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슐라
OTs14
하~암... 너무 늦게 일어났나...?
그로자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텅텅 빈 다른 침대들을 보며, 그녀는 낙담이 아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훗, 아닌 것 같네.
다른 애들은 섣달그믐밤이라면서, 벌써 나가서 한창 먹고 마시고 있겠지.
아주 늦게... 아니, 어쩌면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올 거야... 좋았어.
그로자는 옷장의 락도어를 열고, 안에서 진공 포장된 소포를 꺼냈다.
과연, 지휘관이 직접 특별 주문해 준 옷이네. 내 몸에 딱 맞아.
받을 때 왜 바로 안 입어보냐면서 나한테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이런 소중한 선물, 아무 데서 함부로 뜯기엔 너무 아깝잖아?
거울에 비친 개량 치파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로자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옷장에서 취향껏 털목도리, 장갑, 장신구를 꺼내 입어, 그녀 나름대로 "완전무장"을 했다.
좋아, 아주 완벽해.
모두와 함께 술자리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즐기는 것도 풍류지.
모처럼, 여행을 떠나볼까?
정말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는 없으니, 가까운 도시에서 나만의 밤을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폰의 엘리트 전술인형이자, 인형 소대의 소대장.
...하지만 자신만의 생활 패턴을 가진 인형으로서, 그로자는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잠시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신을 공허함 속으로 던질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을 위해 준비한 목칠 짐 가방만 챙기면, 모든 준비가――
똑똑똑!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 택배라도 왔나?
그로자가 잠깐 머뭇거리고는 문을 여니, 그리폰 인형 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반짝이는 초롱불을 들고서, 그녀에게 활기차게 인사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리 인사드려요! 새해에도 잘 부탁드려요!
저기...?
무표정한 그로자의 반응에, m45는 잠시 멍하니 있다 다시 활짝 웃었다.
그, 그거요! 음력설! 동양의 설날이요! 돼지의 해 축하해요!
아니, 무슨 뜻인지는 알아. 다시 말할 필요 없어.
그런데... 새해 인사를 왜 지금 하는 거니?
그러니까, 미리 인사드리는 거예요...
그래도 그믐날이 된 지 이제 겨우 몇 분 지났는데, 너무 일찍 아니니?
그게, 어...
어, 어쩌죠? 그로자 씨, 생각보다 엄청 까다로우신데요...
모든 꽃이 봄을 반기는 건 아니야. 모두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어.
그건 그렇고, 지금 무슨 특별 임무 중인 거니?
한번 맞춰볼까? 지휘관의 명령이구나?
네, 그게... 지휘관님의 의뢰로, 기지 내의 모두에게 설 선물을 전해드리는 중이에요. 여기, 제가 직접 구운 빵이에요.
...그렇게까지 참견할 정도로 깊은 배려심이라니, 과연 지휘관답구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과연 그로자 씨라고 할까요? 설을 맞아 그렇게 정성스럽게 차려입으시다니, 다른 분들도 보고 좀 배워야 할 텐데 말이에요.
정말 다행이네요, 저 혼자만 이렇게 많이 준비한 게 아니었군요!
응? 아, 아니, 이건...
아, 아무튼 너흰 아직 임무 중인 거지? 어서 가봐.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
그로자는 허둥지둥 선물을 받아들곤 문을 닫았다.
으음... 왠지 급하게 대화를 끝내려 하신 거 같은데...
제가 곤란하게 했던 걸까요?
저렇게 차려입은 건 혹시 더 중요한 손님을 만나야 해서일까요?
...일단 여기에 두자.
똑똑똑!
또 누구지?
금방 받은 선물을 내려놓고, 허겁지겁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상당히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우 냄새... 나쁜 냄새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어... 안녕, 무슨 일이니?
당신의 집에 황금 돼지의 기운이 가득하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돼지가 새끼를 낳듯, 복이 많이많이 들어오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뒷부분은 알겠는데, 앞부분은 무슨 뜻이니?
그러니까, 재물운 팍팍! 연봉 쭉쭉! 행운이 잔뜩 오길 비는 거예요!
...그거 정말 고맙구나.
손에 그건 또 뭐니?
이거요? 저희가 직접 만든 훈제 소시지예요.
합성 재료와 조미료 미첨가, 100% 천연 돈육! 천 리 밖까지 퍼지는 이 그윽한 향기! 끝내주죠?
무슨 길거리 장사꾼도 아니고...
장사꾼이라뇨, 파는 거 아니에요! 설을 맞아 저희가 드리는 선물이랍니다!
하지만, 우리 숙소 냉장고는 거의 꽉 찼는걸?
