 아니라, 마카로프 님이 CF05 님을 뻥~ 찬 걸 따라하는 거예요!
어찌 됐든 메인보드가 이제 진짜 한계야.
내가 저번에 알리타의 제조사에 연락해 본다 했지?
딱 마침 재고가 있어서 하나 샀어.
그럼 바로 교체 가능해?
그야 가능한데... 교체하면 녀석의 메모리도 함께 초기화되어 버려.
전에 말했듯이, 이 모델은 사용자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메모리 복사가 불가능해.
......
알았어, 그럼——
싫어요! 전 반대예요!
화난 표정의 프리셋이 없어, 알리타는 제자리서 펄쩍펄쩍 뛰는 것으로 대신했다.
네 메인보드가 타 버리기 직전이라니까? 새걸로 교체하면 펌웨어도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어.
하지만 제 기억이 몽땅 사라지잖아요!
안목을 좀 더 넓혀 봐, 현재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미래를 보는 거야.
네가 계속 움직일 수 있다면, 더 많은 기억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잖아요.
너는 너 그대로야, AI 설정은 하나도 안 변해.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분명 같은 선택을 할 거야.
......
제 마음은 신경도 안 쓰고...!
그럼 절 해체하려던 나쁜 사람들이랑 뭐가 달라요!
알리타는 작업대에서 뛰어내려, 벽 밑의 구멍으로 굴러 들어갔다.
어, 야! 아직 수리 안 끝났어!
와우, 천하의 마카로프가 맞아도 쌀 소리를 하다니.
......
나 참, 그래가지고 무슨 관찰자야?
지금 넌 그냥 말 안 듣는 인형 때문에 골치 썩이는 지휘관이랑 똑같아.
K11은 흥미진진하단 얼굴로 팔짱을 끼고 날 구경했다.
잔소리는 됐으니까 찾는 거나 도와줘!
마카로프 말이야... 요즘 들어서 좀 이상하지 않아?
와아! 드디어 누가 말했다!
꼭 내가 뭐라면 헛소리 말래서 참았는데!
확실히 그래요, 요즘 우리랑 잘 같이 다니지도 않고요.
뭐 예전부터 혼자 훌쩍 어디로 가거나 심오한 고민을 하거나 하긴 했지만...
하지만 이번엔 뭔가 좀 달라.
최근엔 딱히 임무도 없었는데 혼자 바빠 보이잖아?
그리고 엄청 피곤해 보이고!
마치 들키면 큰일나는 일이라도 꾸미는 것처럼 말예요.
서, 설마...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요?
알리타――! 어딨어――!!
얼어붙은 땅 위론 내 외침만이 메아리쳤다.
......
알리타...
녀석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방패를 들고 도망치다, 교묘하게 주위 환경에 숨었던 그때를.
그건 기계의 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 그 독특한 행동에 끌린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 독특함을 지워버리는 말을 내뱉었던 걸까...
그러게 내가 뭐랬어.
......
관찰자이기를 자처했으면서,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알리타를 객관적으로 가만 두고볼 수가 없었다.
기록하던 손에서 펜을 놓고,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를 붙잡으려 했다. 녀석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분명, 처음에 난 그저...
근데 진짜 궁금하네, 너 대체 이 녀석을 어떡할 셈이야?
아무것도 안 해. 그냥 관찰하기만 할 거야.
자유를 얻은 작은 로봇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미래로 향할지, 지켜보기만 할 거야.
정말 관찰자로서 아무런 간섭도 안 할 거라고 맹세할 수 있어?
물론이지.
......
쌀쌀한 바람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 내 마음도 얼어붙은 듯 더욱 무거워졌다.
뽀드득...
그때, 갑자기 눈덩이 하나가 부풀어오르더니 안에서 알리타가 솟아났다.
......
어...
마카로프 님...
알리타...
아까 화내서 죄송해요...
혼내도 돼요, 마카로프 님!
아니, 나야말로 미안해. 내 생각을 너한테 강요했어.
네 수명이 얼마 안 돼서, 어떻게든 더 늘리고 싶어서...
그런 만큼 전 하루하루가 엄청 소중해요.
......
아직 제가 모르는 일이 아주 많지만요, 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만나는 모든 손님에게 성심성의껏 봉사하고 싶어요.
그리고 하루 일을 마치면 마카로프 님이 확인하러 오길 기다리고 싶어요.
바로 지금처럼요.
...응, 더는 억지 부리지 않을게.
나는 알리타를 눈밭에서 꺼내 들어,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품에서 느껴지는 알리타의 무게는, 덧없고 희미한 미래보다 훨씬 실감났다.
어... 마카로프 님? 지금 우시는 거예요?
92식이 AAT-52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걸 농담이라고 해!?
으겍! 우이씨, 왜 때려요!
싸, 싸우지 마...
그때, 숙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너희는 언제 봐도 기운 넘치는구나.
아, 마카로프! AAT가 뭐랬는――?!
한데 뒤엉켜 투닥대던 세 인형들이 동시에 마카로프에게 고개를 돌리고, 또 동시에 넋을 잃었다.
인사해 알리타, 저 세 녀석이 내 소대원이야.
안녕하세요!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몇 시간 후.
아하하하핫! 알리타 너 진짜 재밌다!
에이, 여러분 이야기가 더 재밌는걸요!
저기 마카로프, 알리타를 어떻게 그리폰에 들일 방법은 없나요?
저도 알리타가 우리 동료가 됐으면 좋겠어요.
알리타, 갈 시간이야.
네!
엥, 벌써요? 더 수다떨고 놀고 싶은데!
어휴, 노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
알리타를 배낭에 넣고 나오는 숙소에선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다 왔어, 이제 나와.
잘 들어, 나랑 내 소대는 내일부터 출장 임무가 있어.
오래 걸리나요, 마카로프 님?
알리타가 뒤뚱뒤뚱 배낭에서 나오면서 물었다.
응, 며칠 정도.
그동안 이 집에서 얌전히 있도록 해.
K11한테도 봐 달라곤 했지만, 걔도 자기 임무며 일이 있으니 길어봤자 사흘 정도밖에 못 올 거야.
알겠습니다!
안전에 주의하고.
걱정 마세요!
강가에도 가지 마. 넌 이제 방수 안 돼.
넵!
마찬가지로 위험하니까 불도 멀리하고.
아하하, 오늘따라 말이 많으시네요?
......
이만 갈게.
안녕히 다녀오세요♪
문을 닫고 나오니, 알리타가 창가로 올라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가슴 안의 무언가가 엄청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며칠 후, 팔레트 소대가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다.
알리타한테 인사하는 건 내가 1등이다아아!!
어쭈, 토마토 주제에 달리기가 빠르네?
가, 같이 가!
......
하지만 그건 내가 기대한 광경이 아니었다. 문이 활짝 열린 채인 오두막과, 안에서 밖으로 난 지저분한 발자국.
그 순간, 내 의식은 산처럼 쌓인 고철 더미의 언덕 아래에서 알리타를 찾아냈던 때로 돌아갔다.
마카로프! 알리타가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