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여우와 9분의 1 승강장
HK21
......
즐거웠던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하아암... 다들 쉬러 간 것 같으니, 나도 정리하고 자러 가야겠다.
오늘도 참 요란했네... 모두 이렇게 실컷 놀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겠지?
모두가 즐거워한 것만으로도 크리스마스에 감사해야겠어.
휴우... 이걸로 서류 작업 끝.
내일 처리해도 될 작업이었는데... 나도 정말 사서 고생한다니까.
커피라도 한 잔 할까 했는데, 이 시간이면 스프링필드도 카페 문을 닫았으려나... 응? 거기 누구야?
쉬잇! 목소리 줄여!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바로 HK21이었다.
......
깜짝이야... 갑자기 나타나면 놀란다고.
느닷없이 문 뒤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HK21의 모습은 마치 산타클로스 같았다.
응? 산타?
잠깐만, 너 왜 여기에 있니? 넌 선물 배달 담당 아니었어?
CAWS가 선물을 전해 줬잖아?
HK21가 갑자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해...
응?
미안해...
......
조금 전.
오오... 이렇게 선물을 한 곳에 쌓아두니 굉장하네.
선물 상자에 각각 받는 사람 이름이 붙어 있어서 다행이지, 뭐가 누구 건지 기억하는 건 나한텐 무리야.
CAWS에게 전달받은 선물들이 HK21의 방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 왠지 흔들거리는 거 같은데, 무너지진 않겠지?
하아... 평소라면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은 아예 나서지도 않았겠지만, 이번 만큼은...!
G3 언니에게 직접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일은 누구에게도 양보 못해!
언니가 칭찬해 줄까나~ "고마워, HK21!"라면서...
으흐흐흐흐...
...아, 안 돼 안 돼,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아직 기뻐하기엔 일러,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문자 그대로.
맞아, 먼저 언니의 선물을 따로 빼두자!
가장 마지막에... 아니, 역시 제일 먼저 주는 게 좋으려나?
아니 아니, 그랬다간 바로 나머지 일을 처리할 의욕이 사라지고 말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직접 나서서 받은 일이니까 똑바로 해야지.
아... 찾았다!
HK21이 G3이 받을 선물을 찾아냈다.
CAWS가 언니에게 줄 선물로 이런 걸 고를 줄이야... 아, 지휘관이 시킨 대로 산 거겠지?
그래, CAWS가 언니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잘 알 리가 없잖아.
선물을 직접 고르지 못해서 쬐끔 아쉽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선물이니까 불평은 안 해도 되겠다.
응...? 빅센?
이번 산타의 썰매를 끌 로봇 은여우, "Vixen".
지휘관이 HK21의 임무를 돕기 위해 특별히 붙여 준 파트너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출발하기 전에는 돌아왔네.
어디 갔다 왔어? 너 없으면 나 혼자서 이렇게 많은 선물을 어떻게 끌고 다녀.
삑! 삑!
으아아, 갑자기 왜 뛰어다녀?! 선물 더미 무너져!!
빅센은 어째선지 매우 흥분한 모습으로 방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 탓에 원래부터 흔들거리던 선물 더미가 더 위태롭게 흔들렸다.
얘 왜 갑자기 흥분한 거야... 어라?
야, 너 입에 그 선물 뭐야? 그건 또 어디서... 아, 그쪽으로 가면 안 돼!
HK21이 한눈파는 사이에 빅센이 선물 더미에 부딪치고 말았다.
히익... 꺄아악!
......
그렇게 된 일이야...
......
그리고 여태까지 기절해 있었다고?
...정말 미안해.
어쩐지 네가 파티에 안 보이더라...
사과할 것 없어, 그런 일이 있었다니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자유 참가여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나도 부주의했구나.
파티를 놓친 건 아쉽겠지만, 그래도 선물을 나눠 주기엔 늦지 않았어.