걱정 마시라, 이거 실온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어요.
밥에 넣어 볶든, 빵에 끼우든, 그냥 굽든, 어떤 식으로 해 먹어도 맛있답니다!
그리고 그로자 씨의 요리 솜씨가 엄청나다 들었으니, 분명 지휘관님의 입맛에 딱 맞는 요리를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차라리 너희가 직접 지휘관에게 요리를 대접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설맞이 인사를 하러 온 두 인형은 그로자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며 대답했다.
그로자 씨가 만드는 게 훨씬 낫잖아요.
맞아요! 정말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라, 눈을 못 뗄 지경이에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 너희도 새해 복 많이 받으렴.
결국 그로자는 저항을 포기하고, 그 강렬한 향을 풍기는 선물을 받아 숙소 부엌의 구석에 던져 넣었다.
이래서는 끝이 없겠어. 더 늦기 전에 어서 나가자.
똑똑똑!
......
그로자는 그리폰 입사 이래... 아니, 인형으로서 난생처음으로, 세상에는 자신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골칫덩이가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여어, 동지! 고형차를 가져왔어.
지금은 비록 다른 소대 소속이지만, 아무렴 어때! 나중에 시간 나면 함께 차 한잔하자!
AK47은 벌써 나갔어? 그래도 누가 있어서 다행이네. 이 선물 좀 대신 전해줄래?
아, 물론 그로자 몫도 있어.
새해 복 많이 받아, 그로자.
내가 이렇게 직접 찾아가서 인사한 인형은 몇 안 된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인형들은 앞다퉈 그로자를 찾아와 인사와 함께 선물을 건넸다.
대부분 m45의 인사를 받고 나서야 오늘이 설날인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설날임을 알자, 대부분 인형들이 이 설 인사 대란에 참여했다.
그로자도 끝까지 매너 있게 대응했다. 쏟아지는 선물을 받으며, 방문한 인형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동이 텄다.
이야~ 재미있었다! 여기저기 인사 돌리는 거,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네!
그래도 밤새도록 돌아다녔더니 피곤해 죽겠네...
...우왓?!
SVD, 왜 그래?
...헉.
숙소 안의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들과 그것을 정리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그로자의 모습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로자 인기 엄청나구나, 아니 무슨 선물이 이렇게 많아?! 다 필요한 거 아니면 나도 좀 나눠줘!
돌아왔니? 마침 잘됐다, 정리하는 거 도와줄래? 이것만 다 정리하고 나면 자러 가야겠어. 어휴...
선물도 잔뜩 받고 기쁜 날인데, 한숨은 왜 쉬어?
세상만사가 영 마음대로 되질 않아서.
어...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 그냥, 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나한테 선물을 주러 온 건지 이해가 안 돼서.
겨우 이런 거 말고도 할 일이야 많잖아?
그야 물론, 그로자 씨가 정말 믿음직스런 분이니까 그런 거죠.
뭐, 믿음직스럽다 해도, 따지고 보면 부탁을 쉽게 들어주는 편리한 도구 취급이나 다름없지만 말이지.
입만 열면 신랄하게 정곡을 찌르는 비평이 쏟아지지만,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 말이긴 하니까 다들 별말 않는 거고.
그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 일이든지 맡기려 들걸?
맞아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SVD! 그리고 AK47까지!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리폰 인형들은 어지간해선 일을 맡겨도 오히려 사고만 치는데...
그로자는 무슨 일이든 척척 해결하잖아.
그래도 평소에 내가 직접 나서는 일은 별로 없잖니.
그렇게 깔끔한 일 처리 태도를 모두가 신뢰하는 거예요.
함부로 나서지 않고, 마치 맹수처럼 성공할 확신이 들 때만 나서서 뚝딱 해결!
그런 전문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니까요.
그저 내가 실수를 잘 숨기고 다녀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지.
에이, 그게 뭐 어때서! 안 들키면 안 한 거나 마찬가지지 뭘!
어머나, AK47이 그런 심오한 말을 하다니 놀라운걸?
너무 마신 탓일까, 아니면 사실 철혈과 바꿔치기 당한 가짜여서일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생각도 않고 말하진 않거든!?
함께 선물더미를 정리해준 소대원들이 잠자리로 돌아간 뒤, 그로자는 홀로 벽에 기댄 채로 내버려 뒀던 짐 가방을 바라보았다.
이번 여행은 연기할 수밖에 없겠네. 하지만...
산더미 같은 설 선물을 보며 방금 소대원들이 한 말을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라...
사치를 부릴 시간을 희생했지만, 그 대신 꽤 괜찮은 수확을 거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