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필라
CZ52
그리폰 기지, 인형 숙소.
CZ52는 책상 앞에 앉아, 낡은 책을 주의 깊게 읽고 있었다.
"맑은 연못 한가운데 우뚝 선 백자청정."
"비단옷을 입고, 활처럼 뻗은 옥색 다리를 지나,"
"정자에서 친우와 함께, 술을 즐기며 시와 노래를 나누었네."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쓰는 모습인 건가?
정말 아름다운 경치다...
CZ52는 시집을 읽으며, 글이 묘사하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못 들을 정도였다.
CZ52 씨, 안에 계세요?
"수면에 비친 비췻빛 다리, 마치 초승달과 같으니." ...나도 이런 풍경을 직접 보고 싶다.
그런데, 중간중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부분이 있네. 시간 날 때 95식 씨한테 물어볼까...
아, 안 잠겨있네.
저, 저기... 실례할게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CZ52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세요?!
꺄악!
들어온 인형도 화들짝 놀라, 문 바로 옆의 사물함 뒤에 숨었다.
하지만 사물함 너머로, 길쭉한 귀 한 쌍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아, 죄송해요. 놀라셨나요?
사물함 뒤의 귀가 떠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그 귀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안녕하세요... 이번 설날 행사를 담당하게 된 88식이에요...
방금 CZ52 씨가 노크 소리를 못 들으셨나 해서, 멋대로 들어왔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책에 너무 몰두한 탓이에요.
그런데, 설 행사 담당이시라고요? 그 동양의 음력 신년맞이 명절 말인가요?
네, 올해는 제가 맡게 됐어요...
그리고, CZ52 씨도 도와주셨으면 해서 찾아왔어요...
정말요? 그럼 전 무엇을 하면 될까요?
어, 도와주시는 건가요?
네, 저도 설날이란 명절에 관심이 있거든요.
초롱불을 켜고 잔칫상을 푸짐하게 차리는 날이죠? 맞다, 작년에 그 창문이나 벽이 붙인 장식품도 봤어요. 그거라면 저도 만들 수 있어요!
어... 그건 이미 따로 담당자가 있어요...
CZ52 씨는 설날 인사 행렬에 참여해주셨으면 해서 온 거예요...
"설날 인사"요? 굳이 사람을 모아서 해야 하는 건가요?
그게 설날 풍습이거든요...
88식이 CZ52에게 설날의 풍습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하... 그렇군요. 집마다 방문해서 새해의 축복을 전해준다는 거군요?
네, 대충 그런 거예요.
참가해 주실 건가요?
물론이죠.
다행이다... 거절당할까 봐 걱정했어요...
왜 제가 거절할 것 같았는데요?
그게, 엄청 오래된 풍습이기도 하고...
그리고... 으음, 말로 설명하긴 어렵네요. 직접 보면 아실 거예요.
......
88식은 자세한 행사 내용을 전달한 뒤 떠났다.
CZ52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낡은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지저귀는 새들아, 봄이 왔느냐? 모든 것이 꿈만 같구나."
......
동양의 신년맞이 행사라, 분명 즐겁겠지?
동쪽으로 여행을 갈 순 없어도, 현지의 문화를 되도록 많이 체험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야.
CZ52는 책을 덮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자.
며칠 후.
CZ52는 새 옷으로 차려입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동양에는 새해를 맞아 새 옷을 입는 풍습이 있다 했지?
되도록 동양풍으로 만들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해서 너무 어색하면 어떡하지...
아무튼, 곧 약속한 집합 시간이니 서둘러야겠다.
CZ52는 숙소에서 나와, 설 인사 행렬에 참여하는 인형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우와, 사람이 엄청 많네...
아, CZ52 씨. 오셨군요.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설 인사에 참여하는 건가요?
네, 그리고 아직 몇 명이 안 왔어요...
88식 씨, 이제 슬슬 출발할 시간이에요.
아직 안 온 인형들한테 연락을 해봤는데, 사정이 있어서 나중에 올 거래요.
네, 그럼 모두 출발합시다...
인형들은 으리으리한 행렬을 이루고 숙소 구역을 향해 행진했다.
인형 숙소 구역.
인사 돌리러 왔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모두 즐거운 설날 되시고, 일이 잘 풀리길 바라요!!
새해 축하해! 자자, 모두 와서 사탕 먹어!
저기, 사탕 말고 다른 간식은 없어? 설날엔 먹을 게 많잖아!
아 맞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왜 이렇게 다들 시끄러운 거죠?
설날은 원래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예요.
어라? 왜 아직도 밖에 계세요?
저기, 앞에 있는 분들! 길 좀 비켜 주세요!
......
CZ52도 세배해야지! 자자, 어서 모두에게 큰절 한번 올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기... CZ52 씨, 왜 아직도 밖에 서 계세요...?
안의 사람들한테 공간을 좀 내어 달라고 할게요...
아뇨, 괜찮아요. 안은 지금 꽉 찬 것 같으니 전 여기에 앉아있을게요.
네에...
......
............
인사 돌리기 행사는 계속되었다. 인형들은 들리는 숙소마다 우르르 들어갔다가, 다시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렇게 서너 곳을 방문했을 무렵, CZ52가 88식을 불러 세웠다.
88식 씨, 저 조금 피곤해요...
네? 아직 절반도 안 됐는데...
...죄송하지만, 저 먼저 돌아가서 쉴게요.
그런 말을 남기고, CZ52는 행렬에서 이탈했다.
그리폰 인형 숙소.
CZ52는 속상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다.