그리고 파티로 어수선할 때보다 모두가 방으로 돌아간 지금이 딱 좋지 않을까?
사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설마, 선물이 망가지기라도 했어?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정말 선물이 망가졌다면 진술서를 미리 써서 들고 왔지...
그, 그게... 그러니까...
HK21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꾸물거렸다.
그전에...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G3한테만 안 말하면 되는 거야?
다른 애들은 상관 없어.
그 성격은 여전하구나... 그래, 절대 안 말할게.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니?
......
정신이 들자마자 바로 선물들의 상태를 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전부 다 멀쩡해.
하지만... 이름표가 전부 다 떨어졌어.
이름표? 아하...
그래, 이해했어.
그래서 날 찾아왔구나?
응...
어느 게 누구한테 줄 선물이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어.
그 선물들을 이름표 없이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CAWS랑 지휘관뿐이야.
하하, 무슨 기밀문서도 아닌데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까지야...
요컨대 나보고 선물을 구별해 달라는 거지? 확실히, 목록을 나랑 CAWS가 작성했으니 이름표가 없이도 어느 게 누구 선물인지는 구별할 수 있지.
그런데, CAWS에게는 안 말했어?
걔한테 말하기 싫어.
하긴... 넌 그런 성격이지.
그런데, 정말 부탁해도 돼...?
지휘관도 많이 피곤할 거 아니야.
괜찮아, 아직 팔팔해.
그리고 HK21이 이렇게 보기 드물게 나한테 직접 부탁했는데, 거절할 수야 없지.
......
...폼 잡기는.
삑! 삑!
어쭈, 이게 말하는 것 좀 봐라?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야, 방금 카푸치노 한 잔 마셔서 기운이 넘친다고.
그렇다면야...
그럼 당장 갈까?
저기... 잠깐만.
응? 왜 그래?
그게... 문제가 하나 더 있어.
또 무슨 일인데? 이름표 말고 다른 문제가 있어?
어... 방금 내가 말했잖아?
빅센이 방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날뛰었다고.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행동을 보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지.
삐익!
너 변호해 주는 거 아니니까 똑바로 사과해.
삑...
그때 빅센이 내가 본 적 없는 선물을 가지고 있었어.
그걸 보고 잠깐 멈칫해서 빅센을 막지 못했어.
본 적 없는 선물?
응, 선물들 전부 멀쩡한지 확인했고, 수량도 세어 봤어.
사라진 게 있었어?
아니... 오히려 한 개 늘어났어.
늘어났다고...?
응.
......
......
삑 삑?
"삑 삑?"은 무슨 이 엉뚱한 녀석아!
그럼 그 선물을 잃어버린 사람이 분명 찾고 있을 거 아니야? 찾아서 주인에게 돌려줘야지.
무리야...
어느 게 빅센이 가지고 온 선물인지 알 수가 없어. 지금 상황에서 지휘관한테 찾아 달라 할 시간도 없고...
그리고,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사람도 없고...
어휴... 그럼 어쩔 수 없지.
우선 선물을 전부 나눠주자.
그러면 빅센이 훔쳐 온 선물만 남을 테니까.
응... 지금도 모두가 선물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시간도 얼마 없으니까 빨리 가자!
HK21이 갑자기 의욕적으로 손뼉을 치고 뒤돌아 달려갔다.
어... 그래! 네가 의욕 넘치니 보기 좋은걸!
방금까지 말하기 싫어서 꾸물거린 녀석이 거 참...
삐이!
어머, 제게 주는 선물인가요? 고마워요 HK21 씨.
천만에. 그리고 지금 나는 산타야.
스프링필드, 아직 깨어 있었구나... 진작 알았으면 커피 한 잔 마실걸.
대왕 막대사탕...! 고마워, HK21.
지금 난 산타라니까! 그나저나, 그렇게 큰 사탕은 먹다 질리지 않아?
응? 잘못 골랐나?
아니, 괜찮아... 아주 마음에 들어.
