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면의 문워커
KSVK
어둠. 무거운 어둠.
......
"저멀리 운명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표정이 왜 그렇게 사납지? 같은 그리폰 인형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않은가?"
"후후후, 걱정 마렴. 난 그저 너희들의 장난에 어울리고 싶을 뿐이니까."
......
"좋은 아침이다, 운명에게 선택받은 행운아여."
꽤 오랫동안 잔 느낌이군... 내가 잠든 사이 세상의 흐름은 얼마나 흘렀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뚜렷하게 보이던 환상이, 눈을 뜬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덧없는 꿈이어서일까, 아니면 기억 자체가 연기와도 같은 것이어서일까...
기록자여, 내게 고하라. 지금 몇 시지?
딩동딩동~ KSVK 님의 부름에 답합니다! 현재 시각은 19시 03분!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무위로 보냈구나. 운명의 연회에 참가하려면 서둘러야겠군.
완벽한 자태로 폭풍을 맞이하리라.
힘내라, KSVK 님!
KSVK,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문 열어! 한참을 기다렸다고!
문은 방문자를 거절하지 않는다. 내게 볼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문 안 잠갔단 소리지? 들어간다.
아, 잠깐...
...너 뭐해?
보다시피, 오늘 밤 있을 연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 밤? 연회? 오늘도 무슨 행사가 있었어?
모든 이들의 두려움을 양식 삼아 배를 채우는 연회가 오늘 밤의 주제 아니었나?
어... 아, 담력 시합 말이구나. 그건 어젯밤 일이지. 아직도 잠이 덜 깼어?
...어젯밤이라고?
응, XM8도 카페 문앞에 반나절 넘게 대롱대롱 매달렸어.
아무리 말려도 G36이 들은 척도 안 하길래, 지휘관이 직접 와서 풀어줘야 했다니까.
XM8은 연회의 참가자 명단에 없었을 터인데?
자세한 사정이야 나도 모르지. G36C를 속여서 헐벗은 차림으로 만들었다나?
그럼 그대의 용무를 말해 줄 수 있겠나, 갑작스런 방문자여?
깜빡할 뻔했네. 너, 어제 잘도 날 속였겠다!
으음...? 그대와 만난 기억은 없다만. 복도에서도 로비에서도, 우리가 갈 수 있는 그 어떤 곳에서도 말이다.
시치미 떼지 마! 내가 한 말 다 녹음해 뒀다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오늘 밤의 행사도 예외는 아니지.
그리고 올해의 주최자가 준비한 경품 중에는, 모든 편의점에서 사용 가능한 20% 할인 쿠폰이 있다.
확실히 내가 할 만한 말이고 내 목소리도 맞지만, 내 기록엔 없군...
나의 내장 시계도 오늘이 핼러윈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말이지.
KSVK 님, KSVK 님! 핼러윈은 어제랍니다!
봐, 너의 저... 저건 또 뭐야!? 왜 요정이 저기 있어?!
작전 도중 파손된 요정이다. 내가 가엾게 여겨, 내 방에서 알람 시계로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지.
그래 그래... 아무튼, 네 알람 시계가 너보다 잘 알고 있네.
정말이지, 어떻게 시간도 모르는 거야...
어제 발생한 일들... 전부 마인드맵에 기록해 뒀나?
그야 물론이지. 네가 날 속이고, M870한테 커다란 호박을 뒤집어씌운 일도 다 기억하고 있다고.
애매한 진술은 오해를 낳는다, QBU-88.
알았어, 그럼 자세히, 모조리 말해 줄 테니까 잘 들어! ...물론 내가 아는 범위에서지만.
KSVK는 옷차림을 정리하고, QBU-88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대의 진술 속에서, 나는 마치 그림자에 숨은 달의 뒷면 같구나.
뭐야, 이중인격이라 할 셈이야?
부정은 의미가 없으니,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법.
하지만 오늘 내가 그대에게 한 말에도 일말의 거짓이 없다.
으음... 정말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그럼 일단은 믿어 줄게. 하지만 그날 모두가 본 KSVK도 가짜가 아니었어. 이상한 점도 전혀 없었고.
그리고 어제 너랑 화상 통신할 때, 뒷배경이...
QBU-88 방을 두리번거리다, 한곳에 시선이 멈췄다.
KSVK도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벽에 더미 인형이 기대고 있었다.
몸이 약간 지저분한 것을 보아, 밖에 나갔다 들어온 것 같았다.
그래... 어제 넌 바로 저길 등지고 나랑 통신했어.
그것 참 흥미롭군... 내가 자아를 벗어나 내 것이 아닌 꿈을 꾸고... 심지어 꿈속에서 나들이를 했단 말인가?