동양의 명절 풍습은 이런 거였나? 시끄럽고 어지럽고, 마치 핼러윈 같아...
이게 동양의 진짜 모습인 걸까?
CZ52는 방금 보았던 동양 인형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진정한 동양의 풍습은 95식 씨처럼 단정하고 우아한 것 아닐까?
그래, 분명 그래서 이번 행사에는 95식 씨가 없었던 걸 거야.
CZ52는 아직 다 읽지 못한 낡은 책을 보았다.
"봄이 온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계속 잠을 자리라!"
......
오늘은 그냥 숙소에 있자.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인사 행렬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CZ52의 불안감도 커져갔다.
방 안에 숨을 수도 없고... 하지만 지금 나가면 바로 들킬 텐데...
어쩌면 좋지?
CZ52가 망설이는 사이, 인사 행렬은 그녀의 숙소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CZ52 씨, 인사 돌리러 왔어요...
.......
어... 문이 잠겨 있네요...
먼저 가서 쉰다고 하셨으니, 안에 계실 텐데...
음, 그럼 먼저 다른 숙소를 들렸다가 다시 오는 게 어떨까요?
어쩌면 일이 있어서 바로 못 나오는 걸 수도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죠.
이 목소리는...!
CZ52 씨, 안에 계시나요?
95식이에요. 새해 인사하러 왔답니다.
95식 씨까지 인사 행렬에...? 어째서...
CZ52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문을 열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으아앗, 한꺼번에 들어오지 마세...
새해 인사와 함께, 인형들은 밀물처럼 CZ52의 숙소로 밀려들어 와 그녀를 에워쌌다.
88식이 네가 많이 피곤하다면서 먼저 돌아갔다 했는데, 괜찮아?
자아, 여기 사탕 먹어! 많이 먹어!
전 괜찮아요, 그런데...
잠깐잠깐, 여기 주인인 CZ52을 서 있게 하면 어떡해? 좀 앉게 다들 비켜봐!
주위의 인형들은 또 우르르 움직여, CZ52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곤 또다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세배를 했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아까만큼 불편한 느낌은 아니네...)
......
잠시 후, 인사 행렬은 다시 다른 숙소를 찾아 떠났다. 시끌벅적한 행렬이 멀어지고 나서야, CZ52는 방에 아직 남아 있는 인형을 눈치챘다.
어... 95식 씨, 안 가세요?
저도 곧 따라갈 거예요.
CZ52 씨, 동양 문화를 좋아하시나요?
어떻게 아셨어요? 88식 씨가 말해드렸나요?
88식 씨가 말해주긴 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지금 이 방을 보면 누구든 알았을 거예요.
아, 그렇네요... 깜박하고 있었네요...
CZ52는 벽에 투영된 붓글씨와 손에 쥔 도자기 찻잔을 눈치채곤,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많이 촌스럽죠...? 부끄러운 꼴을 보여드렸네요
촌스럽다뇨. CZ52 씨가 동양의 문화를 좋아한다니 저도 정말 기쁘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CZ52 씨가 저희의 설날 풍습을 싫어하시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사실 전 동양의 명절에 관해서 관심이 많아요. 오늘은 그저... 조금 의외여서요.
의외요?
그게, 오늘 저 인사를 돌리는 행사는 제가 알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거든요.
동양의 문화는 전부, 95식 씨의 평소 모습처럼 얌전하고 우아한 줄 알았어요.
CZ52가 책상 위의 책을 집어 95식에게 건네줬다.
전에 임무 중 거주구역 폐허에서 주운 책이에요. 읽어보니 동양의 시집인 것 같아요.
책에서 묘사한 동양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워서... 동양의 명절에도 흥미가 생겼어요.
여러분의 명절 행사가 싫은 건 아니지만, 방식이 제가 상상한 것과는 달라서요.
그렇군요...
95식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책의 내용을 훑어보곤 CZ52에게 돌려주었다.
저는 88식 씨가 혹시 CZ52 씨를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닌가 했어요. 88식 씨가 이런 행사의 기획을 맡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동양의 문화는 여러가지랍니다. 이 시집처럼 단아한 것도 있고, 오늘처럼 시끌벅적한 것도 있어요.
그런가요? 으음, 아무래도 제가 너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나 봐요.
제 기분만 생각해서, 모두를 서운하게 했나 보네요...
아뇨,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며칠 전만 해도, 88식 씨도 행사 기획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죠.
계속 "귀찮아요", "촌스러워요"라면서 말이에요.
어? 88식 씨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희도 서양 분들도,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접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죠.
저희도 그리폰에 오고 나서, 세상에는 온갖 희한한 풍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우리 모두 같은 입장이라는 거죠.
그래도... 익숙하지 않다고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보려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
(맞아. 내 상상과 다른 "동양"의 모습을 아주 잠깐 본 것만으로, 마음에 안 든다면서 우물 속으로 숨어버렸어.)
(그래서야, 진정한 동양 문화가 어떤 것인지 평생 알 수 없잖아?)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95식 씨.
상담해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한껏 나아졌어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저희의 문화에 궁금한 게 또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물어보세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 시집에서 이해가 잘 안 가는 내용이 몇 군데 있는데, 해석해주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요. 하지만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모두가 새해 인사를 받은 다음에 얘기해도 될까요?
네.
저... 95식 씨, 저도 다시 인사 행렬에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CZ52는 낡은 시집을 조심조심 책장에 꽂아 넣고서, 95식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동양의 새해 첫날... 처음으로 동양의 풍습을 체험했어.
그 기념으로, 올해의 첫 번째 소원으로는 올해에 동양으로 여행 갈 수 있기를 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