아무튼, 둘 다 고마워.
우읍... 진지하게 감사 인사하니까... 헛구역질이...
괜찮은 거 맞아?!
쿨쿨...
정말 자는 녀석도 있네... 모두 밤새우면서 선물을 기다릴 줄 알았더니.
뭐, FNC니까. 깨우지 않도록 조심해.
저렇게 푹 자고 있는데 깰 리가 있겠어?
자다가도 카카오 냄새만 맡으면 깨는 애야.
...조심할게.
낮에 쇼핑할 때는 하나씩 사느라 몰랐는데, 나눠주려 하니 수가 엄청났구나.
방금 그게 마지막 선물이야... 자는 사람은 몇 명 없었네.
다들 산타의 선물을 기대하고 있었을 테니까.
내 손으로 직접 언니에게 선물을 전해 주고 싶어서 이 일을 맡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보람찬 일이었어.
모두의 감사를 받으니 기쁘지?
...조금은.
아무튼, 드디어 끝났네... 피곤해 죽겠다아...
치이, 역시 피곤해하잖아.
고생시켜서 미안해.
하하하, 괜찮대도. 나도 내가 나선 일이니까 말이지.
...응? 방금 마지막이라 하지 않았어?
왜 상자가 2개나 남았지?
하나는 언니 거야.
아하, 마지막으로 남겨뒀구나.
응... 이걸 먼저 전달하면 의욕이 없어질까 봐.
그런가? 내가 아는 HK21은 책임감이 강한 아이니까 아무 문제 없었을 거라 보는데.
아무튼, 그럼 G3에게 선물을 주러 갈까, 아니면 그 선물의 주인을 찾으러 갈까?
일이 남아 있는 상태로 언니한테 가긴 싫지만... 이 선물이 누구 건지 아직도 모르잖아.
빅센한테 찾으라 시킬 수도 없고.
그럼 G3에게 가자.
아쉽지만 너무 늦었어.
그 선물의 주인을 찾는 건 내일 하자.
응...
G3의 방 앞에 도착해, HK21이 문을 두드렸다.
어쩌면 이미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때, 안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지휘관님?
G3가 쾅 하고 문을 열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보아, 지금까지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문 너머로 보이는 방 안도 약간 어질러져 보였다.
지금 바쁘니?
아, 아뇨, 물건을 찾던 도중이라... HK21?
G3가 대답하던 도중, 지휘관의 등 뒤에 숨은 HK21을 발견했다.
어, 언니...
HK21은 우물쭈물하며 손짓으로 빅센을 불렀다.
메... 메리 크리스마스! 이, 이거 언니 선――
찾았다!!!
응?!
HK21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G3이 화들짝 놀라면서 빅센의 등 위에 놓인 그 주인 모를 선물을 집어 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HK21은 영문을 몰라, 선물을 든 손을 쭉 뻗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아하...
이건 G3의 선물이었구나?
네! 어느샌가 없어져서 계속 찾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어... 어...?
이제야 빅센의 행동이 이해가 되네.
멋대로 주인 대신 전해 주고서 호들갑을 떤 거였구나.
......
음... 그럼 난 먼저 돌아갈게...
어? 지휘관?
지휘관님...?
미안... 너무 졸려서 당장 침대로 가야겠어...
나머지는 너희 자매들끼리 잘 해결하렴.
흐아암... 으으, 졸려 죽겠다...
지휘관...
고마워.
이 정도쯤이야. 메리 크리스마스.
지휘관은 졸린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돌아갔다.
HK21... 좀 많이 늦긴 했지만, 이 선물을 받아 주겠니?
저.. 정말로 나한테 주는 거야?
물론이지, HK21을 위해 준비한 선물인걸.
잃어버린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삐익!
나도... 나도 언니한테 선물!
후훗, 메리 크리스마스.
언니도 메리 크리스마스!
......
선물을 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
받은 이는 감사를 표하고, 주는 이는 축복한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본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