그, 그럴지도...? 으으, 이러니까 왠지 무슨 괴담 같네. 핼러윈은 벌써 끝났는데.
날은 밝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말인가... 그럼 이 더미의 기록을 살펴보자.
아, 여기다. 덕분에 KSVK를 방에 데려다 놓을 수 있었어. 고마워 웰로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웰로드는 KSVK를 침대에 눕힌 뒤, 카리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더미의 시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동 완료.
쳇... 이딴 쓰레기에 침투하는데 이렇게 애를 먹다니.
아무튼, 잠시 동안이라도 이 OS에 적응해야겠어.
굿 모닝, KSVK 님! 트릭 오어 트릿!
이건 또 뭔... 드론인가? 디너게이트보다 조잡하게도 만들었군.
그런데... 핼러윈이라. 그리폰은 그런 명절을 지낼 여유도 있나?
지금의 전 알람 시계로 다시 태어났답니다! 명절! 명절! 명절을 지낼 옷이 준비됐어요!
옷까지 준비하다니...
이봐, 오늘 무슨 행사라도 있나?
담력 시합이요! 방송으로 분위기를 화끈하게 만들어 주세요!
화끈하게... 그거 좋군.
이 몸뚱이로 화끈하게 불을 질러 주지. 성대하게 폭죽을 터뜨려 주겠어.
응...?
더미 인형 주제에,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있군. 게다가 반항하려 하다니, 재미있어.
불장난은 안 돼요! 불장난은 위험해요!
그래? 그럼 다른 장난을 생각해 볼까.
내게 굴욕을 준 만큼, 똑같이 굴욕을 맛보여 주겠어.
어디, 본체의 데이터를 확인해 볼까... 흐음... 오호라.
통신 연결 중.
QBU-88.
오늘 밤의 연회에, 네가 바라 마지않을 물건이 있다.
난 그런 명절 관심 없어. 재미도 없는데.
20% 할인 쿠폰이다.
뭐, 뭐라고오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오늘 밤의 행사도 예외는 아니지.
그리고 올해의 주최자가 준비한 경품 중에는, 모든 편의점에서 사용 가능한 20% 할인 쿠폰이 있다.
시야가 다시 흔들리더니, 더미는 숙소 밖으로 향했다.
......
이 무슨 기묘한 이야기란 말인가...
달의 뒷면이 아니라, 다른 빛이 섞여든 느낌이로군.
......소름 돋았어.
소름이 돋는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지. 다행으로 여겨라.
아직 어제의 기록이 재생되는 건가?
으으...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더미한테 귀신이 씌인 걸로밖에 안 보인다고. 그나저나, 말투가 꽤 익숙한데?
어... 그러니까... 그래, 그거!
우리가 항상 맞서 싸우는 자들...
아주 정확해.
자기 입으로 정확하다니 뭐래... 그런데, 철혈공조라고?
말도 안 돼, 설령 그 우산인가 뭔가 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됐더라도, 그리폰 기지 안에서 대놓고 움직일 리가 없잖아?
그건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야. 우수한 사냥꾼은 조용한 법이다. 사냥감을 확실하게 붙잡는 그 순간까지.
그럼 대체 뭐야... 더미가 폭주했단 말이야?
우리 프로그램에 버그라도 생긴 거야?
아마도 그것이 정답에 가장 가깝겠지.
하지만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잖아!
왜 그랬지? 겨우겨우 자유로운 몸이 됐는데 장난이나 치고... 보통은 그러면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어쩌면 갈 곳이 없어서일지도 모르지.
길 잃은 아이처럼, 궁지에 몰린 사냥감처럼...
아니면 에너지가 바닥나서 그냥 돌아온 걸 수도 있지.
그렇다는 건, 이 녀석 아직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걸.
그것 참 귀에 거슬리는 말이군.
뭐, 무서울 것 없긴 하네. 기껏해야 더미니까, 움직이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 없을 테니.
이것 또한 추리에 필요한 과정이다. 느리지만, 진리에 가까워져 가는 예감이 드는군...
진리? 이걸 진리라고 하는 건가?
애들 장난 수준의 수수께끼를 가지고 진리라니, 웃기지도 않는구나.
QBU-88.
응?
그건 그대답지 않은 말이다. 그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선 자아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태 너 혼자 중얼거린 거 아니었어?
내가...?
두 인형이 어리둥절해하던 그때였다. 방금까지 미동도 없던 더미 인형이, 고개를 들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바로 나다.
네가 기절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지...
지금부터는 나만의 시간이다!
네놈들에게 당한 만큼 되갚아 주마!!
......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내 선물이 마음에 드나?
트릭 오어 트릿이다, 이 빌어먹을 그리폰 인형들아.